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3) 백영희의 학습 세계, 나의 과거를 돌아 본다.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19.09.11
공회의 천재는 백도광, 송종섭, 성실한 학자는 서영호다. 이런 이들은 짝할 이가 없다.
공회의 수재는 신도관 장렬 이동화 김명자 박신찬 홍순철 서영준 김영채 등이다. 그들의 탁월함은 어디 내놓아도 확실하다.

나는 수재를 넘어 서고 천재라는 분들과 비교를 많이 받았다. '공부'에 대한 특이한 기록들이 공회 내에서 많아서 그렇다.
그런데 나의 실제 학습력은 그냥 보통이다. 앞에 인물들은 실적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는 있으나 그 내면의 학습력은 나 같은 사람을 아득히 초월한다. 이 번 글은 나의 실제 실력이 '백영희'의 학습 세계의 일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를 살피고 그리고 이 노선 우리 전부를 살필 책임을 느낀다.

설교록에서 '공부'라는 글자, 특히 '대학'이라는 글자를 면밀하게 살펴 본 이들은 내 이름이 그렇게 많이 반복 된 것을 느낄 듯하다. 아는 사람이라면 설교록 전체의 기록을 통해 아마 '공부' 하나에 관해서는 백 목사님이 가장 많게 그리고 최대치로 표현했을 듯하다. 이미 설교록에 나간 발표 때문에라도 나의 실제 수준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 나는 이 노선 때문에 백 목사님 가정과 내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 이 노선 누구에게도 이미 주어 졌다는 사실을 가지고 글을 적고 싶다.

나의 학습력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시골에서 한 반 60명 중에 10등이다. 전국 평균으로 보면 중간쯤 될 듯하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두 번 했다. 초등 1학년을 재수한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나의 7남매 중 5명은 반에서 60명 중에 50등 이하다. 사촌이 수십 명이지만 9급 공무원 1명이 없다. 거의 망치를 든 공장 기술자다. 나는 고등학교와 대학의 입학 시험에 영어와 수학을 전부 포기하여 찍기만 했다. 학교를 다니며 신앙이 들자 공회의 성향에 따라 영어를 하면 타락하는 줄 알았고 수학은 써먹을 데가 없는 공부로 생각했다. 공부도 싫고 학습력도 없던 차에 신앙을 핑계로 공부를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영어 수학은 완전히 포기했고 다른 과목은 시험 때만 봤다.

그런데 나를 보면서 공부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만한 기록들이 있다.
* 나는 사촌 정도 범위에서 명문이라는 거창고교 20명에 샛별초교 30명 정도가 된다. 나는 샛별초교 졸업 번호 1번이다.
* 나는 대학의 3, 4학년 2년동안 학교를 나간 적이 없다. 이 기간에 책은 2권 샀다. 그리고 수석 졸업을 했다.
* 나는 중학교 1학년 영어 실력에서 8개월 공부하여 토플 527점을 받고 유학을 갔고 바로 550점을 넘기며 신학교를 갔다.
* 알파벳도 모르던 헬라어 히브리어를 몇 주 독학 한 다음 미국의 신학교 원어 15학점을 수강 없이 시험으로 통과 했다.
* 나는 미국의 대학원 과정에 주 40시간을 일하고 수금 예배에 토요 심방까지 하며 18학점을 통과했다. 3명의 몫이었다.
* 부산대 총학의 특별초빙으로 의대생 영어 특강을 비롯하여 부산의 386 총학들의 특강이 밀렸다. 대학가 특강을 도맡았다.
* 이런 상황에 백 목사님이 '서울에서 좋은 대학'을 다니다 부산으로 왔다고 하자 서부교인들은 '서울대 법대'인 줄 알았다.

(백영희와 학습력)
백영희의 설교 세계를 제대로 접하게 되면서 나는 그 분의 머리가 너무 특출하여 우리는 배우기나 하지 그의 잘못을 찾아 내거나 그를 따라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를 가르친 분들과 나 주변 사람들의 생각도 그러했다. 세월이 가면서 공회 내의 위대한 분들을 접하게 되면서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하나 의문을 가졌었다. 저 분은 이 시대를 위해 주신 선물인데, 우리에게 배우기만 하라고 주신 인물인가,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는 하나의 사례인가? 사도라 해도 성경 기록만 우리가 따를 수 없지 그 신앙은 우리가 따라 갈 수 있다. 넘어 설 수도 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부인했으나 손양원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양원이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가? 그 것은 아예 주어지지 않은 세계다.

그렇다면 백영희의 신앙이란 그 어떤 면이라도 우리가 앞 설 수도 있고 배울 수도 있고 그 틀린 것을 지적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설교와 신앙의 세계를 접해 본 사람들은 근접조차 어렵다고 느낀다. 그 중에 가장 궁금한 것은 그의 학습력이다. 도대체 얼마나 머리가 좋으면 저렇게 깨달을까? 그 분의 전기는 그 설교의 이해 때문에 필요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 분의 학습력은 내가 아예 따라 갈 수 없는 차원일까? 또는 집안의 학습력은 어느 정도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의 일제 때 초등학교 성적까지 낱낱이 들여다 봤다. 자녀 7명 부부를 나는 개인적으로 잘 안다. 20명 손주 중 17명을 반사나 다른 기회로 직접 가르쳤고 3명도 가까이에서 접했다. 자녀 손주가 어릴 때부터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 과정을 살펴 봤다. 장남은 시대적 인재다. 그 외에는 그냥 우수한 정도가 몇 있고 나머지는 보통이다. 백 목사님의 다른 형제 처가 외가를 고루 따지면 그냥 일반적이다. 나처럼 그 집안을 다 알면 세상 사람은 이 가정의 특별한 학벌이 우연이라 할 것이고, 우리는 특별한 은혜라 할 듯하다. 이 가정이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하늘의 별처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니다.

