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40)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하고 대견한 일들 - 1

작성자
담당
작성일
2020.02.01
하나님이 만든 만물 중 장점 없는 것은 없다.
어떤 못난 사람도 하나님은 의미 없이 만들지 않았다. 뒤지고 또 뒤져 보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남 다른 장점이 있다.

어느 날 생각하지도 않게 받은 하늘의 은혜,
보통 기적이고 능력이라고 표현하는 그런 면을 여러 글에서 몇 가지 예를 들었다.
이런 글들을 적으면서 나는 정말 나의 노력으로 만들어 가진 것은 없는지 잠깐 돌아 본다. 그래도 있지 않을까? 몇 가지 있다.
평생을 되돌아 보면서 참 못나고 부족한 중에도 나 스스로 대견하여 칭찬해 주고 싶은 대목이 몇 가지 있었다.
이 문제들은 주님이 위에서 은혜를 주지 않고 숨어 계셨다. 내게 완전히 맡겨 버렸다. 나를 연단하고 싶어 그랬을 것이다.

1. 노동의 첫 세계. 오로지 버텼다.

(노동의 첫 현장)
1977년 3월에 서부교회를 와서 뒷 자리에 앉아 전체를 살펴 봤다. 굉장했다. 특히 남반에는 나처럼 소망을 가지고, 나보다 먼저 서부교회에 왔거나 서부교회에서 자란 선배들이 얼른 살펴도 150여명 정도로 보였다. 나보다 이렇게 아득히 앞서 달리고 있으니 따라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그 많은 무리의 제일 뒤에라도 앉게 된 것, 그 것이 감사했다. 그 큰 교회에 대학생이 없기야 할까!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있어서 표시를 낼 분위기가 아니다. 그 대신에 노동 현장을 뛰는 청년들은 눈과 발과 어깨에 힘이 들어 갔다. 기세가 등등했다. 강단에서는 '땀을 흘려야 사람이 된다. 노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인간도 아니다' 이런 말씀이 계속 되고 있었고 '대학을 가? 귀신들! 귀신에게 잡혀 쓸 데 없는 것을 배우느라고... 교만한 것들!' 이런 식이다. 그러니 대학생이 몇몇 있는 듯한데 모두 고개를 숙이고 다닌다. 수요일 금요일 저녁 예배를 오는 청년들은 노동 현장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작업복을 갈아 입지도 못하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려 온다. 그들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그들은 백 목사님의 수제자들로 자처했다.

1학기 내도록 부러웠다. 그리고 7월 초 방학이 되자 노동 현장을 1년 전에 와서 먼저 거친 친구에게 대략 물어 보고 기말고사가 끝나는 주간의 다음 월요일에 바로 노동 현장을 가려고 했다. 요즘과 달리 대학생은 굶는 것은 해도 노동 현장을 가는 개념은 없을 때다. 식당이나 어디 아르바이트 활동을 하지 않을 때다. 친구는 서부교회에 벽돌 미장 철근 목수... 노동 현장을 다니는 사람들을 주욱 열거하며 그 쪽으로 부탁하면 된다고 했다. 친구는 최근 건설경기가 좋지 않아 일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내가 부탁하면 교인들 중에 써 줄 사람들이 누구누구일 것이라고 귀뜸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고 내가 일할 자리를 찾고 싶었다.

주일을 지났고, 월요일 새벽에 예배가 끝나자 나는 눈을 뜨고 목사님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 노동 현장에 가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나는 나의 중요한 결정은 꼭 보고를 하든 지도를 받았다. 다른 날보다 일찍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듯 서두르는 모습이다. 예배 후 목사님께 여쭐 일이 있으면 예배당 중간의 옆문 밖에서 기다렸는데 이 날은 너무 빨리 나오시는 바람에 예배당 복도에서 급하게 목사님께 간단히 보고만 드리고 싶었다. 복도를 빠르게 걸어 나가는 목사님이 앞에 다른 사람에게 막혀 조금 주춤했다.

(백 목사님의 노동에 대한 지도)
'목사님, 방학입니다. 노동을 해 보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고 새벽예배 직후라 아직도 좌석에 교인들이 대부분 앉아 있는 상태에서 바로 말씀을 시작했다. '노동을 간다면, 월급제 시간제로 계산하는 회사 노동자로 일하지 마라. 사람 버린다. 시간만 떼우면 돈을 주는 그런 곳에 가면 못쓴다. 돈내기(떼맡기는 실적급) 하는 데 가서 일을 해라. 내가 일본에서 일을 할 때 삽으로 흙을 퍼올리는 현장에서 일을 했는데 조금 하다 보니까 내 손바닥의 가죽이 삽자루에 엉켜 붙어 버렸다. 몸집이 따라 가지 않는 사람은 시도도 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흙을 퍼 던저야 한다' 말씀을 하며 높이를 가리켰다. 서부교회 2층의 본당에는 중간에 허리 부분을 다닐 수 있도록 복도가 있다. 5미터 높이는 된다. '그리고 하루도 빼지 말고 일을 해야 한다. 비가 와서 대마찌(쉬는 날)가 나면 맨 땅이라도 파고 묻고 반복하면서 6일간 계속을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오늘부터 현장에 나간다고 보고만 하려 했는데 목사님은 심각하게 설명을 하며 한 마디 한 마디 아주 심각하게 주의를 줬다. 이 날 이렇게 강조하는 목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노동을 거쳤다고 평생 떠들면서 속으로는 고비를 넘기지 못한 실패자의 자기 변명만 했을 뻔했다. 7시에 현장에서는 일을 시작한다. 그래서 6시 30분까지 아침 밥을 먹고 도시락을 싼 다음에 일단 서부교회와 생활거리인 영주터널을 벗어 났다. 이 때느 내가 하숙을 할 때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공사판은 단 1곳도 빠지지 않고 들어 갔다. '여기 사람 씁니까?' '여기 인부 필요해요?' 어떤 현장이든 보이는 대로 무조건 들어 갔다. 몇 곳은 사람이 없거나 사람이 필요 없다고 한다. 10곳을 채우지 못해서 한 곳에서 '오늘은 일이 없고 내일 오라'고 한다. 기뻤다. 일단 1곳을 잡았다. 그러나 이 곳이 내일 나를 쓸 지는 모른다. 이왕 나왔으니 몇 곳을 더 잡아 놓고 그 중에 가장 확실한 곳을 고르고 싶었다. 동시에 친구가 요즘은 일이 없어서 아는 사람 소개가 아니면 일자리가 없다는 경험자의 말에 나는 나대로 실제 살펴 보고 싶었다. 착하게 자란 사람이 아니어서 누구 말이든 말을 말로 듣지 않는 편이다. 한참 더 나가다 보니까 부산역으로 가는 대로를 막 넘어 서자 큰 공사판이 보였다.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 쓰느냐 물으니 아주 마르고 작아 보이는 분이 지게를 지라 한다.

