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10) 나의 총공회 1등 기록들 - 혼자 달리니 민망했다.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19.09.24
(혼자 달려 1등한 기록들)

* 서부교회를 다니려고 편입한 경우
돈이 되고 성적이 되면 무조건 서울로 간다. 나는 서울에서 백 목사님께 배우고 싶어 대학 2학년으로 올라 가던 1977년 2월에 부산으로 편입해서 내려 왔다. 백 목사님 목회 평생에 서울에서 내려 온 사람은 하나라면서 공부 때문에 신앙 문제가 생기면 나를 예로 들었다. 정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포기를 했다면 칭찬할 만한데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성적이 중간밖에 되지 않고 공부가 체질에도 맞지 않으며 졸업해 봐야 딱히 좋은 길도 없는 2류대 학생인 내가 부산으로 가는 것은, 가면 가는 것이지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다. 손익 계산서로 볼 때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목사님은 교인을 지도하면서 세상 공부 때문에 신앙을 손해 보는 교인들이 너무 많고 그런 사람들에게 예를 들기 위해 나를 너무 강조했다. 그 바람에 나는 마치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를 다니다가 부산으로 내려온 사람처럼 과포장이 되어 버렸다. 앞에서 설명을 좀 드렸다.

내가 서울에서 다닌 건국대는 당시 기준으로 3류 정도였고 내가 다닌 법학과는 확실하게 2류 범위였다. 나는 그 학과조차 떨어 질 줄 알았다. 일단 합격을 했으니 졸업할 정도의 돈과 실력은 된다. 그런데 목사님께 배우고 싶어 부산의 동아대학교로 편입을 해서 내려 오자 서울에서 부산으로 신앙 때문에 온 첫 경우라 한다. 혼자 달려 1등을 한 것이다. 착실한 사람은 자기 현실을 쉽게 바뀌지 못한다. 나는 철이 없을 때 제 멋대로 살았는데 이제 신앙이 들자 비록 좋은 결정이지만 역시 제 멋대로 해 버리던 습관 때문에 이렇게 쉽게 옮겼을 뿐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백 목사님께 아주 좋게 보였다. 1등을 한 것이다. 과거 명절에 귀성 차량으로 전국의 고속도로는 주차장이 된다. 그 때 혼자 서울로 올라 온다면 아무리 고물차라도 부러운 것이 없다.

내가 1976년 사직동교회에 다닐 때, 나야 건국대가 나로서 한껏 올라 간 학교였으나 교회 안에는 과연 공부에 관해서는 나와 아득히 높은 세계에서 산 분들이 많았다. 서영준 서헌제 두 분은 막 부산이나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사직동교회 출신들이다.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와 법학과 졸업생들이다. 이의용 선생님은 데모하다 군대로 끌려 갔고 서울대 의대 2학년에 복학을 했다. 이의용 선생님 동생은 서울대 건축학과를 다녔다. 지금 고신의대 외과 중심에 있는 신연명 장로님은 중앙대 의대를 다녔다. 연세대 이화대를 손꼽자면 자리가 부족한다. 나는 고무신을 신고 일용 노무자 가방을 허리에 안고 학교를 다녔다. 서울 바닥이 어딘 줄도 모르는 시골 출신이다. 이 맛이 뒤에 보니 공회다.

공회의 수준은 모든 면에서 정말 낮다. 그렇다 해도 전국 교회가 있고 또 서부교회는 세계 10대 교회이다 보니 인재는 있다. 겉으로는 목사님 말을 듣는 것 같아도 자식 공부만은 가지 못해서 있지, 갈 만하면 거의 다 서울로 갔다. 일단 서울로 간 사람이 내려 온 경우는 없다. 그래서 나를 치켜 세우고 전체 교인들을 지도하신 것이다. 그 과정에 나는 목사님의 선전물이 되었다. 선전물은 보기에 좋아야 한다. '서울에서 좋은 학교를 다니다 내려 왔다.' 이 말씀 때문에 교인들은 마음 속에 '서울대'를 생각했다. 나중에 '동아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라는 말에서 '1등 졸업'만 다시 새겨 진 모양이다. 그리고 세월이 좀 지나자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이라는 인물 소개가 돌아 다녔다. 내가 신풍교회를 갈 때 사연이 많았다. 나를 극단적으로 반대 하는 현재 대구공회 측이 호남공회를 거의 독점했고 여수 바닷가의 시골 분들이 젊은 첫 목회자를 받지 못하겠다고 하자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생이며 백 목사님의 후계자'라고 선전을 해서 여수로 끌어 놓았다. 그 것이 내게 오늘의 혼자 달려 1등 하는 신풍교회에 평생 목회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대구공회의 호남지방 지도자들이 지금까지 30년간 고소하고 욕을 해도 '서울대 법학과 수석 졸업생'이라는 말은 그들이 만들어 냈기 때문에 내가 거짓말 했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하여튼 우습기도 하고 재미 있기도 하고 탄식거리가 많다. 내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 온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따로 하고 싶다. 기이한 역사가 너무 많았고 백 목사님이 몇 가지 뿌린 말씀들이 오늘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잘해야 2류인데 1류 위에 올라선 것처럼 되는 과정이 착오로만 끝나지 않았다. 뒤에 보니 그 분의 입에서 떨어 진 말은 결실이 되었다.

