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39) 군 생활의 실패, 백영희 사후를 준비하게 되다

작성자
담당
작성일
2020.01.30
(실패가 주는 복)

높이 뛰려면 그만큼 숙여야 한다. 낮출수록 올라 가지만 너무 낮추면 주저 앉는다. 모르거나 약해서 넘어 지고 죄를 짓다가 낮아 진 것은 뛰어 오를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원리까지 아는 사람이 죄를 짓고 그리고 자기는 마음 속으로 다음에 더 높이 뛸 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성령 훼방죄가 되어 이런 사람의 낮아 진 몸은 아주 주저 앉아 버리지 도약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나의 성장 과정에 흠과 점은 훗날 도약에 도움이 되었으므로 못난 과거를 늘 감사한다. 이 번 이야기는 1978.2.11 ~ 1980.7.9 기간의 군 생활이다. 이 기간을 통해 나는 백영희 사후를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신앙 생활을 잘했다고 말하려면 그렇게 말할 경험이 많다. 이 때는 내가 신앙으로 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군 3년을 통해 '백영희'라는 단어를 떼어 버리자 나는 어느 덧 공기 빠진 풍선 꼴이 되었다. 백영희가 없는 나의 신앙은 교계에 흔한 교인 중의 하나였다. 심각하게 나를 돌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3년 때문에 오늘까지 40년을 다시는 백영희가 없는 문제로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해병대 지원)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기숙사는 그야 말로 신사들의 세계였다. 그들은 사랑과 용서와 배려와 헌신이 몸에 벤 이들이다. 나는 백 목사님께 전투 신앙을 늘 배웠다. 그래서 기숙사에서 TV를 볼 기회가 있으면 전투의 잔인한 장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이 문제로 나를 심각하게 걱정해 주는 분들이 주변에 많았다. 신학생답지 않다는 것이다. 백 목사님의 설교는 늘 환란, 전투, 극복, 승리로 전개 된다. 모든 내용이 그렇게 가득 차 있다. 설교 중에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목사님은 독재 예찬론이다. 군대 문제가 나오면 단호했다. 남자가 군대를 갔다 오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해병대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해병대 말이 나오면 고개를 돌린다. 인간이 어떻게 못나서 그런 곳을 간다는 분위기에 쏠려 다니는지에 대한 반발심이다. 그런데 막상 군대를 갈 때가 되자 목사님 분위기 때문에 해병대를 지원하려고 했다.

1977년, 내 나이 만으로 20세에 대학 2학년이 되어 서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봄에 신체검사를 받았고 당시 추세로 1978년에 입대가 예정이 되어 있었다. 대학 2학년의 1년간 마음껏 목사님께 배울 수 있었다. 서울에서 편입을 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과정과 수고의 보상이 되고도 남았다. 이렇게까지 좋을지 몰랐다. 곧 군대를 가야 할 때가 되었는데 교회의 사찰과 수위를 맡고 있던 강행수 목사님의 큰 아들이 나와 나이가 같은데 이 친구는 교회 밖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다. 동네 건달이 아니라 부산의 시내에서 통하는 사람인데 내가 서부교회에 왔을 때 그 친구도 마음을 잡고 신앙 생활을 열심히 했다. 반사를 잘했다. 한 번은 그 친구가 해병대를 간다면서 나와 대화를 했다. 백 목사님이 직접 해병대를 가도록 조처를 했다고 한다. 당시 해병대는 중학교를 졸업해야 지원을 할 수 있었는데 이 친구는 졸업장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목사님은 대구 달산교회의 신구한 장로님이 사립학교 서무과장이었기 때문에 군대를 보낼 수 있도록 졸업장을 어떻게 해 보도록까지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나는 목사님께 잘 보이고 싶었고 또 목사님이 그렇게까지 미는 정도라면 당연히 지원을 해야 했다. 공회는 목사님의 이런 방향 때문에 해병대를 지원할 분위기가 전혀 아닌데도 그렇게 다녀 온 목회자들이나 일반 교인들이 의외로 많다.

우선 강대철 목사님이 해병대 출신이었고 아직 목회 출발 이전에 교회의 선배였기 때문에 함께 물어 봤다. 수영만 문제가 없으면 갔다 올 만하다고 한다. 몸도 허약해 보이고 마음은 너무 고운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을 보니 대수롭지 않게 갔다 올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알아 보다 보니 시험이 주일이다. 그래서 포기를 했다. 참 아쉬웠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주일인데 어떻게 지원하느냐고 했더니 목사님은 주일이라도 괜찮으니 지원하라고 했다 한다. 이 친구는 밖으로 다닌 면도 있고 또 앞으로 지도할 방향 때문에 그렇게 지도를 했다고 생각을 했다. 이 친구는 결국 해병대를 가지 않고 육군을 갔다 왔고 장군의 운전병을 거쳤다. 해병대를 다녀 왔으면 지금쯤 나와 함께 목회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친구와는 소식이 끊어 졌다.

(훈련소 입대)
해병대를 가려 했으나 막혔고, 1978년 2월 11일에 논산훈련소로 들어 갔다. 입대 직전에 목사님께 군에 간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주의할 일을 여쭸다. '가거든, 맞지 말아라'는 말씀만 한다. 설교 시간과 다른 사람들을 지도할 때는 군대에 가서 맞아 죽어도 신앙을 지키라고 말씀하면서 왜 제게는 매 맞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냐고 의아하여 다시 물었다. '일꾼이 너무 열심히 일을 하면 좀 쉬면서 하라, 삽 부러진다'라고 말을 하는데 게으른 사람에게는 '삽자루 부러지도록 일을 하라고 독촉을 한다'고 설명을 했다. 그리고 백태영 목사님 이야기를 하면서 맞지 않아도 되는 매를 맞았다, 혼자 살던 생활과 단체가 함께 살게 되면 생활이 달라 지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모습도 달라 진다'고 했다. 나는 서부교회 청년들 중에 중간쯤 가는 정도인데 목사님은 나를 아주 신앙이 있다고 보고 군에서 무모하게 투쟁을 할까 싶어 자제를 시킨다는 생각이 드니 한 편으로는 목사님께서 좋게 인정을 하시니 좋은데 내 속으로 나는 신앙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어서 불안했다. 2월 5일 주일에 나는 목사님께 군에 가기 전에 세례를 받고 가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공회는 여자가 시집 가지 않으면 세례를 주지 않고 남자는 군에 갔다 오지 않으면 주지 않는다. 신앙을 배신할까 싶어 그렇다. 나는 군대를 가면 신앙을 지켜 내야 하고 목숨을 걸어야 할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그 때 확신 있게 나가고 싶어서 미리 세례를 받고 싶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혹시 군에 가서 사고로 죽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셨을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시행하지 않는데 2월 5일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당시 4층에 사무실이 있을 때 따로 불러 혼자 세례를 주셨다. 나 권사님만 입회했다. 질문은 단 하나였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았다는 답을 했다. 이 때 경험 때문에 나는 평생 세례와 학습을 문답할 때 질문을 아주 간단히 한다.