(부산역 옆의 대형 건물)
아마 100여평? 5층 건축물인데 골조만 끝냈고 벽돌을 쌓는 일이 막 시작이 되었다. 나를 쓰겠다는 사람은 벽돌을 쌓는 사람들에게 도로 변에 쌓여 있는 벽돌을 올려다 주는 일만 한다. 고운방, 곰방이라고 불렀다. 높은 곳으로 옮긴다는 뜻이다. 벽돌 1개는 2kg, 판대기에 벨트로 된 끈만 매여 있다. 4층과 5층은 40개 80kg가 기본이다. 2-3층은 50개 100kg가 보통이다. 1층은 아예 뛰어 다니는 정도다. 나는 51kg 정도로 무척 마른 편이다. 중학교 들어 가면서 위가 탈이 났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식사가 불규칙적이었고, 또 먹을 때는 급했다. 여기에다 중학교 1학년 때 급성관절염을 앓으며 박트림이라는 독한 약을 먹었는데 이 때 위장을 버렸고 이후 조절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평생 김치조차 먹지 못하는 정도로 살았다. 그리고 고관절은 이 때부터 나의 40대 젊은 날까지 항상 무리하면 바로 통증이 왔다. 이 때문에 군에도 가지 못할 줄 알았다. 공부만 했고 엉치 관절에 통증도 좀 있으며 위염 때문에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태에서 멋 모르고 바로 일을 시작한 곳이 곰방, 80kg를 지고 저녁 7시까지 계속 짐만 지는 일을 했다. 시내 광복동 양화점에서 구두 일을 배우는 비슷한 청년 3명이 먼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친구들이었고 여름이라 구두점에 일이 없어 나왔다고 했다.

1시간쯤 일을 하니까 1명이 지게를 던지고 가버렸다. 입은 옷차림부터 그렇게 보였다. 오전이 끝나자 돈도 싫다며 또 1명이 가버렸다. 나와 1명이 그 날을 끝까지 일을 했다. 그 친구는 그 날 돈을 받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은 내가 노동을 한 뒤에 알았다. 나는 오로지 백 목사님께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일을 끝냈다. 돌아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하다가 고관절이 나가 버리면 평생 어떻게 될까? 온 몸이 쑤시고 아팠다. 하루 종일 짐을 지면서 '죄의 값'을 체험했다. 한 번 지은 죄로 얼굴에 땀이 흘러야 하는 일이 6천년 자자손손 계속 된 면을 새기고 새기고 새겼다. 1년 전에남한산성 문무대의 유격 훈련은 이 노동과 비교를 해 보니 놀이 동산이다. 집에 돌아 오자 바로 엎어 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새벽기도를 일어 나지 못했던 것같다. 눈을 뜨고 급하게 일을 가려고 하자 하숙집 밥 해 주는 주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어제 밤새 앓았다면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일을 간다고 했다. 죽을려고 하느냐고 말렸다. 하루만 가고 포기한다면 내가 목사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정말 목사님이 지켜 본다는 사실만 아니면 첫 날도 점심 때가 한계였고 바로 돌아 왔을 것이다. 적어도 며칠은 하고 그리고 나서 정말 관절이나 허리에 병원 갈 문제가 생기면 그 때 보고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3일 안에는 나는 병원을 갈 줄 알았다. 그런데 3일을 채웠다. 그리고 1주일을 채웠다. 이 때만큼 인생을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그 1주일이 오늘까지 내 인생에 제일 힘들었던 때다. 군생활 3년에도 없었고, 제대 후 노동을 다시 했지만 그 때는 이미 몸이 좀 익어 져 있었기 때문에 달랐다. 1977년 7월은 여름의 태양 빛 아래 한 번도 일해 보지 않고 공부만 했던 학생이 하필 노동 중에 제일 강도가 센 곳을 만나 버렸다. 보통 벽돌을 나르는 사람들은 벽돌을 나르면서 기술자들이 벽돌로 쌓을 때 옆에서 세멘을 물에 이기기도 하고 벽돌을 주워 올리기도 한다. 나는 오로지 짐을 져서 나르기만 하는 오야지(현장 두목)을 만나 그 일만 했다. 회사 잡부는 시간만 때우면 된다. 하루 1,500원을 받는다. 우리는 2,500원을 받는다. 노동 강도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런데 벽돌 쌓는 사람 옆에서 세멘을 이겨 주고 심부름 하는 사람들은 일이 우리보다 훨씬 쉽고 돈은 같다. 기술자들이야 2배를 받는다. 기술과 일자리에 따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잘 체험했다.

나는 돈을 써보지는 못해도 공부와 생활에 필수적인 돈은 집에서 받아 썼다. 대학도 서울의 사립대학에 등록금을 낼 때 불편이 없었다. 내가 아끼고 싶어 쓰지 않은 것이지 써야 할 돈은 시골의 집이 아직도 부자였기 때문에 돈 문제는 없었다. 그러니 일을 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제대로 현장을 만난 것이다. 1주일이 지나고 2주일쩨 접어 들자 죽을 만큼 고생은 고생이지만 늦여름 햇빛이 한여름 햇빛과 뭔가 느낌이 좀 다르듯 미세하게 차이가 났다. 하숙집 주인이 잠을 잘 때 밤새 앓더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2주일이 지나가면서 나는 감을 잡았다. 그 어떤 죽을 강제 노동이라 해도 2주일만 버티면 그 다음부터는 인체가 알아서 적응을 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한 달을 했다. 이제 지게에 80kg를 지고 몸이 자유로웠다. 드디어 나도 노동자가 된 것이다. 이제 이렇게 익어 진다면 내가 힘은 들어도 평생 이렇게 일하고 가족을 부양하라 해도 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서부교회 청년들과 비교)
한 달쯤 하고 이제 현장에 감이 잡힐 때가 되니까 서부교회 내에 내가 부럽던 노동하는 사람들과 말이 통했다. 또 나의 위치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알고 보니 나처럼 일을 찾아 나선 이들이 없다. 모두 교회 내에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처럼 일의 강도가 센 일을 거친 이들은 원래 그런 형편의 분들은 다르겠으나 목회 때문에 일부러 일을 배운 이들은 이렇게 센 일을 한 이들이 없다. 나는 자부심이 생겼다. 나는 내가 대견했다. 다른 것은 좀 견준다 해도 몸으로 막 때우는 일은 선천적으로 약했고 관절염 후유증이 있고 위장 장애 때문에 아예 안 된다고 생각을 했다. 교회에는 한 눈에 다부진 사람, 타고 난 노동자 형의 청년들도 많다. 누구와 대화해도 나만큼 겪은 이는 없다.

