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노선에서 본 우리의 신앙 현실
송용조와 서영호 - 그들의 신앙, 신학 내면
(신학을 마치고 나면)
백영희는 공회의 특수한 신앙 환경 때문에, 공회 밖에서 일반 신학을 하고 오면 반드시 옆에 붙여 놓고 제 정신을 차리게 했다. 배우기도 하고 또 정리도 하라는 뜻이다. 우주 여행을 하고 오면 격리를 시켜 소독을 하는 것과 같다. 신학자 입에서 한 마디가 잘못 나가면 평생 자기 말에 매여 변명하거나 합리화를 하려다 엉뚱하게 되기도 하고, 또 깨끗하게 믿어 온 공회 목회자나 교인들에게 분란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오랫 동안 떨어 져 있었으니 우선 신앙의 기본을 다시 되찾고 신앙의 사람이 되라는 뜻도 있다. 이런 말을 알아 들으면 신앙의 세계일 것이고 이런 말을 들을 때 무슨 말이냐고 의문이나 반발이 나온다면 비판을 하기 전에 이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두고 먼저 사색을 해 보면 좋겠다.
지도자의 위상이 워낙 특별했고 또 송용조 서영호 두 인물의 신앙과 인품이 워낙 남 다르기 때문에 공연한 조처임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잘 순종했다. 일반 목회자들이었으면 맹목적으로 순종했거나 아니면 반발을 했을 터다. 두 사람이 순종하는 면을 보고 목사님은 희망 있게 봤을 듯하다.
(서영호의 경우)
1968년에 유학을 떠났고 학위 논문 외에는 모든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자 1977년 1월에 목사님은 그를 거제동교회로 보냈다. 거제동교회는 홍순철이 앞에 거쳐 가며 모든 교회들 중에서 목사님과 관계가 가장 가까왔다. 옆에 두신 것이다. 거제동교회는 부산에 있었고 그 교회 교인들은 주일 오후와 금요일 저녁 예배를 항상 서부교회로 출석했다. 서영호에게 교회를 맡겨 목회자 자세도 가르치고 또 서부교회로 매주 2회씩 출석을 해서 직접 은혜도 받고 또한 막 시작한 양성원에 강의도 수월하게 했다.
공회에는 서영호와 나란히 놓을 수 있는 인물로 장렬 목사님이 있었다. 서울대 독문학과를 나왔고 목회 실력은 훨씬 출중했다. 그에게는 서부교회의 뒷산인 구덕산 너머 학장교회를 맡긴 적이 있었다. 어느 교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무식한 교인들이 유식한 목회자를 모시려니 너무 어렵고 신앙의 양식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이 나왔다. 타 교단과 공회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다. 목사님은 사람이 좋고 훌륭한데 주변에 데리고 있어야 한다며 교인들을 설득했다. 이럴 때 백영희의 건강은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 알아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높은 차원에서 이해를 구하려니 애가 터지는 것이다. 강압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세계가 신앙이다. 공회는 더욱 그러하다. 이해가 되도록, 이해가 되지 않으면 거부하지는 않을 정도로 설명을 해야 한다. 평소 설교 중에 또는 다른 교회들의 조처 중에 이미 충분하게 전했는데 정작 자기들 문제로 닥치면 덮어 놓고 우선 유리한 것만 요구한다. 이럴 때 백영희의 건강은 무너진다.
이후 서영호는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다시 미국으로 갔고 돌아 왔다. 목사님의 애정, 스승이며 선배로서 목사님은 1989년 8월에 가실 때까지 서영호를 챙겼다. 그런데 그는 고성 출신이었다. 목사님은 그 쪽의 인물을 한반도의 성격을 가진 잘 고수하고 있다고 평해 왔다. 누가 뭐라든 마지막에는 자기 생각대로 한다. 이 것이 주관이며 자유이며 신앙이며 소신이라는 점에서는 칭찬이 된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으로서는 강퍅이 되며 거역이 된다. 그는 백 목사님이 1952년 서부교회에 부임할 때, 그 이전에 이미 손의원 김창인이라는 두 목회자를 거쳤던 분이다. 또 당시는 고신 시절이었다. 그 고신 시절에 그는 서부교회를 떠나 서울에 있었다. 넓게 말하면 백 목사님이 지도하는 공회 범위 안에 있었지만 그의 고매한 인격과 어릴 때부터 탁월한 학습 능력에 따라 그는 신앙의 지식과 체질도 백영희가 오기 전에 먼저 온 조류와 사상에 이미 자기 내면을 만들고 있었다.
