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21) 백영희를 소개한 분들, 보물을 소쿠리에 끌어 담다. -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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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6
나는 공회에서 비판을 제일 많이 받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1989년 백영희 살인범, 1990년 서부교회와 총공회를 깬 인물, 1997년 백영희 자료 절도범, 2019년 저작권 등 전과 10범? ...


공회 전체가 가장 비판하던 각 시기에 이 몹쓸 사람을 향해 최고의 기대와 후원을 보내 주신 분들을 돌아 본다.
나쁜 아이였던 창동교회에서 나를 가르친 손용모 선생님, 이준원 박병은 신영철 장로님은 나를 목사님의 후계자로 평가했다.
나를 백 목사님 살인범이라고 대구공회가 마음 먹고 소문을 낼 때, 박윤철 목사님은 나를 총공회 최고 전문가라며 상대했다.
부산공회가 1993년부터 나를 밀어 낼 때, 초등 6학년 담임인 천세욱 목사님은 내게 백 목사님 후계자의 기대를 접지 않았다.
서윤호 부공2 목사님은 친형 서영호 목사님은 공회를 모르는 사람이며 나만 백 목사님 뒤를 이을 신앙과 실력자로 봤다.
1989년 백 목사님 사후부터 이민영 연구소장은 나 하나가 서부교회와 총공회 전체를 상대하고도 남을 실력자로 봐 줬다.
백 목사님 7남매 중 백도광 백순희 백명희 백도영 4명은 내가 도와 드리면 서부교회와 총공회를 붙들 수 있다고 봤다.
이신영 손돈 김형렬 목사님들은 내가 홀로 외롭게 되었을 때 나 하나를 믿고 따랐으며 2012년까지 그들의 생을 내게 맡겼다.
이 분들 외에도 자신들의 결혼과 직업과 학업과 벌어 놓은 돈과 인생을 나의 지도에 따라 던지고 바꾼 이들이 수백 명이다.

비록 숫자는 많지 않으나 인간적으로 나같이 몹쓸, 이런 사람에게 이렇게 극단적인 지지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맡긴 분들을 생각하면 감사할 뿐이다. 이 정도면 나는 나와 상관도 없이 나를 비판하는 전국 200여 총공회 교회들이 뭐라 하든 사람 복은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한 목회자를 두고 출석 교인으로 맺어 진 숫자가 아니라 인생과 신앙에 직접 영향을 크게 받은 면으로 본다면 백 목사님 다음으로는 내가 되지 않을까? 연구소 사이트를 통해 남 달리 맺어 진 관계는 더욱 많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런 분들보다 나를 만든 분들을 나의 보물로 따로 기억하며 늘 감사한다. 나는 이 분들 때문에 보물을 소쿠리에 끌어 담았다. 손가락에 끼는 반지 위의 다이아나 귀에 다는 진주들을 소쿠리에 쓸어 담는다면 굉장하지 않은가?

(손용모 집사님, 창동교회)
1950년 출생이며 이탁원 목사님, 윤창근 장로님과 거창 창동교회의 친구분들이다. 이탁원 윤창근 두 분은 내가 주일학교 때 반사 선생님들이었고 손용모 집사님은 나를 직접 가르친 분이다. 분반 공부를 할 때 설교를 하지 못하게 5분 정도 계속 욕을 하고 대들면 무릎 앞에 쌓아 둔 성경 찬송 공과집 노트 4가지를 내 얼굴에 집어 던진 후 나를 잡으러 달려 온다. 그렇게 그 날의 주일 오전 예배를 망쳐 놓는 것이 나의 목적이고 선생님은 그 것을 알면서도 다혈적인 성격 때문에 끝내 참지를 못한다. 이 정도 학생이 내게 걸렸다면 내가 경찰서를 가더라도 해결했을 것이다. 그 분은 이런 나를 중학교 1학년이 되자 백영희 목사님을 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은 고교 3학년이었다. 내가 중학교로 올라 가자 선생님은 부산으로 갔다. 백 목사님 밑에 직접 배우기 위해 서부교회로 갔는데 1970년 9월 추석 때 불신 부모님 때문에 고향을 왔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백 목사님과 서부교회 이야기를 했다. 누가 보면 부산에 간 시골 청년의 목격담이다. 내게는 늘 겉돌던 '백영희' '부산 서부교회'가 내 마음에 각인이 되었다. 시골 처녀가 서울 이야기를 들으면 무조건 상경을 하던 시절이었다. 공수부대 모집 행사가 거창읍 학교 마당에서 벌어 지면 끓는 피를 참지 못하던 청년들이 지원을 하던 때다. 내게는 어떤 충격도 그냥 넘어 갔다. 손용모 선생님의 부산 이야기는 내게 철 없는 그리고 이유도 없는 동경을 심어 놓았다.