너무 기뻤다. 하나님은 그 어려운 현장에서 그 고생을 하는데 어떤 면으로든지 돕지 않았다. 생고생을 다하도록 했고, 완전히 숨어 계셨다. 기적과 능력을 봐야 할 때는 봐야 한다. 그런데 인내를 배울 때 도와 주시면 능력은 체험을 하나 인내를 배우지 못한다. 땀 흘리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땀을 흘리지 않도록 해 주면 능력은 체험을 해도 땀을 흘리는 수고는 모르게 된다. 학교를 다니며 시험과 성적으로는 이미 많이 구경을 했다. 그러나 생고생을 하는 과정에서는 전혀 도와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몸 하나를 어디에 굴려도 내 평생 먹고 살겠고, 그리고 내가 목회를 하다가 돈이 없어 어렵다면 내가 노동을 해서라도 교회를 운영할 수 있다면 나는 목회자로서 막판에 최후 생존법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이 면을 알지 못했고 또 이런 생존력은 갖지를 못했었다. 1989년 3월 신풍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도, 8월에 백 목사님 돌아 가셨을 때도, 나는 교인이나 연구소 관계자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길을 걷다가 마지막에 나 혼자만 남게 되면 내가 노동을 해서라도 내 가족을 내가 해결하고 내가 맡은 강단과 연구소는 내가 해결하겠다는 말이었다. 이런 말은 괜히 해 보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1977년 여름 방학 때 몸으로 거쳐 나의 바탕에 깔린 자신감이다. 이 때 경험 때문에 나는 내 평생에 이 번에는 내가 사람을 지도해야 할 때 늘 최고로 고생하는 현장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몸으로만 버텨 낼 수 있는 단계를 제시했다. 이 단계를 통과한 사람은, 이 단계를 통과한 사람만이 가지는 세계가 있다. 백 목사님의 그 날 새벽 그 한 마디 지도를 오늘까지 되돌아 보면 나는 그 노동 현장을 지도한 그 한 가지만 가지고도 끝없이 감사할 스승이다. 목사님이 힘 주어 지도한 그 말씀이 아니면 아예 시작 단계에서 포기했을 것이고 두 번 그렇게 해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노동 현장을 기준으로 나는 평생 실패자가 되었을 것이고, 남들에게는 땀을 흘려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나 때문에 나는 초라해 졌을 것이다.

이 노선의 목회자뿐 아니라 이 노선에서 교인으로 살려 해도 우리는 세상의 좋은 직업 좋은 여건을 다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에 어떤 노동도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하는 노동을 해 낼 수 있어야 이 노선으로 살 때 돈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목회와 상관 없이 산다 해도 이 노선에서 제대로 믿고 살 사람들에게는 나는 최강도의 노동을 제시하고 끝장을 봐서 그 일이 몸에 익어져 이제 평생 그 일을 하면서도 찬송을 할 수 있고, 기도를 할 수 있고, 심지어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벽돌을 지고 나르는 일을 할 때는 성경을 읽을 수 있다. 줄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날 묵상할 특별한 말씀들을 메모를 하거나, 작은 성경을 꺼내 한두 줄을 얼른 눈에 담은 뒤 걸어 가면서 차분하게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80kg를 진 상태에서는 뛰어 다니지는 못하기 때문에 눈과 마음은 말씀을 얼마든지 새길 수 있다.

(어떤 초인적인 과정이라도)
잘 뛰고 잘 쏠 수 있다면 군인으로서는 그 이상이 있겠는가? 이것을 하지 못하는 군인은 맡길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맡긴 것을 할 수 있는 때가 있지만, 맡을 수 없는 일들이 많고 또 맡은 것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법관은 기본적으로 법전이 자유로워야 하듯이, 공회 사람은 지식적으로는 교리가 막히지 않아야 하고 생활에서는 어떤 중노동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이 고비를 넘지 못하게 되면 어느 날 알면서도 이 길을 걸어 갈 수가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도움도 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장 혹독한 환경을 주시면서, 끝까지 돌아 보지 않았던 77년의 여름, 나는 그 여름의 그 무더위 속에서 그 현장을 거치게 된 후 평생 중노동 문제만 나오면 할 말이 많아 진다. 어떤 대화에서도 빠질 것이 없다. 내가 약했기 때문에,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백 목사님이 지켜 보는 사실 하나 때문에 나는 견뎠고 그 과정을 통과했다. 군을 아는 사람들은 일반 군인들이 겪지 못한 특별한 훈련들을 안다. 나는 가장 쉬운 과정만 거치고 왔다. 그러나 그 어떤 혹독한 훈련도 그 1개월을 돌아 보면 나는 해낼 수 있다는 그림이 나온다. 백 목사님께 감사할 일은 참으로 많다. 말 한 마디 해 주고 한 번 지켜 봐 준다는 그 사실만 가지고도 약한 한 청년이 세상 가장 센 과정을 견뎌 낼 수 있었다. 그 일을 하기 전의 나와 그 일을 겪은 나는 차원이 다르다.

(혜택을 하나 더 받았다.)
방학이 끝나고 나는 일을 마쳤다. 이제 2학기 공부를 하고 나면 군에 가야 한다. 군에 가서 육체적 고생도 이제 걱정이 되지 않았다. 제대 후 다시 노동을 해서 3년 과정을 거칠 마음을 가졌다. 목사님은 보통 노동 3년, 장사 3년을 말한다. 그런데 일을 끝내던 마지막 며칠에 벽돌을 쌓는 기술자 쪽에서 내게 돈을 받았느냐고 물어 본다. 간주라고 한다.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쪽에서 내게 귀뜸을 해 준다. 그 망할 ㄴ이 네 돈을 떼 먹었다며 격분을 했다. 노동 현장에 내가 하도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자꾸 나를 이상하게 봤는데 일을 그만 두는 직전에 내가 대학생임이 알려 졌다. 동정심이 생긴 것이다. 노동 현장은 1-2주 단위로 돈이 내려 온다. 시행자가 미장 벽돌처럼 큰 단위 하청업자에게 돈을 주면, 하청 업자는 자기 밑에 재하청 업자에게 돈을 주고, 나는 벽돌만 나르는 것을 떼맡은 제일 밑에 업자에게 돈을 받아야 한다. 내 돈만 주지 않은 것이다. 어리숙하니까, 경험이 없으니까,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교회를 다닌다면서 노동 현장에서 아주 흔한 일을 하지 않고 말도 거칠지 않으니까.