목사님으로서는 많은 면에서 좋은 재목으로 봤고, 그 누구에게나 그러했듯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평생 그의 손에 있는 듯이 보였으나 한 번도 그의 손에 묻어 본 적은 없다. 드문 드문 공회 물이 튀었으나 그는 신사며 지성인이다. 그는 공회의 몇몇 좋은 아이디어는 인용을 했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호주 선교부라는 유럽 발 정통 개혁주의의 역사적 흐름의 산물이다. 이 점은 끝까지 바뀌지 않았다. 양성원 강의에서 '행위를 강조하면 율법주의가 된다'며 공회의 건설구원을 웃어 가며 보란 듯이 쥐어 박았다. 기독교는 민주주의라면서 공회의 행정을 비판했다. 공회는 하나님 주권에는 타협과 중론이 없으니 교회의 모든 결정은 소수든 다수든 하나님의 뜻 하나만을 따르는 것이 주권에 맞다고 했다. 4.19의 주력인 서영호로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송용조)
서영호에 비해 송용조는 처음부터 공회 내부 식구였다. 서영호는 공회 내부인지 처음부터 애매했다. 공회는 어떤 사람이든 거두려 노력하다 보니 붙들었지만 공회 사람 같지 않았다. 반면에 송용조는 처음부터 공회 사람이었다. 어떤 분들은 송용조도 처음부터 공회 사람이 아니라고 봤다는데 열두 제자를 제자로 보려면 그들만은 사도다. 그들조차 남으로 보려면 그 표현도 맞다. 송용조는 공회의 최고 핵심 한두 사람의 기준에서는 신학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또 처음부터 뭔가 공부에 애착도 있고 원어나 영어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좀 애매한 점은 있었다. 그런데 이 노선을 외부에 잘 전하기 위해 신학을 참고한다면 오히려 수고하는 일이고 그의 중심을 굳이 파헤치려면 거짓말 탐지기를 갖다 대야 하는데 공회는 타 교단처럼 신학이나 신앙의 사상을 검증하지는 않는다.
송용조는 1958년 청량리교회에 처음 목회를 출발했고 1960년에는 창동교회에 부임을 했다. 서부교회를 알고 난 다음에는 목회 파송 외에는 다른 일로 백영희와 서부교회를 떠난 적이 없다. 그의 마음이나 처신도 그러했다. 그는 1972년? 1973년 2월의 거창 위산교회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총공회의 삼분설과 중생 교리와 건설구원은 세계 교회사적 최고의 진리라고 가르쳤다. 원자탄까지 나온 20세기 과학 앞에 역사적 신학과 성경이 모두 무너 지고 소련의 과학자들이 마음의 작용이 뇌수의 결과라는데 마음을 영이라고 해 버리면 교회는 과학에게 삼킨다고 가르쳤다. 그는 진심으로 가르쳤고 그의 강의를 듣고 총공회의 교리와 노선을 정립한 사람이 오늘도 이 곳에서 연구소의 중심이 되어 그 길을 걸어 가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송용조에게 늘 공사석을 막론하고 그 때 가르쳐 준 것을 감사하면서 동시에 늘 되뇌이며 질문하고 있다. '당시 가르친 것은 진심으로 본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친 것이 오류라면 오류라고 그가 가르친 공회를 향해 공개적으로 밝혀야 하지 않을까..'
송용조는 미국의 유학 시절에 '신학 박사 과정을 밟는 사람들이 성경을 1독도 하지 않았다 할 정도로 성경을 모르니 탄식스럽다'고 편지를 적었다. 그 글이 송용조에게 유학을 도울 수 있거나 또는 귀국 후 공회 안에서 자기의 훗날을 보장 받으려고 백영희에게 거짓말을 적었을까, 아부를 했을까? 송용조는 평생 당당한 사람이었다. 교만해서가 아니라 가리지 않았고 실제 만사 진심인 인물이다. 본 대로 느낀 대로 또 자기의 믿는 바 공회의 신앙을 그대로 적었다. 당시를 입증할 기록은 연구소에 많다.