(전성수 목사님, 창동교회)
1971년 봄에 남해로 가야 했던 전성수 목사님이 예상치 않게 창동교회로 부임을 했다. 목사님은 내게 백영희라는 인물을 상대하는 기본 자세를 심었다. 따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 분의 몇 마디와 행동을 보면서 내 눈과 귀를 통해 영구 보존용 동영상과 음성 자료가 되었다.

전화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한 번은 200미터 거리에 있던 교회로 가서 부산 목사님께 전화를 하시라고 전달을 했다. 집에 와서 전화를 하는 전 목사님은 무릎을 꿇고 받았다. 사극에서 임금님 앞에 불려 간 신하의 모습이었다. 그 한 장면은 내게 평생 목회자에 대한 기본을 심었다. 굳이 말하자면 백영희 목사님을 대하는 자세다. 그 모습 그 충격 그 생생한 학습은 50여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흐려 지거나 퇴색이 없다. 나는 백 목사님의 자녀들을 대할 때 지금도 그렇게 한다. 정말 피치 못할 순간만 조금 변색을 하지만 내적으로는 늘 극히 미세한 면까지 계산을 한다.

매월 첫 주일을 지난 월요일이 되면 전성수 목사님은 부산에 교역자회 때문에 간다. 아침 일찍 어머니께 늘 하는 부탁을 반복한다. '제일 좋은 사과'를 백 목사님께 가져 간다. 심부름 하는 어머니도 또 부탁하고 가져 가는 목사님도 임금님께 올리는 진상품의 자세였다. 그 때는 부사가 나오기 전이다. 주먹 만한 것이 가장 크다. 한 바구니에 10개 이상이 들어 간다. 어머니가 사오는 것은 5개 정도면 꽉 찬다. 최고의 최고, 조심에 조심, 정성에 정성! 그냥 눈에 본 그대로 내게 심어 졌다. 하나님의 종은 이렇게 대하는 것이다! 이런 강의 이런 교육이 따로 없었다. 아무 말이 필요 없었다. 원래 어머니는 목회자에 대해 지극하다. 전성수 목사님의 백 목사님에 대한 정성과 최선은 더욱 극진했다. 8월 집회가 되면 어머니가 강사실에 필요한 것을 맡았다. 이제 이 때가 되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백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한 마디 하면, 전 목사님은 그 한 마디를 들고 벌벌 떨었다. 그리고 딱 그대로 실천을 해서 끝을 내야 야는 사명감은 최전선에 선 군인이 목숨을 걸고 돌진하는 모습이었다. 주저함이 없었고 그 비장함이 그러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8월 집회를 위해 도평 기도원에 처리할 일은 참으로 많다. 백 목사님의 지시나 뜻이 내려 오면 그 때부터는 그러했다. 1970년대까지는 공회 교회가 4-60개였다. 거의 대부분 다 그러했다. 그러나 전 목사님을 옆에서 접하면 다른 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홍순철 목사님과 두 분이 특히 그러했다. 홍 목사님을 직접 접해 본 것은 1976년 2월로 기억 되는 창동교회 사경회 때 한 번이다. 전 목사님은 1971년부터 돌아 가실 때까지였다.

1973년? 일지를 봐야 정확히 아는데 늘 숫자는 혼동을 한다. 한 번은 둘째 주일 오후 예배가 끝난 다음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예배당의 톱밥 난로 옆에서 '루터가 깨달은 것을 칼빈이 정리했다. 내가 깨달은 것을 정리하라'는 유언적 글을 읽어 주셨다. 전 목사님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서렸다. 그런데 왜 이 것을 내게 읽어 주셨을까? 목사님 말씀으로는 이 글이 발표 되자 모든 목회자들이 일제히 서로 칼빈이 되겠다며 그 동안 필기한 노트를 주제별로 재 분류에 들어 갔다 하며 어떤 분은 스프링 노트를 구입하여 주제 별로 분량을 조절한다는 이야기까지 해 주셨다. 전 목사님은 이 귀한 정보를 독점하는 자기 중심의 악이 없었다. 참 진실했다. 전 목사님은 자신이 그런 정리자가 되기를 가장 원하는 분이다. 그런데 그 분은 동시에 다른 사람도 함께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당시로 봐서는 이런 문제를 두고 너무 어려서 해당도 없는 내게까지 소식을 전했다. 바로 이 순간, 나는 복음이라는 보물을 상대하는 자세를 봤다. 나는 물론, 나 외에 함께 가질 사람을 위한 자세다. 내게는 원래 이런 자세가 없었다. 이 순간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백영희 관련 모든 자료를 수원의 수산교회처럼 나만 독점하고 수십 년을 버티며 아무에게도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했다면 저작권 때문에 7년간 수도 없는 고소에 고초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천국에 가면 전성수 목사님께 떳떳이 설 것이다. 최소한 이 문제를 두고는, '조사님은 제게 그 때 그 모습을 보여 주셨고, 저는 훗날 이 노선 자료 전체를 독점하게 되었을 때 무제한 무조건 살포 했으며, 그렇게 한 것은 바로 조사님께 배운 덕입니다.'라고. 그 분은 지금도 나를 향해 그 분의 그 특유의 미소와 함께 나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할 것이다.