군대 갈 날이 확정 되자 나 권사님은 나만은 군대를 보내기가 망설여 진다면서 군 면제를 부탁할 만한 인물이 있다 했고 많이 생각하고 망설였다. 당시 분위기로 볼 때 목사님께 상의를 드리고 포기한 느낌이다. 부탁할 인물은 군 창설에 이름이 나오는 분이다.

(첫 어려움들)

나는 마음에 각오를 많이 했다. 그런데 입대를 하고 보니 군의 분위기가 막 바뀌었다. 과거 펼쳐 놓고 했던 부정 부패가 없어 졌다. 먹는 것과 유류 횡령은 목숨을 걸지 않고 할 수 없었다. 매를 드는 것도 발바닥이나 몇 대 치는 정도고 그마저도 눈치를 봐가며 숨어서 하는 정도였다. 전방의 어느 골짝에서는 여전히 삽자루가 날라 다녔지만 대세는 잡힌 것으로 보이고 그대신 모든 생활과 훈련이 체계화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군대는 군대고, 입대한 군인은 바짝 얼어 붙었다.

2월 11일 밤에 도착하고 아침에 일어 나니 주일이다. 일어 나자 막 바로 몇 명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간다. 그리고 빗자루로 쓸라고 했다. 공회 교인이면 6.25 때 배추달 집사님이 주일날 마당을 쓸지 않다 순교를 당했다는 백 목사님의 예화를 늘 들어서 안다. 그래서 바로 빗자루를 놓고 주일이라 쓸지 못하겠다고 했다. 훗날 생각해 보니 내가 사는 나의 방과 마당은 내가 청소를 할 수 있는데, 배추달의 경우는 주일날 인민군들이 돼지를 몰고 전쟁하는 군인의 보금에 나서라고 하다가 주일 때문에 가지 못한다고 하자 빗자루를 주면서 시험을 했던 것이고 나는 내가 먹은 그릇을 내가 씻을 수 있는데 군대라 사람이 많으면 서로 분업을 하는 것인데 이 것을 주일에 일을 시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의 오판이지만 나는 맞아 죽어도 하지 못한다고 버텼다. 인솔하던 하사관은 기가 찼을 것이다. 그런데 대뜸 '내가 믿는 사람이라 너 행동을 나는 봐 줄 수 있지만 앞으로 너 견디지 못할 거야'라면서 그냥 넘어 갔다. 이 날은 몰랐는데 이 첫날을 지켜 본 동기 중에 한 사람은 추순덕 집사님의 조카였고 한 사람은 그 날부터 나를 알게 되어 평생 내게 신앙의 문제를 두고는 내게 진지하게 의논을 하는 두 살 위에 학교 선배가 있었다. 이 친구는 학교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내가 책을 사지 못하고 기말고사나 중간고사를 볼 때 도서관의 책을 미리 확보해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주일날 단체 기합을 거부할 것인가?)
주일 날은 교회를 가게 했고 훈련이 없었다. 그런데 단체 기합을 줄 때가 있다. 기합은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것이다. 주일 날 벌을 받을 수 있을까? 미리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뒤에 더 크게 당할지라도 단체 벌을 받는데 나가지 않고 숨어 버린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애매하게 나간 적도 있다. 내게는 평소 모든 면을 일일이 연구하고 확인해 두지 않으면 공연히 고초를 겪기도 하고 또 알지 못해서 죄를 짓게 되는 수도 있음을 절감했다. 평소 백 목사님께 잘 배웠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평상의 생활을 떠나 이런 강제 시설에서 생활을 해 보니 주일 문제는 아예 내가 예상도 못한 문제가 줄을 이었다. 백 목사님께 들은 말만 없었다면 내 생각대로 곧이 곧대로 다 밀고 나갔을 것이고 바로 당하든 잘못 당하든 했을 것인데 미리 들은 이야기 때문에 계속 혼란이 왔다. 이 것이 건설구원의 단점이기도 하다. 주일을 한 번 어기면 지옥을 간다는 기본구원만 마음에 가득 차면 지옥을 가지 않기 위해 이 땅 위의 박해는 죽어도 당한다고 단순화가 되는데 건설구원은 이 순간에 해당 되는 것은 이 한 가지만 문제가 되는 것이고, 또한 건설구원은 바로 알고 바르게 당하지 않은 것은 당해 봐야 헛 일이 된다. 이런 면이 너무 밝으니 만사가 복잡해 지고 혼란스러워 졌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면 주변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 되지 않을 행동은 많이 했다.

나는 신체검사를 받고 군에 가기 전에 1년간 기도를 했었다. 하루 3번 식사 기도를 할 때마다 '입대하게 되면 부산에 배치를 받게 해 주옵소서. 부산이 아니면 성경 많이 읽을 수 있는 곳으로 가게 해 주옵소서. 고생은 상관이 없습니다.' 단기간 뜨거운 기도는 해 봤지만 장기간 꾸준한 기도는 내게 이 기도가 처음이었다. 홍순철 목사님이 부산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서부교회로 대예배를 모두 출석을 했다는 말이 그렇게 부러웠다. 어떤 고생을 하고 어떤 댓가를 치른다 해도 백 목사님의 설교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는 부산이 주어 지지 않았다.

