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4) 백영희 설교의 자료화, 1948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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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4
(백영희 설교 자료화의 역사)
백영희의 세계에는 기록적인 일들이 참 많다. 그를 잘 모르는 이들은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를 꼽는다. 선물 없이, 율동 없이, 어린이용 찬송 없이 그냥 장년반 대예배 방식 딱 그대로만 가지고 초등학교 6학년 이하만 주일 아침 8시 30분 한 번에 8천명이 앉았다. 여름성경학교와 성탄절에는 14,000명이 한 자리에 앉았다. 그를 좀 아는 사람들은 이런 기록보다 그의 설교 세계에 숨이 막혔다. 한국 기준으로 장로교단과 침례교단의 성경과 설교의 최고 학자들이 칼빈이나 스펄젼과 비교한다. 일반 교단들은 공회와 접촉 자체를 피하라 한다. 이단도 아닌데 한 번만 접하면 완전히 넘어 가버린다. 돌변을 하기 때문이다.

백영희의 설교 내용은 일반 교인의 생활을 가르치는데도 설교 전체가 주해며 조직신학이다. 원어나 신학 학설은 없다. 이 면까지 고려하면 칼빈과 스펄젼을 초월한다. 백영희를 아는 이들은 그의 설교 한 줄을 찾아 헤맨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 노선은 유명해 졌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부친의 설교를 전했다고 7명 자녀가 수백 건으로 고소를 하는 기이한 일도 진행되고 있다. 부산공회라는 이름의 교회들은 백영희 사후 30년이 지나고 있지만 그 설교 녹음만 그대로 재독하며 집회를 이어 가고 있다. 그의 설교 중 한 줄이라도 비공개 자료를 가지는 이들은 주변에 철저히 비밀에 붙인다. 30년째 공개를 거부하는 수원의 수산교회도 있다. 혼자만 사용할 때 모두가 막혀 쩔쩔 매는 성구가 환하게 풀리고 이를 감탄하는 교인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백영희 설교 세계의 중심에서 38년을 걸어 왔다. 나의 사고 방식은 그의 기록 전체를 만인에게 무제한 무조건 전달이다. 내가 그 자료를 접하기 위해 1982년 서부교회 편집실이 출발하던 해에 직원으로 들어 갔다. 편집실장부터 전 직원은 고졸이 최고였고 나만 대졸이었다. 학벌로는 혼자 대졸이니 혼자 1등이다. 백 목사님 책상에 쓰레기통을 뒤지면 그 분이 버린 메모가 있다. 쓰레기를 모았다. 5명이 매주 한 번씩 함께 결제를 받으러 가는 자리다. 모두가 보는 가운데 그렇게 했다. 백 목사님은 쓰레기통을 다 뒤지느냐고 핀잔을 하셨다. 그 분이 막고 나서지 않는 것은 칭찬이다. 다른 4명은 바짝 긴장했고 나는 즐겁게 휴지통을 5명이 지켜 보는 가운데 뒤졌다. 쿰란 사본도 양치기 소년에게는 고물상 폐지였다. 성경학자에게는 인류 2천년 역사의 보배였다. 목숨과 평생을 던질 기회다.

나중에는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책상 모퉁이에 멀쳐 두신다. 어느 덧 그 분의 메모지는 모두가 보는 가운데 내 것으로 공인이 되었고 하나의 업무가 되었다. 그런 지 조금 지나자 자녀에게도 보여 주지 않던 노트를 한 권씩 내주셨다. 처음에는 보고 나서 달라 하셨다. 나중에는 달라 말씀이 없었다. 나중에는 정리하지 않느냐고 공석에서 야단을 치셨다. 아무도 경쟁하지 않으니 백영희 자료 수집은 혼자 달려 1등을 했다. 결과적으로 백영희라는 인물의 일제 때 일지와 해방 후를 미리 예언한 기록과 평생의 모든 필적 전부를 다 가지게 되었다. 이 정도면 '백영희학' '백영희 자료학'에 한해서는 내가 권위자가 아닐까? 교만인가 혼자 달려 1등을 했으니 교만이 될 수가 없다.

