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41) 1980년, 다시 시작한 주일학교 - 2

작성자
담당
작성일
2020.02.03
(공회의 전도법)
1980년대는 한국교회의 초대형교회 부흥사로 기록 된다. 세계 최대의 교회들이 한국에서 연이어 등장한다.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교회들은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순복음교회 등이다. 교세들이 크다. 그 모든 교파들의 세계 최대 교회들은 모두 한국에 있다. 세계 최대 교회들이 줄줄이 들어 선 시기는 1980년대다. 전도의 방법들이 난무했다. 총동원주일, 달란트선교, 이슬비전도, 태신자전도, 셀목회, 열린교회, 제자교육? 등으로 그 이름도 헤아릴 수 없이 나왔다. 이 노선, 서부교회를 중심으로 한 공회의 전도법은 자기 집과 예배당에서 한 골목씩 일일이 찾아 가서 전하는 것으로 전부다. 어떤 방법도 없다. 그냥 자연발생적이며 생활 속에 한 걸음씩 딛는 것이다. 이 것도 이름을 붙이려면 가능하겠지만 상표화가 싫어서 붙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냥 서부교회식이라고 되었다. 역사적으로 모를 수 없고, 어떤 교회든 그렇게 해 보지 않은 교회는 없다. 그런데 너무 쉽고 간단하고 초보적이어서 모두가 특별한 프로그램을 찾아 개발을 했고 곳곳에서 개발에 성공한 소식이 이어 졌다. 공회는 그런 식은 성공을 하면 교회가 탈선 속화가 된다고 봤다. 또 그런 성공이 지속적이 아니라 족제비 기웃거리듯 어느 한 곳의 어느 한 때만 해당이 되니 다른 교회에게는 공연히 헛 일이 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백 목사님 생전인데도 80년대가 들어서자 각가지 교계의 전도법을 공회 안에 적용하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그 때마다 목사님은 방법론적 의견은 전부 눌렀다. 한 사람이 잘 믿으려고 노력하고, 주님과 하나 된 것만큼 붙여 주신다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기회 되는 대로 주변 한 사람씩 붙들고 예수님 믿고 천국 가자는 말 한 마디만 하자는 것이 전부다. 서부교회 주일학교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동네, 그런 골목에 들어 가면 아이들이 떼로 몰려 온다. 이미 다른 반사가 쓸고 간 곳은 교회를 가자 해도 시큰둥하다. 그래서 부산 전역으로 600명 반사와 400명 보조 반사들은 발길을 넓혔다. 1977년 1년간 반사를 할 때 매주 2천명 출석이 매주 3천명으로 올라 갔다. 3년 후 1980년 7월에 제대를 하고 나오니 매주 평균 8천명까지 올라 갔다. 모든 반사들은 부산 어디를 가도 몇십 명에서 1-200명은 그냥 데리고 나올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쳤고 또 실제 그러했다. 군대를 갈 때 3천명을 육박하던 교회가 8천명을 넘어 서고 있으니 나는 많이 뒤떨어 진 느낌을 받았다.

(예배당 앞 골목)
입대 전에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이 벌써 주력에 서 있었다. 불과 3년만에 나도 서열이 중간쯤 될 만큼 보였다. 8월 집회를 다녀 오고 새로 반를 시작했다. 이 번에도 또 예배당 앞 골목에서 시작했다. 1977년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시작했다. 이 번에는 잘 안다. 휴가 때마다 서부교회 4층으로 옮겨진 청년방에 있다가 갔기 때문에 추이를 안다. 청년방은 연고 없이 백 목사님을 찾아 온 청년들에게 교회에서 20분 걸어야 하는 대티고개라는 언덕에 불법 건축물에 방 몇 칸을 마련하여 그 곳에서 자취를 하며 살아 갈 발판을 마련하게 했다. 그런데 70년대 말에 전국의 산속에 불법 기도원 사찰 암자를 일제 철거 시키며 없어 졌고, 1970년 서부교회 본당을 3층으로 지은 후 1975년 양성원을 만들기 위해 4층을 올리면서 그 제일 중심에 방 한 칸을 청년방처럼 사용하게 했다. 서윤호 유종환 그리고 내가 마지막 있다가 없어 졌다. 휴가 때마다 주일학교 동향을 알았기 때문에 제대 후 예배당 골목에서는 전도가 될 수 없음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교록에서 읽고 또 백 목사님이 가르치는 전도의 순서를 알기 때문에 골목 앞에서 시작을 했다.

