남단에서

(13) 나의 요게벳 - 김명자 나인숙을 평생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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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1
(평생 고마운 분)
모세에게는 요게벳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반듯하게 길렀다. 어거스틴에게는 모니카가 있었다. 요게벳처럼 노력을 해도 어거스틴은 곁길을 걸었다. 공회의 거의 모든 분들은 전자의 경우로 보인다. 경제나 가족의 신앙 내력은 천차만별이지만 일단 신앙을 출발한 다음부터는 모두가 반듯해 보인다. 공회 내에 드물게도 이병준 목사님과 나는 후자다. 이 목사님의 모친인 서봉월 권사님과 나의 모친은 평생 가장 가깝지 않았을까. 이병준은 교회 밖에서 크게 놀던 거물급이고, 나는 교회 안에서 못된 짓이나 하는 망나니 애물이었다. 이 기억과 이력 때문에 목사님 사후 공회들의 모임에 내 이름이 나오면 조사 목사 호칭을 붙이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를 한다. 나 같으면 호칭만 빼지 않고 이름 뒤에 개ㅅㄲ 라면서 작은 개라는 비칭을 붙였을 듯하다.

나에게는 성경을 가르친 것은 하나도 없고 소리 없이 평생 기도를 한 김봉선 어머니가 있다.
나에게는 성경을 가르쳐 주신 김명자 사모님이 있다.
나에게는 신앙을 지도해 주신 나인숙 권사님이 있다.

이 세 분을 생각하면 항상 나는 역사에 어떤 인물이나 기록을 통해서 '은사'를 그리워 하며 감사하는 사람과 비교해도 나로서는 나 이상이 없을 듯하다. 내 마음이 그렇다. 여기에 백영희 이름을 하나 더 더한다면 정말 없다고 큰 소리를 치겠다. 백영희 외의 3명만을 두고 말한다면 그런 감사한 분들을 가진 이들은 흔하지 않을까. 내게는 이 분들이 나의 요게벳이다. 그 중에 요게벳 이름을 가지고 생각할 때는 늘 '김명자' 성함을 먼저 떠올린다.


(김명자 사모님의 의미)
국어책과 영어책은 한 가방에 들어 가지만 다른 책이다. 하나를 뺄 수 없다. 내게는 나를 위해 평생 기도한 김봉선 어머님이 있다. 기도의 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봤다. 그러나 백영희 목사님의 바로 밑에 동생 백계순, 그리고 백계순이 기른 김봉선의 기도는 공회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다. 1997년의 변판원 순교집에 자세히 기록해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이야기 대부분을 어릴 때 들었다. 그러나 모르고 들었다. 철이 들면서 과장이고 착각이며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백영희 전기를 모으면서 살이 떨리도록 두려웠고 그들의 기도 세계를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는 이런 이름 외에 김명자 사모님이라는 이름이 다른 면에서 존재한다. 백계순 김봉선 이 이름은 내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경의 이치를 심은 것은 없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한 '기도'라는 배경과 배후를 제공했던 분들이다.


(죄송하기만 한 기억들)
김명자 사모님, 서부교회의 1950년대에 유명했던 주일학교 반사다. 1966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신용인 김명자 조사님 부부가 창동교회에 부임했다. 1971년 여름에 가게 되는 이 기간에 나는 너무 심각했다. 주일학교 예배 시간의 찬송이 후렴을 시작할 때 한꺼번에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게 하고, 분반 공부 때 손용모 선생님을 면전에서 계속 부아를 올려 찬송 성경 공과책 노트를 내 얼굴에 집어 던지고 나를 잡으러 쫓아 오게 만들면 그 날 오전 예배는 수라장이 되고 어수선하게 끝이 난다. 이런 나였지만 김영웅 선생님이 강단에 서면 너무 웅장하게 보여 기가 질렸고 이재순 목사님의 조카 하영신 선생님은 사정 없이 뺨을 날리기 때문에 움싹하지 못했다. 매가 사랑이 되고 능력이 압도해야 하며, 화가 나서 잡으러 다니는 수준으로는 사탄을 잡을 수 없음을 배우고 있었다. 이 때 경험 때문에 평생에 교회를 향해 그 어떤 나쁜 학생과 교인이 있다 해도 나보다는 그래도 낫다 싶고, 그래서 앞으로 나를 지도할 수도 있다고 보지 소망을 잃어 본 적이 없다. 요즘 나를 향해 들어 오는 수백 건의 고소 고발을 막기 위해 나의 칼을 뽑아 들 것처럼 시늉은 해도 속으로는 나보다는 다 착하고 순진하게 보여 소망을 놓아 본 적은 없다. 내가 그들이었다면 10배는 더했을 것이다.