그 때 노가다 세계는 정글의 막 가는 상황인데 내게만 동정을 베푼 것이다. 아미동 꼭대기에서 감천을 막 넘어 가는 그 어간에 있던 오야지 집을 알려 주면서 내 돈을 벌써 줬으니 가서 받으라고 했다. 또 자기들도 내 돈을 주지 않으면 다음에는 일을 맡기지 않겠다고 압박해 놓겠다고 했다. 그 생고생을 하고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한다니? 그렇게 받지 못하는 것이 흔했다. 그래서 당시 노동은 일하는 기술 위에 돈 받는 기술이 먼저라고 했다. 그 집에 찾아 가서 그 오야지의 위가 되는 벽돌 업자, 수미라고 한다. 수미 오야지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돈을 전부 챙겼는데 다시 내놓게 생겼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사는 집은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의 판자집이었다. 그 동네가 다 그렇다. 공동묘지의 묘들을 깔아 뭉개고 합판 몇 장으로 집들을 지은 곳이다. 오야지는 내게 자기도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했으니 받아서 주겠다면서 따라 오라 한다.

따라 가니 아미동 밑에 괜찮게 사는 주택가로 갔다. 그 집은 초상이 나서 장례 기간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 받을 돈이 있으니 이 집에서 받으면 바로 주겠고 그렇지 않으면 줄 수가 없으니 자기가 들어 가서 돈을 받을 때 도와 달라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물랐다. 작은 단독 주택에 들어 서자 조문객으로 가득 찬 집에 시끄럽기 그지 없다. 들어 가자 말자 오야지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미쳐 설쳤다. 자기 돈을 당장 내놓으라고. 한참이나 생난리를 다 부리고 나니까 주인이 돈을 챙겨 줬다. 나는 그 날 인간의 막장 세계를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내 돈이 걸려 있었고, 내 돈을 떼먹고 도망 가던 사람이 자기 돈을 받으러 갈 때 한 순간 어떻게 표정을 바꾸고 입장이 달라 지는지를 이렇게 생생하게 볼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한 여름의 노동과 함께 마지막 날의 돈 받는 장면을 통해 인심, 인간 세계, 장사, 수금, 결산, 약육강식, 연극, 이중 삼중...을 보여 주셨다. 이 날까지 나는 책만 보고 알았고 돈 걱정 없이 살면서 세상을 얼마나 헛 살고 모르고 겉으로 돌았는지 참으로 실감했다. 이 날의 경험은 오늘까지 사업이나 장사의 마지막 결산의 순간을 늘 생생하게 그려 주었다.

2. 공회 신앙의 첫 걸음. 반사 생활은 예배당 골목에서 시작했다.

(주일학교의 반사 생활)
1977년 여름의 노동이 하나님 도움 없이 나의 약한 체력으로 끝장을 본 대견한 일이었다면 1977년 3월부터 서부교회 생활을 시작하며 나는 반사생활을 1년 하고 1978년 2월에 군대를 갔다. 만 1년의 서부교회 반사 생활. 나는 이 기간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보지 못했다. 제대 후 그리고 10년이 더 지난 다음에 열매를 가질 수 있었으나 1977년 1년의반사 생활은 그 해 여름의 노동 현장처럼 오로지 나는 내 힘으로만 걸어 갔다. 나는 그 때가 대견하다. 그렇게 되기가 참 어려운데.

1977년 2월 말에 서부교회 부근에 하숙집을 구했고 3월 개학을 기다리던 마지막 주일로 기억이 된다. 1년 전에 온 친구가 내 하숙집을 찾아 왔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였다. 그 친구는 대학을 가고 싶었으나 부친이 일부러 보내지 않고 백 목사님 밑에 목회 길을 배우라고 서부교회에 갖다 놓았다. 그는 마음 속에 세상을 좀 원했다. 나는 대학을 1년 마치고 부산으로 편입을 했다. 나는 목회가 소망이고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았으나 백 목사님이 웬지 내게만은 이왕 시작한 공부니 대학을 마치라 해서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 속으로는 이 친구가 부러웠다. 이 친구는 이미 1년 전에 와서 노동 현장을 거쳤고 제법 기술을 좀 배워서 반쪽 정도의 기술자 대우를 받고 있었다. 또 반사 생활도 아주 잘 하고 있었다.

네가 여기 왔고 너는 대학을 다니니까 반사를 해도 시간이 많고 유리하겠다. 이제 반사를 하게 되면 시내 버스를 타고 멀리 가야 한다. 서부교회 주변은 이미 수 없는 반사들이 수 없이 쓸고 갔기 때문에 전도 될 학생이 1명도 없다. 서부교회 주변은 교인들이거나 아니면 교인들이 앞뒤집 아이들을 다 데리고 나오기 때문에 전도할 대상이 없다. 그래서 어느 반사는 영도로, 어느 반사는 감천으로, 또 자기는 감천보다 더 먼 신평까지 간다고 했다. 100명씩 데리고 오는 일이 흔하다 했다. 나는 1명도 없는데 1백명 이상을 전도해서 반사 1명이 주일날 교회에 앉힌다고 했다. 이미 서부교회는 반사가 150여명이다. 매주 2천여명이 몰려 들 때였다. 그리고 매주 새로운 반사가 새로운 반을 만들고 합류를 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장 8절)
나는 이미 백 목사님으로부터 신앙의 출발은 살고 있는 자기 주변인 '예루살렘'에서 먼저 시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에 있는 '유다' 땅으로 넓혀 가고, 그리고 나서 '사마리아'까지도 갈 수 있고, 이 곳을 거치면서 주님이 더 인도하시면 '땅 끝까지'도 간다고배웠다. 그 친구는 서부교회 반사들의 경쟁, 열기, 온 교회의 진행 방향을 읽고 있었고, 그 대열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숨가쁘게 달렸으며 그런 상황을 부산에 처음 온 옛 친구에게 상세히 설명을 했다. 서부교회가 다 그렇게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영업 비밀을 친구에게 특별히 알려 준 것이다. 그 친구는 1997년에 나와 아주 관계를 끊을 때까지 자기가 듣고 안 것을, 비록 전부는 아니겠지만 내가 들을 수 없는 내용을 무수히 제공해 줬다. 내 평생에 백 목사님과 공회에 대하여 내가 남 다르게 많이 알게 된 이유의 절반은 그 친구 덕분이다. 그 친구 아버지는 공회가 출발하던 첫 순간부터 그 부친의 위치가 특별하여 공회 내의 은밀한 일들을 대부분 알았고 또 다른 분들과 달리 그런 내용에 관심도 많고 그런 내용을 잘 파악한 분이다. 더하여 아들에게 말하기 곤란한 내용까지 세심히 알려 준 아버지다. 나는 그 친구를 통해 그런 이야기 거의 전부를 전해 들었다. 그런데 그 부친과 그 아들은 내게 전해 준 그 귀한 소식들을 가지고 나처럼 복 되게 사용하지는 않은 듯하다. 1997년부터 나와 다른 길을 걸을 때 알게 되었다.