(정보교육대, 후반기 교육)
내가 입대할 때 군의 훈련 체계는 논산 훈련소에서 기본 4주만 교육을 받았다. 군인으로 최소한의 훈련이다. 유격 교육은 자대에서 따로 진행했고 훈련소에서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입대하기 전 1976년 서울에서 대학 1학년을 다닐 때 남한산성의 문무대에 설치된 대학생 군사훈련 제1기였고 10일간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이 때 현대화 된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았다. 이 때 유격훈련을 해 봤다. 또 대학 2학년 여름방학에 강도 높은 노동을 해서 육체적으로 극단적 한계는 이미 겪어 봤다. 그러다 보니 훈련소는 공포 분위기 때문에 달랐지 육체적 고통만 가지고 보면 할 만했다. 공부만 하다 온 학생들은 갑자기 군사 훈련을 계속 받게 되면 한계가 빨리 온다. 나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상황인데 노동을 할 때 고운방(곰방)이라 하여 80kg 등짐을 지고 4~5층 건축물에 벽돌만 하루 12시간 나르는 일만 했다. 1주간은 죽을 지경이어서 처음 노동을 하는 사람은 모두 포기를 한다. 나는 백 목사님이 지켜 보고 또 그런 노동을 원했기 때문에 그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첫 1주간만 그렇게 2주째가 되면 약간 나아 지다가 1개월이 되면 몸이 어떤 고통이라도 감당해 내면서 평소처럼 되는 과정을 겪었다. 그래서 훈련소의 모든 힘든 과정을 미리 계산을 할 수 있다 보니 몸을 그냥 막 던지며 고통스러워 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나는 군에 오기 전에 기도한 소망을 붙들고 있었다. 부산으로 발령을 내 주시든지 아니면 성경을 많이 읽을 곳으로 보내 주시라고 기도를 계속했다. 그리고 4주의 훈련을 통해 말로 기도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기도를 했다. 훈련소 4주가 그렇게 바쁘게 지나 갔지만 그래도 간간히 2-3분이 주어 진다.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을 준다. 어떤 훈련이라도. 그럴 때가 되면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대용 신약성경을 꺼내 들고 몰입하고 읽었다. 어떤 훈련 어떤 기회라도 이렇게 몰입을 하는 행동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3년의 군생활 전체를 통해 내가 약속을 지킬 것으로 보시고 부산으로 보내 주시든 성경 읽을 곳으로 보내 주겠다고 생각을 했다.

4주 기본교육이 끝나게 되자 후반기 교육이 배정 되었다. 나는 모두에게 생소한 정보교육대로 배정을 받았다. 30명인데 심리전 제3기였다. 8주 교육을 받고 나면 최전방 GP에 들어 가서 대북방송을 맡는다. 이렇게 되자 부산 배치는 주지 않으셨고, 그 대신 나의 기도의 두 번째였던 성경 많이 읽을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했다. 심리전 교육생 30명 중에는 김복동 장군, MBC TV 9시 뉴스 앵커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하순봉 등등의 집안이라며 우리 사회 최고 수준들이 보였다. 그런 이름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나중에 알았다. 이들이 섞였다 말은 좋은 곳으로 간다는 뜻이라며 수군거렸다. 그래 봐야 이 노선에 이미 찌든 나에게는 귀에 들리는 것이 없었다. 지금은 옮겨 졌으나 정보사령부의 교육대는 신갈IC 주변 베지밀 회사 바로 옆이었다. 북파 공작원의 훈련을 직접 맡은 교관, 실미도 사건의 생존 간부의 형제였던 교관 등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나 군생활을 거친 이들은 원래 밑도 없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만 수십 년 뒤가 지난 최근에야 공개 된 정부 발표는 나는 당시 세밀하게 알고 있었다. 핵개발 이야기까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신기하게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모르는 일들이 내게는 훗날을 위해 적절히 들려 지고 보여 지고 있었다. 이 곳의 8주 교육에는 총이 주어 지지 않고 필기구만 있다. 뒤에 공회 내에 이 곳을 거친 목회자 자녀들이 몇 있었다. 정보 교육을 거친 이들은 많으나 심리전 교육은 그 인원이 워낙 소수여서 적다. 교육을 직접 맡은 구대장이 거창 사람이었다. 골목까지 서로 짚을 정도였다.

총도 주지 않는 교육, 8주간 대학 강의처럼 보내면서 이렇게 편하고 좋게 보낼 줄은 몰랐다. 그런데 4주의 기본 교육 뒤에 바로 이렇게 편하게 되자 성경을 꺼내 읽는 것이 벌써 좀 달라 졌다. 주변 친구들과 대화도 좀 하고 또 군의 정보 계통에서만 배울 수 있는 많은 교육이 내게는 흥미로웠다. 체질에 맞았다. 모두들 자고 시간만 때우고 있었으나 나는 흥미 진진했다. 집안에 체질 중에 이런 쪽이 가끔 있다. 남들은 쳐다 보지 않고 틈만 나면 시간만 때우고 지나 가고 싶어 하는 군생활인데 마치 안달이 난 것처럼 그런 경우가 있다. 내 위에 형과 내가 그렇다. 주일 때문에 또 술 담배 때문에 믿는 표시는 너무 강하게 내면서도 전쟁에 대해서는 너무 집요하게 또 작정한 사람처럼 행동이 보이니 주변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사랑이라든데 너는 왜 생사를 걸고 죽이는 기술에 그렇게 집착을 하느냐고 이상하게 본다. 미국에서 신학교 기숙사에서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가장 잔인한 전투 장면이 나오면 나만 열심히 보고 있었다.