오늘까지도 기이하다. 그 말씀에 목숨을 건다는 분들이 왜 아무도 나처럼 그 자료를 걷지 않았던가? 목사님께 왜 자료를 달라는 분이 하나도 없었던가? 혼자 부탁했고 내게만 주셨다. 오늘이야 그 자녀분들이 훔쳐 갔다고 고소를 했다. 그런데 고소에 첨부한 자료를 보니 백 목사님께 이런 과정을 생전에 다 듣고 알고 있었다.


(1948년, 백영희 설교의 자료화가 시작되다.)
모세에게는 요게벳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반듯하게 길렀다. 어거스틴에게는 모니카가 있었다. 요게벳처럼 노력을 해도 어거스틴은 곁길을 걸었다. 목회자를 기준으로, 공회의 거의 모든 분들은 전자의 경우로 보인다. 경제나 가족의 신앙 내력은 천차만별이지만 일단 신앙을 출발한 다음부터는 모두가 반듯해 보인다. 공회 내에 드물게도 이병준 목사님과 나는 후자다. 그런데 이병준과 나는 평생에 백영희 설교의 자료에 생을 바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두 사람의 모친이 공회에 처음 펼쳐 진 사도행전 2장의 상황인 1948년의 가조집회와 봉산집회 때 백영희 당시 집사님이 설교를 위해 기도를 부탁했던 인물들이다.

백 목사님의 설교는 해방 후에 집사로서 이미 한국교회를 흔들고 있었다. 한국교회를 주도하고 있던 고신의 최고 부흥사였다. 그러나 백영희의 설교가 정말 천지를 흔들 듯 모인 교인 전체를 돌변 시키며 역사적 기록을 수없이 남기는 시작은 1948년의 가조집회와 봉산집회다. 첫 집회의 첫 설교를 시작하려는 순간 성령이 백 목사님의 목을 붙들어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원고 없이 성령으로만 설교를 하는 분이니 너무 절박하여 강단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가 가는 곳은 자리가 좁아 설교자 바로 발 밑에까지 교인들이 빼곡하게 앉는다. 무릎을 꿇자 바로 머리를 맞댄 사람은 3명이었다. 신도범, 서봉월, 김봉선이다. 백 목사님은 '이 순간 성령이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나를 위해 기도하라. 그리고 평생 나를 위해 기도하라. 나도 세 사람을 위해 평생 기도하겠다'고 했다.

1979년 신도범 목사님은 공회를 탈퇴했다. 그래도 목사님은 평생 기도의 약속을 지켰다. 신 목사님도 그랬으리라. 한 분은 나의 모친이다. 평생 백 목사님을 위해 기도했다. 백 목사님은 순교 직전에 모친에게 그 때 약속을 지키고 있느냐고 확인을 하고 가셨다. 서봉월 권사님은 이병준 목사님의 모친이다. 백 목사님이 서부교회에 오신 1952년 이후 서부교회의 중심에 계셨으니 그 약속을 지켰을 것이다. 강사와 3명의 교인, 합하여 4명이 강단 위에서 기도를 끝내자 가조 집회는 말씀의 은혜가 봇물이 터졌고 직후에 열린 봉산교회에서는 절정을 이루었다. 이전까지 백영희 이름은 모든 면으로 다 유명했지만 그래도 '신사참배 승리' '기사와 능력' '전도와 심방' '자연이 움직이는 역사' 등으로 유명했다. 그 설교의 예배 현장에서는 수없는 '기적'이 쏟아 졌다. 그런데 가조 집회, 이 날 이후 설교는 성경과 교리 중심으로 강조점이 바뀐다. 물론 기사는 계속해서 따랐지만 이전과 다른 점은 설교자의 전하는 방향과 내용은 명확하게 당대와 후세를 위해 알아야 하는 성경의 해석이었다.

가조 집회 전의 설교는 듣는 교인에게 변화와 능력을 일으켰다면 이 때부터는 설교 안에 교리로 이어지고 성경해석의 원리로 이어 지면서 어느 교회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든지 다시 그 설교를 읽기만 해도 설교 속의 '이치'가 읽는 사람의 현실과 그 교회와 그 가정에 해당이 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백영희의 설교는 평생 그 설교를 필기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 필기를 읽거나 연구하는 이들은 지난 날과 다른 신앙의 세계를 열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 설교를 자료화 하고 재사용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기본구원 건설구원으로부터 성경 전체의 난해절이 모두 풀리고 있었다. 정통 교리만 알고 있던 이들은 16세기의 칼빈을 기준으로 정죄를 했으나 이미 눈치 있는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5백년 막힌 교리와 성경 해석이 새롭게 한 차원 밝아 지며 길이 새롭게 열리는 것을 목격했다.