내가 대학 2학년이어서 너무 부럽다는 것, 자기는 희망 없이 노동이나 하고 있으니 나중에 목회자가 되어도 대수롭지 않게 대우를 받게 되겠다는 것, 부친이 너무 엄해서 인간적을 좀 끌어 줘도 되는데 오히려 박대만 한다는 것... 서부교회 분위기로 볼 때 또 백 목사님이 특별히 챙기는 것을 볼 때 서부교회의 추세로 보면 나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발전이 빠를 것인데 얼른 멀리 신개척지 좋은 곳으로 가라는 것이 그의 핵심이었다. 실제 서부교회를 1년 있어 보면서 그 친구는 진심으로 나를 위해 묘수요 비법을 전수해 준 것이 맞다. 그리고 서부교회 주일학교 부장이 된 훗날 나의 경험으로 봐도 다 맞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 친구와 좀 다른 면이 있다면 그 친구는 그런 교회 소식을 들으면 당연히 유리한 쪽으로 움직였다. 그 친구뿐 아니라 모두가 다 그러했던 것같다. 나는 실적이 오르지 않아도 일단 신앙의 세계만은 배운 대로 한다.

나는 반사를 처음 시작하면서 서부교회 예배당에서 기도를 한 다음에, 서부교회 첫 골목부터 전도를 시작했다. 5명을 데려 오기 전까지는 보조반사다. 나는 나인숙 구역이어서 나 집사님 구역의 윤창근 반사에게 보조 반사로 우선 붙여 졌다. 그 분은 내가 창동교회 초등학교 6학년 때 거창고 3학년을 다니며 이탁원 훗날 목사님과 함께 주일학교 반사를 했었다. 이제 부산교대를 졸업하고 교사를 하고 있었다. 나를 서부교회로 오게 한 전성수 목사님은 서부교회에 가면 내가 추순덕 집사님 구역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너무 당연하게 말씀했다. 그런데 막상 추 집사님께 나를 소개하자 추 집사님은 이렇게 오는 지교회 교인의 경우 앞으로는 목사님이 정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백 목사님께 추 집사님 구역에 맡겨야 하지 않느냐고 하자 목사님은 생각 좀 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나인숙 구역으로 배정을 했다. 내 친구는 추 집사님 구역만 되면 청년들을 마구 길러 준다고 했다.

서부교회에서 작은 2블럭 거리의 나의 집 사이를 거쳐 그 집 바로 뒤로 올라가며 한 길만 전도했다. 그리고 1년 뒤에는 걸어서 오는 학생만 50명을 넘겼고 1등반이 되는 60명 출석 기준 직전에 나는 입대를 했다. 이 때 간 곳은 보수동 아파트 밑에까지였다. 순수하게 걸어서만 오는 학생이며 교회와 거리로 보면 내가 제일 많다고 기억한다. 멀리서 시내버스에 태워 오는 반사들은 150여명 출석이 여러 반 있었고 1등 기준인 60명 이상의 출석은 많았다. 백 목사님은 전체를 지도하기 때문에 부산 전역으로 반사들은 뻗어 가고 있었으나 나는 예배당 바로 주변만 맴돌았다. 그대신 그 곳에서 1977년에 맺은 학생들은 오늘까지 44년을 나와 함께 하며 나의 동지거나 나를 대신하여 공회의 대표들이 되어 있다. 바람을 타고 떠도는 전도여행도 필요하고, 나처럼 고인물 막힌 곳은 희망이 없다는 곳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반은 달라도 이 때 나와 눈을 맞추며 함께 뛰던 분들, 그 때 나와 함께 한 이들이 부공3과 연구소의 현재 중심들 대부분이다.

주일학교의 통계는 많은 면으로 분석할 수 있다. 아마 주일학생 때문에 장년반을 전도하여 끝까지 교인이 되고 공회의 중심에 세운 것을 기준으로 보면 내가 2등은 아닐지 모른다. 그런 숫자가 많으면 장년반 통계에 잡히기 때문에 표시가 난다. 나는 1989년 목회를 나가던 반사 생활 끝까지 50명에서 100명사이를 오갔다. 나처럼 목회자로 또는 그런 수준에서 열심히 일을 했던 분들은 대개 100명에서 300명 사이다. 그런 분들의 상황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중간반 반사들이 한꺼번에 30여명이며 들고 나는 문제로 많은 중간반 반사들이 중간반을 지나 갔다. 장신석 목사님은 중간반사 시절에는 별로 실적이 앞서지 못했다. 그런데 목회를 출발한 이후 중간반사 출신 목회자로서는 단연 돋보이는 1등이다. 요셉이 앞설지, 르우벤 시므온이 앞설지, 단기간을 보면서 장기간도 봐야 하지 않을까. 유다는 별로 활동이 없었으나 800여년 지난 다윗 때부터 이스라엘을 주도하며 주님으로 이어진다. 당시도 봐야 하고 또 후에도 살펴야 한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나는 연구소의 설교 분석 업무에 전념했다. 이 면으로는 1982년 편집실로 시작할 때부터 오늘까지 나를 앞서는 분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반사와 목회를 통해 구원 현장을 기준으로 보면 나보다 훨씬 앞서 있는 분, 부러운 분 별별 분들이 있다. 그러나 이어 가는 세월을 연결하면서, 그 연결의 내면을 살핀다면 나는 나의 외부 통계보다 훨씬 좋아 진다는 결과가 있다. 나의 이런 점도 교회에는 필요할 것이다.

진리가 달라 다른 길을 가는 것은 이별이라 하지 배신이라 하지 않는다. 진리의 차원을 높이며 서로 가는 곳이 달라 지면 진학이라고 하지 비판할 일이 아니다. 사명이 달라 다른 길을 가는 것은 파송이라 하지 배신이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진리가 같다면서, 행정이 같다면서, 역사가 하나고 지향이 하나라 하면서 길을 바꾸면 우리는 배신이라 한다. 나는 성장과정이 나쁘고 철이 든 후에도 수준은 낮지만, 배신은 하지 않는다. 오판하거나 실수한 것은 반드시 밝히고 새로 잡는다. 병이 들면 나는 병원은 찾아 간다는 뜻이다. 이 면을 기준으로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점이 많다. 잘못을 알면 바로 돌아 서는 사람을 나는 거의거의 보지 못했다. 그들은 거의 전부 나보다 훌륭한 분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 분들보다 나아 졌다. 적어도 나는 배신은 하지 않고 나의 잘못을 묻어 놓고 덮지는 않기 때문이다.

목사로서 그 교회 주일학교 이제 출발하는 아이를 대할 때도, 이 아이가 뒤에는 나를 지도할 시대의 인도자가 되고 목사는 그 밑에서 배워야 할 수 있다. 이 것이 신앙의 세계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을 뵙게 한 지도자다. 그러나 엘리는 바로 사무엘에게 자신과 집안을 훗날을 지도 받으면서도 적어도  사울처럼 자존심과 이권 문제로 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바울은 복음의 2세대지만 베드로와 모든 1세대 사도들이 세대차를 두고 견제하지 않았다.