신앙에 철이 들고 나서도 나는 공회를 위해 한 번씩 과거처럼 움직여야 할 때가 있었다. 물론 이 때부터는 비느하스의 창이 필요할 때만 그렇게 했다. 그런데 예전의 나를 본 사람이 나와 반대 쪽에 있으면 나의 창을 반대로 본다. 천하에 제일 나쁜 인간으로, 서부교회와 총공회를 짓뭉갠 인물로 평한다. 그렇다 해도 나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 본 적은 없다.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 본 이재순 목사님이 신풍교회 교인들에게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는' 인물로 요약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교인들에게 그 분이 워낙 도인이어서 점잖게 표현했지만 실제 나는 더한 인간이다. 변명하지 않았다. 선 곳이 반대가 되면 나쁘게 보는 것이고, 내게 대한 악평은 최소한 그 근거가 확실하다.

그 분을 기억할 때마다 혼자 가장 죄송한 것은 그 분의 뒤를 따라 다니며 '자기 아들은 1등상 주고...' 그 사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려고 투덜대며 따라 다닌 그 말에 그 옛날 목회자 사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긁히고 찢겼을까? 사모님 집 아이들은 참 반듯했다. 보기에도 그랬고 행동도 그랬다. 큰 아들은 서울법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지금 삼성그룹 이사일 듯하다. 젊어서 벌써 부장 된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나는 앞에서 말했듯이 그렇게 행동했다. 성탄절이 되면 1년을 돌아 보며 시상을 한다. 그 집 아이들은 1등이고 나는 꼴찌다. 그 때마다 52주 연보한 돈을 계산하면서 나는 연필 1개 아니면 공책 1권밖에 주지 않고 사모님이 사택 아이들만 편애했다고 떠들어 댔다. 내가 지금 목회하는 교회에서 어느 누가 사택 사람을 시비 걸고 나와도 나는 그 때를 생각하면서 변명하지 않는다. 사택 식구 전부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도 내가 어릴 때 뱉은 그 나쁜 말의 10분의 1도 갚지를 못한다.


(중생의 체험, 주일학교)
초등학교 3학년으로 기억 되는 어느 주일 오후 주일학교 예배, 4학년이었는지 지금도 기억은 잘 없다. 천국과 지옥을 말씀했다. 그 날부터 두려워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꿈 속에서 나는 지옥 불에 타고 있었다. 너무 생생했다. 그런 짓을 했지만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주님 앞에 서기 전에 내 양심이 심판을 해도 그렇게 된 듯했다. 한 주간 내내 나는 죽으면 지옥을 갈 것이라 확신이 들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다음 주간에는 건설구원을 가르쳐 주셨다. 택자는 무조건 천국에 간다고 하면서 택자인지 알 수 있는 몇 가지 힌트를 주셨다. 평생 교회를 버리고 세상에 살며 술에 취해 있어도 교회 종소리를 들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그의 마음은 신앙을 거부해도 그 마음 속에 영은 이미 중생이 되어 있고 이 중생은 다시 죽는 것이 아니라는 그런 몇 가지 사례였다. 남의 이야기를 예화로 들었지만 나는 그 날 오후 그 설교를 들으며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 이후로 교회 내에서 나쁜 짓을 할 때는 이제 천국 갈 확신을 가진 상태에서 더욱 나쁘게 했던 것 같다.