공회 신앙은 환란 속에 승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세상 직업 중에서는 군대와 제일 맞아 떨어 진다. 백 목사님은 불신자 시절에 한 번 울어 본 적이 있다. 식민지 출신이어서 내 나라를 위해 군인이 되어 보지 못한 것 때문이다. 일본군의 행진을 보며 일본에서 부럽기도 하고 억울해서 울었다. 원수의 나라에 군인은 하기 싫었다 한다. 나의 체질은 전쟁이다. 이순신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묘하게 마음 속에 무슨 느낌이 있다. 이순신은 맹장이거나 검술사가 아니다. 늦게 무장이 되었다. 말을 잘 탈 줄 몰라서 다리도 다치고 낙방을 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이 전쟁에는 딱 맞았다. 집안에는 많지는 않으나 좀 그런 기질이 흐른다. 그런데 백 목사님의 설교가 딱 이순신 식의 준비와 수행이다. 입대 하기 전에 특별히 그런 말씀이 많았다. 그러다가 입대를 했고 훈련을 받게 되니까 다른 사람들은 시켜서 마지 못해 군가를 부르고 훈련을 받고 있었으나, 나는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죄를 짓게 하는 저 귀신과 싸워 이겨야 하는데 군대라는 조직과 운용과 교육의 전부는 육체의 전쟁인데 이 것을 신령하게 바꾸어 보면 정확히 백 목사님의 설교가 된다. 그래서 군가를 불러도 적과 싸워 이기자는 내용으로 악을 쓰며 군가를 부를 때 나는 그 가사의 적을 마귀로 잡고 신앙의 전투를 하는 마음으로 군가를 불렀다. 그러다 보니 비록 최고는 아니라 해도 모든 면에서 참 모범적이고 좋은 군인으로 보였다. '고지를 향해'라는 대목이 나오면 신앙의 막 바지를 향해 끝까지 인내하는 신앙의 내면을 생각하며 군가를 부르고 모든 훈련 행동을 그렇게 하다 보니 사격까지 아주 좋은 점수가 나왔다. 저 귀신을 한 방에 틀림 없이! 이런 생각이었다. 군에서는 인사를 할 때 구호를 붙인다. '충성'이라고 할 때 나는 계시록 1장 5절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의 충성 의미를 막 배우고 갔다. '충성'이라고 경례 할 때마다 계1:5을 새김질했다. 위에서 볼 때 다른 것들은 마지 못해 끌려 가고 군기가 들어서 그렇게 하는데, 나는 좋아서 신이 나서 힘껏 하게 되니 이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훈련소 연병장에 모인 첫 날에 당시 유행가로 제일 유명한 사람이 혜은이라는 가수의 감수광이었다. 전부가 떼창을 하는데 내가 그 가수가 누구냐 그 노래 가사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이 한 마디로 바보 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공회, 서부교회, 우리들의 평균 신앙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을 그토록 몰랐다. 제대하기 직전에 조용필이라는 사람이 활동을 재개한다고 모두들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나는 누구냐고 다시 물었다. 이미 3년을 함께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 때는 모두가 하기야 모르겠지 라는 표정이었다.

(맹호부대, 수기사)
원래 심리전 교육을 거치면 무조건 최전방 GP로 간다. 내 앞에까지는 군의 부대 배치는 교육 내용에 별 상관 없이 가는 대로 보내 지고 현장에 도착하면 반영이 될 수도 있고 그냥 지나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받은 교육만은 참모총장 명의로 특별 관리를 하여 전문성에 문제가 없도록 했기 때문에 교육대에서 과거와 달리 또 다른 교육생들과 달리 무조건 가는 곳은 최전방 대북방송요원으로만 간다고 했다. 가는 곳은 전방이나 방송만 틀어 놓으면 할 일은 없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102 보충대를 통해 정작 발령을 받은 곳은 맹호부대로 잘 알려 져 있는 수도기계화사단이었다. 102 보충대에서 며칠을 기다리는 동안 모든 사람은 수기사를 가면 제일 고생한다고 모두들 수군거렸다. 65년부터 73년까지 월남전에 참전한 부대였다. 그리고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 제일 중요한 위치에 최강의 전력으로 배치를 시켰다. 이 부대는 간부들이 월남에서 전투를 직접 거친 관계로 살벌했다. 나는 이 부대와 전혀 상관이 없어 수군거리는 소리를 넘겨 들었다. 그런데 며칠 뒤 부대를 배정하는데 수기사였다. 여러 번 확인을 했으나 확실했다. 이 부대는 보직에 상관없이 이 부대만의 기초 교육을 새로 받는다고 했다. 전쟁을 실제 해보니 훈련소 훈련은 아이들 율동이란다. 논산훈련소 4주 교육을 받고도 팔꿈치가 까지지 않았는데, 이 부대의 기초교육을 받으니 1주만에 피가 흘렀다. 전쟁을 한 군인과 후방 군인은 눈빛과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난다고 말한 백 목사님의 말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았다.

수기사의 특징은, 다른 부대는 어디를 가도 막 시작하는 군인들이 제일 팔팔하고 1년 2년 시간이 지나면 벌써 동작이 느려 지며 대충 하는 모습이 보인다. 수기사는 첫 날부터 군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얼굴 빛에 근육이 달랐다. 제대하는 마지막 군인들은 확실히 몸이 달랐다. 1년의 기도와 4주 훈련 기간에 정말 열심히 성경을 읽는 모습을 보고 군 3년을 마음껏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셨는데 8주의 교육 기간에 해이해 진 모습을 보고 가장 혹독한 곳에 담가 버리셨다고 느꼈다. 너무 확실하게 느껴 졌기 때문에 회개는 달리 할 것 없이 논산훈련소보다 훨씬 힘든 수기사 교육대에서 더욱더 성경을 읽었다. 담배 한 대 피는 시간만 주어지면 나도 모르게 성경을 꺼내 읽었다. 이 부대는 너무 중요하고 너무 힘이 드는 곳이어서 한 번 배치를 받으면 이 부대 내에서는 이동을 시켜도 이 부대 밖으로는 전출을 시키지 않았다. 병사들이 부정으로 움직이면 기강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다시 모든 교육을 새로 다 받아야 했고 딱 1주일이 되었을 때 아침 첫 훈련을 위해 모두 현장으로 간 상태에서 갑자기 훈련소 전체에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훈련생 이영인 이병, 긴급히 본부로 오라' 연속 나오고 있었다. 조교 한 사람이 나를 데리고 긴급히 달리면서 '야, 너 무슨 일이 있어!'라고 했다. 집에 부모가 죽어도 이런 식으로 호출하지 않는다. 본부로 들어 서자 모두들 나를 보며 '야, 너 아버지 뭐 하는 사람이야!' '너, 인적 사항 적어 낼 때 제대로 적었어!' 정신이 없었다.