3. 백영희 설교 연구, 편집실 직원으로 출발했다.

1982.10.5. 나는 장차 연구소가 되고 당시 서부교회 편집실로 출발한 첫 해에 '백영희 설교 교정'을 맡아 출근을 했다. 이 때는 백 목사님이 중환으로 1주일에 설교를 1-2회만 했다. 나는 설교 1개를 가지고 한 주간 계속 살피고 살피고 또 살폈다. 녹음과 우선 타이핑을 나란히 비교한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살핀다. 그리고 나면 설교 전체의 문장 하나씩을 따로 떼어 주어와 주동사와 목적어와 보어와 부사어들을 분해한다. 고1 담임이 독일어 전공인데 영어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 분은 문장의 도해가 특출했다. 1988년에 내가 부산의 대학 내 토플 강의를 그만 두면서 나를 이어 강의를 시작하게 된 이재헌 선생님은 영어에 경지를 가진 분인데 그 역시 그 분에게 배웠고 문장의 도해 또는 분석적 접근에 대해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 영어는 기초가 없어 포기했던 시절이나 그 분의 영어 강의는 단어 문법의 기초로 쌓아 올라 가는 방식이 아니라 문장 도해에 특별했고 그 방식은 국어에도 그대로 적용 되는 원리적인 면이 있어 나는 그 분 때문에 영어가 아니라 국어의 언어적 접근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983년 5월부터 유학 때문에 영어를 처음부터 시작할 때 그 분의 강의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1982년 편집실에서 백 목사님의 설교만 하루 종일 붙들게 되면서 그 때의 문장의 도형적 구조가 백영희 설교를 문장 단위로 따로 떼어 그 안을 들여다 보게 해 주었다. 이 때문에 나는 고1 담임과 이재헌 성함을 늘 잊지 못한다. 또 이런 접근 때문에 백영희 설교의 별 세계를 알게 된 나는 오늘까지 백영희 설교의 세계를 두고 내게 질문하는 이들은 이런 면을 상세히 설명한다. 구 pkist 게시판에서 많이 적었던 기억도 있다.

(첫 출근, 설교 내용을 마구 도륙 내는 광경)
1982년 7월에 백 목사님은 처음으로 주일 오전과 오후 설교를 '주간설교록'으로 인쇄하여 스테플로 찍어 반사의 공과 활용에 도움이 되게 했다. 백영희 평생에 그의 설교가 처음 인쇄화 된 것이다. 그런데 반사들이 녹음과 인쇄 된 설교록을 비교하면서 폭동?을 연상할 정도의 분노가 일어 났다. 백 목사님의 설교를 모든 반사가 직접 듣고 그리고 인쇄물로 받아 봤는데 문어체로 바꾸는 과정의 이해할 만한 그런 정도가 아니라 불신자가 설교도 모르면서 엉망을 만들어 놓은 정도였다. 반사회가 끝나고 지도적 반사들이 편집실의 책임자로 지칭 되던 나의 친구를 불러 추궁을 했다. 이 것이 말이 되느냐고, 이 짓을 누가 했느냐고, 그의 신앙과 실력을 알기 때문에 뭔가 사연이 있을 것으로 봤다. 그는 목회자 가정 출신이고 그의 말에 의하면 부친이 평생 백 목사님께 견제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해명과 표정은 참으로 난해했다. 한 마디로 뱉으면 그냥 될 일인데 차마 말을 하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10월 5일에 출근하면서 나는 그 주간에 발간 될 주간설교록 원고를 받았다. 친구가 1차 타이핑을 하면 다른 사람이 녹음을 들으며 대조하고, 정오를 표시한 원고를 다른 직원이 2차 타이핑을 하면, 정오를 표시한 것과 2차 타이핑은 거의 맞아 진다. 이 것을 최종 표시하여 인쇄소로 보낸다. 첫 날 내가 작업을 한 것은 인쇄소로 가기 전의 최종본이었다. 한 눈에 엉망이었다. 최종 결재자가 백 목사님의 설교록을 주욱 주욱 그어 버리고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 버렸다. 설교를 들어 보지도 않고 예배를 참석한 흔적이 없었다. 친구가 편집실장을 맡고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하도록 뒀냐고 물었다. 이제 직원이 되었고 원고를 직접 본 내게는 가룰 것이 없다. 백 목사님이 최종 교정자로 임명을 해놓았으니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다. 나는 백 목사님께 직접 보고하고 문제점을 지적했느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정무적 감각이 있다. 백 목사님께 오해를 사고 그 최종 결재자에게 보복을 당할까 싶어 그냥 묻어 버리고 출간을 해 온 것이다. 이제야 의문이 다 풀렸다. 나는 친구에게 내가 책임 질 테니 그냥 두고 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친구가 친 1타, 교정을 거친 1교, 다시 친 2타, 그리고 다시 교정을 거친 2교를 근거로 나의 최종 점검으로 끝을 냈다. 거의 손 댈 것이 없었다. 그 대신 최종 점검자가 마음대로 그어 놓은 원고는 서랍 속에 넣어 버렸다. 이 번 인쇄는 내 손을 거친 원래 원고가 나갔고 외부 3자의 최종안은 묻어 버렸다. 친구는 한 편으로 좋아하면서 한 편으로는 너무 걱정을 했다. 바로 이런 때에는 어린 시절 나처럼 막 자란 사람이 대처하기에 좋다. 나쁜 짓도 거침 없이 했으니 옳은 일을 하면서야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친구는 반듯하게 컸다. 부모의 교육이 그야 말로 조선 시대의 엄한 유학자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의 보살핌을 고루 받은 인품이다. 그러니 이런 엉망인 사태를 바로 잡는데는 좀 주저했을 것이고 돌파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동안 양심에 가책을 그렇게 느끼고 교회의 반사들에게 지탄 대상이 되어 괴로웠던 친구, 이제 내가 일거에 정상화를 시켰고 책임은 나 혼자 지게 될 것이니 탙이 나면 내가 맞을 것이고, 들키지 않으면 이제 교회의 교훈이 바로 나가니 편집실 책임자로서 좋게 된 것이다. 이후 만사가 거의 그렇게 되어 가면서 1997년까지 우리는 서부교회 전체와 총공회 모든 목회자가 볼 때 완벽한 한 몸으로 모두에게 인식이 되어 졌다. 그러나 나는 그와 신앙의 모든 성향과 지향이 180도로 달랐다.