1975년 2월쯤일까, 고교 3학년으로 올라 가는 직전에 대학과 전공을 생각할 때다. 나는 사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주일 날 우연히 그런 말씀을 드렸다. 전 목사님은 '백 목사님은 목회자들에게 법학을 원한다. 그래서 나도 청량리교회에서 낮에는 장사를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면서 밤에는 건국대학교 법학과 야간을 졸업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목회 소망도 아닌데 법학을 택했다. 따로 이래라 저래라 군소리 잔소리가 없는 분이다. 그냥 말과 행동을 통해 간단히 스쳐 지나 간다. 그런데 너무 강렬하여 내게는 그 때마다 각인이 되었다. '건국대 법학과' 그 분의 입에서 나온 첫 소리가 부화 된 새에게 들리고 보인 첫 모습이 어미가 된다. 이 며칠을 놓치면 야생이 된다. 거창고교 전체 10등 이내 성적이 계속 될 정도였으므로 사학과는 어디든 마음에 든든했으나 법학과로 인식이 되는 순간 대학입시에 대한 심적 부담이 너무 강했다. 그래도 그냥 가야 할 외길로만 여겨 졌다.

1975년 11월 초로 기억되는 '대학입학 예비고사일', 학교에서 전체 20등 내의 학생은 졸업 때까지 출석을 면제해 주면서 전국 어느 학원에라도 가서 본고사를 준비하라 했다. 출석으로 쳐 줬다. 이미 3학년 올라 가자 말자 전체 20등 내의 학생은 3학년 1년 내내 단 1시간도 정규 수업을 참석하지 않고 학교 반지하 도서실의 지정 좌석에 앉을 수 있게 했다. 나는 두세 명 친구와 함께 1년 내내 거의 수업에 들어 가지 않았다. 그 학교는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이 없었다. 속에는 진심과 열정과 실리적 과정이 넘쳤다. 최근 외부에 알려 진 그 학교의 내용은 실제와 판이하다. 서울로 올라 간다고 전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서울은 사직동교회가 공회 교회들 중에 중심이며 제일 컸다. 학원이 바로 걸어서 다닌 광화문이다. 사직동교회로 간다고 말씀을 드렸다. 당연한 줄 알았다. 목사님 얼굴에 갑자기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며 '서울에는 청량리교회가 있는데... 백 목사님이 서부교회에 계시면서 청량리교회를 개척했는데...'라고만 하셨다. 나는 서울을 몰랐다. 사직동교회 신도범 목사님이 총공회에서 백 목사님 다음인 줄 알았다. 그 것이 창동교회의 분위기였다. 전 목사님의 분위기가 너무 딴판인데 목사님은 더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 때 이 표정, 이 때 그 말에 담긴 뜻과 우려는 오늘까지 내가 다른 사람을 지도할 때 늘 반복 되는 자세다. 백 목사님이 1959년부터 잠깐 청량리교회를 순회했을 뿐이다. 이후 목회자는 다른데도 그 이유 하나가 신앙의 소속을 결정하는 이유여야 하는가?

1976년 2월, 나는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사직동교회를 학원 때문에 이미 50일을 다녔다. 전성수 목사님은 2가지를 부탁했다. 서울에 가거든 공부만 하지 말고 서울의 여기저지를 좀 다니면서 뭐가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 말씀은 하나도 실천하지 못했다. 교회 학교만 오갔다. 전 목사님은 이 부분을 많이 아쉬워 했다. 나는 그 뜻을 알아 차리는 데 세월이 많이 걸렸다. 또 한 가지는 '방학이 되면 집으로 올 때 거창으로 바로 오지 말고 부산에 가서 백 목사님께 김봉선 집사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집에 가는 길에 들렀다며 인사를 드리고 오라'고 했다. 나는 참 희안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거창 시골의 내가 서울에서 공부하다 거창으로 오지 않고 부산으로 가서 인사만 하고 온다? 그 것도 백 목사님이라는 그 위대하고 굉장한 분에게? 얼마나 바쁠 것이며 어디 나를 알기라도 할 것이며, 그리고 공회 전국 교인이 그런 식이라면 그 분은 인사만 받다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겠는데... 참으로 참으로 이상한 지시였다. 바로 이 지시 때문에 나는 오늘의 나를 만들 수 있었다. 나는 대학교 2학년을 올라 가며 부산으로 편입을 했고 서울에서 집으로 오갈 때 부산에 들런 적이 없다.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너무나 깊게 내게 심겼고, 1976년 12월에 부산으로 편입을 위해 내려 가면서 감히! 백 목사님을 직접 찾아 가게 했다. 방학 때 잠깐 인사 하고 갈 수 있다는데 이런 진로 문제로 가는 것은 어느 정도 갈 수 있다고 봤다.