좀 있으니 명령서를 준다. 너 우리 수기사로 온 것이 잘못 되었다고 5군단 본부로 전출이라 한다. 일반 사병은 전출이 없다. 무슨 특수 요원도 아닌 그 흔하디 흔한 이등병 하나인데 참모총장 명의로 공문이 내려 왔다고 한다. 군에서 부대 배치는 아직도 숫자만 채워 보내면 알아서 한다. 063, 이들에게는 처음 보는 숫자다. 정보 병과 중에서 심리전인데 일반 사단에는 없다. 전방의 군단 사령부에만 몇 명 있을 뿐이다. 훈련소 본부의 모든 간부들이 너 아버지 누구냐고 묻는 소리에 나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외며 그렇게 기뻤다. 중3의 가을소풍에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 몰래 타고 간 산 꼭대기 택시를 타고 내려 올 때의 기분과 같았다. 1주일간 열심히 성경을 읽었던, 바로 그 행동적 회개를 주님은 보셨다.

(5군단 사령부)
3-40명이 1개 소대다. 4개 소대 160여명이 모이면 중대다. 4개 중대 7-800여명이 모이면 대대다. 4개 대대가 모여 3천여명이 되면 사단이다. 4개 연대 1만명이 조금 넘으면 사단이 된다. 4개 사단이 모여 5~6만명이면 군단이 된다. 휴전선을 5개 군단이 지킨다. 5개 군단에 30명을 고루 나누었다. 내가 속한 제5군단에 5명이 배치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GP로 배치 받아 철책선 안으로 들어 가는데 나는 철책선 밖에 있는 삐라 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북한에 전단을 보내는 부대다. 바람이 북쪽으로 불 때만 가능하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 외의 시간은 완전히 자유였다. 한 주간에 성경을 1권 읽을 수 있는 정도였다. 마침 부대를 책임 진 분은 내가 주일 때문에 본부에 처음 오자 바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GP의 방송요원으로 보내지 말고 자기가 데려 가겠다고 했다. 몇 명이 가족처럼 따로 사는 파견부대였다. 책임자가 호의적이었다. 신앙 생활을 최대한 보장할 테니 마음껏 하라 한다.

중부 전선 제일 북쪽에 있던 이 곳에서 이제 제대 할 때까지 있어야 한다. 이 곳에 와서 자리를 잡고 보니 1년의 기도와 훈련 기간에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행동으로 주님 앞에 긍휼을 구한 것을 모두 다 받았다. 이 부대의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다. 제대 후에 육군본부 방첩대 출신 반사, 철원의 산야를 휘어 잡았다는 반사들이 어느 날 서부교회 청년들이 자는 방에서 밤새 군대 갔다 온 이야기로 정신이 없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의 평생 하는 그런 이야기다. 둘 다 나이가 두 살 위다. 나는 당시 노동을 하다 새벽 예배 때 일어 나지 못할까 싶어 이 방을 이용할 때다. 잠을 자기 어려워 두 사람이 재우려고 한 마디 거들었다. 방첩대에 방첩 요원도 있고 밥 해 주는 식모도 있는데 어느 쪽이요? 그러나 입이 닫혔다. 정말 뭔가 한 사람들은 그 때 일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 옆에서 구경을 한 사람들이 온갖 이야기를 한다. 또 한 사람에게는 나 금잔디요 라고 했다. 그 말이 나오자 '그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까 봐 기고 살았다'고 한다. 내가 막 갔을 때 그 사람은 제대 할 때쯤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는 군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이등병 달고 그 곳에서 대위들을 상대했다. 주변 부대들은 나를 북한에 드나드는 북파 요원인 줄 알았다. 나는 배정 받은 부대에 밥을 하던 식모였는데. 그리고 내가 근무한 부대에 하사관 교육 6개월을 받고 온 11명이 한 기수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나, 이 부장인데 앞으로 말을 높여'라고 부탁을 했다. 몇 명 있는 파견 부대에 밥만 하던 이등병에게 새로 임관한 하사 11명이 5군단 곳곳을 들쑤기고 다니다가 고양이 앞에 쥐가 되어 버렸다. 주눅이 들었던 그들에게 밥과 반찬을 하나씩 들고 이 곳을 방문한 부대장의 식탁에 음식을 나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이 있어 부대장과 부대 하사관 간부들이 식사 하는 자리에 들어 가자 하사들이 내게 '이 부장님!'이라며 바짝 얼어 차렷 자세를 해 버렸다. 한 순간에 부대장과 하사관 간부들은 눈치를 챘다. 나는 별 것이 없는데 왜 다른 사람들이 먼저 떨고 먼저 알아 봐 주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하사들이 제대할 때까지 내게는 늘 '부장님'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3년을 지나다 보니 나의 신앙 생활은 내 평생 지금까지 그 때처럼 자유로웠던 때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간에 유일하게 세상 생활을 해 봤다. 집에서 학교만 다니고 이후 신학교를 거쳐 교회 생활만 했다. 노동과 장사는 해 봤지만 세상의 조직생활은 없다. 그래서 내 평생에 세상 속을 제대로 들여다 본 것은 군 3년이 전부인데, 이 기간을 통해 나는 세상을 읽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회든 우리를 위해 필요한 과정은 전부 주신다. 내게도 주셨다. 내게만 특별히 주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주시는 기회를 잘 챙긴 사람과 무심코 지내 버린 사람이 있다. 세상을 평생 겪고 살아도 세상을 모르는 사람이 있고, 관심을 가지고 말씀으로 세상을 제대로 들여다 보면 세상에 많이 있었다고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 절감한다.