(공회와 개혁주의 신학)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굳이 비교를 하자면 초대교회를 잇는 것은 천주교가 아니라 개신교다. 개신교 안에서도 칼빈으로 내려 오는 개혁주의가 가장 정통이다. 이 것이 장로교라는 이름으로 내려 오고 있다. 신학적으로 본다면 칼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벌콥 등의 이름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박형룡 박윤선 고신 합동 합신 등이 대략 그 길을 가고 있다. 이들은 이분설이다. 또 기본구원만 안다. 공회는 사람의 마음은 물질이고 중생이 된 것은 영이니, 영은 중생 후 죄를 짓지 않는 신앙의 새생명이지만 마음과 몸은 죽는 날까지 죄와 의를 두고 싸운다. 그 신앙의 차이는 천국에 간 우리의 모습이다.
백영희가 처음 가르쳤다. 이 것은 고신이나 고려신학교나 당대의 신학서에서 도출할 수가 없다. 오히려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그런데 백영희가 가르친 것을 논리 정연하게 체계적으로 확실하게 가르친 인물은 서영호도 아니고 홍순철이나 다른 인물도 아니다. 바로 송용조다. 백영희가 가르친 것을 다른 사람들은 옮겨 전했다. 송용조는 백영희가 가르친 것을 잘 파악했고 논리적으로 잘 정립을 했다. 그래서 공회를 이단으로 비판하면 송용조가 가장 당당하게 그리고 압도적으로 상대하며 눌렀다. 양심적이며 양식이 있으며 진실하며 논리적이며 탁월한 학습력에 학자적 자질을 다 갖춘 인물, 그런데 가난한 시골의 불신 가정과 노동을 하며 공부하고 적대적 신학교를 이미 거치며 상대와 객관적 논리를 미리 파악해 둔 송용조는 최근 이 연구소가 공회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소개도 하고 논변도 하며 변증도 하듯, 1960년대와 70년대는 송용조 한 사람의 몫이었다.
그런 송용조였기 때문에 서영호의 유학은 공회로서 유학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반신반의였다면 송용조의 유학은 확고한 공회 사람이 유학을 통해 개혁주의의 일반론에 대해 공회의 신앙과 신학을 더욱 세련되게 잘 정립할 인물로 봤다. 송용조는 서영호보다 나은 공회의 신학자가 될 줄로 알았다. 서영호는 속으로 이 노선인데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는지, 속으로 타 노선인데 사람이 좋아서 그냥 여기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고도의 계산에 따라 자기 길을 밟는 것인지 그 때도 알기 어렵고 지금도 어렵다. 그가 외부로 표시 낸 것만을 두고 보면 공회에 주소를 둔 타 교단의 좋은 사람이다. 송용조는 아주 달랐다. 그런데 박사 학위를 받고 다시 돌아 온 80년대 이후를 보면 서영호와 송용조는 어느 덧 같아 졌다.
(남의 속을 어떻게 아는가?)
그들이 총공회 양성원에서 현직 목회자들을 다 모아 놓고 외쳤으니 아는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다. 1 년도 아니며 2 년도 아니다. 백 목사님이 5층에서 스피커로 그들이 강의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들으며 그들의 강의를 서부교회 설교에서 인용도 하는데 그럴 때 그들은 한 주간씩 강의차 왔다가 서부교회 설교를 다 듣고 있었다.
굳이 아쉽다면 백 목사님의 당시 설교는 모두 녹음이 되어 있다. 그들의 강의는 녹음 대상이 아니어서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 해도 당시 수십 명의 양성원 학생들은 목회자 또는 목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고, 백 목사님은 송용조 서영호 목사님들과 그들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양성원의 학과정 일부로 서부교회의 모든 예배를 매일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 목사님이 설교 중에 강의에 관련 된 언급을 할 때 강의를 한 사람과 들은 학생들이 함께 늘 했다는 점이 증거다. 학생들의 집단 반발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 때마다 목사님은 학생들에게 교수들이 밖에서 배운 것이 그 것이니 배운 것을 써먹는 것은 이해를 하고 앞으로 자꾸 가다 보면 나아 질 것이고 옳은 것이 이길 것인데 지금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야단 치는 것은 너무 야박하다, 그런데 그들의 강의를 듣는 너희들이 교수들의 강의 내용에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기 때문에 격분했고 나까지 만나러 와서 항의를 한다는 바로 그 점을 볼 때 너희들이 물들 사람은 아니니, 그만하면 되었다..' 이 정도로 무마를 해 주었다.