나는 1976년의 5월과 8월 집회를 마음 편히 정식으로 참석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백 목사님 밑에 가서 직접 배워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 1976년 1년 동안 사직동교회에서 신도범 목사님께 배우면서 나는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았고 내게는 신도범 목사님이 백 목사님과 같았다. 그런데 집회 때문에 자꾸 내려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신 목사님께 가서 여쭸다. '백 목사님께 부산으로 가서 직접 배우고 싶습니다.' 신 목사님은 '갈 것 없다. 내가 매월 가서 배우고 와서 그대로 전하기 때문에 목사님께 배우는 것이나 내게 배우는 것이다 같다'고 하셨다. 이해가 되었다. 5월과 8월 집회를 마치면 집회 말씀조차 다시 복습을 하는데 노트조차 보지 않고 정확히 반복하신다. 또 나는 이미 신 목사님께 배우면서 성경 전체에 대해 모두를 깨달았다 할 세계를 만났다. 지식으로는 갈 것이 없는데 자꾸 마음이 부산으로 향했다. 거창에 와서 전 목사님께 이 말씀을 드렸다. 전 목사님은 백 목사님과 같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 분이 그냥 부산으로 가라 하면 나는 갈 터인데 언제든지 결정이 필요하여 물으면 목사님은 마지막 결정은 알아서 하라고 빠진다. 물론 양쪽의 비교도 아주 최소화로 간단히 말을 한다. 내가 신도범 목사님의 입장과 공회의 내부 여러 상황과 백 목사님의 길을 명확히 아는 데는 세월이 참 많이 걸렸다. 그 때는 무지했기 때문에 무조건 부딪힐 때다.

바로 부산으로 갔다. 수위실에서 백 목사님을 찾았다. 4층 사무실에 계신다고 했다. 방문을 노크했다. 백 목사님과 추순덕 집사님이 계셨다. 꾸벅 인사를 했다. 창동교회 김봉선 집사가 어머니라 하자 너무 반가워 하신다. '제가 지금 서울 사직동교회에서 대학교 1학년을 끝냈습니다. 부산에 와서 배우고 싶은데 신 목사님께 여쭈니 가지 않아도 같다고 합니다.' 백 목사님은 너무 환하게 웃으시며 '아니지, 여기 와서 배우는 것이 낫다. 신 목사에게는 내가 전화를 해 주지'라고 했다. 나는 이 한 마디가 신 목사님께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때는 몰랐다. 또 목사님이 이렇게 대화하는 수가 없음도 몰랐다. 내가 너무 무지하니 순수하게 보시고 일반적인 지도의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목사님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믿는 사람은 공부도 잘해야 돼. 너 몇 등 하나?' '겨우 따라 가는 정도입니다.' 건국대 법학과는 90명 모집에 10명은 고시용으로 서울대 입학권 학생에게 파격적인 장학금과 혜택을 주고 영입했고 그 10명은 나머지 80명과는 수준이 아주 차이가 났다. 나는 입학도 90명 중에 제일 끝인 줄 알았다. 11등은 가능해도 10등 안에는 들어 갈 상황이 아니다. 목사님은 '하여튼 1등 해라'는 말씀으로 끝을 냈다. 나는 돌아 서면서 참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서울로 가서 편입 서류를 요청했다. 학적부에서 '자네는 편입 서류를 발부할 수 없네' '학생이 편입을 하겠다는데 무슨 말인가요?' '자세한 것은 학장에게 가서 직접 물어 보게. 대학의 허락 없이 편입을 하면 바로 군으로 가야 하네. 일단 현행 법이니 더 이상 말 할 것도 없고...'