공회에는 백도광 서영준 김증한 서헌제와 같은 분들이 서울대 법대 이름으로 유명했다. 김증한 교수님 외에 3명은 목사님이 목사를 만드려고 노력했다. 1명은 생전에, 1명은 사후에 그렇게 되었고, 1명도 신학박사까지는 되었다. 김증한 교수님에 대해서도 목사님은 신앙 본능적으로 목사를 만드시려 했을 것이나 기록상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우리 나라 민법의 대가다. 이런 분들이 백 목사님의 평소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가운데 나의 이름이 공부를 두고 계속 거론이 되자 일반 교인들에게 나의 공부나 학교는 그런 그룹 중 하나로 인식이 되어 버렸다. 서영준 목사님과는 제일 가까왔고 그 분 대신 나를 미국에 보냈셨으며, 서헌제 집사님은 나의 반에서 보조 반사를 거쳤다. 신앙까지 모든 면에서 나보다 훨씬 나은 분인데 서부교회의 내부 분위기에 '반사와 그 보조반사'의 의미는 마치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처럼 여겨 진다. 백도광 장로님이 나를 늘 공회 최고의 인재로 선전하고 다니는 바람에 나에 대한 오해는 더 심해 졌다. 그리고 1986년부터 최근 문제가 되는 386세대를 대학 시절 나는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황당한 일들이 사실처럼 여겨 져 버린 것이다. 공부에 관해서는 너무 무지한 공회 수준 때문에.




* 신학 공부의 경우
1984년에 미국을 가게 되었다. 1983년 5월집회 직전에 연구소 직원으로 있는데 본당 옆 계단에서 갑자기 내게 미국 카브난트 신학교를 가서 신학 공부를 하라 했다. 방정 맞은 내 입에서 대뜸

'서영준 목사님이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했다.
'서 목사가 가면 좋지. 그런데 시간이 없다.' 라 한다.
'저도 시간이 없습니다. 매일 설교 교정 보기에 바쁩니다.'
'그 것은 다른 사람이 해도 된다.'
'제가 가면 타락합니다. 군대 3년 떠난 것이 억울해서 목사님 생전에는 다시는 떠나지 않겠다고 각오를 했습니다.'
'그래서 네게 가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가고 싶어 난리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가면 안심이 안 된다.'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 못 갑니다.'
'잘 생각해 봐라'

이 것이 집회 전에 있었던 대화다. 집회가 끝난 뒤에는 아예 말대꾸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가라.' 그 분이 엄하면 그 눈 빛을 쳐다 보지도 못한다. 집회 전과 분위기가 달라서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가야만 한다면 나로서는 한 가지를 얻고 싶었다. '그렇다면 제가 미국에 가는 대신에 제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목사님께 전화로 여쭐 수 있겠습니까?' '그래, 좋다. 그렇게 하거라. 이 쪽에서 돈을 내도록 걸면 된다.' 이 때부터 돌아 가실 때까지는 나는 목사님 직통 전화로 내가 원하는 대로 여쭐 수 있었다.

백 목사님 생전에 신학만을 목적으로 해외에 보낸 것은 나뿐이다. 나 외에 해외 신학을 공부한 분은 최재현 서영호 송용조 송종관 이진석 류정현 6명인데 백 목사님에게 사후 통고를 했거나 목사님이 막지를 못해서 가게 된 분들이다. 그런데 그 분들은 집안과 학문이 선천적으로 다 뛰어난 인재들이다. 이런 내면 때문에 나만 공회가 유학비 전체를 책임 졌다. 내게 공을 들인 것을 보고 공회를 모르는 분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인재로 오해를 한다. 백 목사님의 절묘한 판단은 이럴 때도 아주 다르다. 너무 우수한 이들을 보내면 신학에 흔들릴 수 있다. 물 만난 고기가 될 수 있다. 나 같이 어중간 한 사람을 보내 놓으면 실력이나 돈이 없어 옆을 돌아 볼 틈이 없다고 봤다. 겨우 외부 세계를 구경이나 하고 오는 사람, 그 것이 나 같은 사람의 수준이다. 나 외에는 세계 신학을 섭렵하고 세계 신학 위에 올라 설 사람들이다. 그렇게 되면 다른 교단은 훌륭한 신학자라고 존경을 하는데 공회는 사람을 버렸다고 오히려 반대로 생각한다.