(나의 학습, 과거를 돌아 본다.)
이런 사실을 알아 가면서 내게는 소망이 생겼다. 노력을 한다 해도 백 목사님을 10분의 1이 아니라 100분의 1도 따라 가지 못할 줄 알았다. 아예 시도조차 안 될 줄 알았다. 겉모습으로만 비교를 한다 해도.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 최소한 겉모습으로는 10분의 1까지는 갈 수 있을 듯했다. 자녀나 손주의 진로나 세상 성공면을 본다면 그들의 실적은 흉내를 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거의 비슷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배우고 따라 가는 과정에 어느 덧 나의 주변 다른 분들이 나를 비교하면서 내가 마치 그들이 아예 흉내내기 어렵다는 표현들이 나왔다. 그래서 얼른 나의 지난 날과 내면, 그리고 백 목사님 가정의 알려 지지 않은 이야기도 공개할 필요를 느꼈다. 그 분의 이야기는 전기에 담았으나 전기는 그 성격상 우리 같은 내면을 조금만 적었다. 그리고 연구소의 이전 게시판을 통해 그리고 평소 다른 기회를 통해 부지런히 안내를 해 왔다. 알고 보면 소망을 전한 것인데 내 마음을 모르는 이들은 가족들에게 섭섭하다고 비판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진의는 그렇지 않고 또 가족에 대한 나의 표현은 그 어떤 경우라도 예우에 만전을 기했다.

여기 나의 지난 날을 적는다. 나의 지난 날은 누구나 주변에 흔하다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실적은 아주 특별한 내용이 많다. 그래서 적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든지 나 정도는 모두에게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잘 살펴 보면 나와 종목은 달라도 각자에게 나같은 특별한 면을 현재 가지고 있을 것이니 자신을 살펴 보면 좋겠다. 더 나아가 이 곳을 찾으면 백영희의 이름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 이름이 우리 누구라도 노력하면 그렇게 될 정도다. 이 것이 이 글을 적는 이유다.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나는 거창 중앙에 살았다. 집 바로 앞에 초등학교가 있었고 1학년을 마쳤을 때도 받침 있는 글을 읽지 못했다. 때마침 그 학교 옆에 또 다른 초등학교가 문을 열면서 45명 정원을 채우지 못하자 학교의 길목에 살던 나를 다시 1학년에 오라 했다. 재수를 시킨 것이다. 초등 1학년을 재수했다고 말하면 공부를 아는 사람은 얼른 알아 듣는다. 그래도 초등학교 개근상은 8장이다. 학년 개근장 7개, 6년 개근상 1개다. 이렇게 개근상을 받고도 그 정도면 이런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나를 직접 데려 간 분이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교장이었다.

기독교 학교에 사립이다 보니 거창의 당시 분위기에서 학생을 구하지 못했다. 마치 이화여대를 시작할 때 선교사들이 학생을 모집할 수 없어 집집을 다니며 사정을 해서 하나 둘을 끌어 갔으니 누구나 손만 들면 이화여대 1회생이 될 수 있었던 상황이 나의 초등학교 입학 때 분위기였다. 나중에 학교가 유명해 지고 나니 경쟁률이 심해졌고 전국 유명세를 탔다. 서울의 국회의원 자녀들이나 유명 인사가 추첨에 줄을 섰으나 내가 들어 갈 때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학교에 사촌 범위에서 30명이 그 학교를 다녔으니 그 학교가 유명해 진 다음만 아는 이들은 나를 상대할 때 기본적으로 교육 명망가 집안으로 보지 않겠는가? 실은 학생을 유인 납치하다시피 해서 따라 갔을 뿐인데.

한 때 전국 최고의 성적을 올렸던 거창고등학교도 내가 입학할 때는 시골의 한 반에서 10등이면 그냥 들어 갔다. 졸업을 하고 나니 MBC TV 운동권 세력이 조직적으로 선전을 해서 전국 최고 학교가 되어 버렸고 지금도 전설로 남아 있다. 현재 공회 내의 목회자들은 학교가 정말 유명할 때 들어 갔기 때문에 그 학교 출신이면 학습에 관한한 최고다. 내가 들어 갈 때는 시골에서 아무나 갔는데 나의 샛별 초등학교 졸업번호가 1번이고 거고 출신이며 집안에서 20명 30명이 그 학교와 관련이 있다 보니 멋 모르는 사람들은 수재 집안이라고 오해를 한다. 내가 살던 주소지가 그 학교 앞이어서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훗날 교회사와 공회의 의미를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공부에는 참 관계도 없도록 만들어 놓고 공부나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다음에 맡길 '공회의 조직신학과 역사 담당자'로 배치하기 위해 짜맞춘 일정이었다. 나의 전공은 백영희 설교와 이 노선이다. 이 세계에서는 세상 공부와 신학이 필요가 없다. 없을수록 더 유리하다. 그래서 나는 겉보기는 마치 공부나 한 사람처럼 보이는 기록이 많은데 속으로는 딱 안성마춤이다. 세상 지식으로 말하면 글만 읽는 정도. 그리고 아는 것은 이 노선뿐이다. 내가 전공하는 분야는 일반 교회가 전공할 리는 없고 공회는 공회의 이상한 분위기 때문에 이 분야를 공부한 사람이 없다. 우선, 이 분야의 자료 자체를 찾고 다닌 사람이 나뿐이다. 혼자 뒤졌으니 1등이 아닐까?

훗날 서부교회 주일학교가 세계 교회사의 전설이 되었을 때 그 교회 주일학교 반사는 아무나 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마치 엄청난 신학 훈련을 받은 특급 전도사들이 된 것처럼 알려 졌다. 속으로는 너무 쉬워 아무나 다 할 수 있었는데 남들이 너무 대단하게 보는 바람에 괴리가 컸다. 공회에는 이런 면이 너무 많다. 학습 문제를 두고는 나의 평생이 거의 다 그렇다. 아무 것도 아닌데, 남들이 그렇게 보게 되었다. 아이 4명이 전부 시골에서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다음 해에 대학에 독학으로 진학했다. 이후 대학을 거치며 가진 기록은 신문 방송에 소개 된 수십 건의 보도 내용보다 더 극적인 것이 많다. 전국 중앙 언론이 총동원 되면 보도한 것은 대학측이 홍보를 위해 보도자료를 내놓는 바람에 막지를 못했으나 이후 개별 진로는 철저히 막을 수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하는 순간부터 집에서는 밥만 먹인다. 이 방법은 백 목사님이 그토록 평생 강조한 설교록 기본 내용이고 공회에서는 상식이다. 그리고 밖에서 쓰는 돈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게 했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를 의지하는 과정에 약해지는데 이들은 부모가 있는데 현실 세계에 뛰어 들어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조금 더 강해 지게 된다. 그 작은 위기감이 시대 자체가 해이하다 보니 뒤에 빛을 발한 것이다. 이 것은 공회 신앙에서는 상식이다. 천재적 목사의 천재적 유전인 줄 알고 모두 부러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신풍교회와 부공3 전국의 모두가 다 그렇게 하니 이제는 예사로 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공회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설교록에서 그토록 가르친 것을 그토록 외면했기 때문이다. 나와 내 주변이 뛰어 나서가 아니라 나와 내 주변은 공회의 그냥 일반 수준이다. 다른 이들이 전혀 하지 않다 보니 혼자 뛰어 1등을 한 셈이다.