학장에게 갔다. 학장은 대뜸 '자네, 부산으로 스카웃 되었나? 우리 학교가 같은 대우 해 줄 테니 그대로 있지' 알고 보니 90명이 2학년에 올라 가면서 법학과에 36명이 지원을 했는데 내 성적이 1등이었다. 학교에서 고시반으로 관리하는 학생으로 표시를 해 두었다. 그 순간 부산의 목사님 말씀과 표정이 떠올랐다. 온 몸이 쩌릿했다. 현재 학교는 고시 성적으로 학교의 수준을 높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야구부와 법학과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호소를 했다. '실은 스카웃이 아니라, 백영희 목사님이라는 분이 부산 서부교회에 있는데 제가 법학과에 온 것은 그 분이 목회자 될 사람은 법학을 하라 해서 한 것이지 고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그 분의 연세가 높고 교단의 신학교가 부산에 있어서 제가 부산으로 가야 목회자 과정도 밟고 또 학교 공부도 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 문제일 뿐입니다.' 목회자 과정은 양성원을 말하는데 허락을 받기 위해 양성원을 곁들였다. 사실 목회자가 되겠다는 것은 애매한 소망이었지 당면 일정은 아니었다. 그냥 그 분께 배우는 것이 절대 목적이었다. 학장의 허락을 위해 내세웠다. 학장은 너무 아쉬운 표정을 하면서도 승인을 해 줬다.

바로 부산으로 왔다. 당시 국립대학은 편입제도가 없었다. 서부교회 바로 위에 있는 동아대학교가 서부교회를 다니며 대학을 공부하는 대안이다. 학교에 가자 편입 마감일이 하루 지났다며 신청을 받지 않았다. 서부교회에 왔다며 하룻밤 신세를 지든 또는 학교 안내를 받든 이탁원 윤창근 두 선생님이 내게는 어릴 때 선생님이어서 찾아 갔다. 마감일이 넘었다 하자 윤창근 선생님이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야간에 동아대학교 법학과를 다니고 계셨는데 편입 서류를 보자 하고 성적이 굉장히 좋다며 아는 교수에게 부탁을 해 보겠다고 했다. 학교에 서류를 보여 주자 마감일이 지났는데도 접수를 시켰고 합격이 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 나는 '전성수'라는 목사님이 백 목사님을 향하는 마음, 그 자세, 그 가치 평가를 오늘까지 기억한다. 나는 전 목사님의 설교에서 받은 은혜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전 목사님께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 그 분의 신앙 전심과 충성과 자세 때문에. 훗날 주남선 목사님을 살피면서 전 목사님이 그런 유형이라고 생각했다. 손양원은 설교로 유명한 분이다. 설교로 유명한 이야기가 넘친다. 주남선 목사님은 학적으로도 설교 은혜면으로도 또 행정 처리면으로도 무슨 기록이 없다. 그런데 그 분을 접한 분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평생 기억한다.

나는 서부교회에 간 이후, 명절 등에 집을 찾을 일이 있으면 반드시 목사님을 찾아 '내일 거창 집에 다녀 오겠습니다.' '오늘 거창에 좀 다녀 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다녀 오면 목사님께 '잘 다녀 왔습니다.'라고 인사를 꼭 했다. 서부교인과 백 목사님을 직접 접해 본 사람이라면 이 것이 가능하다 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나뿐이었다. 그래서 모르는 분들은 내가 백 목사님과 관계가 굉장한 줄 안다. 나도 그런 인사는 꿈도 꾸지 않았다. 전 목사님이 너무 자연스럽게 당연한 듯이 말을 했고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게 되었다. 전 목사님 때문에. 그리고 그 날 설교 중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예배 후에 출입문에 기다렸다 꼬박꼬박 질문을 했다. 고향 다녀 온다고 인사도 하는 사이인데 설교 질문이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주일학생 8천명에 반사 보조 반사가 1천명, 출석 교인이 수천 명, 구역장만 150명, 전국 100개 교회 목회자들이 각 교회의 절박한 일로 질문을 하는 것도 어렵다. 일단 죄송해서라도 직접 전화를 하거나 찾아 뵙는다는 것은 어렵다. 나중에는 백 목사님만 아는 직통 전화까지 받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백영희 목사님이 살아 계시는 이 순간, 이 세계의 중심은 서부교회요 하나님의 종은 우리에게 그 분 하나로 보면 된다. 부산은 현재 예루살렘이다' 이렇게 내 머리에 지워지지 않도록 새겨 놓은 분이 전성수 목사님이다. 누가 들으면 이단 교주 소리가 나올 것 같다. 그 분은 실제 그렇게 살았다. 내게 가끔 접촉을 하면서 나는 그런 물이 묻었다. 이 것이 pkist 연구소를 운영하며 나의 평생을 돌아 보지 않고 쏟고 있는 방향과 추진이 되었다.