최재현 목사님은 고신 시절에 갔으니 사실 백 목사님과 상관 없이 갔다. 서영호 송용조 송종관 세 분은 서둘러 목사로 안수를 했고 원래 결혼을 했던 분들이다. 일반적으로 해외 유학 과정에 이성 문제와 신학에 쉽게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결혼과 목사 안수를 기본으로 생각했다. 나는 서부교회 주일학교 반사였고 미혼으로 갔다. 옆에 눈을 뜰 경제나 공부의 실력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본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때문에 나는 백 목사님 생전에 공회의 신학 원칙에 따라 정식으로 미국에 신학 공부를 파견한 유일한 사례다. 혼자 달려 1등을 했다. 실력인가? 신앙인가? 중간쯤이지만 서울에서 공부하다 부산으로 오는 것을 봤고, 성적이 중간쯤이니 신학에 빠지고 싶어도 실력이 되지 않아서 빠지지 않을 것이고, 다윗처럼 아무 것도 아닌 인물이 잘해야 공회적이지 타고 난 유명인이 잘 되는 것은 공회적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어중간해서 선발이 된 경우다. 공회 내에 세상적으로 정말 특급 인물들은 목사님이 아주 시골로 또는 아주 묻혀 살도록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이 빛이 나기 때문이다. 세상적으로도 원래 훌륭했고 신앙조차 정말 훌륭했던 분은 홍순철 서영준 두 분이다. 이 분들은 35세와 39세에 불러 가셨다. 우수한 분들이 없어 지고 나니 2류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 목수가 다듬으려고 고를 만한 목재가 흔치 않다 보니 잡목이 얻어 걸린 것이다. 세상은 재수가 좋다 할 것이고, 신앙의 사람은 귀하게 쓰려고 천하게 보내셨다고 할 듯하다. 그렇다. 세상으로 못난 것이 주님 앞에 소망이 있다. 그렇다면 나 외에도 나 정도 될 사람은 사실상 공회 내에 흔하다. 이 것이 오늘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나를 아이 보듯이 아이 야단 치듯이 하는 이유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그런 취급을 당할 때는 비로소 받을 뻗고 잘 수 있다. 나를 조금 특수하게 보는 눈길이 있으면 나는 바늘 방석이다. 그 시선의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 목회연구소 직원 시험 1등
1982년 9월로 기억이 된다. 연구소에 직원을 1명 구한다고 예배 시간에 광고가 나왔다. 지금은 서부교회로부터 독립한 연구소지만 원래는 서부교회 내에 편집실이었다. 편집실이 출발하던 1982년에 첫 직원들은 공지도 없이 선발이 되었다. 공지 없이 선발 되면서 편집실장이 된 분은 이진헌 목사님의 아들 이민영 선생님이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71년에 이진헌 목사님이 거창 창동교회에 부임했다. 이후로 연구소 노선을 두고 1997년에 나뉠 때까지 그와 나는 부모와 가족과 교인과 천하 모든 사람 앞에서 서로가 제일 가까왔다. 1997년에 설교록 출간 재개로 나뉜 뒤 오늘까지 얼굴 한 번에 전화 한 통화를 한 적이 없다.

예배 때 광고가 나왔고 나로서는 가장 소원하는 자리였지만 이 때 대학 4학년 2학기였고 당시 대기업 입사를 위해 자리를 찾던 중이었다. 목회가 소원이었고, 연구소 업무란 내게는 꿈이었지만 목사님이 불러서 시키던 시대였으니 내가 지원을 하고 말고 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목회 길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우선 취직 자리를 알아 봐야 했다. 대학 2학년 때였던 1977년 여름부터 이미 노동 중에 제일 힘든 노동을 해 봤고 국제시장과 영도까지 다니며 여러 장사를 해 본 상태다. 그래서 언제든 목사님이 불러 주시면 목회 출발을 할 준비는 되었으나 아직까지 딴 말씀이 없으니 이왕이면 일반 사회 기준으로 괜찮은 직장을 잡은 뒤, 목회자로 출발하게 되면 세상에 갈 곳이 없어서 목회를 나오게 되었다는 마음의 짐을 미리 줄이고 싶었다. 이런 마음이 들었던 이유는 우선 백 목사님이 세상 성공을 하지 못하고 목회 나오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 곳 없어 교회 와서 목회하는 사람, 공회에서는 늘 경계 대상이다. 괜찮은 직장을 잡고 싶었던 또 하나의 배경은 나의 사촌 수십 명 중에 공무원 1명이 없고 대기업 1명이 없고 전부 철공장 직공 정도여서 내 마음 속에 나는 세상을 중간쯤에서도 살기 어렵다는 좌절감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학교를 다닐 때 나보다 공부를 못해도 집안에 공무원이 많으면 자기도 공무원 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을 했고 그런 친구들은 그렇게 되는 것을 봤다. 노는 물이 있다는 그런 면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집안 모두가 그렇듯이 공장에서 기술자 하는 것은 쉽게 된다고 생각했고 그 것을 어렵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공직이나 대기업은 아예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되어 있었다. 1982년 가을의 당시 대졸 입사 시험은 1차 시험이 전부 주일이다. 그래서 1차 시험을 보지 않는 2류 3류 회사에 입사 원사를 넣어 봤으나 부산지방의 업체까지 모두 불합격이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 나라 3대 회사로 치던 대우그룹이 그 해만 1차 시험을 서류로만 봤기 때문에 응시를 했다. 부산의 지방 중소기업도 다 불합격이어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합격 통지서가 왔다. 2차 면접은 무사히 통과했다. 뒤에 보니 1200명 모집에 법학과가 120명이었고, 서울에서 1명 대구와 부산에서 각각 1명, 3명을 빼고는 서울대 연대 고대 법학과에서 뽑았다. 당시 대우는 출신학교를 무조건 봤다. 아마 구색을 맞추는데 3명 중에 1명이 된 것 같았다. 합격증을 받자 나는 백 목사님을 찾았다. 서부교회에서 보이는 구덕산 맞은편 꽃마을이라는 산동네에 2층 단독주택을 기도실로 하나 마련해서 거의 매일 가셨다. 바로 올라 갔다.

'목사님, 대우그룹 합격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기뻐하셨다. 서울에서 내려 온 유일한 학생, 대학을 다니며 학교는 다니지 않고 2년을 노동과 장사만 한 학생, 그리고 취업에 자신이 있다 해도 노동으로 나가지 않고 취업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던 청년들 중에 주일 시험을 보지 않고 합격증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기뻐하시는 목사님 표정을 보면서 바로 말씀을 드렸다.