사모님은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의 본문을 짚어 주셨다. 다른 교회의 이야기 식이 아니라 본문을 그대로 짚어 갔다. 재미가 아니라 말씀의 정확한 정리며 소개였다. 지금도 성경을 읽어 내려 가다 보면 곳곳에 그 분의 그 때 정리한 내용을 떠올린다. 그 때 사모님의 가르치던 모습이 동영상으로 내 눈에서 돌아 간다. 그 분의 그런 예배 인도 모습을 내 눈에 담고 살 수 있다는 이 행복, 이 감사, 이 자랑을 어떻게 다 표현을 할 수 있을까? 나의 당시 외부 행동은 교회에 몹쓸 짓만 했는데 불택자의 지옥과 택자의 천국이라는 2번은 교리로서 내 마음에 뿌려 졌고, 성경 전체의 본문 소개는 내게 성경의 전체 요약과 정리를 심었다.

한 자리에 8천명 아이들이 북쩍이는 모습을 두고 외부에서 오신 분들이 이렇게 해서 어떻게 교육이 되겠느냐고 좋은 뜻을 담아 의문과 우려를 표시할 때 백 목사님은 공과가 같으니 앞에 있는 자기 선생님에게 듣고 옆에 있는 다른 선생님에게 듣고 위에 있는 다른 반의 다른 선생님의 고함 소리를 동시에 섞어 듣습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사방에서 줏어 담아도 다 담긴다고 설명을 한다. 말은 맞다. 그런데 그 말을 실감 있게 듣는 이들을 보지 못했다. 서부교회 우리 1천명의 반사들도 시키니까 그렇게 하고 교회의 흐름이니 따라는 하지만 속으로 무릎을 치며 '맞다! 과연 맞다! 정말 맞다!' 이렇게 진정으로 동의가 되고 감격스럽게 자기 경험을 가지고 찬동하는 선생님들이 있었을까? 백 목사님은 1910년생이고 1936년에 믿었다. 이 때 아이가 벌써 3명이었다. 주일학교라는 세계를 모르는 분, 주일학교의 예배 분위기를 겪어 보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예리하게 뽑아 낼 수 있을까? 바로 이런 순간을 접할 때마다 백영희라는 신앙의 인물을 모셨고 주변에서 접할 수 있었던 복을 느낀다. 나는 안다. 내가 바로 그들 중에 있었다. 그들 중에 설교와 제일 먼 거리에 있던 내게 그 말씀들은 하나하나 심겨 졌고 나의 평생의 밑바탕이 되었다.