나는 이 글을 적으며, 이 글을 접하는 이들이 생전의 백영희보다 훨씬 나은 사후의 백영희 설교와 그의 모든 자료 일체를 상대하며 그를 생전에 접할 때 나와 같이 마음껏 접해 보면 좋겠다. 나는 백 목사님께 질문을 하는 사람이 수백 명씩 늘어 서서 기다릴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감히 줄에 설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목사님의 마지막 14년을 나는 그 분에게 언제나 전화를 들었고 언제나 찾아 뵙고 뭐든지 다 여쭈었으며 지도를 요청했다. 어떤 때는 돈놀이 하는 법을 부탁했다. 설교 중에 돈놀이를 예로 들었는데 마침 고향 집을 판 돈이 현금으로 있을 때였다. 주택을 사고 팔면서, 그리고 백 목사님이 나의 집안을 잘 아니 나의 형제 간의 재산 분할은 아예 안 된다며 단호히 말씀을 했으나 1985년에 재산 분할을 하고 보고를 드렸다. 바로 이런 순간 백 목사님은 끈질기게 붙어서 묻고 말도 되지 않는 말로 그 소중한 목사님의 시간과 체력을 소모 시키던 나에게 소망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나는 이 노선 공회를 아는 모든 이들이 이미 가신 그 분을 생전처럼 상대할 수 없으나, 모든 분들이 생각할 착각, 생전을 놓쳤으니 기회가 없고 나는 생전에 황금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내가 무제한 무조건 30년을 퍼 나르고 공개한 자료 속에 생전보다 나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나는 그 분에게 정말 그 분의 시간도 그 분의 매 순간의 중요한 처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전성수 목사님의 분위기에 취하여 소모를 시켜 드렸는데, 내가 멋 모르고 얻게 된 그 가치를 알기 때문에 이제 모든 분들에게 그런 기회를 드리는 것이 내가 백 목사님께 빚진 것을 조금이라도 갚고 또 전 목사님이 나에게 방향을 잡아 준 것처럼 적어도 나도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글은 적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인숙 권사님, 부산 서부교회)
나 권사님은 일제 때부터 믿은 분이다. 부친이 수원에서 일제 때 택시 12대로 사업하던 거부였고 무남독녀로 자랐다. 귀하게 자란 모든 면이 평생 그 언행에 녹여 있었다. 서부교회의 구역은 주일 오전과 오후와 수요일 금요일 밤 예배라는 4회의 대예배를 각 1점씩으로 계산하고 총점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만사에 대우했다. 이말출 구역이 1천점을 넘겼고 김현찬 김효순 그리고 4번째가 나인숙이었다. 그래서 네 분을 권사로 세웠고 교회의 모든 면에서 네 분은 교회의 4개 기둥처럼 되었다. 물론 네 명을 넘어 서는 분으로 추순덕 집사님이 있었다. 그런데 서부교회로 합류한 것이 좀 늦었고 또 연배가 1983년에 일찍 돌아 가셨기 때문에 모르는 분들도 많다. 생존해 계셨더라면 4명 권사 전체를 이겼을 것이고 주도했을 것이고 백 목사님 사후의 서부교회는 저렇게 허무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성수 목사님은 나를 데리고 서부교회에 처음 갔을 때 추 집사님께 맡아 달라고 바로 부탁을 했다. 그러나 나와 같은 경우는 백 목사님이 직접 구역을 배정한다며 목사님께로 보냈고 목사님은 잠깐 생각하시다가 나인숙 구역으로 배정을 했다.

1977년 2월, 대학 편입이 결정되고 구역이 정해지자 권사님은 서부교회 본당 옆계단의 2층과 3층 사이에 있던 방 3칸 중에 1칸을 숙소로 사용했고 나는 그 곳에서 권사님을 뵐 수 있었다. 권사님에게는 경남 중고교를 나오고 대학을 거쳐 교사로 계신 외아들 김 집사님이 있었으나 웬지 내가 아들 같고 김 집사님은 어머님의 숙소의 본 자리? 앞 자리?를 내게 살짝 비켜 주는 듯했다. 신앙에 일편단심인 어머니에게 교사 생활을 하는 자신과 서부교회로 와서 생을 바치는 나를 비교할 때 어머니 마음을 읽는 듯했다. 나는 밤낮이고 어떤 때고 권사님을 찾았다. 내가 들어 가면 평생 그렇게 좋아서 어쩔 줄 몰랐고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들렀다.