(관심은 백영희의 학습력)
나는 백 목사님의 집안에 관심이 많았다. 집안이 너무 특출한가? 그렇다면 내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 집안도 우리와 비슷한가? 그렇다면 소망이 있다. 그 집안 전체가 시골에서 그냥 보통이다. 조금 좋은 편이다. 백 목사님과 직계는 확실히 특출하다. 그런데 백 목사님이 평생 자신보다 우수했다는 학교에서 늘 우수했다는 정봉조 목사님을 세세히 살펴 볼 기회가 있었다. 아들이 총신대 신약교수 정훈택 목사님이다. 그 분에게 백지 위임장 10장을 받고 고신의 성적표부터 전국을 다니며 정봉조 정훈택 두 분의 학습력을 조사해 봤다. 정 목사님 부자는 우수하다. 그렇다고 남들이 따라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를 통해 백 목사님의 학습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백도광 장남은 시대적 인물이다. 그런데 내막을 살펴 보면 운이 좋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안다. 어쨌든 너무 위대하다. 그런데 그 외 나머지 형제와 집안 전체를 살피면 어느 집안에라도 가끔 한 번씩 인물은 나온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백 목사님과 그 집안 전체는 선천적으로 우리가 올려 보지 못할 그런 탁월한 경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 유명해 졌던 분들의 내면을 다시 살펴 보면 어떻게 하다 보면 나도 대충 어느 정도 따라 가겠다고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아니겠는가?

나는 공부를 두고는 특이한 이력과 성적이 많다. 주변에서 천재인 줄 오해를 한다. 우연히 그렇게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자기를 살피다 보면 자기도 잊고 있었으나 남 달리 아주 특별한 점들이 있을 것으로 본다.
내가 평생 접한, 우리 교회와 전국의 공회 교인들은 모두 너무 특별한 면들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모르고 있었다.
이 노선은 교회사적 의미 때문에 하나님은 이 노선의 사람들은 모두 특별히 관리를 하신다고 느낀다. 우리 이야기를 적는다.

(내가 거친 공부의 세계들)
나는 공부가 별로였으나 거창고와 샛별초를 통해 공부의 깊은 세계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전영창 학교장은 해방 후 여권 1호로 미국 유학을 다녀 왔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니 따로 참고하면 될 듯하다. 조용기 목사가 모델로 삼았던 로버트 슐러 목사가 나의 재학 시절에 거창까지 와서 설교를 하고 갔다. 그 인연으로 내 아들이 LA에 유전공학 연구원 파견을 갔을 때 수정교회를 찾아가 담임 목사님께 직접 인사를 드리게 했다. 그 분 면담은 몇 달씩 대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무식이 때로는 직통을 만들 때가 있다. 샛별초교 시절이다. 총리 가정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홍종만 선생님은 1965년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우리를 가르쳤다. 당시 미국 초등학교가 사용한 영어 교과서로 직접 배웠다. 연대 작곡가를 나온 친구 아버지가 음악교사였다. 시골 초등학교 1학년 45명을 위해 선교사, 영어교사, 음악교사, 시청각 교사가 따로 있었다. 60년대의 미국 초등학교를 그대로 옮겨 놓으려 했다. 수천 명이 다니던 옆에 학교 전체에 풍금 1대 있던 시절에 이 학교에는 반마다 풍금이 있었고 강당에는 피아노가 있었으며 학생들은 2학년 때부터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바이올린 첼로 등으로 합주를 했다. 서울의 고급 학교는 이미 그렇게 했을지라도 거창 시골에서는 파격이었다. 나는 초등 3학년까지 호주 선교사들이 사택으로 사용하던 2층 벽돌집에서 공부를 했다. 첫 화장실 경험은 물에 풀어 지는 휴지를 사용한 수세식이었다. 1964년 3월, 경남 거창 시골에서 그런 일은 그냥 꿈 속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1년간 수업을 들어 가지 않았다. 그 학교가 그런 식이었다. 나의 성적까지는 자기 갈 대학의 본 고사를 집중하라면서 3학년 1년간 수업을 면제 시켜 주었고 듣고 싶은 과목은 출석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했다. 그 기회를 100% 활용한 학생은 불과 몇 명이었다. 고정 관념 때문에 중요한 과목의 수업은 모두가 잘 빠지지 못했다. 나는 공부해 봐야 그만이고, 수업을 들어 봐야 별로기 때문에 1년 거의 수업에 들어 가지 않았다. 오늘 이 나라 좌파들이 그토록 주창하는 '열린 교육' '자율 교육' '인간 행복 교육'의 모델로 삼는 거창고의 내막은 실은 이런 식이었다. 좋은 학교 입학을 위해서는 수단도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그 학교가 전국의 주목을 받게 되자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고 나섰다. 인간 되는 것이 중요하지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고! 그렇지 않았다. 단어 시험 200개를 내고, 틀리면 틀린 갯수만큼 종아리를 친 분도 있다. 여 교사였다. 나중에는 자기 팔이 아파 울면서도 그렇게 시켰다. 그러니 시골 일반 학교가 그렇게 실적을 올린 것이다. 공회처럼 알려 지고 성공한 다음에도 내막을 솔직히 다 털어 공개하는 곳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공회가 좋다. 믿음이 간다. 그리고 평생 광고한다. 그리고 공회 외에 어떤 전설적 기록을 가진 사례가 나오면 거창고 샛별초처럼 광고와 실제가 과연 같은지 들여다 본다. 손양원도 김현봉도 정말 알려 진 그대로인가, 아니면 전달 과정에 왜곡이 있는가? 평생 이렇게 만사를 대하다 보니 나는 일반 학자들이나 전문가와 만나면 대화하는 방법과 차원이 다르다.