당시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며 시위성 주도를 했던 학생들.. 그런데 그들이 나중에 공회 노선이 틀렸다며 밖으로 더 나간 경우가 많다. 목사님은 그 점까지도 다 보고 계셨다. 8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개선이 되지 않자 백영희는 송용조 서영호를 대체할 훗날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서영준과 연구소 연구부장이었다. 서영준은 우선 서부교회와 공회 전체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사명까지 포함이 되어 유학을 보내지 않고 연구부장에게 시급히 유학을 보낸다. 송용조 서영호 이들이 해외 유학을 통해 더욱 바깥 사람이 되었다. 안에서조차 멋모르고 그들의 강의에 피동이 되고 따라 간다.
송용조 서영호의 해외 유학 후 국내로 와서 공회 사람으로 제 정신을 갖추고 해외에서 배운 외부 신학은 잘 비교해 가면서 정말 우리가 배울 것은 당연히 소개하고, 과제가 있다면 과제로 제시하고, 또 바깥 것과 비교할 때 공회 것이 좋은 것은 왜 좋은지, 신학을 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 것만 배우다 보니 그냥 우리 것만 아는데 외부를 잘 파악을 한 사람들이 왜 좋은지를 잘 설명해서 이해가 되게 하되 이 모든 과정에 해외 신학을 제대로 한 사람들 때문에 국내 무식한 타 교단의 비판을 막아 내는 역할까지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송용조 서영호 두 분은 귀국 후 서울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신학 강좌를 하기 위해 밖으로 돌았다. 양성원에서는 세상 신학을 쏟아 부었다. 공회와 다른 부분이 있어도 상관 없이 외부 신학을 쏟아 놓으니 듣는 사람이 볼 때는 외부 것이 맞고 공회 것은 우물 안 개구리에 신학과 원어도 모르는 백영희의 무식한 오판이라고 비판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학습력이 있는 내부인들은 이들을 모델로 삼아 바깥 신학을 배우고 그런 유학 과정을 밟기 위해 혈안이 된 일부, 이 두 사람의 강의가 세계 신학의 전부인 줄 알고 매료가 되어 가르치는 대로 빨아 들이는 다수, 이들의 언행에 뭔가 불편과 이상함을 느껴 헷갈리는 일부, 이런 인물들에게 왜 강의를 맡기는지 격분하는 이들은 아주 소수인데 그 몇몇의 소수들조차 철이 없어 그 때만 반발을 했지 그 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들의 추종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을 1 년 2 년을 지켜 보면서 백영희는 연구부장을 1983년 5월에 불러 송용조 서영호를 대신할 공회의 노선을 맡겼다.
1998년, 연구소의 사이트가 처음 개설 될 때 서영호가 앞으로 공회를 얼마나 소개하고 정립하여 세계에 알릴 것인데 서둘러 비판하는 저의가 뭐냐는 반발이 참으로 많았다. 그가 속한 서부교회와 부산공회2에게 이 시점에 다시 여쭈어 본다. 아직도 그 반발이 유효한지? 그래도 최근에 소개 된 송용조 목사님의 회고담은 진솔하다. 모든 면을 고루 다 담고 배려했다. 과연 송용조다. 서영호 목사님의 경우는 평생에 변한 것이 없다. 불변이다. 그가 공부한 신학과 학위를 가지고 공회와 서부교회를 가장 아프게 비판하고 찢어 놓은 곳에 가서 그 신학교가 문을 닫아서 이제 없어 지도록까지 일반 신학만 가르쳤다. 변치 않음은 훌륭하다. 과연 서영호다.
이 곳은?
언제나 내부 내용을 밖에 전해 왔다. 이 곳은 역시 늘 그러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듯하다.