'편집실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광고를 하셨는데 지원하고 싶습니다.'
'편집실? 타자 치면 되니까 아무나 해도 된다. 너는 중간반 반사를 해라. 목회자로 나가려면 중간반 반사를 해야 한다.'
'설교 테이프를 복사하는 일이라고 광고를 들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목사님 설교만 보고 싶습니다. 편집실에 넣어 주십시오.'

목사님은 왜 중간반 반사를 해야 하는지 설명을 시작했다. 당시 중간반은 중학생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서영준 백명희 목사님 부부가 맡아서 매주 2천명을 출석 시키며 재적 학생이 6천명에 이르렀고, 중간반 반사는 목사님이 서부교회 전체 직원과 교인 중에서 늘 직접 챙기는 특수 직책이었다. 온 교회는 중간반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할 정도다. 주일학교는 1978년대에 이미 절정에 이르렀고 이제 주일학교 졸업생을 장년반으로 앉히는 과정에 막중한 직책이었다. 1천명 주일학교 반사와 보조반사 그리고 전체 서부교회와 전국 공회가 백 목사님이 집중하는 중간반 반사를 제일 유망한 청년으로 볼 때다. 지금 전국의 공회들의 최고 실력자들이 되어 있는 분들이 당시 중간반 출신들이다. 대구공회 장신석 서원균, 부산공회 김윤수 이병철 김부호 목사님 등이다. 이들은 군에서 육사 출신처럼, 서울 바닥에 서울대 법대생들처럼 실제 실력도 있었고 모두에게 단연 돋보였다. 그대신 편집실은 연장 창고를 치우고 여상 출신 여학생 몇 명이 타이핑 하는 곳이다. 편집실 이민영 실장은 중간반과 편집실의 대우가 너무 다르다고 늘 그렇게 말할 때다. 실장의 관사는 방 한 칸에 화장실이 없어 교회까지 일반 골목을 80미터 걸어 다녀야 한다. 젖먹이들이 있는데도. 중간반사들은 월급이 2배다. 모든 공과금과 차비를 다 교회에서 지출한다. 물론 수고는 말할 것 없이 많다. 그런데 그런 수고야 목사님 밑에 웬만한 반사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목사님, 저는 오로지 목사님 설교 업무만 하고 싶습니다.
여러 차례 아무리 달래도 전혀 움직이지 않자 목사님은 한 말씀을 하신다.

'그래, 꼭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그대신에 세계 신학을 밟아야 한다.'
'예.'

그 때 성경과 백 목사님 설교 외에는 어떤 외부의 신학서도 읽어 본 적이 없고 모르기 때문에 그냥 답을 드렸다.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도 시험에 필요한 부분만 공부해서 성적만 챙겼을 뿐이고 모든 남는 시간은 성경 읽고, 설교 필기 다시 읽고, 주일학생 심방 전도가 전부였다. 신학서를 보지 않는 것, 이 것이 공회며 오늘까지도 공회의 자랑이다. 그래서 이단이라는 말도 수도 없이 듣고 비판을 받는다. 그래도 또 고함을 지른다. 신학은 필요가 없다!

그런 나에게 '세계 신학을 밟으라' 그 말은 세계 신학에 1인자가 되라는 말이다.
나는 이미 백 목사님의 말은 한 번 나오면 그대로 되고야 만다는 경험을 몇 번 했다. 그래서 이제 어느 정도 느낄 때였다. 하여튼 내가 세계 신학의 1인자가 되라는 말이니 내가 그렇게 될 수 있겠구나! 그 세계를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기억을 해뒀다. 허락을 받은 것이 내게는 컸다. 1982년 10월 5일 오후다. 나는 한 걸음에 교회로 달려 왔고 나는 구역장인 나인숙 권사님을 찾아 갔다. '권사님, 제가 편집실에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세상 그 어떤 합격증보다 더 귀하게 생각한 세계를 손에 넣었다. 그런데 권사님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깜짝 놀랐다. '어쩌자고 교회 직원을 지원했는가!' 나 권사님은 교회 직원들이 처음에는 모두 좋아서 천사가 되는 줄 알고 출근을 하지만 교회 안에서 별별 일을 다 보게 되면서 천하에 제일 몹쓸 사람이 된다며 구체적으로 교회 직원을 거쳐 간 사람들을 일일이 손 꼽아 헤아리고 가정사 개인의 내면사를 소개했다. 나 권사님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교계적 거물이다. 일제 때 화신백화점에서 물품 관리를 했다. 부친이 수원에서 일제 때 택시 12대를 운영했다. 전영창 안용준과 함께 순교자 유가족회의 경리를 맡았던 분이다. 지금은 고신대학병원으로 발전한 초기를 아는 분이다. 신앙의 세계를 위해 수고하는 내부 근무자들의 세계가 어느 지경인지 철 없는 청년에게 억장 무너지는 심정으로 토로하며 취소를 하라고 압박을 한다.

백 목사님 앞에서도 버티며 따온 편집실 직원 자리인데, 구역장님의 만류에 막히겠는가?
그러나 그 날 백 목사님의 한 말씀 '세계 신학을 밟으라'는 말과 '교회 직원은 절대로 해서 안 된다'라는 말은 내 평생을 이끌고 있다. 성경만 가진 이 노선의 삼분론과 건설구원론으로 신학의 학설 중심의 세계 신학이 가진 문제점을 짚고 바른 길을 앞서 열고 나가라는 그 말씀은 내가 늘 마음에 목표로 두고 있는 소망이다. 그리고 이 길을 걸어 가면서 연구소는 말할 것도 없고 연구소를 위해서 개척하고 운영되는 부산공회3의 교회들을 맡고 있는 목회자들과 내 주변에 연구소나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모든 이들에게 '교회 직원이란, 절대로 해서 안 된다!'고 절규한 권사님의 통계적 병폐가 없도록 노력해 왔다. 이 글은 내가 공회 내에서 '1등'을 했던 많은 사례 중에 하나다.