당시 교회는 예배당을 건축 중이었다. 1970년에 완공한 원래 본당은 10년만에 주일학교의 수직 부흥으로 중간반이 넘치고 장년반으로 들어오는 숫자와 함께 장년반 자체도 크게 부흥이 되면서 예배당 면적이 2배가 필요했다. 기존 건물보다 더 큰 규모를 나란히 붙이면서 내적으로는 하나의 단일 공간으로 만들어야 했다. 공사도 엄청났지만 난이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스레트 1층 화장실도 증축하면 방수가 되지 않는다. 서부교회 건물은 지금 40년이 지나면서도 틈 하나가 없다고 한다. 백 목사님의 건축 현장의 실력은 감을 잡기 어려울 정도다. 일제 때 노동 현장을 다니며 잠깐 일본의 기술과 손끝을 봤고 그 때 익힌 실력에 창의적 연구가 더해 졌다. 이 건축을 두고 내용적으로 여러 심부름을 하던 분은 건축 때문에 그렇다는 말도 있고 원래 교회를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었다. 어쨌든 나는 교회에서 그를 본 기억이 없다. 그의 손에서 공사판 각목 잘려 나가듯 주간설교 내용이 헤집어 졌다. 나는 원래 위치로 돌려 놓았다.

아마 두어 달은 그렇게 더 나가지 않았을까? 당시 일지를 보면 확인이 가능하다. 어느 날, 편집실장을 맡던 친구는 상이 새파랗게 되어 나를 붙들고 '들켰어. 우리를 보자고 하더라.' 나는 할 일을 했고, 결국 목사님이 판정할 테니 목사님께 자신 있게 설명하면 된다는 자세여서 미동도 없었다. 그 때 그렇게 휘젓어 놓은 흔적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런데 그가 보자고 하던 날, 바로 그 전날에 5층에서는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 건축과 편집실에 백 목사님의 이름을 내세워 교회를 혼란 속에 빠트리게 한 인물을 가족의 대표가 그냥 두지 않겠다고 거칠게 이의를 제기한 분이 계셨고, 백 목사님의 신임을 내세워 버티던 인물은 백 목사님 면전에서 어깨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 날로 주간설교록의 최종 결재자는 교회에서 자취를 감췄다. 적어도 5년 이상. 그 사이에 나는 편집실의 실제 책임자가 되었다.

이제 눈치 볼 곳은 없었고, 나는 책임자인 친구의 배려로 연구소에서 백영희 설교를 하루 종일, 한 주간 내내, 6개월을 계속 살폈다. 교인으로 매 설교 시간에 은혜를 받고 필기를 하고 다시 연구하던 때와 매일 출근하여 하루 종일 설교를 완전히 분해하며 살피니 설교와 성경에 대한 나의 세계는 달라 졌다. 그리고 나는 단정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누구라도 백영희 설교 한 편을 가지고

1. 녹음을 들으며 일일이 적거나 타이핑을 한다.

2. 타이핑 된 것을 녹음으로 다시 들어 가며 새로 교정한다.

3. 교정 된 설교 내용을 문단으로 묶고 작은 제목을 붙여 간다.

4. 문장과 문장의 내용 관계, 문단과 문단이 어떤 내용으로 전개 되는지 앞뒤 관계를 살핀다.

5. 큰 문단에 작은 제목을 붙이고, 설교 전체를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누고 내용 전체를 도식한다.

6. 전체 설교를 한 줄로 제목을, 3-4줄로 요약을, 모든 문단과 소제목을 하나의 이야기로 적는다.

이렇게 하게 되면 설교를 한 줄로 줄일 수도 있고 한 줄을 여러 줄로 펼칠 수도 있고 여러 줄을 짧은 하나의 이야기로 전할 수도 있고, 그리고 설교 전체를 모두 적으면 내용과 전개를 전부 재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설교 몇십 개를 분석하게 되면 백 목사님의 평생 설교 어느 것을 접해도 또 어떤 설교의 어느 한 부분을 접해도 설교 전체를 파악하면서 백 목사님 설교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성경을 읽으면 어느 성경 어느 본문이라도 성경 전체에서 의미와 그 성구 하나만을 가지고 끝없이 말씀을 풀어 낼 수가 있다. 이렇게 해 보면 신앙 출발의 사람이나 평생 목회한 사람이 최소한 백영희의 설교 세계를 두고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지간한 사람은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자기가 진리의 세계를 두고는 모르는 것이 없는 최고라고 자부하게 된다. 바로 이 순간까지 귀신은 접근을 하지 못하다가 이런 자부심이 드는 순간 낚아 채고 가 버린다. 그 설교의 세계를 이렇게 철저하게 파헤쳐 나갈 때마다 무식한 백 목사님이 성경 하나만을 들고 깨닫고 나간 그 자세를 붙들면 그 설교를 알아 갈수록 자기의 부족을 알게 된다. 갈수록 더욱 부족하게 되고, 한 편으로 갈수록 이 세계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려고 필사적이 된다. 귀신이 노리는 자부심으로 나간 사람들은 갈수록 혼자 그 세계를 가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기가 겪고 알게 된 설교 원고나 자료는 남이 볼 수 없도록 평생을 감춰 버린다. 한국의 조상들이 특별한 기술을 가지면 죽는 날 자식에게만 물려 주려고 감추다가 물려 주지도 못하거나 그 자식이 그 가치를 느끼지 못하여 수 많은 비법이 사라 져 버린 바로 그 길을 걷는다.

 

나는 1982년 10월부터 1983년 4월까지 백영희 설교만 전념했던 7개월이 지금도 감사하다. 꿈만 같다. 어떻게 그런 기회가 내게 주어졌을까? 그리고 어떤 것도 옆 돌아 보지 않고 오로지 그 설교에만 집중할 수 있었을까? 노동을 할 때 무조건 끝을 보자고 매일을 버텼던 것처럼, 이 번에는 이 설교의 세계를 가장 철저히 한 자도 빠짐없이 다 살펴 보자 하고 그렇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세계 안에 발을 들여다 놓았다. 그래서 오늘까지 누구에게든지 그 세계를 전하고 있다. 저작권 문제로 백 목사님의 자녀들로부터 전과자가 되기까지 그렇게 했다. 백 목사님은 나를 신앙의 아들이라 했다. 백 목사님은 육체의 아들을 신앙의 아들로 부른 적이 없다. 그렇다면 호적으로는 7남매가 있고, 하나님 앞에는 7남매 중의 일부와 내가 신앙의 계통으로 그 자녀다. 이런 나를 나만 그 자리에 세우지 않고 나보다 훌륭한, 나보는 최소한 어린 시절이나 철 든 뒤에 훨씬 나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함께 세우고자 한다. 그래서 지난 30년의 세월에 나는 내가 근무하는 신풍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 나는 연구소를 위해 교회에 생활비 때문에 근무하는 사람이지 교회를 위해 연구소를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니, 이 취지가 맞지 않으면 미리 말씀해 달라고 했다. 한 사람이라도 원치 않으면 나는 내가 노동을 해서 내가 돈을 벌고 나의 가족 하나만으로 교회를 출발하며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 대구공회 교인들이 나간 뒤에도 다시 재확인을 받았다. 그리고 부산공회3의 모든 목회자들에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또 한 교회도 빠지지 않고, 또 집회 때에도 전체를 대상으로 그렇게 내려 왔다. 부산공회3은 '연구소 공회'라고..

