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오늘, 이 노선에서 본 현실

어려운 시대 - 전도와 기도를 중심으로

작성자
담당
작성일
2021.06.04
(악화 되는 세상)
아담의 타락 후 노아 때까지의 수명은 1천년에 근접했었다. 세월 속에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창6:5에서 세상을 물로 대청소를 해 버렸다. 주님이 오실 때는 단12:4에서 사람의 왕래가 빨라 지며 지식이 더해 진다고 했다. 죄악이 더욱 차고 넘치며 가속화가 된다. 노아 때는 죄악이 땅에만 가득했다면 말세에는 죄악이 하늘에까지 관영하게 된다. 노아 때 '땅'이라 하심은 인간끼리 살아 가며 짓는 이 세상적인 죄를 주로 말한다. 말세에는 하늘까지 불 태운다는 하늘은 하나님을 향한 교회의 신앙까지 죄악화가 될 것인데 신앙의 세계는 물이 아니라 불로 태운다고 했다. 그 내용과 성격이 다른 차원이다.


(주어 지는 기회)
신앙의 사람들이 '도고일장 道高一長, 마고일장 魔高一長'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이전의 한국 교회에는 흔하게 사용을 했다. 말씀이 높아 지면 귀신의 유혹도 높아 지더라는 것이다. 처음 믿을 때는 술을 마실까 끊을까 망설이지만 회계 집사가 되면 교회 돈을 어떻게 해 볼까 라는 유혹이 따라 온다. 목사가 되면 그 수준이 높아서 일반인은 눈 뜨고도 당한다. 말세가 될수록 죄악이 더 강해 지고 높아 지는 것은 필연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에게 주신 신앙은 생명인데 생명은 자라는 것이 본질이다. 우리를 길러 가면 악령은 우리를 인도하는 도가 높아 질수록 더 높은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예전에는 죽인다고 위협을 했다. 지금은 성경을 너무 믿지 말라며 성경은 인간의 작품이라고 설득을 한다. 죽기가 두려워 주님을 부인할 때는 속으로 자기 신앙이 약했음을 뻔히 안다. 겉으로는 죄를 짓지만 속으로는 양심이 찔린다. 그리고 해방이 되고 나면 뜨겁게 회개하며 다음을 준비한다. 그래서 악령이 우리의 목숨과 세상 살아 가는 외부를 박해하면 우선은 쉬운데 속으로는 더 손해를 보는 줄 안다. 그래서 어릴 때나 급할 때는 외부로 박해 하지만 악령은 우리 내면을 늘 허물려고 한다. 성경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면 겉으로는 열심 교인이고 속으로는 무너 져 내린다. 오늘의 상황이 그렇다.

그런데 이런 말세가 되면 외부 환경은 얼마든지 믿을 수 있도록 되지만 내면의 투쟁이 심해 지는데 제대로 잘 믿는 사람은 외부의 좋은 환경까지 이용해서 내면 신앙이 더 강해 질 수도 있다. 바로 이렇게 진행이 되어 지면서 과거와는 그 모습이 전혀 다른 형태의 시험과 환란이 온다. 실제로는 그 악령이 그 죄를 짓게 하는데, 겉으로는 모습이 달라 보일 뿐이다. 기독교가 선진국화 되면서 나타 나는 현상 중에 '전도'와 '기도'의 문제가 있다. 선교 초기에는 사방이 박해를 하는데 어둠 속에 등불을 치켜 들면 마구 빛이 퍼진다. 시대적으로 선교의 기회는 빛만 비추면 된다. 공회는 주일학교 전도의 경험이 있다.

사회가 미개할 때는 배가 고프고 이름 모를 병에 속수무책으로 식구들이 죽어 나가니 열정적으로 기도를 한다. 먹여 주시고! 살려 주시고! 낫게 해 주시고! 이런 탄압을 끝내 주시라! 기도의 제목이 또렷하다. 눈 앞에 죽을 지경이 펼쳐 지니 믿는 사람으로서는 별별 기도를 알아서 한다. 그런데 이런 기도의 시기가 지나며 이제 그 사회까지 넉넉하게 만들어 오늘 한국처럼 먹고 입고 살고 안전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부족함이 없게 되면 이제 기도를 어떻게 할지 문제가 생긴다. 과거 기도는 목표가 뚜렷했다. 적이 뚜렷했고 가야 할 고지가 눈에 보였다. 기도의 시간도 열정도 마구 쏟을 수가 있었다. 사람이 약하니 그렇다.



(오늘의 전도, 오늘의 기도)
전도지를 들고 또 스피커를 들고 골목마다 집집마다 방문하는 전도는 오늘도 필요하다. 소음 때문에 막으면 목 소리를 줄이면 된다. 광장의 공공성 때문에 막으면 광장 아닌 곳으로 가면 된다. 때리면 맞고 쫓아 내면 쫒기며 전도하는 것이 이 땅 위에서 교회가 하는 일이다. 교회에게 세상 운영권인 칼을 주지 않고 오히려 세상 집권자들에게 하나님이 칼을 주셨다고 했다. 그러니 세상 집권자는 전도가 싫어 온갖 기회를 통해 박해를 하고 우리는 맞으며 피하며 기회를 보며 전도를 한다. 역사 6천 년이 늘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은 전도를 받지 못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는 도를 이미 아는데 믿기 싫어 믿지 않는다.