나 권사님은 구역 순위로 추순덕 집사님이 한창일 때는 5위였고 추 집사님 사후에는 4위였다. 그런데 추 집사님 구역에는 서부교회의 남 청년 주력이 다 있다 할 정도였다. 이말출 구역은 이말출 권사님 자신이 재력가였으며 사범학교 교수를 지낸 인재였고 교인들의 숫자와 재력이 제일 많았다. 김현찬 구역은 숫자는 조금 떨어 졌지만 사회 기준의 인물과 재력가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막상 교회가 필요할 때 동원하는 돈은 이말출 권사님 구역이 먼저 였다. 김효순 구역은 3번째였다. 나인숙 구역에는 남자 청년들이 적었다. 그러나 홍순철 목사님이 나 권사님 구역이다. 이 1명이 서부교회의 나머지 남반을 혼자 능가할 분이다. 일찍 목회를 나갔고 1977년 35세로 가셨다. 백 목사님의 후계자로는 서영준 목사님보다 앞섰고 독보적인 분이다. 이 노선의 훗날을 오늘처럼 어렵게 만드시려고 하나님께서 일찍 데려 가셨다. 나로 보면 홍순철 전성수 서영준 추순덕 4명 중에 1명만 계셨다 하더라도 평생 그 분들의 심부름만 하고도 오늘보다 비교하지 못할 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이 4명은 백 목사님의 후계자로 모든 면에서 자격과 실력과 위치가 있는데 목사님 보다 먼저 다 가셨다. 모두를 다 데려 가시다 보니 나 같은 사람이 저작권 고소에 목표가 되고 백 목사님 사후에 이런저런 역할을 맡는다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 벌어 졌다. 아쉽다.