 

이런 파격이 계속 되면서 거창고와 샛별초는 한국의 훗날 교육계를 전교조로 만드는 모델이 되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모순을 다 말하려면 한도 없다. 그 속을 모두 들여다 보았고 나는 공회 신앙을 훗날 가졌기 때문에 오늘 좌우 충돌의 교육 현장과 전혀 상관 없이 공회의 세상 교육에 대한 노선이 체험적으로 맞고 또 좌우의 모순을 알며, 이 문제점을 파악했고 나의 학습력이 평균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직접 지도할 수 있는 학생들에 관한 한 나는 그들이 이 노선에서 5월집회도 한 주간 결석하고, 모든 밤 예배에 학교의 밤자습이 지장되지 않으면 등록금, 사교육, 스펙 쌓기 등의 문제점과 그 속에 들어 있는 지름길을 알게 되었다.

한 번은 전국 아동복지의 최고 대장님을 서대문 근처 그 사무실에서 만났다. 입회인 2명을 앉혀 놓고 내 혼자 4시간을 강의했다. 실은 진보 좌파의 막장 모습을 지적했다. 그는 한 마디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그래도 내 식구들인데 손을 댈 수는 없다.' 그 것이 그들의 내부 세계다. 또 한 번은 삼성전자의 아동 복지 쪽을 총괄 맡은 두 분의 교수가 신풍까지 따로 찾아 왔다. 관련 분야 최고 전문가 교수들이었다.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3시간씩 각각 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듣기만 했다. 그리고 이후에 그들이 맡은 정책은 방향을 완전히 틀어 버렸다. 그래도 기업이다 보니 반영이라도 되었다고 느꼈다. 그 바람에 우리 교인들은 엄청난 혜택을 많이 봤다. 이런 분위기가 가능한 이유는 내가 나온 초등학교와 고교를 먼저 사례로 함께 놓고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였지만 내게는 처음 듣는 이야기뿐이니 들을 뿐이었다. 나는 목사나 교회나 공회 이름으로는 이런 이들을 만나지 않는다. 교인 가정의 학생을 위해 심방 차원에서 한 번씩 이렇게 만난다. 최근 내게 대한 별별 이야기는 이런 과정을 비튼 이야기들이다.

공부가 체질도 아니며 관심도 없는데 공립학교 1년을 먼저 손해 보게 하시고 사립학교를 통해 나는 기독교 학교의 문제점과 함께 우리 사회의 오늘까지 공부에 관련 된 모순점, 이 노선의 사람이 이 노선 식으로 믿고 살아 가는 데 있어서는 최소한 공부 때문에 헛일은 하지 않을 수 있게 지도를 했고 실제 수십 년의 역사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공회의 교육관, 복지관, 인생관, 세상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특별하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접한 이 경험 때문에 공회의 신앙 방향으로 그들의 세계를 다시 평가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내 말이 다 맞고 그들의 주장은 말 한 마디를 할 여지가 없었다. 공회라는 이름을 꺼낸 적은 없다. 공회의 이름이란 그야 말로 신앙의 세계 안에서도 가장 깊은 세계를 논할 때 사용하지 세상 그런 밥그릇 문제나 땅 따먹기 분쟁에는 굳이 그 이름을 던지기가 아깝다.

이런 바탕이 몇 개 모여 지면 이 노선의 교회와 이 연구소와 부산공회3이라는 세계가 형성이 된다. 최근 두어 명이 고소하고 십여 명이 달라 붙어 고소 동의를 하거나 법정 증언을 통해 나를 매장하려고 사력을 다한다. 이런 긴 이야기를 법원이나 사법기관이 들어 줄 시간도 없고 관심도 없다. 다 이야기를 하면 모두 은혜를 받고 훈장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이방인이며 나그네로 지나 가고 있다. 복음을 바르게 잡고 나가려면 이 땅 위에서는 잡범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아니면 이단의 괴수가 된다. 이 세상의 법과 이 세계를 모르는 말로 나를 비판한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러나 지금 설명하는 이런 세계가 근본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뒤집어 씌우는 모든 것은 바위 위에 모래 먼지 쌓이는 정도다. 그냥 바람 불면 그만이다. 남을 것도 없다.

(교계를 상대로 사용 된 경우)
초등학교 때 성경을 가르친 분은 차영배 김의환 한철하 교수와 고신의 예과를 함께 했던 분이다. 고등학교 때 성경을 가르친 분은 총신대 부총장을 지냈고 교회사로 합동 교단에서 정평 있는 분이다. 그 분들과의 개인 이야기들이 많다. 여기서는 생략한다. 초등학생과 고교생 때 교계의 신학계 인물들과 직접 부딪힐 일이 있었다. 돌과 쇠가 부딪혀 보면, 구리와 금을 달아 보면 금방 가치 평가가 나온다. 그 때는 몰랐지만 나는 그 때의 충돌을 통해 공회의 보배성을 평생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긴 이야기가 필요가 없다. 그 때 사례를 간단히 소개하면 공회에 대한 비판은 바로 멈춘다.