나는 김명자 사모님의 자녀들을 안다. 대충 그 분들의 신앙 생활을 여러 곳에서 듣게 된다. 그런 부모님의 자녀들이니 그들은 가장 완벽한 신앙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 자녀들이 전부 어릴 때부터 다 모범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있다. 성인이 된 후의 신앙을 비교하면 내가 앞 서 있지 않을까? 김명자 사모님이 가르친 것을 기준으로 삼고 비교를 한다면 적어도 외부 모습은 그럴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오신 사모님은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택 방에서 서너 명 학생을 불러 놓고 과외를 하셨다. 잠깐 그렇게 하셨다. 설교록을 맡은 직원으로 설교 기록을 살피다가 사모님의 그런 행동 때문에 백 목사님이 서부교회나 집회 때 꾸중하신 사례가 많다. 닭을 몇 마리 예배당에 길렀다. 그 것도 창동교인이 목사님께 보고를 했고 금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 말은 어머니께 들었다. 왜 그렇게 막느냐고 여쭈었다. 목회자는 목회만 전념해야 하고 부업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평생 목회를 하며 늘 그 때 들었던 이런 이야기들이 남 다르게 내 마음을 아프게 날카롭게 벼린다. 그리고 그 사모님의 말할 수 없는 그 고난을 조금이라도 더 느껴 본다. 한 아이를 위해 어머니가 겪는 고난의 길, 한 교회의 한 교인의 한 신앙을 위해 지도자가 아무도 모르게 겪는 고난을 나는 절절이 체험한다. 다른 분들은 백 목사님이 이렇게 지적을 하고 나면 속을 섭섭하고 그 섭섭이 때가 되면 분노가 되며 이 노선과 내적으로 변심을 한다. 사모님들이 사택에서 이렇게 변해 가며 호소를 이어 가면 천하 없는 목회자라도 결국은 그렇게 되어 버린다. 김명자, 사모님은 총공회 모든 사모님들 중에 공석에서 매를 가장 혹독하게 맞은 분이다. 다른 분은 10분의 1만 그렇게 되었다면 바로 짐을 쌌을 것이다. 최근에도 한 번씩 전화로 뵙는다. 어떻게 1966년 그 때와 2018년 오늘이 그렇게 꼭 같을까? 그 신앙에 날이 무디어 지지 않았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정말 나 때문이 아니라 저 분에게 배워 그렇다고 진심 다하여 외칠 수 있는 그런 은사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런 분을 가지고 있다. 내게는 요게벳이다. 백영희 성함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수 없는 사람이 그 분을 다 함게 그렇게 생각한다. 백영희 외에, 나는 김명자 사모님이 그런 분이다.



(기도의 배경)
성경에 요게벳 기록은 모세의 출생 때만 잠깐 나온다.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았지만 요게벳은 죽을 때까지 모세를 위해 기도했을 것이고 그 기도는 모세의 모든 활동을 신령하게 은혜롭게 만드는 내적 골격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백계순 집사님이라는 기도의 세계 안에 김봉선 기도가 있다. '김봉선'이라는 이름을 알면 공회의 원래를 아는 사람이고 모르면 2세대로 분류해도 되는 이름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거창 지방을 거쳐 간 목회자들과 거창 지방 교인들 및 8월의 도평 집회의 핵심 실무자들에게 수고하는 창동교인 정도로 알려 져 있다.



(공회의 출발에 '기도'가 필요하던 때)
공회의 실체가 외부에 본격적으로 드러 나기 시작한 1948년의 가조교회 집회 때다. 예배 첫 시간에 백영희 집사님은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섰고, 신도범 서봉월 김봉선 3명이 강사의 발 밑에 머리를 맞댈 거리에 앉았었다. 예배당이 차고 넘쳐 자리가 없었고 강단 위에까지 떠밀려 앉아야 했기 때문이다. 백영희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서 모여 드는 이들은 이미 주변에 의하여 하나의 모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집회가 실질적으로 공회의 첫 집회라 할 수 있다. 그 집회의 첫 설교에 입이 막힌 강사는 그 자리에 주저 앉으며 제일 가까이 앉은 3인에게 머리를 맞대며 평생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 했고 목사님도 3인을 위해 매일 기도하겠다고 했다. 백 목사님은 순교 직전 평생 그렇게 했다 하셨고 어머니는 내가 안다. 다른 분들은 어머니보다 신앙이 훨씬 위대하다. 당연할 것이다.

그 집회에서 박기천 순교자가 목회를 출발했고 그 집회는 바로 직후의 봉산교회 집회를 준비한 집회가 되었고 봉산교회 집회는 공회의 절정이 되면서 오늘의 공회를 만든 출발이 된다. 그 3인 중에서 이 노선의 계통이 하나 나온다면 자연스럽지 않을까? 이병준 목사님은 내가 이 노선과 교훈의 의미를 알기 전에 백영희 자료에 혈안이 된 분이다. 정재성을 필기 1인자라면 이병준은 녹음 1인자다. 나는 이들 중 이 노선의 자료와 연구와 반포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2013년에 백도영 고소인은 그들을 지목하지 않고 나를 지목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1등이라 했던가? 공회의 자료를 두고 전설처럼 이야기가 돌았던 그들이지만 최후의 면류관은 내가 썼다. 그들이 백영희 설교 자료에 1등을 하려고 달릴 때 나는 그들 밑에 수많은 목회자, 그 밑에 다시 공회의 수많은 교인들 중에서도 어렸다.