* 존칭 양해
이 글에서 백영희 송용조 서영호 성함에 목사님을 뺄 때는 객관적 역사적 서술 때문이지 인간적 친소 때문은 아니다. 백영희는 교계적으로 이미 역사적 인물이다. 서영호 송용조도 교계 차원에서 알려 진 정도와 상관 없이 공회로서는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고 또 그들이 공회 전체를 향해 보인 언행 때문에 공회사에서 그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이 곳은 어떤 경우라도 최대한 존칭을 사용한다. 다만 역사적 연구적 서술일 때는 누구에게나 존칭을 생략하고 있음을 양해 구한다. 백 목사님의 자녀 중 하나는 이 곳에서 칼빈 루터 주남선 손양원 주기철과 함께 그 부친의 이름을 나란히 사용하는데 부친의 이름에 '목사님'을 붙이지 않고 백영희라고 적었다 하여 명예 훼손이라며 사법기관에 펄펄 뛰는데 이 곳이 어디 사교인가, 사이비인가, 아니면 이 곳이 개인의 일기장인가.. 나는 그 어떤 사석에서도 성직에는 최선을 다해 '님'을 붙인다. 원수들까지도.. 고소한 분의 성함에도..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공지 |
이용 ① 안내문 ② 취지 ③ 필명 ..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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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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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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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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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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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18.04.11 | 0 | 3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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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UP 대구기도원의 매각, 교회마다 평균 5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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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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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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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원 | 2023.12.06 | 0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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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UP 2100년대를 주신다면, 우리 공회는 누가 지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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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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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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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 2023.12.05 | 0 |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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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그 초기와 후기의 순행과 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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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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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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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 2023.11.26 | 0 | 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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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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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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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 2023.11.29 | 0 | 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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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분의 유언적인 당부를 새기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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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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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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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2 | 2023.11.19 | 0 | 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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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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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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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2023.11.21 | 0 | 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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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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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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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 2023.11.23 | 0 | 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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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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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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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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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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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 2023.11.25 | 0 | 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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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마디가, 이 노선!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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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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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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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2023.11.14 | 0 | 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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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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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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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2023.11.18 | 0 | 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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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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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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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 2023.11.18 | 0 | 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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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사후 대비 - 후임을 위한 저택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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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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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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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23.10.31 | 0 | 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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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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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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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1.03 | 0 | 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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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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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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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1 | 2023.11.05 | 0 | 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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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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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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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 2023.11.07 | 0 | 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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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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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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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2023.11.08 | 0 | 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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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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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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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 2023.11.09 | 0 | 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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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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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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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회 | 2023.11.09 | 0 | 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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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이 몰려온다. 1945년의 재현을 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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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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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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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2023.10.23 | 0 | 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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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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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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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1 | 2023.10.24 | 0 | 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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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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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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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2023.10.25 | 0 | 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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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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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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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0.26 | 0 | 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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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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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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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0.28 | 0 | 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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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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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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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0.30 | 0 |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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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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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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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0.31 | 0 | 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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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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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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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2023.11.02 | 0 | 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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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심, 광화문의 3개 교회를 비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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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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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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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0.20 | 0 | 176 |
135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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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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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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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1 | 2023.10.22 | 0 | 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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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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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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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0.29 | 0 | 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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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남은 마지막 지장물..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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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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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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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23.10.15 | 0 | 145 |
13576 |
연구소 공회의 20개 역사와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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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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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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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2023.10.13 | 0 | 179 |
135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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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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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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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0.17 | 0 | 164 |
13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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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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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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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 2023.10.19 | 0 | 143 |
13571 |
모든 총회와 노회는 왜 하필 9월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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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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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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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0.12 | 0 | 149 |
13550 |
소속의 형태, 공회를 중심으로
1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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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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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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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0.05 | 0 | 177 |
13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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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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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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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23.10.06 | 0 | 141 |
13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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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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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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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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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0.06 | 0 | 133 |
13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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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57
|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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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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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 2023.10.07 | 0 | 174 |
13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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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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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2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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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23.10.08 | 0 | 123 |
13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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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59
|
담당
|
2023.10.09
|
담당 | 2023.10.09 | 0 | 142 |
13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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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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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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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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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2 | 2023.10.11 | 0 | 156 |
13548 |
한글 유감 - 한글은 고맙다, 한글학자는 밉다.
1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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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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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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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23.10.05 | 0 | 131 |
135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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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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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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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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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3 | 2023.10.05 | 0 | 132 |
13529 |
필요한 인원을 주셔서 참 감사하다. 기대하지 않았었다.
1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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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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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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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1 | 2023.10.03 | 0 | 193 |
13525 |
만사 좋지 않았다. 덕분에 만사가 좋았다. - 84년의 유학
1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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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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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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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부 | 2023.09.30 | 0 | 1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