(제대를 하게 되면서)
수 많은 일화를 남기며 제대를 하게 되었다. 제대하는 마지막 날, 철원 시내로 갔다. 그 곳에는 별별 종류의 군부대와 철원의 지역 사회인을 엮는 유지가 나와 헤어지며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나를 3년간 신앙 생활하도록 모든 배려를 베푼 부대 책임자와 세 사람이 함께 했다. 술을 권했다. 나는 믿는 사람이라 술을 먹지 않는다니까 상대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난 3년간 내가 활동한 모든 행동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일반 사병이 철원이라는 군부대 밀접 지역에 와서 각 군부대의 날고 기는 사람들이 별별 일을 하던 일에 마치 뭐나 된 것처럼 움직였는데 술도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훗날 내 뒤를 맡은 후배와는 마음에 딱 맞게 큰 일들을 마음껏 벌였다. 이 정도로만 표현하는 것은 그 당시의 규정만 놓고 본다면 나는 그런 규정에 별로 얽매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 손에 나를 위해서는 단 1원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있던 파견 부대를 잘 가꾸어 모두에게 좋게 잘 살도록 했다.

부대 내에서는 독실한데, 내가 맡아 처리하는 방식은 너무 달랐기 때문에 나를 맡았던 부대 책임자는 지금까지 나를 잊지 않고 전화를 한다. 그 책임자는 국방부에 원사가 되어 관련 업무의 군 총책임자가 되어 퇴직했다. 부공3 동역자의 자녀 한 사람이 심리전 쪽으로 교육을 받게 되어 전화를 한 번 한 적이 있다. 현직에 있을 때다. 바로 배려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다 서울에 서인교회를 개척하게 되고 세종시에 대동교회를 개척하게 되면서 그 분은 내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그 분의 고향이 바로 대동교회 생활 거리에 있었고, 그 분의 거주지가 서인교회 개척한 첫 예배당 바로 옆이었다. 그 분은 내게 전화를 한 번 더 하게 되면 공회 교인으로 붙들리게 되는 끔찍한 상황을 계산했을 것이다. 여수까지 찾아 오며 그렇게 늘 가깝게 연락을 했는데, 결국 나는 이 노선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그 분은 나를 계산하면서 대했다는 것이니 이 노선 목사로서 적어도 나는 충실했다고 생각한다. 국방부 관련 부서의 총 책임자였지만 1978년에 거쳐 간 사병 한 사람인 나를 평생 기억하고 먼저 늘 가깝게 했다는 것도 반갑고, 나를 이은 후배는 제대 후 나와 연락이 되지 않자 내가 부산에 산다는 것만 알고 부산의 신문에다 대고 나의 호출명칭을 광고를 해 버렸다. 연구소에 출장을 갔을 때 연구소 소장은 신문에 나온 내 호출 표시를 보여 주어 연락을 다시 하게 되었다. 내 호출 번호는 '금잔디 이부장'이다.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그런데 아이들 장난이 아닌 그 이상의 경험을 하게 했다. 지금도 교회와 내가 접하는 세상 누구와 대화를 해도 최소한 내가 상대방을 파악하는 데는 별 불편이 없다. 마치 백 목사님은 일제 때 식민지 10대 후반의 청년으로 3년을 일본에서 별별 일들을 하고 왔다. 그런데 그 수 없는 이들이 그렇게 했음에도 그들은 그들의 한계를 벗어 나지 못했으나 백 목사님은 그 3년을 통해 평생 목회와 성경 연구와 신앙 생활을 두고 세상을 파악하는 데 불편이 없었다. 내게는 군 3년이 그렇게 지나 갔다. 목사님과 나만 그렇겠는가? 주님은 모두에게 각각 필요한 별도의 맞춤 현실을 주신다. 받아 놓고 버린 사람은 버렸기 때문에 모른다. 받아 쥔 다음에 유심히 살펴 본 사람은 주신 것을 쥐고 이후 다른 사람이 된다. 설교록에 다 있는 말씀이다. 모두들 나보다는 유리하고 나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에게 쥐어 준 주님의 현실과 견학과 체험을 생각 없이 떠 내려 보냈다. 나는 쥐어 준 것을 잡았던 것 같다. 목사님만은 못하지만 적어도 공회 내의 다른 사람보다는 좀 낫게 붙든 느낌이다. 바로 이 느낌 때문에 나는 지금도 내가 접하고 지도하고 대화할 수 있는 분들에게 기회만 있으면 이 노선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접하는 현실이 전부 말로 할 수 없는 보배라며 애를 태우고 그 현실을 잘 들여다 보시라고 권한다. 이 피 토하는 심정을 알아 듣는 사람이 없다. 더 구체적으로 적으면 보다 명확해 질 것 같다. 그런데 이 이상으로 적으면 너무 많아서 세상적으로나 신앙 자율면에서 효과가 없을 듯하다.