반사 600명, 보조반사 400명, 교인 대부분이 걸어서 교회를 다니려고 예배당 주변에 모여 살다 보니 서부교회 주변에는 방이 비지 않는다. 주일학생 전도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 줄 알면서 또 골목 앞에서 전도하고 발이 닿는 대로 간다는 원칙으로 반사를 시작했다. 한 주간 노동 현장에 갔고 토요일에는 오전만 일하고 오후 2시경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고 출발을 한다. 첫 골목에 나가니 몇 명 아이가 있다. 다니겠지만 그래도 물어 봤다. 다니지 않는다. 집을 물으니 예배당에 붙어 있는 세탁소 아이다. 그 집 앞에 일식당 아이다. 교회가 있는 통반에 통장집 반장집 아이들이다. 또 세탁소 옆의 약국에서 왼쪽 골목이 서부교회 다음 골목인데 이 곳은 갈비집 고급식당가다. 이 곳에 아이들이 모두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었다. 예배당 앞 골목이 비어 있었다. 바로 이 곳에서 10여 명 이상의 아이들을 데려 올 수 있었다. 이 곳의 10명이면 멀리서 차에 태워 오는 100명보다 낫다. 반사를 해 본 사람들은 안다. 모두가 주변은 다 교회를 다닌다고 생각을 해서 멀리 멀리 나갈 때 단숨에 어린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교회 앞에서 놀고 있으니 모두들 교회를 다니거나 격렬하게 교회를 반대하는 가정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보수동, 대청동)
그리고 그 다음 골목으로 이어 가다 보니 보수동 대청동에서 학생들을 모을 수 있었다. 1978년 2월에 입대하던 바로 그 전 주일에 전도했던 분이 보수동의 조카들을 소개해서 3명이 나왔다. 지금까지 30년 넘게 연구소와 부공3의 기둥이 된 장천룡 장현주 장기웅 가정이다. 이들의 자녀는 15명이고 5명이 결혼을 해서 손주들이 벌써 8명을 넘어 서고 있다. 모두가 4-5명을 기본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다른 전도법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 그대신 주변을 전도하고 그 이전에 내가 일찍 결혼하고 내가 힘대로 아이를 낳아 나의 아이들을 먼저 교회에 앉힌다. 부산공회3은 그렇게 시작했고 오늘까지 이어 지고 있다. 이렇게 되지 않은 교회들은 부공3 안에서도 저절로 일반교회화로 진행 된다. 내가 하지 않고 남에게 하라 하지 않는다. 내가 해 보고 좋고, 내가 해보고 힘이 들지만 해야 할 일일 때 남에게 부탁한다. 그러다 보면 발전은 늦지만 생명의 역사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보수동과 대청동에서 아이들이 교회를 나오면서 이제 1년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세월이 가게 되자 아이들의 부모들이 지켜 보다 교회를 출석한다. 이미 다니던 동네를 그냥 두고 지나가지 않고 계속 이어 가다 보니 영주동, 초량, 수정까지 발이 닿았다. 아이들과 함께 장년반 전도가 이어 지고 있었다. 3학년에 복학 하면서는 노동현장을 다니고 장사를 했기 때문에 학교 갈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어떻게 알게 된 친구가 한 명씩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가정의 식구들이 대거 교회를 나오면서 나는 150개 장년반 구역 중에서 20등까지 올라 갔다.