내가 26세가 되던 1982년 10월 5일부터 접하고 연구하고 소개하는 백영희 설교와 그 신앙 자료에 대한 업무를 지금 63세가 된 2019년 9월 24일 현재까지 내 인생 총력을 기울이는 전부로 삼고 있다. 나는 이 직책과 업무가 나의 생과 겹치는 오늘 이 땅 위에 모든 복음 운동과 그 어떤 사명과 비교할 때 최고요 제일이요 유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지금 이 일을 금지 시키려고 수백 건의 고소가 7년을 계속해도 나는 이 일을 후회하거나 섭섭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막는 운동이 극심하니 이 일이 얼마나 더 소중한지 감격스러울 뿐이다. 이런 자리를 두고 제1차 공채 때 나는 혼자 응시했고 혼자 합격했다. 왜 그 많은 서부교인들과 총공회 교인들 중에 단 1명도 지원자가 없었을까?

김윤수 목사님이 한참 잘 나가던 중간반 반사 시절에 편집실 유리 문 앞을 지나 가시다가 나를 보고 '편집실에서는 뭐 합니까? 중간반 반사로 와야지요.' 이렇게 한 말씀을 했다. 지금도 그 때도 그 분은 늘 포근하시고 좋은 분이다. 그 분처럼 사심이 없는 분도 없다. 그 분의 진심을 가지고 그 분이 괜찮게 보던 나를 향해 좋은 뜻으로 주신 말씀이다. 그러나 사실적으로만 말한다면 그 분의 말은 내게 무식한 말로 들렸다. 그 당시 나는 한 마디 했다. '할 일이 없어 중간반사나 합니까? 편집실에서 말씀을 배우는 일이 얼마나 귀한데. 목회 배우는 것은 뒤에 해도 됩니다. 그 분이 한 말은 거의 정확하게 그렇게 말을 했다. 내가 한 말은 취지만 기억한다. 표현은 좀 흐리다. 속으로 느낀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같다. 중간반 반사들은 당시 김윤수 목사님과 같이 귀한 분은 극히 드물었고 이미 요즘 말로 말하면 공무원이 되어 가지고 속으로 곪아 터질 때다. 내가 볼 때는 부패한 불충의 집단이다. 김 목사님이 그 때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면 내 표정에서 무시 멸시의 극단적인 표정과 말투를 접했을 듯하다. 내가 그렇게 막 가도 그 분은 그 때나 지금이나 늘 너그럽다. 아득한 막내 동생을 사랑스럽게 봐 주는 장형처럼 그렇다. 그런 자세는 늘 고맙지만 그 말을 두고는 나는 지금도 우습게 생각한다. 다행스럽게 김 목사님은 1987년에 목회를 출발한 뒤에 평생 '말씀 연구'에도 중간반 때와는 달리 철저하다. 그렇다면 그 분은 목회와 말씀을 함께 중시하는 분이니 나로서 귀한 분이다.

나는 1989년 3월 18일에 신풍교회를 부임하고 제1 조건이 다른 것은 없으나, 나의 목회는 80%가 설교록이고 나의 시간 20%만 신풍교회 목회자로 활동하니 내가 있는 이상 신풍교회는 목회자가 없고 연구소 직원이 설교를 맡고 목회는 최소화한다는 점을 아시고 나를 받아야 한다고 미리 약속을 했다. 백 목사님이 신풍교회로 가라 할 때 나는 연구소와 목회를 몇대 몇으로 해야 하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 때 목사님이 주신 선이 80:20이다. 지금 나의 동역자 중에서는 그렇게 하면 교회 위에 연구소가 자리를 잡으니 교회론에서 볼 때 잘못 된 교회라고 한다. 이견이 있다 해도 나는 이런 조건으로 시작을 했다. 1990년 8월 15일, 백 목사님 사후의 1년 분쟁을 통해 신풍교회 내에서 대구공회에 서는 교인들이 개척해서 나가고 나를 지지하는 교인들만 남았을 때 나는 다시 교인들에게 재질문을 드렸다.


나는 연구소 업무가 평생의 사명이며, 신풍교회는 내가 연구소 일을 하기 위해 근무하는 정도만 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신풍교회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되어 교회와 교인에게 손해가 많다, 이제 부산공회를 반대하는 이들은 일단 나갔다. 부산공회 내에서도 나는 사명이 이 것이다. 목회자가 필요하면 다른 분이 오면 된다. 나는 개척해서 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만일 내가 신풍교회에 계속 근무하면 신풍교회는 연구소를 위한 교회, 연구소를 운영하는 것이 첫 사명으로 삼는다. 이 조건을 두고 다시 시무투표를 통해 각자 확인을 해 주기 바란다. 혹시 내가 목회자로서 문제가 있다면 시무투표 25% 이상이 반대하면 나가지만 만일 연구소 문제로 반대한다면 그런 교인은 신풍교회의 재출발의 약속에 어긋나기 때문에 서로 분리를 하지 목회자 사임으로 이어 지지 않는다고 말했고 이 것에 전원이 찬성을 하고 재출발한 것이 신풍교회다. 그리고 1990년 11월의 시무투표 때 교회 분리 후의 첫 시무투표이기 때문에 다시 이 면을 강조하고 투표를 했다. 한 편으로는 공회의 시무투표이고 한 편으로는 신풍교회는 이영인 목사 시무의 전제 조건이 신풍교회는 연구소 운영을 위한 사명이 제1 순위라는 조건으로 투표를 했다. 전원일치 찬성이었다.