거창고 졸업 40년이 넘던 어느 날 거창읍 어느 병원에 병문안을 갔다. 입원실에 들어 오던 거창고의 평생 주인이 날 보자 먼저 알아 보고 인사를 한다. 그는 이 나라 '교육의 현장'과 '교육의 지성'으로 언론에 수없이 나온 인물이다. 고신 대학병원의 설립자 전영창, 그의 역사가 된 거창고, SFC... 고신이 역사를 따지다 보면 늘 고개를 숙이는 이름들이다. 고신 인물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또 그런 식이 된다. SFC의 창설과 진행 과정, 고신대 복음병원의 창설과 진행 과정, 거창고를 둔 국내 진보 최고의 실력체와 고신의 접촉을 공회의 시각으로 보면, 백영희 신앙노선과 그 역사를 가지고 보면 간단 명료하다. 공회 내는 물론 교계적으로도 아마 이런 면에 대한 시야를 가진 인물은 따로 없는 듯하다. 현재 근무하는 신풍교회가 애양원과 손양원의 관계 때문에 교계적인 인물들을 한 번씩 만난다. 그럴 때마다 교계의 흔한 두 대립적 시각만 알고 대화하는 상대방에게 공회적 시각으로 대화를 시작하면 누구든지 상대방은 내게 듣는 입장이라야 한다. 이미 설명을 많이 했지만 내가 공부를 한 사람인가? 공부가 되는 사람인가? 그냥 일반 수준이다. 그런데 이 노선 때문에 특별한 역사와 접한 것이 있다. 그래서 내가 상대하는 이 분야에서는 나는 나만의 독보적인 위치가 있다.

이 노선의 모든 분들이 자기를 다시 살펴 보고 연구를 하되, 자기의 위치와 사명과 장단점을 면밀히 따져 본다면 나와는 다를지라도 각자 자기에게는 내가 가진 나의 입장처럼 그런 입장들을 가졌다고 본다. 그런데 자기를 알아 보지 못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특별한 장점이며 사명을 너무 쉽게 팔거나 잊거나 버린 것으로 보인다. 백 목사님 사후 대구공회가 일반 교회들의 행태를 추종할 때 이런 생각 때문에 참 안타까웠다. 그 다음에는 부산공회들이다. 마지막에는 부공3 우리 내부들이다. 세상에! 자신이 가진 특별한 위치가 어느 정도인데, 화가 난다고 밥상도 아니라 역사를 걷어 차다니. 자존심 때문에. 또는 평소 대구공회 식으로 했으면 하는 것이 막혔다고 대구공회는 30년 전에 했고 그 결과도 뻔히 좋지 않은 줄 알면서 또 따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부하며 겪은 것, 모두 자기 분야에 그렇지 않았을까?)
고교 입학 때 영어 수학 2과목을 1문제도 풀지 못하고 찍기만 했다. 그런데 입학 성적은 성적 장학생 바로 뒤 성적이었다.
이런 현상은 고교 3년을 계속 이어 갔다. 학교는 사관학교보다 엄했고 전체 상위권 10명은 최고의 학교로 진학을 했다.
나의 성적은 그들 중에 있었다. 영어 수학 2과목을 포기한 상태에서? 그래서 가깝게 아는 친구들은 천재인 줄 안다.
나의 평소 학습과 성적은 너무나 다르게 나온 경우가 많아서 나는 평생 공부 문제를 두고는 부풀려 살아 왔다.
나는 2류대에 넣기 애매한 건국대 동아대 법학과를 거쳤다. 교회 직원이어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설교 때도 언급이 되었다.그러나 지금까지 내 주변에서는 나를 서울대 법학과 수석 출신으로 안다. 설명을 해봐야 더 겸손하다고 생각하니 그냥 둔다.
대학교 3, 4학년을 거의 출석한 적이 없다. 벽돌 지는 노동현장과 국제시장 리어카 장사를 하며 영도 끝까지 돌아 다녔다.
그런데 졸업 때 수석이었다. 알고 보니 1학년 때 37학점이 49학점이 되면서 12학점이 학적과 책상에서 그냥 보태졌다.
당시 실험대학 제도 때문에 발생한 과도기 현상이었다. 1학년 49학점이 평균 A였다. 이후 성적에 상관 없이 다른 학생이 따라 올 수 없는 성적이었다. 이런 현상은 늘 따라 다녔다.

실제 열심히 공부하고 학습력이 좋은 학생들이 이런 내막은 모르고 말하다 보니 보통 학생인데 자꾸 천재 소리를 들었다.
반사를 하느라고 신청만 하고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과목이 A+가 나왔다. 그 과목은 눈을 감고 기도하면서
'주님, 친구들이 제가 반사 때문에 학기 내내 빠진 줄 압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방해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라고 했다.
기도 중에 문제가 보였고 그 문제 하나만 준비하여 최고 성적이 나왔다. 이런 시험이 한둘 아니었다.
교회와 노동과 장사 현장만 쫓아 다녔으니 낙제가 아니면 좋겠다 했는데 그렇게 되었고 졸업 때 수석이라며 신문에 나왔다.
공부의 내막을 모르는 서부교회와 총공회, 그리고 공부를 알아도 사연을 모르는 이들 사이에서 자꾸만 머리 탓이 나온다.
나는 집안적으로 공부와 아주 거리가 먼 출신이다. 이 노선에 미쳐 날뛴 이들은 각자 자기 분야에서 그런 경험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있는 줄 모르고 재수 좋아 그렇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뭐나 된 줄 알고 교만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그런 줄도 자각하지 못하고 산다. 나는 내 경험이 뚜렷하기 때문에 이 노선의 사람을 접할 때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특별한 점을 평생 눈여겨 보며 살았다. 그렇게 하다 보니 이렇게 평가하는 눈이 자꾸 밝아지면서 적지 않은 분들이 과거와 다르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다. 이 곳에 적지 못할 사례라 너무 많다. 구 게시판 한두 사례를 자세히 적은 적이 있었다.

공회에는 역사적으로 타고 난 천재와 엄청난 집안의 출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천적이다. 이 노선에 필요하여 외부에서 좋은 인재를 만들어 놓았다가 이 곳으로 끌어 왔다. 이 노선 내의 원래 인물들은 대부분 나처럼 천출이다. 그런데 이 노선에 쓰시려고 귀중품을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공회 범위에서 사람을 접할 때는 다른 곳에서 귀하게 만든 다음에 공회 내로 데려 온 사람과 별 볼 일도 없는 공회 내의 천한 사람을 아주 귀하게 만드신다는 확신이 있다. 통계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그렇다.