 

이렇게 설명을 하자 대뜸 연구소가 교회 위에 있을 수 있는가, 교회는 머리를 그리스도로 삼기 때문에 어떤 기관도 연구소도 교회 위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그렇게 반론을 하려면 애초부터 나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어야 한다. 나와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갑자기 교리를 가지고 명분을 세운다. 그런데 교회 위에 다른 기관이 올라 갈 수 없으면 공회는 왜 백 목사님 생전에 서부교회를 모교회로 삼았던가? 왜 지교회와 목회자들이 자기 속에 성령으로만 지도를 받지 않고 백 목사님께 지도를 구하고 지도를 받았던가? 슬프다. 애통하다. 따져 볼 것도 없는 말인데. 문제는 이런 말이 나오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혼동한다. 그 것이 바로 타락한 사람의 본성이다. 거짓말에는 솔깃하고 옳은 말에는 갑자기 아이가 되어 버린다.

 

 

 

(진행 중)
전체 1

  • 2020-02-02 06:07
    사도행전26:28-29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결박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담당 님의 걸어오신 인생 글을 읽으며 떠오른 성구입니다. 공회는 성구 인용을 극히 조심하는 편 같으나 저는 시행착오를 자처하는 편이라 ㄸ이라도 찍어서 먹어보고 뱉는 고집불통 성격 탓에 지난 과거 주신 자본을 허비한 면이 많습니다.

    담당님의 글을 읽으며 백목사님의 지도가 간접으로 제 것이 되고 있음에 감사가 됩니다. 이제는 실제 그렇게 해 보는 실전만 남았습니다. 저 또한 담당님처럼 나의 걸어온 인생길에 함께 하신 주님의 주관, 객관 역사를 글로 적어 놓는다면 자자손손 후손들에게 못다한 신앙 지침서 내지는 세대를 넘나 드는 공유와 교류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담당님의 모든 인생 글들에 댓글로 화답하고 싶고 보고나 질문도 드리고 싶지만 남북의 냉전 대치 상황 만큼이나 모든 관계가 얼어 붙어 있고 앞으로도 빛은 보이지 않으니 교인들은 비정상의 사람들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씀처럼 각자 시간적 여유는 달라도 전체적인 방향은 한 곳을 향해 통일되듯이 담당님처럼 동천, 조례, 서인, 대동, 반사 누구, 교인 누구... 앞으로 언젠가는 목회자에서부터 주일학생에 이르기까지 자기 인생 걸음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글로 정리해 주신다면(부득불 자타구원을 위해 지극히 개인적인 세째 하늘 체험까지 공개한 사도 바울처럼) 이 또한 부공3의 보배가 될 것입니다.

    자기가 걸어온 인생 걸음을 글로 정리해 보는 습관을 통해 자기 표현력이 길러진다.
    부공3 불목의 원인 중에 하나가 자기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싸움이 될까 봐. 말해도 소용 없으니까. 당신은 늘 그런 식이니까 회의는 회의일 뿐 의논은 의논일 뿐 최종 결정은 당신 뜻대로 할 거니까 사람간 부부간 부자간 소통이 안될 때는 손편지를 써 봅니다.

    교역자간에는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고 무슨 말이라도 들어줄 수 있어야 하고 열명이 모이면 열가지 각기 다른 새로운 생각이 탄생한다.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이 강조되는, 문답방 뿐 아니라 남단 글도 담당님처럼 여러 목회자가 함께 자기 인생 글을 표현하여 공유한다면, 나만의 공간이 아닌 진정 우리들만의 남단, pkists가 될 수 있음을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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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5
(50) 공회 청년의 유학은 탈북민의 남한 정착과 같았다.
담당 | 2020.07.05 | 추천 0 | 조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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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6
(51)신학 공부의 실체, 그 함정과 허상
담당 | 2020.07.07 | 추천 0 | 조회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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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1
소수 정예의 함정, 주교로 본 경험
담당 | 2020.06.27 | 추천 0 | 조회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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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4
87년부터 시작 된 서부교회 '고3 졸업생'에 대한 사회 교육 (1)
담당 | 2020.06.25 | 추천 0 | 조회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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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9
의인의 자손에게는 왜 세상 복만 내려 가는가?
담당 | 2020.06.17 | 추천 0 | 조회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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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6
백영희 목사님이 이 길을 버려도 나는 이 길을 간다! - 이진헌, 1972년
담당 | 2020.06.14 | 추천 0 | 조회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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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3
오늘이 불안한 이유, 백영희 예언의 끝자락에서
담당 | 2020.06.11 | 추천 0 | 조회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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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2
사욕 (1)
교인 | 2020.06.07 | 추천 0 | 조회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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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8
코로나가 바꾼 새시대論, 공회의 시각은?
담당 | 2020.06.02 | 추천 0 | 조회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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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5
교회가 자초한 '세상의 교회 개입' (2)
담당 | 2020.06.14 | 추천 0 | 조회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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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8
홍콩을 통해 본 남한 교회의 내일 (7)
담당 | 2020.05.30 | 추천 0 | 조회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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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2
실패한 도둑이 성공한 도둑을 비판한다? - 신천지와 교계 관계
담당 | 2020.05.24 | 추천 0 | 조회 200
담당 2020.05.24 0 200
3366
친일파가 친일파를 욕하고? - 선전선동의 악습 (1)
담당 | 2020.05.27 | 추천 0 | 조회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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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0
한국 선교 역사의 양면 (1) : 선교는 좁게, 복음을 널찍하게.
담당 | 2020.05.23 | 추천 0 | 조회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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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1
한국 선교 역사의 양면 (2) : 분열된 선교사들과 선교지 분할
담당 | 2020.05.28 | 추천 0 | 조회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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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7
한국 선교 역사의 양면 (3) : 왜 흑인 선교사는 단 1명도 없었는가?
담당 | 2020.05.30 | 추천 0 | 조회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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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5
집회의 계시록 공부를 거치며
담당 | 2020.05.16 | 추천 0 | 조회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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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구호금, 공회의 지혜 (6)
회원 | 2020.05.15 | 추천 0 | 조회 296
회원 2020.05.15 0 296
3300
그림과 글자 - 성경 기록의 방향에 대하여
담당 | 2020.05.09 | 추천 0 | 조회 160
담당 2020.05.09 0 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