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오늘, 이 노선에서 본 현실

엎드려 기도할 뿐, 은혜 아니고는 안 되는 기도 제목

작성자
담당
작성일
2021.04.28
(성령론, 조직신학에서의 위치)

최근 공회의 교리 정립 과정에서 성령론을 주력하여 살피고 있다.
교리사를 통해 삼위일체와 성부와 성자는 '신론, 기독론, 구원론'을 중심으로 넘칠 정도로 정밀하게 정리 되어 있다. 반면 '성령론'은 교리화 또는 조직신학 차원에서 본다면 미조직 미정리 상태다. 그래서 더욱 발표가 많아 어지럽다. 오늘 정통 교파의 교리가 '계시론, 신론, 인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말세론' 등을 마치 공식처럼 열거하고 있지만 성령론은 들어 갈 곳이 별로 없다. 계시론에서 성경의 기록에 역사한 성령, 신론의 삼위일체에 일부, 교회론에서도 곳곳에 잠깐 섞여 나오거나 스며 든 정도로 보인다. 이렇게 된 배경은 교리사의 발전을 시대적으로 살펴 보면 바로 그 답이 나온다. 이제 이 시대에 주어 진 과제기 때문이다.



(성령론, 오순절의 역사를 통해)

성령론은 삼위일체에 포함 되어 있으니 하나님의 자존과 목적과 창조와 구약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어디 한 곳에도 빠질 수는 없다. 그런데 구약이 성부의 시대라고 한다면 구약 끝에 오시고 신약을 준비한 초림은 성자의 시대라 해야 하겠다. 그리고 사도행정 2장 1절의 성령 역사는 신약 전체를 성령의 시대라고 적기에 주저 하지 않아도 될 기록이다. 존재적 성령이 아니라 역사적 성령을 제대로 살피려면 사도행전 2장 1절이 중심에 설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그 때부터 오늘까지 내내 우리 안으로 들어 오신 하나님의 충만으로 살펴 볼 사안이다. 성부가 없던 시대가 없고 성부의 외롭게 어디 계신 적도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 중 우리 보기에 우리 알기에 우리 느끼기에 어느 분이 전면에 계신지를 두고는 시대 별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순서를 적어 볼 수 있다.

성부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 하나님의 세계는 영계와 우주에 충만하지만 구약도 오늘도 우리와 거리가 너무 멀다. 성부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안이 어두워 그렇다. 아이가 어머니의 수고는 느끼고 알지만 아버지의 집 밖에 수고는 잘 모르는 것과 같다. 성자 하나님, 대속의 예수님, 이 성자의 수고는 우리가 중생 되기 전에 이미 완성을 하셨고 오늘은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에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대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지만 부활 직후에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하물며 승천 후 주님을 우리가 느끼고 인지하는 것은 더욱 거리가 멀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내 마음에 오셔서 내 양심 내 욕심 내 지식 내 감정을 뒤흔들어 버리시니 상대적으로 우리가 느끼기 쉽다. 그리고 성령은 웬만한 교인이면 자기 속에 넣고 다닌다는 분도 있고 집에 계신 부모님 정도로 생각하면서 남들에게 소개도 하고 친한 사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처음 믿는 분들, 특히 순복음 계통의 분들, 열정적인 분들, 경건한 분들일수록 더욱 그런 현상이 또렷하다. 그런 분들과 대할 때마다 나는 그 분들이 모신 성령을 만나 뵌 적도 없어 마치 남의 집 부친처럼 그렇게 남처럼 된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면 성령이 한 성령이므로 그들이 뵌 성령과 내가 뵌 성령을 맞춰 보면 나다나엘이 요한복음 2장48절에서 주님과 얼굴로는 처음 뵈었지만 성령으로 서로 뵌 적이 있어 바로 알아 본 것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내가 읽은 성경이 맞다면 내게 와서 성령을 소개한 분들의 대개는 뭔가 잘못 뵌 분들인 듯하다. 그런데 한 번씩 정말 반갑게 인사하는 경우도 있다. 마치 외국의 어느 뒷 골목에서 만난 사람이 건너 편 마을에 살았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서로 맞춰 보면 착착 다 맞아 떨어 진다. 이런 경우는 상대방이 출신과 고향과 성장 과정을 속이는지 아닌지 조사할 것도 없다. 성령의 역사도 그러하다.