(성탄절, 1981년?)
멀리서 오는 학생과 함께 예배당 가장 가까운 주변의 학생들은 단연 나의 반이다. 멀리서 오는 학생들의 형색은 참 가난했지만 예배당 주변 학생들은 보통이거나 식당집 아이들은 한 눈에 잘 사는 표시가 났다. 아마 80년은 아닐 것 같고 다음 해로 기억이 되는데 성탄절이 다가 오자 어머니들이 성탄절 행사를 보러 오겠다 한다. 서부교회의 성탄절 행사는 멀리서 오는 학생들은 평일의 연습에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믿는 집 학생들이 중심인데, 나의 반은 주변이기 때문에 강단에 올라 가는 순서를 맡는다. 아이들이 성탄 공연의 무대에 선다니 그 큰 교회 그 많은 학생들 앞에서... 어머니들은 교회를 모르니 일반적으로 생각을 한 것이다. 서부교회와 골목 하나를 두고 건너편에 있는 화랑초등학교가 전교생 2천명이다. 서부교회는 8천명이다. 초등학교 4개 전교생을 한 자리에 앉혀 놓는 규모의 성탄 행사에 아이가 무대에 선다니 시립 회관의 무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직 1층은 마루바닥이었다. 모두가 신발주머니를 하나씩 받고 들어 온다. 겨울이니 못 살아도 옷은 두텁게 입는다. 난리통이 된다. 1층은 천장도 낮고 강단도 50cm 높이나 될까, 아이들이 빽빽하지만 앉기만 하면 무대를 볼 수나 있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서기 시작하면 중간 쯤에서부터는 앞이 보이지도 않는다. 유아, 저학년, 고학년, 찬송 암송 합주는 한 번에 50명에서 100명이 기본이다. 시끄럽고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장내를 압도하려면 순서를 위해 올라 갈 때 행진곡 찬송을 크게 부르며 올라 간다. 또 발표 찬송도 은은하게 은혜로운 찬송을 아름답게 하는 방식은 꿈을 꿀 수 없다. 소리가 높고 빨라야 행사에 집중이 된다.


성탄절이 되자 어머니들이 4-5명? 오셨다. 밍크 코트를 입고 한껏 잘 차려 입었다. 이제 이 모습을 보고 나면 다시는 아이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다. 출입구 정문으로 들어오면 강단을 볼 수도 없고 안으로 들어 올 수도 없다. 그래서 옆문을 가르쳐 드렸다. 들어 서자 바로 벽에 붙었고, 발 디딜 틈이 없는 그 혼란에 부자집 사모님들의 잘 차려 입은 모습은 모두에게 참으로 이상했고, 그 분들은 눈만 껌뻑거리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단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한 곳에 몰려 있는 광경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 아이들의 수준은 1.4후퇴의 흥남철수 화면에서나 짐작할 정도였다.

다행히, 다음 주일에도 아이들을 보내 주셨다. 너무 놀라서 냉정하게 비판하지 못했을 듯하다. 종교 교육을 하는 곳이면 일반 학교보다는 뭔가 엄숙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갈비집을 하는 고급 식당가의 주인들은 교회를 다녀 본 분들이 없었다. 그래서 아마 그 날 본 모습이 처음이니 교회는 그런가 보다 라고 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 많은 아이들 중에 자기 아이들이 순서를 맡아 강단에 올랐으니 그 사실만은 괜찮지 않았을까? 워낙 표시 난 관객이 되어 두고 두고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 속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내가 대견했다. 모든 반사들이 교회로부터 가장 먼 곳을 달려 가고 있을 때, 나는 예배당 앞 골목을 다녔다. 나 혼자만. 아무도 가지 않는 등잔 밑, 발 밑. 혼자 달려서 혼자 1등을 했다. 나는 지금도 서부교회의 반사 생활을 돌아 보면 1등이라고 생각한다. 출석 숫자는 300명을 넘겼던 장영목 선생님이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을 통해 장년반이 전도 된 숫자는 나보다 훨씬 적다. 그리고 그들이 훗날 공회의 중심 교인으로 또는 목회자로 이어 진 숫자는 더 적다. 그보다 예배당에서 가까운 거리로 따져 전도하고 출석 시킨 숫자는 단연 많다.