오늘의 기도도 생존 본능에 위협을 느껴 기도하던 상황이 이제는 거의 없다. 그러니 철야 기도, 금식 기도, 통성 기도, 어떤 기도까지도 저절로 전부 사라 지고 있다. 전도하는 사람이 사라 지는 것과 같다. 시대가 그렇다고 전도의 내용과 기도의 실제까지 함게 사라 지면 세상에게 삼켰다. 모양은 다르고 방법은 다르고 내용은 다를 수 있어도 전도와 기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야 변치 않는 신앙이다. 이 것이 속화 타락을 하지 않는 신앙이다. 오늘의 전도는 말씀으로 사는 나의 생활과 행위와 나 자체가 전도라야 하는 시대이다. 벤츠를 사라고 광고를 하는 방법도 있다. 주변에 굴러 다니는 벤츠 자체가 광고가 된다.

믿는 사람을 접하는 사람이 전도라는 말을 따로 듣지 않아도 '비판' '대처' '판단' '행동' '생활' '경제' '소망' '절망' '대처'를 비교하면서 우리를 통해 진리를 알아 가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에 끌려 진다면 이 것이 무서운 전도다. 기도 역시 마6:7에서 말을 많이 하여야 듣는 줄 알고 중언부언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의 기도라 했는데 이방인의 기도란 중의 염불이며 미신의 주문이 된다. 어릴 때는 주님이 일단 들어 주신다. 우리를 기르는 방법이다.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게 되면 6:6의 골방기도가 되어야 한다. 왜 이런 현실을 주셨을까, 이 시간에는 무엇을 원하실까, 그 뜻을 찾고 그 뜻을 알게 되면 그 때 구할 것을 강하게 구해야 한다.

이렇게 기도를 하려다 보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구하게 되고 아는 것은 설교 시간에 또는 성경을 읽으며 또는 아는 말씀을 마음에 좀 새겨 봐야 하나씩 알아 지게 된다. 말씀을 접하면서 마음이 하나씩 깨치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남이 보면 성경을 읽거나 연구하거나 설교를 듣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말씀과 기도, 깨달음과 간구라는 것은 이분법으로 나눌 수가 없는 하나이다. 알아 가면서 그 것이 깨달아 져 가면서, 그 속에 후회가 있고 결심이 서고 각오를 하는 작용이 복잡하게 진행이 되는 것, 그 전체가 기도이다. 지금 너무 좋아 진 때, 어떤 것도 더 이상 달라고 구할 것이 없는 지금, 오늘의 기도는 말씀과 기도가 함께 할 때다.

그렇다면 설교 시간 내내 기도가 함께 하고, 출퇴근 길에 그 날에 기억할 말씀 또는 그 순간에 특별히 생각할 말씀, 그 말씀에 대한 연구와 묵상과 새김이 기도와 어울려야 한다. 밥과 반찬을 나누어 진열하는 것이 전통식 밥상이다. 모두를 잘 비벼 놓으면, 한 술의 입에 함께 들어 간다. 밥만 먹고 반찬을 따로 먹는 식이 아니다. 비빔은 보통 어지러움이거나 적절한 타협이거나 무분별한 속화를 말한다. 그렇게 나쁘게만 쓸 것은 없다. 때로는 사랑과 책망이 함께 할 때가 있다. 아이가 자라 가면서 점점 이런 현상이 더 많아 져야 한다. 부부도 그렇다. 교회와 신앙도 그렇다. 말씀과 기도가 함께 하며 찬송까지 하나 되는 세계를 접하면,


찬송을 할 때 그 찬송의 가사 속에 담긴 교리 때문에 말씀 때문에 내용 때문에 겉으로는 곡을 따라 화음만 맞추지만 그 화음이 주는 감성 안에 지성이 깊어 지는 만큼 형언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가 펼쳐 진다. 설교 때 진리는 분량이 많으나 찬송 때 깨닫는 진리는 깊이 깊이 꽃아 진다. 그리고 설교를 들을 때 그 말씀이 맞고 찬동이 되고 감동이 되면 설교 시간에 혼자 찬송을 부를 수는 없으나 마음 깊이 우러 나는 찬송적 감사를 입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막는 만큼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내 속에 감동은 한 없이 더 깊어 진다. 찬송에 기도를 담아 찬송을 해 보았는가? 찬송을 말씀으로 해 봤는가? 설교를 들으며 기도와 찬송을 해 보셨을까?

외부 환경을 역사적으로 이렇게 넘치게 주신 적은 없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오늘은 말씀과 찬송과 기도가 과거 예배처럼 순서적으로 구별을 하기는 하지만 그 순서 하나하나가 항상 3면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 삼위일체를 교리 학자들은 오로지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만 집중하고 연구한다. 삼위일체를 사람의 영과 마음과 몸에 적용하려 들면 바로 이단으로 딱지를 떼려고 혈안이 된다. 예배는 찬송 기도 말씀이다. 이 3가지가 하나 된 예배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는 방법인데 하나님 주신 방법으로 그 은혜를 받다 보면 자꾸 삼위일체를 닮게 되지 않을까? 예배를 삼위일체적인 은혜로 대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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