이병준 필기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정재성 필기는 정리 된 형태로만 교역자들 사이에 전해 졌고 얼마 전에 내게 모두 전해 지면서 연구소 게시판에 전부 올렸었다. 가조집회의 3인 기도 명단에 들었던 신도범 목사님을 통해 나는 1976년에 성경을 배웠다. 비록 초기 단계지만 나는 그 분에게 에베소서 2장 5절을 배울 때 성경 전체를 순간에 받았다. 그러나 신도범 목사님은 공회를 떠났다. 그리고 가조교회 집회의 첫 시간에 기도로 출발한 3인 중에 김봉선은 평생 기도와 전도와 충성은 최고였으나 교리와 설교 내용의 정리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김봉선은 나를 위해 평생 기도했다. 그리고 나는 백영희 신앙노선의 모든 자료와 설교를 외부에 전하는 단 1명이다. 그래서 저작권 십자가에 못 박혔고 지금 곧 숨을 거두기 직전이다. 연말쯤 대법원에서 최종 선고가 있다 한다. 유죄 판결이 나면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한 묘소에 들어 가야 한다. 그 곳을 그리면 지금도 설렌다. 주님이 가신 그 길, 이 노선의 모두가 가겠다고 한 그 길, 나만 가도 되는가? 남을 가지 못하게 막은 것이 아니라 남들이 다 흩어 졌고 버렸기 때문에 혼자 간다. 내가 가는 이 길을 더러운 죄인들이 가는 길이라고 지금도 침을 뱉다가 침이 부족하니 가래까지 끌어 올려 뱉는 이들이 있다.

누가 뭐라 해도 백영희 신앙 노선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이를 전달한 나의 노력은 다른 사람과 비교가 어렵다. 이런 나의 모습은 나의 못난 모든 모습 중에 유일하게 보배롭다. 이 것을 만든 분이 바로 김명자 사모님의 가르침이다. 그는 내게 스승이다. 말씀에 대한 이 가치를 내게 심은 첫 선생님이다. 보이지 않게 기도한 것은 김봉선 어머니가 더 많았을 듯하다. 내게는 한 분이 더 있다. 나인숙 권사님이다.



(나인숙, 또 한 분의 요게벳)
뒤에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일제 때 수원에서 택시 12대를 가지고 사업을 했던 아버지 밑에 무남 독녀 외딸로 자랐다. 권사님을 보면 사람이 저처럼 고울 수 있을까? 감탄이 된다. 좋은 집에서 바르게 자란 저력이 그 분의 모든 면에서 묻어 난다. 50세가 넘도록 밥을 해 보지 못했다. 친정 어머니가 밥을 해서 바친 정도다. 막 그 모친이 돌아 가셔서 혼자 밥을 해 드셔야 하던 1977년 2월에 나는 나 권사님의 교회 내 방을 찾았다. 전성수 목사님은 추순덕 집사님 구역으로 맡기려 했으나 목사님이 나인숙 구역으로 지정을 했다.

처음으로 인사를 하러 갔다. 서부교회 본당의 남반 쪽 측면에는 계단이 있다. 이 계단 사이에 방을 몇 개 넣었는데 2층 계단 사이에 창고가 있었고 이 것은 1982년에 편집실이 되어 1988년까지 사용한다. 내가 근무하게 될 곳이었다. 그 위 3층 올라 가는 중간 계단에 방 3칸이 있고 김현찬 김효순 나인숙 3명의 구역장이 방을 한 칸씩 사용했다. 첫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밥상을 작게 차려 주셨다. '내가 오십 넘도록 어머니 차려 주는 밥상을 앉아서 받아 먹었어. 나는 멍청이야. 연단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백 목사님을 알고야 깨달았어.'