어떻게 이렇게 대견하게 반사 생활을 했을까? 설교를 들으며 그 설교에 담겨 진 그대로 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모두들 어디로 가야 한다. 어떤 식이라야 한다는 등등의 방법론은 귀에 담아 본 적이 없다. 그냥 백 목사님께 교회에서 배우고 들은 대로 했을 뿐이다. 가장 쉬운 방법, 가장 간단한 방법, 가장 가까운 방법, 아무나 하면 다 할 수 있는 방법. 특별한 것이 없고 남 다를 것도 없고 따로 준비해야 할 것도 없는 방법. 이 것을 신앙의 '보편성' '일반성' '자연성'이라고 한다. 훗날 신풍교회를 목회하면서도 또 부산공회3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전도지의 디지인, 교회의 외형, 예배 때의 순서나 강단의 표현, 교회 운영에 직분과 행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공회의 방법인 그냥 그대로 할 뿐이다.

백 목사님 생전에 이미 공회 목회자들은 각종 부흥법 전도법을 밖에서 배우자고 했다. 목사님 사후가 되자 다른 공회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 지금 서부교회는 색스폰을 불고 솜사탕을 주며 프래카드를 걸고 골목에서 칼가는 봉사도 한다. 80년대에 이미 다 지나 간 방법들이다. 늦게 배운 도둑,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 방법을 몰라서 하지 않았든가? 해서 안 된다고 해서 하지 않았었다. 너무 오래 하지 않다 보니까 서부교회 안에서만 자란 이들은 수십 년 전에 유행하고 없어 진 방법을 마치 처음 개발한 사람들처럼 환호를 한다. 교회는 점점 침체를 하는데 그런 방법론이 들어 교회의 내부를 속화 타락을 시킨다. 이 것이 백 목사님의 탄식이었고 경고였다.


(방법론적 기독교)
나 역시 그들 중에 하나일 뻔했다. 나도 어린 시절, 그리고 자라가는 과정에 공회의 답답한 운영은 내 마음을 갑갑하게 만들어 도무지 교회를 튀쳐 나가지 않을 수 없도록 눌렀다. 공회가 싫었다. 그런데 샛별초등학교와 거창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그들이 한국 교계에서는 가장 잘 나가는 첨단의 방법론을 사용했다. 학교장이 LA 오렌지 카운티의 로벝크 슐러 목사님과 신학교에서 기숙사 룸메이트다. 학교 건물을 짓도록 늘 그 분이 도왔다. 5분 면담을 하려면 몇 달 전에 예약이 필요한데 아무나 만나 주지도 않는다는 그 분이 이 학교만 방문할 목적으로 거창까지 온 적이 있다. 그 교회를 통해 미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선교 방법, 학생들을 신앙으로 기른다는 별별 방법을 학교가 소개했다. 나는 그런 환경을 어릴 때부터 접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결과를 보면 학생들을 남녀 이성 교제나 하게 만들고 교회와 신앙을 예술화 시킬 뿐인데 신앙이 있는 학생들조차 교회와 신앙을 놀이 대상으로 삼게 만드는 것을 잘 봤다. 그래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게 하는 방법으로서는 몰라도 교회의 신앙을 바르게 길러 가는 면에서는 백해무익임을 체험했었다.