(성령의 역사, 내 인격 다 할 때)
사도행전 2장 1절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시작한다. 1장 3절에서는 십자가에서 해 받으신 유월절 40일 동안 제자들이 주님의 사활을 직접 봤고 또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일을 직접 배운 기록이 있다. 생전과 달리 십자가를 거친 후기 때문에 정말 제대로 배웠고 부활의 실체를 봤다. 그 실체가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 살다가 죽으면 부활할 때의 자신들이다. 이 40일의 배울 기회를 다시 주신 것은 제자들로서는 살아 생전 자기들에게 주어 진 기회 전부였다. 그리고 주님은 4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하시고 9절에서 저들을 떠났다. 이제 성령이 오셔야 되는데 언제 오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자들은 인간으로 전력을 해도 인간으로 할 수 없는 환경에 내 몰렸다. 오로지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주님 가신 후의 자신들을 붙들어 주셔야 했다. 14절에서 '전혀' 기도에 힘을 썼다. 세상과 우연과 인간의 노력으로 될 수 없는 지경이다. 인간 자기를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에도 기댈 여지가 없다. 15절에 모인 무리 전부가 자기를 정말 다 비워 버렸을 때, 모인 무리가 자신들을 다 비움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오실 수 있도록 만들고 계셨다.


오늘도 인간으로서, 성도로서,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우리 할 일을 정말 제대로 다 하고 나면 비로서 하나 큰 것을 얻는다. 인간으로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 보인다. 우연으로도 어떤 세상으로도 되는 길이 없음을 비로소 제대로 알게 된다. 이 때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 자기로서 인간으로서는 안 되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야 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 절감도 내가 생각할 때 절감하는 그 정도의 절감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볼 때 이제 됐다 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하나님께서 됐다 하는 때가 되면 우리는 자기가 노력도 해 봤고 그리고 아무리 둘러 봐도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는 정말 안 된다고 속으로부터 변치 않을 마음이 우러 날 때 바로 이 때가 성령이 정말 비어 있는 내 마음에, 정말 비워 놓은 내 마음에 자유롭게 오실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이 내 마음을 사도행정 2장 1절 이하처럼 장악하고 원하는 역사를 할 수 있다.


집회를 준비하면서 공회인으로 연구소를 통해 그 동안 살핀 말씀으로만 본다면 집회의 말씀을 연경처럼 공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듣는 사람이 세상의 강의가 아니라 성령이 그 마음을 흔들어 아주 바꿔 놓아야 하는데 이 것은 강사의 설득력이나 말 재주나 다채로운 행사로 해결할 수 없다. 공회 외에는 모인 모든 분들을 강사의 실력으로 장악하여 강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지도하는 분들이 많다. 공회는 그런 실력이 있다 해도 설교에는 사용하지 않게 되어 있다. 철저히 자기 부정만이 성령의 역사에 방해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 실제 그렇게 노력을 한다. 그런데 신앙도 별로고 실력도 별로다 보니 공회 집회는 그냥 그저 그런 정도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은 공회의 집회가 그저 그렇다 해도 다른 교회는 공회처럼 집회를 한다면 아무 개최 자체도 하지 못할 듯하다. 바로 이 정도를 백 목사님 사후의 오늘 우리의 수준이라고 아쉽게 생각할 뿐이다.



(정말,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은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 성장

①건강 : 사고 없이 자라가고 - 아이의 사고는 부모를 향한 주님의 음성
②인격 : 주변에 물들지 않고 - 아이의 곁길은 부모에게 주신 기도 제목
③신앙 : 말씀에 마음을 열고 - 말씀의 귀는 전적 주님의 은혜로만 열림


* 정착

①부부 : 결혼과 가정 가지고 - 20세 결혼으로 허망한 인생 낭비를 막고
②경제 : 근검 절약하여 살고 - 먹고 입으면 충분하니 경제에 염려 말 것
③충성 : 신앙 생활 잘 할 것 - 세상 최소화로 신앙의 최대화를 노력하고


* 교회

①은혜 : 교회와 교인 평안을 - 교회와 교인 평안은 은혜 외에 길이 없음
②성장 : 모일 때마다 더하고 - 생명과 교회는 자라며 강해 가야 하는 것
③사명 : 이 노선이 전해지게 - 내가 걸어 보고 좋은 길이니 최대한 소개




이렇게 요약을 해 봤다. 자세하게 적으면 좋겠지만 이 곳에서 '남단'을 찾는 분들은 요약한 글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을까..