그 날 이후 그 분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보다 내가 더 귀했다. 말이 아니라 실제 그랬다. 딸이라고 한다면 조순자 집사님일 것이다. 아들이라면 나다. 많은 일화를 그려 본다. 그런 분을 가져 보지 못한 분들이 이 글을 통해 그런 세계를 그리며 소망할 때 자신에게도 이미 이런 분들을 주님은 주셨는데 잊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복이든, 어떤 능력이든, 어떤 하나님의 은혜든 하나님은 공평하게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사도 바울이나 또 가깝게는 백영희 목사님과 같은 분에게는 너무 큰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는 너무 적게 주셨다고 생각한다. 알고 보니 마찬 가지였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알아 봤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몰라 봤을 뿐이다.

나 권사님에게는 나 같은 또는 나보다 훨씬 입장이 앞에 있었고 좋았던 분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인숙이라는 인물을 멀리 했다. 그래서 그 분의 주변이 비어 있었고 빈 자리에 혼자 앉다 보니 나는 나인숙이라는 이름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혼자 가졌다. 독점을 한 것이 아니라 독점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런 현상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백영희 목사님도 그러했다. 나는 서부교회에 1977년부터 신앙생활을 할 때 대충 헤아려도 나와 같은 소망을 가졌으나 나보다 먼저 그 분을 배우고 따르던 이들이 약 150여명이라고 헤아려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1주일에 11회 설교를 하는 백 목사님, 그 설교를 마치면 무조건 2층 남반 측문으로 나오는데 나는 설교 중에 모르거나 의문이 있으면 그 측문에서 기다렸다고 일일이 여쭸다. 나 외에 그렇게 고정적으로 여쭈는 분은 본 적이 없다. 나는 시대의 종이라 할 백영희의 하나밖에 없는 제자다. 어떤 의미에서? 매일 매 예배 때마다 나는 그 분에게 늘 직접 여쭸다. 그 분은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 다른 분들은 그 분에게 그렇게 열려 있는 기회를 사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정말 큰 일이 생기면 다급하게 여쭙는 경우는 있다. 왜 그 분의 생전, 왜 그 분이 비워 둔 그의 옆 자리에 질문 좌석을 아무도 앉지 않았을까?

오늘 공회의 참담한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때를 그려 본다. 그 때 그랬으니 지금 이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좀 나은 면이 있어 그랬던가? 아다시피 나는 중간쯤이 내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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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10-06 09:23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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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7
다윗의 성전 준비로 본 연구소의 사명
담당 | 2019.08.30 | 추천 0 | 조회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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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
훌륭한 지도자의 당대와 후대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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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6
압살롬과 시므이 (1)
담당 | 2019.08.30 | 추천 0 | 조회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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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느 장관, 공회의 어느 장관 (1)
담당 | 2019.09.18 | 추천 0 | 조회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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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1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고 퍼뜨리니 오늘까지..
담당 | 2019.08.24 | 추천 0 | 조회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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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이론적 양심가들의 불장난과 시대의 균형추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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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3
최악의 좌익이, 정상적 우익으로 - 안병직으로 본 공회 (1)
회원 | 2019.08.25 | 추천 0 | 조회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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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 생활의 농경식과 이동 생활의 목축식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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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매년제와 집회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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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세상의 셈법, 신앙의 셈법 - 손익을 기준으로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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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공회의 '실행'론, 이 노선의 희망
담당 | 2019.08.18 | 추천 0 | 조회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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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후보' 논쟁 - 공회만이 아는 국가적 이야기들 (2)
담당 | 2019.08.17 | 추천 0 | 조회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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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부공1의 대구 기도원 철거와 집회 탈선 역사 (부공2측 공개 발언) (1)
부공2 | 2019.08.11 | 추천 0 | 조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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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과 역사 - 백영희
담당 | 2019.08.03 | 추천 0 | 조회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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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3
돌아 본 1992년 12월의 궤변
담당 | 2019.07.28 | 추천 0 | 조회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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