(원래, 이 글은 군 생활의 실패다.)
나는 군 생활 3년을 끝내면서 돌아 볼 때 어떤 때는 1주에 성경 1독을 했다. 그러나 3년 내내 거의 다 매주 1독을 할 수 있는 그 기회에 성경 1독을 하는 대신에 내가 과거에도 또 앞으로도 다시 체험할 수 없는 세상의 깊은 세계를 들여다 보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세상에 대하여 요목요목 아는 것은 대부분 그 때 알게 된 것이다. 필요하면, 내 취미기도 한데, 실탄을 마음껏 넣고 들판에 쏘아 댔다. 훈련이 없고 어느 정도 보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실탄 소비를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술로 노름으로 다른 일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총을 잡고 연구도 하고 사격도 했다. 한 번은 실탄을 확실히 뺀 상태에서 바로 후임의 옆에 누워 그의 얼굴에 정조준을 했다. 그리고 발사를 하려다가 그냥 총을 제 자리에 놓았다. 혹시 싶어 약실을 보니 총알 하나가 장전이 되어 있었다. 나는 살인자가 되고 그는 사망할 뻔했다. 얼마나 놀랐겠는가, 식은 땀이 주욱 흐르고 있었다. 한 번은 귀찮게 하는 고양이를 잡으려다 오발이 되었다. 내 다리 하나가 날아 갈 뻔했다. 사격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대여서 모두들 3년을 시간만 때우고 있는데 나는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보고 있었다. 흥미롭게 또 연구해 가면서. 그들의 눈에는 군인이 되기 위해서 태어 난 사람처럼. 그런데도 술 담배는 심부름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아찔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공회라는 신앙은 왜 저렇게 호전적인가, 왜 저렇게 사랑적이거나 부드럽지 않은가? 그런데 저렇게 확실하게 선을 긋고 사는가... 그들은 평생에 나를 접할 기회가 있으면 그 때를 말한다. 최근에는 내 부대에 몇 달 있다 간 분이 전화가 왔다. 그 때를 더듬으며 또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 신앙으로 보면 특이하게 목사를 할 선배였는데, 평소 언행은 너무 거칠었다고 그 정도가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였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내게 마음껏 성경을 통달할 기회를 주셨고, 나는 신앙의 계율적인 면으로는 선을 넘지 않았으나, 목회자가 되어야 할 나의 기준으로 보면 세상에 3년을 나갔다 온 세월이 되었다. 1980년 7월 9일, 내가 제대하는 날이 다가 오면서 별별 사고가 이어 지며 제대 후 새로 출발할 나의 신앙을 미리 경고해 주고 계셨다. 제대를 해도 1981년 3월이라야 3학년에 복학을 하게 되니 그 동안 또 노동을 하게 되었다. 8월 집회를 다녀 오고 8월 말 어느 날 시골에서 불러 들인 밑에 동생과 금산에 기도를 하러 하루를 가게 되었다. 70인 바위로 갔다. 1960년대 백 목사님이 집회를 하다가 대구로 옮겼는데 아직도 그 곳은 과거 집회할 때 형태가 남아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오후 내내 뜨거운 햇빛 아래 기도를 하면서 왜 군 3년을 세상 공부만 하고 성경에 통달하지 못했을까? 군 3년을 돌아 봤다. 그리고 나는 내 평생을 결정할 해결을 받았다.

백 목사님에게 와서 배우니 뭐든지 해결이 되었다. 뭐든지 기적이었고, 항상 행복했다. 구름 위를 다니는 느낌이다. 서부교회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믿는 청년들과 교인들의 평균이 그랬다. 모두들 눈빛이 다르다. 저 멀리 길을 걸어 가도 발걸음이 다르다. 이런 이들이 반사를 했으니 세계 최대 주일학교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군 3년을 통해 나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백영희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 분의 지도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나의 신앙은 좋았다. 그런데 군 3년을 통해 백영희와의 관계가 끊어 져 버리게 되자, 비축한 전기가 바닥난 배터리처럼 빈 껍데기만 남았다. 처음 몇 달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게 되자 과거 잘 믿던 습관이 나를 끌고 가고 있었으며 나의 신앙의 열기는 식어 져 가고 있었다. 나의 신앙은 백영희의 신앙이지 나의 신앙이 아니었다.

이제 제대를 했다. 백 목사님의 연세는 71세다. 요즘으로 치면 80대 후반 90세 정도라 할 수 있다. 아직도 나보다 더 오래 살 건강을 가진 분이다. 그런데 언젠가 저 분이 돌아 가시면 나의 신앙은 군 3년처럼 되면서 점점 더 세상 쪽으로 가게 될 것 같다. 백영희 사후의 내 모습이 그 날 금정산 기도 중에 보였다. 군 3년 중에 나는 주변으로부터 잘 믿는 사람으로 박수를 받고 본보기가 될 만한 일들을 열거하라면 얼마든지 많다. 그런데 신앙이 특별한 인간이 저 모양이냐고 비판을 받게 된다면 이 역시 적지를 않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이 노선의 내막과 성격을 잘 몰라서 남들이 공연히 더 칭찬하거나 괜히 그들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속에 있는 불덩어리다. 내 속에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나의 신앙의 실체다. 이 것이 3년을 지나면서 분명히 식고 있었다. 만일 백 목사님이 돌아 가신다면 나의 신앙은 어떤 모습일까. 그렇다, 군 3년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백영희가 없는 상황, 백영희 사후의 나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감사, 또 감사, 결심, 다시 결심)
군 3년을 위해 1년을 기도했고, 훈련 기간 내내 2-3분을 아껴 가며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주님은 내 평생에 지금까지 어떤 사람의 군생활과 비교를 해도 나만큼 군 3년에 성경을 읽을 기회를 받아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군생활 중에 주일과 계명을 지키려고 순교를 각오했어야 할 청년이, 또 군 생활 중에 온 부대에 전도인이 되고 목사가 될 내가 모두에게 어리둥절한 사람으로 제대를 하게 되었다. 신앙은 확실한데 세상을 살아가는 면을 볼 때는 타고 난 군인이 되면 좋을 사람이고, 세상을 살아 가며 어떤 형편에서든지 해결을 하며 대처를 해 나가는 인물로만 내가 남겨 졌다. 이 노선의 설교와 이 노선의 신앙 기준에서 보면 군 3년을 지나 가면서 점점 식어 져 가면서 믿기 전의 사람으로서는 괜찮을 정도지 이 노선이 만들 사람은 아니었다. 이 노선이 만드는 사람은 내가 근무하던 철원 지역 일대에 총공회 교회가 개척이 되고 그 곳에 근무했던 이들은 나의 근무 3년을 통해 다니엘이 왔다 갔다는 이야기를 남겨야 했다. 홍순철은 그러했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백 목사님이 앞으로 돌아 가시게 되면 나와 우리 공회 모든 인물들이 백영희 신앙노선의 총공회와 서부교회는 과거 그러했다더라, 그런데 현재 볼 때는 여전히 신앙은 특별한 것 같은데 저렇게 싸우고 저렇게 상식에 없는 행동을 하고, 저렇게 불신자도 흉내내지 못할 독하고 악한 행동을 할까... 이런 기록들을 백 목사님 사후 30년간 공회들은 보여 주고 있다. 바로 이 모습들이 나의 군 3년 모습이다. 다행히 나는 1980년 8월 어느 늦은 날 오후에 금정산 70인 바위의 맞은 편에서 내리 쬐는 햇빛 아래 미리 그렇게 되지 않도록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백영희가 없는 사후를 이제부터 준비하자!!!