1982년 10월 5일, 나는 당시 국내 3대 회사로 분류되던 대우그룹에 대졸 사원의 합격 통지서를 받고 백 목사님께 편집실 직원으로 출근하고 싶다고 했다. 목사님은 6개월을 지켜 보신 뒤 1984년 4월에 미국 유학 준비를 하라시며 '토플 시험'을 치라 했다. '토플'이라는 말이 대학생의 영어 교재 이름인 줄 알았지 유학 시험인 줄 몰랐다. 목사님께 그 단어를 들었다. 목사님께 공회 목회자는 영어가 필요 없고 중학교 1학년 영어실력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준비조차 하지 못한다고 했다. 목사님은 그냥 해 봐라 하셨고 당시 교회 내에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2년 후배를 찾아 갔다. 영어 단어 몇 개를 짚으며 무슨 뜻이냐고 묻는데 gardener를 못 알아 봤다. 한숨을 내 쉬며 이 정도면 어떻게 지도를 해 드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이미 550점을 넘겼고, 뒤에 유펜 생물학과로 갔다. 아무 책이나 한 권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아카데미 토플이 그래도 쉬운 책이라고 했다. 그 책을 들고 그 날부터 무조건 읽었다. 서부교회 2층에 있던 편집실에서 직원들 틈에 혼자 공부했다. 5월부터 시작했고 매달 25점 정도 정확하게 성적이 올라가며 12월에 527점이 나왔다. 그리고 1월과 2월에도 527점이 나왔다. 목사님은 너의 한계가 왔으니 일단 미국 가서 마저 550점을 채우고 신학교로 가면 된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만 나온 백 목사님이 세부 지도를 해서 유학을 보낸 것이다. 이 과정을 지켜 본 서윤호 목사는 서영호 목사 동생이다. 그는 한국교계에 이름 있는 학자들의 유학과정을 남 달리 지켜 봤고 그의 기억은 컴퓨터 수준이다. 총신대와 서영호 목사까지 다 비교를 해도 너는 천재다. 아니면 하나님이 그냥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성적표에 원하는 점수를 그냥 적어 주셨다. 그래서 미국을 갔다. 눈과 귀는 멀었고 성적표만 들고.

안양에 살던 김성렬 집사님, 백 목사님 사후 대구공회와 분쟁이 막 끝나고 조금 조용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 1976년 사직동교회에서 1년을 함께 하며 평생 떨어 져 있어도 늘 형제처럼 지냈다. 지난 날 안부를 묻다 보니 한의사가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만 나왔는데. 대뜸 설교록의 효력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로 말을 끊고, 이런저런 이야기지요? 질문을 드렸다. 그리고 둘은 서로 말하지 않았다. 서로 분야만 다르지 서로 그런 세계를 봤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고신 교회로 갔고 그 곳에서 학원을 하다 한 번은 연구소에 들린 적이 있다. '설교록의 효력으로 말하면....' 학원을 경영하면서 주일학교 반사 시절에 체질화가 되었던 심방을 조금 흉내를 냈고 그 때문에 큰 돈을 벌고 사업이 호황이었다. 혼자 감격해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표현을 다하지는 못하겠고 그 좋은 세계를 우리에게 말을 해야 하니 더듬었다. 그 때도 내가 공부하며 겪었던 세계를 조금 말했다. 이런 것이지요? 그러했다.

이런 세계를 본 사람.
유럽이 유럽만 전부인 줄 알았다가 인디언 뛰 놀던 아메리카 대륙을 우습게 여기고 죄인이나 3류 인간만 간다고 알던 시절,

아무나 갈 수 있고
아무나 할 수가 있는데
아직은 그 세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

이런 때에 황금의 기회는 알아 차린 사람은 혼자 독식을 한다. 훗날 역사가들은 혼자 몰래 먹었다고 욕을 한다.
그러면 그렇게 욕하는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가치를 알면서 원주민의 생활권을 존중해서 가지 않았던가?

이 노선과 교훈을 1989년부터 필생의 사업으로 전력을 하자고 출발한 곳이 이 연구소다.
이 연구소가 교회를 하나씩 세우면서 교회는 예배당 건물에 목사가 월급을 받고 교인들이 설교를 들으려 모이는 곳이라면 서울에 수만 개, 전국에 수도 없는 교회들이 있으니 있는 교회를 다니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 교회들이 모르는 것, 그래서 우리가 알려야 한다면 우리는 그 교회들을 교회답게 만드는 소리 없는 목회자요 우리 단체는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했다. 그리고 이 더 귀하고 어려운 교회를 위해 눈에 보이는 교회를 하나씩 개척해 가자고 했다. 보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교회다. 교회의 절대권은 보이지 않는 교회에만 해당 된다. 보이는 교회에는 해당이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가 거의 대부분이다.

지금 서부교회가 교회인가? 시청에 교회로 이름이 올라 있기 때문에 교회다. 기독교 사회가 교회라고 부르니 교회다.
그 교회 목사 장로가 목사 장로인가? 시무투표라는 공회 노선에서 보며 그 교회 목사 장로를 목사 장로로 보는 무리도 있고 목사 장로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부공3은 아니라고 본다. 서부교회를 교회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교회'라고 페인트 간판이 붙었으니 그 곳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고 그 서부교회 위에는 어떤 지시도 할 수 없고 올라 갈 수 없는가? 그렇다면 서부교회 현재 교권 측의 교인일 것이다. 교회의 자유권, 절대권, 그 위에 주님 외에 누구도 올라 갈 수 없고 연구소도 올라 갈 수 없는 교회가 되려면 그 교회는

조직신학의 교회론의 교회라야 한다.
그 교회는 늘 주님이 머리라야 한다. 그런 교회가 역사에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그 교회의 설교는 늘 진리랴야 한다.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백영희 서부교회 설교도 정죄를 받아야 한다.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었다. 서부교회 백영희 설교가 주님을 머리로 삼고 그 설교가 진리에 맞을 바로 그 순간은 교회다. 그렇지 않을 때는 눈에 보이기에 교회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교회보다 워낙 좋게 보이기 때문에 그냥 늘 옳다고 그렇게 넘어갈 뿐이다. 따지고 들어 가려면 눈에 보이는 교회는 교리가 말하는 교회가 아니다. 조직신학의 기본이 아닌가?