부공3은 이 날 이후 하나씩 개척을 했고 그 때마다 이런 말은 수도 없이 반복했다. 교회 내에서, 집회 때, 교역자회 때, 각 교회의 개척 때마다. 나처럼 정리를 하지는 못해도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최소한 기억은 할 것이다. 최소한 취지는 기억할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부공3의 역사와 그 교회의 출발을 모르는 분들이다.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좌파는 틀렸다고 지적부터 한다. 그래서 좌파의 말은 말이 맞아도 틀렸다. 그 말은 남이 할 말이기 때문이다. 먼저 왜 이 곳은 그런 곳인지 물어야 한다. 묻고 나서 과거에 그랬으니 무조건 따라 간다면 썩은 우파다. 바른 교회는 먼저 묻는다. 모르면 배운다. 애매하면 지켜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틀렸다 싶으면 틀렸다고 말을 하기 전에 그들이 뭔가 그 때 이유나 배경이 있는지 다시 잘 뒤져 보고 묻고 좋은 뜻으로 받아 드리려고 최선을 다한다. 이 것이 백영희의 고신 시절 자세다. 이 것이 공회의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다. 이 것이 공회 행정이 불문법이며 관례를 따른다고 할 때 전제 되는 조건이다. 그런데 아무리 따지고 살펴도 이 것은 반드시 틀렸거나 비록 틀리지는 않아도 고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사안이 있으면 그 때부터 이제 설명을 시작해야 한다. 왜 고쳐야 하는지. 그다음에 따르는 것이 전원일치다. 그리고 이 과정에 앞에 섰거나 이제 공회에 막 들어 온 사람이나 그 누구도 강제하지 않아야 한다. 지도자들은 강제하지 않기 위해 비상존을 말했는데 교인들은 목회자나 지도자에게 비상존을 내세워 자기와 같은 자리에 앉힌 다음에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 버리면 이 것은 공산 혁명을 하는 좌익들의 기생충 수법이다. 그 것은 사기다. 비상존이라는 비교권화는 모두에게 함께 적용된다.


나는 내가 그토록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세계에 뛰어 들어 봤다. 처음에는 무수한 선배들이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이 노선의 제일 중심은 의외로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빈 자리에 앉을 사람이 없어 혼자 신청했고 혼자 합격했다. 알고 보니 혼자 합격한 것도 수석이고 1등이더라. 백영희 설교를 데이타 화를 한 상태에서 누구든지 무조건 무차별 뿌리면 되는데 수원의 수산교회처럼 죽어도 혼자 가지고 내놓지 못하겠다는 분들도 있다. 다른 분들은 그렇게까지 버티지는 않으나 구하는 것은 열심히 구하되 나누는 것은 선별하거나 모른 척한다. 덮어 놓고 막 전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그래서 백 목사님의 자녀 전부가 나 하나만을 저작권 도적이라며 고소를 한 듯하다. 다른 이유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신풍의 시골 교회와 비교할 때 서부교회는 원래 백영희 목회 교회다. 그 교회는 왜 그냥 두나? 총공회 재산이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몰래 등기를 바꾸고 재독만 하는 이들은 왜 그냥 두나? 그들은 말만 그렇지 이익집단이니 나를 끝낸 다음에 그들을 부르면 그들은 버틸 사람도 없지만 지금부터 알아서 기고 있는데 왜 손을 보겠는가? 이 말이 심한가, 전하지 않는 다른 공회들의 그런 행위가 심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 때는 아무나 그 밑에 갈 수가 있다. 혼자 가면 혼자 독점한다. 베드로까지 다 비운 자리기 때문에 그렇게 쉽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기가 있고 밥을 줄 때는 삭개오가 예수님의 얼굴을 볼 방법조차 없었다. 곧 저작권에 대한 대법원 결정이 나온다고 한다. 고소자가 지면 그 때는 7년의 소동을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 일단 이 노선을 두고 나의 이름은 역사에 두고두고 공로자가 될 것이다. 처음 만든 이는 백영희, 그 것을 전한 자는 내가 될 것이다. 이미 1974년경 교역자회 때 이런 내용을 담아서 불러 주시고 교역자들이 받아 적은 내용이 있다. '나는 갑니다. 나는 이제 전할 것을 다 전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말세에 대하여 전했습니다. 루터가 조직한 것을 칼빈이 정리해서 전했습니다. 여러 분들 중에 누가 내가 전한 것을 정리해서 전하면 복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다. 전성수 목사님이 그 날 적어서 다음 주일에 내게 읽어 주셨다. 전 목사님은 지금 목회자들이 스프링 노트를 사는 등 이 말씀을 듣고 모두 불이 붙었고 경쟁이 시작 되었다고 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다.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만 부러웠다. 루터와 같은 역할을 백영희 목사님이 하는데 전성수 조사님을 비롯해서 우리 공회 목회자들이 칼빈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서 서로 달리기를 시작했구나?