이 날, 이 오후,

오늘까지 나는 내 생애 전체를 통해 이렇게 기쁘고, 이렇게 천하를 얻게 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된 적이 없다.
앞 날에 달려 갈 방향과 노력할 내용이 손바닥에 적힌 글처럼 명확하다면, 나머지는 어떤 과정과 노력이 들어도 상관이 없다.

나를 봐서,
나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지켜 볼 때,
지금은 나와 그들이 앞서고 뒤서면서 백 목사님의 뒤를 따라 가며 한 무리의 총공회 교인들이며 서부교회 교인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백영희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데려 가버리면 공회는 어떻게 될까?

이들 중에 신앙이 괜찮아서 지도급이 될 정도의 사람들까지 거의 다 나의 군 생활 3년처럼 될 것이다.
나보다 더 나을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이나 나는 6개월을 버텼다면 그들은 1년이나 몇 년이지 그 이상일 것 같지 않았다.
대부분은 나처럼 6개월 안팎일 것이고, 신앙이 나보다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영희 장례를 치면 그 날로 끝일 듯했다.

이 날부터 나의 모든 신앙의 자세는 설교를 들을 때나 그 언제 어느 순간에도 '백 목사님이 이 순간 돌아 가신다면'이라는 가정을 했다. 그래서 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오늘 설교가 마지막이라면, 이렇게 들으니 과거 듣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들린다. 또 예배를 마치고 나면 그 시간에 궁금한 것을 바로 질문을 했다. 백 목사님의 설교는 새벽 7회, 대예배 4회다. 주일 오전과 오후는 시간이 되지 않으나 수금요일 저녁 예배와 평일 6번의 새벽예배 뒤에는 목사님이 기도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바로 질문을 했다. 내 마음 속에 의문 되는 것은 전부 다 물어 봤다. 돌아 가실 때까지. 자연스럽게 나처럼 물어 볼 사람이 있었다면 그 시간만 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마주 쳤을 것인데 나처럼 물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 달렸고 1등을 했다. 백영희라는 인물이 생존하던 1989년까지, 1980년부터. 10년을. 교역자회든 권찰회든 반사회처럼 행정적인 문제와 설교 내용과 성경 해석은 물론 내가 살아 가며 접하는 모든 생활과 직업과 공부와 교인의 지도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뭐든지 질문을 했다.

이 분이 오늘 돌아 가신다면, 나는 이 분 대신에 이 분이 지금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을 내가 대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단순히 묻고 답을 받아 오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할 때는 어떤 때 어떤 일을 어떤 방식으로 지도를 하는가, 이 면을 지켜 봤다. 생각 없이 일을 하는 사람과 그 일을 연구하며 일을 하는 사람은 두뇌 차이에 상관 없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질문을 할수록 이제 다음 질문을 할 때는 미리 어떤 답이 나올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설명을 해 나갈 것인지를 미리 답을 마음에 두고 간다. 그리고 말씀을 하면 내가 준비한 것과 맞춰 본다. 자꾸 같아 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예배 때 성경 본문을 목사님이 부르시기 전에, 최근 설교들과 오늘 예배의 시작 기도와 찬송을 선택하는 것으로 볼 때 오늘 설교는 본문이 어디가 되고 설교 방향은 이렇지 않을까 라며 마음을 앞세우다 보니 실제로 백 목사님이 예배를 시작하고 설교를 하기 전에 본문을 말하기 전에 본문이 전혀 달라 지는 곳을 미리 성경을 펼칠 때도 있었다. 그 때 서영준 목사님이 제일 앞 자리에 나란히 앉았었고 본문이 달라 지는데 본문이 나오기 전에 성경을 미리 펼치자 서 목사님은 약간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서 목사님은 목사님의 후계자로 지명이 된 분이다. 나 개인적으로 너무 존경하는 분이다. 군에 가기 전 자신의 군 생활 이야기를 하면서 백 목사님의 5월과 8월의 집회를 모두 참석하라고 하셨다. 그 분의 그 말씀 때문에 나는 기적적으로 5월과 8월의 집회를 참석하게 되는 일들이 있었다. 바로 그 분 옆에서 본문을 먼저 펼치게 되면서 나는 그 분께 '당신의 앞 선 지도 덕에 제가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마음만 전하며 참으로 감사했다. 그 분도 그런 세계를 나보다 훨씬 앞서 했을 분이다.

1989년 8월 27일 백 목사님이 순교 하기 전, 1년 전부터 나는 장례를 준비했다. 몇 달 전부터는 장례를 주일로 예정하고 구체적으로 준비할 내용을 적어 놓았다. 1987년 8월 15일에 서영준 목사님이 돌아 가셨고 장례 일체를 내가 주관하게 되었는데 그 때 경험 때문에 구체화 할 수 있었다. 이 준비 때문에 나는 대구공회 핵심들로부터 백 목사님을 살해하고 서부교회와 총공회 교권을 잡기 위해 청부살인을 했다고 여수경찰서에 고발을 당했고 조사까지 받았다.

1989년 백 목사님 사후 오늘까지 31년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최소한 백 목사님이 돌아 가신 뒤에도 후퇴는 하지 않았다. 군 3년을 통해 아무리 신앙이 펄펄 살아 있다 해도 백영희로 배운 나의 신앙에 백영희를 빼 버렸을 때 어떻게 될까, 이 문제를 실제 겪어 봤고 그래서 준비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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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 역사의 양면 (1) : 선교는 좁게, 복음을 널찍하게.
담당 | 2020.05.23 | 추천 0 | 조회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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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1
한국 선교 역사의 양면 (2) : 분열된 선교사들과 선교지 분할
담당 | 2020.05.28 | 추천 0 | 조회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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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7
한국 선교 역사의 양면 (3) : 왜 흑인 선교사는 단 1명도 없었는가?
담당 | 2020.05.30 | 추천 0 | 조회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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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5
집회의 계시록 공부를 거치며
담당 | 2020.05.16 | 추천 0 | 조회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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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7
재난구호금, 공회의 지혜 (6)
회원 | 2020.05.15 | 추천 0 | 조회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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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0
그림과 글자 - 성경 기록의 방향에 대하여
담당 | 2020.05.09 | 추천 0 | 조회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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