한 아이가 사고 없이 자라 가는 것. 장애자가 되지 않고 성년이 되는 것.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전적 은혜 아니고는 안 된다.
한 아이가 성인이 되는 과정에 오늘 같은 세상에 주변 환경에 휩쓸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은혜라야 한다.
한 아이가 자라 가면서 공회의 이 말씀 이런 설교에 귀를 열고 마음이 열린다면 이 것은 행2:1의 성령 역사 아니고 가능할까?

오늘 같은 세상에 20세에 결혼하여 부부가 30세에 4명의 자녀를 주일학교로 보낸다면, 이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까?
오늘은, 열심히 산 후에 버는 돈은 아무리 저소득이라도 조선의 임금보다 더 잘 먹고 사는 세상이니 이 것이 은혜가 아닐까?
오늘은 모두에게 이런 환경이 제공 되고 있으니 세상은 줄이고 하늘을 향해 더욱 노력하려 한다면 전적 은혜가 아닐까?

가족조차 밀어 내고 자기만 돌 보는 세상에 교회와 교인의 평안을 구한다면 이는 인간이 노력해서 가질 마음은 아닐 듯하다.
이런 교인이 모인 교회, 그 교회에 신앙이 유지 되고 교인이 유지 되거나 늘어 나간다면 인간의 노력의 결과는 아닐 듯하다.
공회는 이렇다. 이렇게 걸어 왔다. 이렇게 가려 한다. 그리고 이 것이 좋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성령의 방언이라고 생각한다.



집회를 준비하며
예전에는 덕유산 험한 산에 맹수로부터 지켜 달라고 기도 했다. 이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 때문에 기도하고 있다.
맹수는 피할 방책이라도 있는데 코로나는 너무 작아 쉽게 생각했으나 이 것은 막을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기도할 뿐이다.

세월이 악하다 하셨고 갈수록 심할 것이라 했는데 이제 우리 공회 우리 집회 안에까지 그런 면이 스며 드는 모습을 본다.
무엇으로 막겠는가? 기도할 뿐이다. 그냥 기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길이 없으니 긍휼히 여겨 달라 할 뿐이다.



역대하 14장 11절에서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이 말씀을 이렇게 강하게 읽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절실히 느껴 본 적이 없다.
한 아이가 무사히 자라는 것도, 세상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신앙에 눈을 뜨는 것도....
이 아이가 신앙의 가정을 이루고, 경제를 초월하고, 신앙에 매진하는 것도...
그리고 교회와 교인의 평안을 기도하는 것도, 이런 교회가 성장을 하는 것도, 그리고 이 곳에서 이 사명을 맡는 것도........

인간으로서 일단 최선을 다하되
그 최선, 그 충성, 그 끝에서
주님 앞에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며 은혜를 구할 뿐이다. '긍휼을 베풀어 주시라'고...
그리고 돌아 보니 내가 지난 날 철이 들며 신앙 생활을 하고 말씀으로 기뻐하던 그 시절, 나는 이런 세계를 몰랐었다.
그런데 나를 지도하던 분들, 나를 위해 기도하던 분들, 또 이 노선의 지도자는 나를 위해 전체를 위해 이렇게 빌었었다.
전체 2

  • 2021-04-28 18:16
    죄와 마귀와 사망은 인간이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이길 수 없는 강한 자다. 대하14:11로 기도할 뿐이다.
    성령이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는 약한 자니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우리다. 대하14:11로 기도할 뿐이다.

    이 말세 우리 환경은 역사 이래 가장 어두운 때다. 말세지 말인 오늘은 분명히 강한 자고 우리는 약한 자다.
    어느 교회든 우리 공회 교회든 지금 아이들 지금 청소년과 청년들은 강한 자다. 부모가 이길 수가 없다.

    더 강하신 성령의 은혜를 구할 뿐이다.

  • 2021-04-29 21:46
    염려되는 부분을 살펴 주셨습니다. 기도로 힘써 돕겠습니다. 기도로.

전체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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