그런데 반세기가 다 가도록 나 외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최근에도 부공2와 대구공회가 조직신학을 함께 정리하기 위해 출발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논을 했다는 말을 부공2 쪽에서 들었다. 각 공회 별로 또는 서로 추진하자는 시도가 벌써 몇십 년동안 몇 번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미 했다. 정확성이란 이 땅 위에서는 없다. 칼빈도 생전에 5차례나 수정했다. 그 제자들이 계속 손을 보고 있다. 일단 나는 했다. 부족하고 빈 곳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적을 하면 된다. 아직은 지적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이 정리의 시작을 백 목사님 생전이 1989년 1월에 백 목사님의 부탁으로 서부교회 사경회를 통해 시작했다. 또 연구소 구 게시판을 통해 수만 개의 글로 이 노선 정리에 필요한 내용을 충분히 설명을 했다. 아마 여기서 빠진 것을 보충할 여지는 거의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미 다 한 것이 아닌가? 혼자 달려 1등을 했다. 이 것이 슬프다. 왜 9급 공무원 시험은 100대 1로 몰리고, 왜 100명 출석 교회의 목회자 자리에는 전부 눈 독을 들이면서 이 노선 이 자료를 전하고 살피는 일은 왜 하지 않나? 내가 위대한가, 실력이 있는가, 선천 후전에 유리한 적이 있었나? 나는 딱 중간이다. 아주 잘 봐 준다면 중간에서 약간 앞에 있는 정도다. 총공회 2백 개 교회에 목회자들 중에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는가? 지금 부공3의 목회자 절반이 나를 때려 죽일 인간이라고 5년간 난리를 부리고 나를 어릴 때부터 보고 온 나의 집안 나의 형제들이 그 일에 앞장을 서서 욕을 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천하 몹쓸 죄인이 이 노선을 혼자 전하고 혼자 정리한다는 것을 어떻게 그냥 두고 보는가?

각 공회들이 모두 총공회 유일의 정통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노선의 1차 자료인 백영희 설교와 이 노선의 내용을 천하에 전하라! 무차별 무제한으로 전하라! 왜 감추나? 총공회 200개 교회에 '총공회 임원' '총공회 위원' 전현직을 합하니 100명이 넘는다. 간부들 아닌가? 왜 하지 않나? 이 노선이 잘못 되었다면 정죄를 하고 뜯어 고치라. 이 노선은 좋으나 감추어 둘 보배라고 한다면 이 것을 전하라고 한 백영희를 비판하라.
전체 0