나 권사님 구역에는 말하자면 홍순철 이후 이후에 뚜렷한 인물도 없었고 남자 청년 자체가 적었다. 정영덕 윤창근 등의 이름도 얼마든지 나보다야 훨씬 앞 서 있지만 교회 전체를 통해 중심에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와중에 내가 대학교 2학년으로 오게 되고 백 목사님은 강단에서 '서울의 유명한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 이 말씀 때문에 내려 온 청년'이라고 설교 중에 칭찬 사례를 이어 갔고 나는 2류도 되지 않는 학교를 다니다 서울에 있으나 어디 있으나 애매한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서부교회로 내려 온 상태였기 때문에 백 목사님의 지나 친 칭찬이라고 생각했지 한 번도 그 말씀이 적절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런데 백 목사님이 '어디든 뭐을 하든 1등을 하라. 공부도.' 라는 말씀이 나온 이후의 나의 기록은 1등이나 1등 이상의 내용을 가진 일들이 평생 줄을 이었다. 원래 잘하던 사람이 1등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을 해도 내심으로는 자기 실력을 기억하겠지만 나는 워낙 2류에서 3류 사이를 오가던 사람이기 때문에 백 목사님 말씀 뒤에 이어 진 모든 기록들은 그 분의 축복에는 하나님의 유효적 결과가 있다는 것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1977년 3월 동아대학교 2학년 1학기 첫 수업부터 나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서 교수가 들어 오기 전까지 성경을 펼쳐 놓고 읽었다. 6-80명 되는 전공과목 수강생들과 눈을 마주 칠 일은 거의 없었다. 길을 가면 기도하는 마음이고, 앉으면 성경을 읽고, 꼭 대화가 진행되는 시간에는 전도만 마음에 두고 이야기를 했다. 나 때문에 교회를 출석한 친구가 한 명, 두 명, 세 명.. 늘고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나인숙 권사님께 꼭 인사를 시켰다. 주일학교 반사들은 1970년부터 전도가 폭발적으로 늘어 나면서 11977년 3월에 내가 서부교회에 왔을 때는 걸어서 나오는 곳의 아이들은 이미 교회를 다니다가 중단을 했거나 하도 많은 반사들이 손을 대는 바람에 모두 차를 타고 멀리서 왔었다. 1년 먼저 온 친구가 장림으로 간다면서 영도 감천 장림 등에서 1명 반사가 100명씩 데려 오는 상황이며 교회 주변은 서부교인이거나 아니면 교회를 다니다 포기한 아이들이나 몇 있으니 멀리 가라 했다. 나는 설교 때 배운 대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를 거쳐 그 다음에 땅 끝이라도 멀리 간다는 그 원칙을 지켰다. 갈 때 가더라도 예배당 앞 골목부터 훑었다. 1978년 2월에 입대를 할 때까지 나는 50여명 학생들을 모두 걸어서 오는 주변에서 모았다. 그리고 걸어서 오는 반으로서는 내가 제일 많지 않았을까 싶다. 그 때는 따로 비교할 일도 없고 그럴 틈도 없었다. 이 모든 과정에 늘 권사님을 찾았고 보고를 드렸고 권사님은 매 예배 후에 예배 때 말씀으로 요약, 정리, 질문, 대화를 했다. 나 권사님께 남반 교인으로서는 내가 거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나 권사님은 교회의 십일조를 맡고 있었고 이 업무 때문에 백 목사님께 혼자 업무를 보고하고 지시를 전할 일이 많았다. 최소한 다른 권사님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나 권사님은 그런 기회에 나의 언행 하나하나를 전부 목사님께 보고를 드렸고 또 목사님의 마음을 내게 전했다. 목사님 이름은 전혀 말씀하지 않고. 만일 목사님께 보고하고 또 목사님이 그러시더라고 했다면 나는 목사님을 의식해서 행동이 지나 쳤거나 영향을 받으면서 순수하게 자라는 면이 흔들렸을 듯하다. 백 목사님은 인간적 가감이 들어 가면 초정밀 기계처럼 바로 파악하는 분이다. 그 많은 사연은 다음에 다른 기회에 소개해야 할 듯하다. 사연도 많고 그 사연은 오늘 백영희 설교나 공회 자료만 접하는 이들에게 이미 가신 그 분을 각자가 생활 속에 그 때의 나처럼 상대하게 할 듯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백 목사님 생전에 그 분을 접하지 않은 분들이 그 분 생전에 그 분을 접하며 신앙생활을 직접 지도 받는 그런 효과가 있을 듯하다. 아마 대부분은 나 정도는 될 듯하고 가끔 나보다 분명히 앞 설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보다 앞 서는 분이 나타 난다면 나는 그 분을 오늘의 백영희 2세로 상대하며 그에게 배우고 그에게 내가 순종하고 역할을 함으로 나의 원래 위치와 나의 수준에 맞는 나의 사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나는 체질적으로 충신형 인간이지 머리 노릇하는 지도자형은 되지 못한다. 집안의 내력도 그렇게 평생 살아 온 것도 그렇다.
그런데 나를 지도하기에 넉넉할 분들은 일찍 돌아 가셨고 아직도 생존해 있는 분들은 스스로 이 노선에서 벗어 나 버렸다.
나만 남겨 지는 바람에 혼자 달리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1등은 뻔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1등도 1등이라 할 수 있을까?
이 것이 공회의 서글픈 현실이다. 백 목사님의 자녀들이 저작권 문제로 고소를 하고 달려 들었다면 내가 아니라 대구공회에 계신 원로들 중에 내가 주일학교 때 나를 가르친 대선배들이 백영희 설교를 무차별 살포를 하다 먼저 사격을 받았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들 주변에서 그들을 심부름 하다가 방조 혐의로 처벌을 받을 정도라야 한다. 내가 주범이 되다니? 내가 수괴가 되다니... 부산공회에도 이진헌 김응도 목사님이 그렇게 되고 나는 그들의 그늘에 가려 방조범은 고사하고 구경꾼에 그쳐야 하지 않을까? 이진헌 목사님은 내가 1971년 가을인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 창동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그 분은 설교 시간에 '백영희 목사님이 이 길이 틀렸다고 나간다 해도 나는 이 길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리고 1997년 여름까지 그 분은 내가 하는 일이면 무조건 그 분의 모든 것을 걸고 도왔다. 그 분은 이 노선 이 말씀을 외부에 전파하는 것이 목회보다 더 귀하다며 목사를 그만 두고 연구소 직원으로 지원을 하고자 한 분이다. 많지는 않으나 적지 않은 분들이 나보다 앞 서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왜 나만 남고 다른 분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나 권사님은 알고 보니 나를 만들어 갔다. 단 한 번도 나에게 이렇게 해야 목사님께 인정을 받는다, 그래야 교회나 공회에서 올라 갈 수 있다... 라는 개념이 없고 그런 언급도 표시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분 때문에 채색 없는 투명 유리를 통해 목사님과 또 하나의 연결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 왔고 이제 공회적으로 활동을 시작해야 할 시점, 나는 그 때 나 권사님이 나를 위해 어떻게 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인격이 얕은 분들은 한 번 수고를 하면 열 번이나 생색을 낸다. 이 분의 깊이는 불신 때 집안에서 자라며 가진 품성에서 또 백 목사님 밑에서 제대로 된 수련을 겪으며 나를 잘 조련했다. 백 목사님이 직접 지도하는 듯이 자신을 유리처럼 만들었다. 나는 그 분만 상대했는데 나는 목사님과 직접 상대하듯 되었다. 권사님을 통하지 않고도 나는 내가 여쭙고 싶은 것은 목사님께 늘 직접 상대를 했다. 이 직접 상대와 권사님의 간접 상대가 참으로 조화롭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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