더 따지고 들어 가면
개척을 할 때 그 교회 목회자와 교인들만이 경제부터 모든 것을 독립했어야 교회로 출발이 된 것이다. 개척 때 신세 진 돈도 아직 갚지 않은 교회가 있다면 이런 교회는 독립 독자 절대라는 교회론의 교회 권리를 입에 담을 수 없다. 외상부터 갚고, 그리고 나서 교회를 논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너무 먹고 남을 돌아 보지 않아서 뒤탈이 난다. 좌파들은 남의 돈을 제 돈처럼 쓴다. 내놓으라고 한다. 그렇게 써면서 인사도 없다. 거지는 얻어 먹고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는데, 거지만도 못하다. 이런 인간은 생물학적 인간이지 경제적 도덕적 인격적 인간은 되지 못한다.

연구소만 백영희 설교를 전했다. 실제 그런가? 모두가 전했다. 모르는 이들에게 자부심으로 가르치려 들었다.
지금 그 설교의 세상 법적 주인이라는 분들이 고소를 했다. 왜 이 연구소만 고소를 받고 처벌을 받는가? 다른 사람들은 그 세상 법적 주인이라는 분들에게 승인을 받았는가? 전하지 않았거나, 전하더라도 조금만 전하여 미미했거나, 전하기는 하지만 전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거나, 심지어 전해놓고 전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거짓말을 했거나, 참으로 안타깝지만 고소하는 이들의 목표를 파악하고 고소하는 쪽과 원수가 되니 '적의 적은 친구'라는 세상 전법에 따라 지금 용서를 받고 있거나... 다른 사례는 생략하겠다.

서울대 어느 교수처럼 평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쉽다.
그 말을 가지고 자기를 상대해 봐야 비로소 그 말이 말인가 헛말인가, 나쁜 말인가, 쳐 죽일 말인가 알 수 있다.
지금 좌파 쪽이 되어 평양만 오로지 좋아하는 쪽은 그 교수가 무조건 좋다고 난리다. 지금 우파 쪽에서는 무조건 잡아 누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우리는 이런 곳을 세상이라면서 물 건너 불구경하듯 보면서 우리를 돌아 본다. 우리는 누군가? 우리는 과거 뭐라고 했나? 우리는 과거 어떻게 했나?

나는 1989년 8월 27일 이후 대구공회 사람들을 향해 늘 하나만 주로 말을 했다.
백 목사님 생전에 재독할 때, 그 때 왜 죄라고 하지 않았나?
백 목사님 생전에 공회 찬송을 할 때, 그 때 왜 통일찬송가를 주장하지 않았나?
백 목사님 생전에 교회가 남여 학생을 섞지 말라 할 때, 그 때 왜 섞지 않는 것이 맞다고 했나?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대구공회의 핵심 중에 김명재 목사님 한 분만 양심가다. 그 분은 백 목사님 생전에 구미시에서 개척교회를 하는 초창기여서 지금 몰려 오는 어린 교인들 때문에 지금은 찬송가나 남여 학생의 분리 원칙을 공회 전체 기준에 다 맞추지 못합니다. 나중에 교회가 자리를 잡고 나면 그 때 목회적으로 공회의 이 옳고 좋은 길에 다 맞추겠습니다. 그 때까지 시간을 좀 기다려 주시라고 했다. 그 분은 그 때 목사님 앞에서 직접 말을 했다. 그래서 그 분은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을지라로 아직 늦어 지고 있다. 내가 좀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이 노선에 대한 가치는 누구보다 잘 알고 또 외치는 어른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1989.8.27.까지는 누가 찬송가를 바꾸려고 드느냐고 눈을 부라리며 난리였다. 그 날 이후 이제는 바꿔야 한다면 또 난리였다. 내가 왜 입장이 바뀌었냐고 묻자 궁색한 논리를 하나 개발했다.

연구소가 찬송가를 만들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총공회를 깨는 나쁜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 분은 한 가지 이유를 더 들었다. 설교록을 사지 않는 이유는 백태영 목사가 대구공회라 해서 연구소가 부산공회를 편들려고 설교록에 백태영 목사 칭찬하는 부분을 뺐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그 설교록을 직접 보자고 했다. 실제 백태영 목사를 칭찬하는 부분이 빠져 있었다. 나는 다시 출판정보가 있는 제일 뒷페이지를 가리켰다. 인쇄일이 언제냐고? 그 책에 그 내용이 빠진 것은 백 목사님 생전이었다. 백 목사님 생전에 설교록 편집은 토씨 하나도 목사님의 승인 사항이다. 또한 백태영 목사 부부만 뺀 것이 아니다. 광고라든지 몇 가지 일괄적으로 편집을 하는 기준에 해당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한이 없다.
이런 대화를 하는 과정에 상대방이 말이 막히면 마지막에 하는 말이 있다.
'수석 졸업을 해서 머리가 좋은데 나쁜 짓만 하고 말만 잘해서 빠져 나간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두 번 한 것이 자랑스럽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공부와 글에 대해 그토록 체질이 맞지 않고 싫었던 과거 학창 시절이 감사했다.

나는 백영희 설교를 접하면서 글에 재미를 붙였다. 그 글 외에는 머리가 아프다. 싫다. 그래서 읽지를 않는다. 내가 세상 다른 책이나 신학서를 읽는다면 설교록의 내용을 확인해야 하거나 뭔가 설교록과 이해관계가 걸렸을 때뿐이다. 다른 분들이 그 많은 세상 학문이 머리속에 들어 있다 보니 이 노선에 대한 대화가 진행 되면 속에 든 것이 많아서 기억이나 활용에 차질이 많다고 본다. 나는 내 속에 이 노선에 대한 것만 들어 있으니 뽑아 쓸 때 별로 불편이 없다. 신도범 목사님이 1976년 사직동교회에서 반사회를 하면서 한 마디 한 것이 내게 심겨 졌다. '부산 백 목사님이 늘 그러신다. 젊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멍청이가 되어 이렇게 기억도 하지 못하는가? 쓸 데 없는 것을 머리 속에 많이 넣어 놓아서 그렇다'