바로 이런 경험에다 백 목사님의 전도법, 신앙의 발전법은 그 학교와 정반대였고 나는 철이 들며 양쪽을 비교할 수 있고 성경이나 신앙의 본질적으로 이 노선 이 방법이 맞다고 판단을 했다. 실제 비교 판단을 했기 때문에 마치 북한에서 실제 살다가 남한에 온 사람은 진보니 좌익이니 종복을 추종할 리가 없고, 북한을 말로만 듣고 자기 생각으로 꾸며 본 강남의 좌파들은 오늘도 종북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 1977년 서부교회에 간 이후 1989년 목사님 돌아 가실 때까지 나는 신앙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다. 교회는 그 어떤 방법이든 방법을 사용하는 만큼 세상을 닮아 가는 속화일로뿐이고, 교회와 신앙의 본질은 없어 지며, 그 진전 속도는 가속의 원리가 적용이 되어 몇 번을 하고 나면 그 속에 너무 깊이 들어 가게 되어 빠져 나오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지금도 1977년 기준으로 나와 함께 열심을 다했던 분들, 이후 목사님 장례 때까지 죽어도 이 노선을 절대 변치 말자고 앞장을 섰던 분들, 심지어 나를 기르고 지도했던 60년대 50년대의 이 노선 1세대 2세대들을 돌아 본다. 전도와 신앙의 방법론을 두고 다른 교회를 뒤쫓아 바꾸고 변동 시키지 않은 곳들이 있는가? 나 알기에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나를 대견하게 본다. 훌륭해서가 아니라 낭떠러지에 줄줄이 뛰어 내리는데 나는 뛰어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 목사님 생전, 딱 그대로만 하자고 그토록 소리를 높이며 각목으로 전국을 휩쓸던 '백영희 생전 그대로 파'가 서부교회 4층이며 현재 부공1과 부공4다. 이들이 입장을 바꾼 것은 너무 오래 되어 이제 그들조차 돌아 올 길도 잃어 버렸을 듯하다. 공회 기준으로 보면 미아다. 영구 미아. 나는 1등이 많다. 그 1등은 여럿이 달리면서 실력이 좋아서 1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서 쪽으로 모두 달리는데 나는 동 쪽으로 달렸고, 혼자 달려서 혼자니 1등이 되었다. 대부분이 그렇고. 그리고 여러 사람이 함께 달리는데 1등을 한 것은 하나님께서 훗날의 경력으로 쓰도록, 그리고 나를 격려하느라고 누가 봐도 알 수 있도록 그냥 들어서 갖다 놓은 것이다. 그래서 1등 기록은 많으나 나를 자랑할 것은 없고 나를 가르친, 내가 배운, 백영희라는 이름이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백영희 연구' '백영희 신앙노선' '백영희 목회연구소'라는 간판을 대법원이 전과자로 만들면서 폐쇄를 시킬 때까지는 고함을 질렀다. 왜 이렇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가? 공회 내에서. 왜 모든 공회들과 심지어 이 연구소 이 부공3 내에서까지 '백영희' 이름을 묻어 버리자는데 협조를 하는가? 어떤 이들은 공회를 좌익으로 만들려다 막히니까 그러는 이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주일에 출근을 해야 하는 자기 입장을 변호하려다 보니까 그러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은 이 노선 그대로 믿고 나가려다 보면 교회의 부흥이 어렵고 목회자에게 십자가가 많고 교인들은 요즘 살아 가는 분위기로 살기가 어려워 진다. 그래서 '백영희' 이름을 파묻는데 앞에서 고소하고 뒤에서 협조하는 것이 아닐까? 그 이유 외에 다른 이유가 있으면, 그 누구라도 나를 좀 가르쳐 주면 좋겠다. 나를 좀 깨우쳐 주면 좋겠다. 내가 학습력과 두뇌와 모든 실력이 어중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면 방향을 바꾼다. 바꾸고 나면 배신하거나 중도에 입장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를 가르치는 사람이 없다. 수백 건의 고소를 8년째 당하고 있지만, 경찰 법원 검찰에다 내 욕만 퍼붓고 있지, 교회 내에서는 그 누구도 나와 조용히 그리고 사실 관계를 놓고 성경으로 신앙으로 공회로 백영희 설교로 살피자는 사람은 없다. 왜? 그들은 안다. 한 자리에 앉아 모두가 보는 가운데 '고소가 좋은 것이냐'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숨을 곳이 없을 것이다. 그 대신 경찰 검찰 법원에 가서 이런 말을 하면 그들은 고소란 기독교인에게도 마땅히 해야 할 권리라고 말해 준다. 법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그래도 그 사법기관의 인물들이 자기 아이들끼리 싸우다가 고소를 하려고 하면 아마 목숨 걸고 말리지 않을까? 그런데 가는 것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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