전체 182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
이용 안내문
담당 | 2018.04.11 | 추천 0 | 조회 983
담당 2018.04.11 0 983
3132
절묘, 기묘, 감탄 - '폐렴' '저작권 고소'... 한 건으로 이렇게까지 많은 것을
담당 | 2020.03.29 | 추천 0 | 조회 153
담당 2020.03.29 0 153
3051
세상의 빛이었던 교회가 있었던가 - 분쟁과 배신의 역사를 중심으로 (7)
담당 | 2020.03.20 | 추천 0 | 조회 259
담당 2020.03.20 0 259
3007
이 노선의 다음 세대들을 보는 감사...
서기 | 2020.03.11 | 추천 0 | 조회 239
서기 2020.03.11 0 239
3005
1980년의 공회와 2020년의 신천지
담당 | 2020.03.10 | 추천 0 | 조회 174
담당 2020.03.10 0 174
2958
왜 하필 대구일까? 공회인 우리는 기도원 철거의 광풍을 돌아 봐야 한다.
서기 | 2020.03.01 | 추천 0 | 조회 312
서기 2020.03.01 0 312
2972
전염병으로 교회를 한 번 흔들어 봤다. - 마귀의 궤계를 중심으로 (1)
서기 | 2020.03.08 | 추천 0 | 조회 254
서기 2020.03.08 0 254
3054
교회가 깬 주일과 예배, 세상이 깬 들 무슨 말을 하랴!
담당 | 2020.03.21 | 추천 0 | 조회 148
담당 2020.03.21 0 148
2946
예배의 불변성과 가변성 - 공회의 '정한 예배' 원칙을 중심으로 (1)
연구 | 2020.02.29 | 추천 0 | 조회 232
연구 2020.02.29 0 232
2932
장군은 남의 아들을 전쟁에 내몬다. 그리고 자기 아들에게는?
회원 | 2020.02.27 | 추천 0 | 조회 188
회원 2020.02.27 0 188
2889
'시대 > 교계 > 이 노선'을 비교 시키는 주님
담당 | 2020.02.14 | 추천 0 | 조회 206
담당 2020.02.14 0 206
2877
E. 사후 30년을 돌아 보며 - 연구소의 역사적 고찰
담당 | 2020.02.11 | 추천 0 | 조회 160
담당 2020.02.11 0 160
2878
(43) 백영희와 가족, 나의 기억들 (진행 2)
담당 | 2020.02.11 | 추천 0 | 조회 301
담당 2020.02.11 0 301
2923
(44) 중국폐렴과 교회 출입 금지
연구 | 2020.02.22 | 추천 0 | 조회 306
연구 2020.02.22 0 306
2927
(45) 우한 폐렴이 '제20회 총공회'를 정죄하고 있는데, 알고나 있는지
담당 | 2020.02.25 | 추천 0 | 조회 279
담당 2020.02.25 0 279
3057
(46) 스쳐 지나 간 분들, 평생에 남겨 준 것 - 2차
" | 2020.03.22 | 추천 0 | 조회 187
" 2020.03.22 0 187
2782
D. 사후 30년을 돌아 보며 - 연구소의 역사적 고찰
담당 | 2020.01.21 | 추천 0 | 조회 197
담당 2020.01.21 0 197
2786
(34) 연보를 들고 주일에 가게로 갔던 첫 죄, 이어진 죄들
담당 | 2020.01.21 | 추천 0 | 조회 225
담당 2020.01.21 0 225
2802
(35) 간간히 비추며 인도하신 순간들, 능력의 체험이라 하고 싶다.
담당 | 2020.01.26 | 추천 0 | 조회 174
담당 2020.01.26 0 174
2809
(36) 고교 입학 시험 - 첫 기도와 그 서약 (4)
서기 | 2020.01.27 | 추천 0 | 조회 190
서기 2020.01.27 0 190
2820
(37) 공회의 인재 양성은 고전1:27, '미련한 것들'을 주목한다.
담당 | 2020.01.28 | 추천 0 | 조회 160
담당 2020.01.28 0 160
2822
(38) 공회 신앙의 정상적 모습들, 나도 공회인이 되었다.
담당 | 2020.01.29 | 추천 0 | 조회 185
담당 2020.01.29 0 185
2829
(39) 군 생활의 실패, 백영희 사후를 준비하게 되다
담당 | 2020.01.30 | 추천 0 | 조회 218
담당 2020.01.30 0 218
2847
(40)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하고 대견한 일들 - 1 (1)
담당 | 2020.02.01 | 추천 0 | 조회 262
담당 2020.02.01 0 262
2852
(41) 1980년, 다시 시작한 주일학교 - 2
담당 | 2020.02.03 | 추천 0 | 조회 178
담당 2020.02.03 0 178
2873
(42) 서윤호, 평생에 감사하고 그리고 아직도 소망을 놓치 않다. (1)
담당 | 2020.02.09 | 추천 0 | 조회 231
담당 2020.02.09 0 231
2727
천주교 WCC 동성 ... 귀신의 복병전, 논점 돌리기
담당 | 2020.01.05 | 추천 0 | 조회 228
담당 2020.01.05 0 228
2686
성탄행사를 폐지할 시점 - 1980년 8월의 주교 야외예배 폐지 (2)
담당 | 2019.12.25 | 추천 0 | 조회 332
담당 2019.12.25 0 332
2651
감정이 가진 반발심, 북조 이스라엘부터 오늘까지 (1)
담당 | 2019.12.15 | 추천 0 | 조회 350
담당 2019.12.15 0 350
2522
C. 사후 30년을 돌아 보며 - 연구소의 역사적 고찰
서기 | 2019.11.12 | 추천 0 | 조회 341
서기 2019.11.12 0 341
2526
(23) 교회 경영론으로 본 백영희 (거창고 전영창과 비교하며) - 2
서기 | 2019.11.14 | 추천 0 | 조회 379
서기 2019.11.14 0 379
2536
(24) 사후 30년을 돌아 보며 - 연구소의 역사적 고찰
서기 | 2019.11.17 | 추천 0 | 조회 343
서기 2019.11.17 0 343
2577
(25) 전교조가 그린 1964년의 꿈, 그 실패와 실체
서ㅣ | 2019.11.22 | 추천 0 | 조회 419
서ㅣ 2019.11.22 0 419
2588
(26) 타 교단과 같았던 시절, 총공회의 성장 과정
서기 | 2019.11.27 | 추천 0 | 조회 336
서기 2019.11.27 0 336
2633
(27) 전국의 공회가 한 가족으로
담당 | 2019.12.10 | 추천 0 | 조회 290
담당 2019.12.10 0 290
2677
(28) 교회를 방문하는 타 교회 목회자와 교인들
담당 | 2019.12.22 | 추천 0 | 조회 267
담당 2019.12.22 0 267
2703
(29) 개별 교회의 사경회, 공회의 인재를 실제 길러 내던 기회 (계속2)
담당 | 2019.12.31 | 추천 0 | 조회 249
담당 2019.12.31 0 249
2721
(30) 서부교회 4층, 강하기만 하다 실패
담당 | 2020.01.03 | 추천 0 | 조회 286
담당 2020.01.03 0 286
2744
(31) 내게 각인 시킨 목회자의 고난
담당 | 2020.01.09 | 추천 0 | 조회 186
담당 2020.01.09 0 186
2753
(32) 나는 적어도 의리는 있다. 나는 신앙의 의리를 본 적이 없다.
담당 | 2020.01.11 | 추천 0 | 조회 299
담당 2020.01.11 0 299
2755
(33) 공회의 굉장한 인재들, 그 어릴 때와 훗날
담당 | 2020.01.12 | 추천 0 | 조회 313
담당 2020.01.12 0 313
2437
대법원 최종 판결 (1)
이영인 | 2019.10.18 | 추천 0 | 조회 603
이영인 2019.10.18 0 603
2452
'이 말씀 전하다 이 말씀 때문에 죽는 것' - 종교인의 상식이 아닐까?
부공3 | 2019.10.27 | 추천 0 | 조회 518
부공3 2019.10.27 0 518
2481
연구소 정체성에 대한 참담한 시비 (6)
담당 | 2019.11.02 | 추천 0 | 조회 477
담당 2019.11.02 0 477
2509
화산, 지진, 전쟁이라는 파란이 주는 선물
서기 | 2019.11.09 | 추천 0 | 조회 319
서기 2019.11.09 0 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