---------------------------------
연구소 공용 자료에서 옮기는 과정에 글에 일부는 옮기는 서기가 1인칭으로 서술한 곳이 있습니다. 또 여러 자료의 여러 글을 모으다 보니 좀 흐름이 어지럽기도 합니다. 알아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앞으로 공회 역사 차원에서 그리고 향후 우리의 갈 길에 참고를 위해 개인 글을 계속 올립니다. 이 글에 관심이 많고 개별적으로 토론과 질문이 많아서 다행입니다. 중간에 내용 정리나 사실관계의 수정이 있을 때는 제목에 따로 표시하고 어느 부분인지 따로 적어서 편리하게 재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글에는 실명만 있었으나 최근 여러 문제로 익명 처리를 많이 했습니다. - 담당
전체 3

  • 2019-09-14 02:02
    "그 글 외에는 머리가 아프다. 싫다. 그래서 잃지를 않는다. 내가 세상 다른 책이나 신학서를 잃는다면 설교록의 내용을 확인해야 하거나 뭔가 설교록과 이해관계가 걸렸을 때뿐이다." '읽지를', '읽는다면...'으로 하면 어떨까 싶네요? 소개해 주시는 진솔한 내용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드리며....

  • 2019-09-14 06:33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누가 봐도 오자니 너그럽게 넘어 가는 분도 있지만 일단 누구 눈에든 일단 읽는 흐름을 끊게 됩니다. 그래서 지적해 주시는 분을 저희는 더욱 감사하게 받습니다. 중요한 오자면 따로 공지하지만 이 정도는 공지 없이 수정합니다.

    • 2019-09-17 03:33
      감사합니다. 위 제 글도 삭제를 부탁드립니다.

전체 122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
이용 안내문
담당 | 2018.04.11 | 추천 0 | 조회 745
담당 2018.04.11 0 745
1196
사후 30년을 돌아 보며 - 연구소의 역사적 고찰
서기 | 2019.09.07 | 추천 0 | 조회 136
서기 2019.09.07 0 136
1197
(1) 이 노선을 위해 특별히 예비 된 우리
서기 | 2019.09.07 | 추천 0 | 조회 177
서기 2019.09.07 0 177
1199
(2) 한 사람의 사례로, 각자 자기를 살펴 보셨으면
서기 | 2019.09.08 | 추천 0 | 조회 226
서기 2019.09.08 0 226
1231
(3) 백영희의 학습 세계, 나의 과거를 돌아 본다. (3)
서기 | 2019.09.11 | 추천 0 | 조회 191
서기 2019.09.11 0 191
1236
(4) 백영희 설교의 자료화, 1948년의 의미 (1)
서기 | 2019.09.14 | 추천 0 | 조회 117
서기 2019.09.14 0 117
1237
(5) 공회의 '선교관'
서기 | 2019.09.15 | 추천 0 | 조회 108
서기 2019.09.15 0 108
1261
(6) 모이면 썩고 흩어지면 사는, 진리의 세계
서기 | 2019.09.17 | 추천 0 | 조회 107
서기 2019.09.17 0 107
1306
New (7) 우리는 못났다. 그러나 자라 가면 된다.
서기 | 2019.09.20 | 추천 0 | 조회 19
서기 2019.09.20 0 19
1192
변치 않는 사명, 변하는 사명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70
담당 2019.09.07 0 70
1193
다윗의 전쟁, 그 모든 향방은 '성전' 건축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68
담당 2019.09.07 0 68
1147
다윗의 성전 준비로 본 연구소의 사명
담당 | 2019.08.30 | 추천 0 | 조회 147
담당 2019.08.30 0 147
1194
훌륭한 지도자의 당대와 후대
담당 | 2019.09.07 | 추천 0 | 조회 96
담당 2019.09.07 0 96
1146
압살롬과 시므이 (1)
담당 | 2019.08.30 | 추천 0 | 조회 129
담당 2019.08.30 0 129
1276
New 세상의 어느 장관, 공회의 어느 장관
담당 | 2019.09.18 | 추천 0 | 조회 114
담당 2019.09.18 0 114
1131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고 퍼뜨리니 오늘까지..
담당 | 2019.08.24 | 추천 0 | 조회 134
담당 2019.08.24 0 134
1125
이론적 양심가들의 불장난과 시대의 균형추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191
담당 2019.08.21 0 191
1133
최악의 좌익이, 정상적 우익으로 - 안병직으로 본 공회 (1)
회원 | 2019.08.25 | 추천 0 | 조회 205
회원 2019.08.25 0 205
1124
고정 생활의 농경식과 이동 생활의 목축식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88
담당 2019.08.21 0 88
1123
매년제와 집회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110
담당 2019.08.21 0 110
1122
세상의 셈법, 신앙의 셈법 - 손익을 기준으로
담당 | 2019.08.21 | 추천 0 | 조회 121
담당 2019.08.21 0 121
1113
공회의 '실행'론, 이 노선의 희망
담당 | 2019.08.18 | 추천 0 | 조회 169
담당 2019.08.18 0 169
1111
'조국 후보' 논쟁 - 공회만이 아는 국가적 이야기들 (2)
담당 | 2019.08.17 | 추천 0 | 조회 341
담당 2019.08.17 0 341
1092
비밀글 부공1의 대구 기도원 철거와 집회 탈선 역사 (부공2측 공개 발언) (1)
부공2 | 2019.08.11 | 추천 0 | 조회 14
부공2 2019.08.11 0 14
1081
지명과 역사 - 백영희
담당 | 2019.08.03 | 추천 0 | 조회 249
담당 2019.08.03 0 249
1073
돌아 본 1992년 12월의 궤변
담당 | 2019.07.28 | 추천 0 | 조회 253
담당 2019.07.28 0 253
1061
부공2의 들쥐 망동 (3)
담당 | 2019.07.19 | 추천 0 | 조회 502
담당 2019.07.19 0 502
1063
89년 총공회의 희극과 비극, 2019년의 반복, 目死 > 牧死
담당 | 2019.07.21 | 추천 0 | 조회 367
담당 2019.07.21 0 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