(가조집회 설교를 위한 3인)
백영희의 설교가 이런 차원이었기 때문에 목회자는 설교의 은혜를 위해, 그 설교 속에 신학적 가치를 아는 이는 5백 년 전에 칼빈의 자료를 기억하며 그 설교를 필기했고 그 설교의 자료화에 열을 올렸다. 그들과 관계 없이 백영희는 성령에 붙들려서 설교를 하려고 평생 전력했다. 그래서 원고를 준비한다 해도 그 원고대로 설교하는 경우는 없다. 듣는 교인들은 그 설교가 너무 보배롭기 때문에 기록을 노력한다. 백영희의 평생 설교 모습은 숨을 죽인 교인들이 남녀 노소 필기에 몰두 한다. 부공3에서는 동천교회와 강동교회가 오늘까지 그런 모습을 이어 간다. 백영희 설교에 충실했다는 증거다. 다른 곳은 모르겠다.

백영희의 설교가 기록의 가치를 지니기 시작한 그 출발의 가조집회 3인, 그들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 설교의 자료화에 사명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그 때 상황이 그렇다. 그리고 그 훗날 그 3인의 행적을 보면 여실히 그렇게 보인다. 우선 신도범은 훗날 목회에 나선다. 그는 평생 백영희 설교를 머리에 담아 전했다. 나는 1976년 사직동교회에서 대학 1년을 지냈다. 그 해 9월 신도범 목사님이 에배소서 2장 5절 설교를 할 때 성경 전체가 머리에 들어 왔다. 신 목사님은 당시 성경 전체와 백영희 설교 세계를 머리에 넣고 있었다. 그는 백영희의 집회 설교 11회 30시간 이상의 내용을 한 번 들으면 그 내용을 사직동교회 강단에서 그대로 풀어 낸다. 초등학교 출신의 그가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회를 하며 서울의 가장 지성인들을 상대로 빛나게 목회를 했다. 그 근본의 힘이 바로 백영희 설교 세계의 이해에 있었다. 나는 그 분이 백영희 설교 세계를 이어 갈 것으로 생각했다. 내게는 신 목사님이 백영희 목사님과 같은 차원으로 여겨 졌다. 그런데 그는 1979년에 공회를 탈퇴했다. 가조 집회의 이 노선 말씀 세계가 새롭게 열릴 때 3인 중에 1인이며 남성이고 목사님이 되었으니 그가 이어 갔더라면 가장 좋은 모습이 될 듯했다. 그런데 스스로 다른 길을 걸었으니 공회는 참으로 아쉽게도 백영희 사후 2세대를 이끌 지도자를 하나 놓친 것이다.

신도범 외에 다른 2인은 평생 기도와 전도와 심방에 주력한 여성도들이다. 설교의 기록과 전달에는 일반 교인에 비해 뛰어 난 점이 없다. 그런데 서봉월에게는 이병준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교회 밖으로 크게 놀던 분이다. 회개하고 돌아 선 다음부터는 백영희 설교의 자료화에 사력을 다했다. 공회 내에서 잘 모르는 분들은 정재성 기록을 말한다. 실제 대단한 어른이다. 그 분은 내게 모든 자료를 다 넘겨 주셨다. 얼마 전까지는 주지 못할 대상이라고 했었다. 정재성 목사님이 설교의 정리에 주력했다면 이병준은 설교의 자료화에 주력했다. 가조 집회의 기도가 그렇게 결실을 맺고 있었다.

김봉선은 나의 모친이다. 나는 목사님 생전의 모든 자료를 현재 다 가지고 있다. 그 자료의 공회식 출간은 아마 내가 관계 되지 않은 것은 없을 듯하다. 그래서 목사님의 7남매는 2009년 좋았을 때까지는 내게 하나밖에 없는 부친의 참 아들이라고 칭송을 해서 바늘 방석이었고 2013년부터는 수백 건의 고소를 통해 나를 응징하고 있다. 왜 하필 내게만 그렇게 하는가? 이유는 두고, 일단 나의 활동 결과가 백영희의 자료와 연구와 발표는 나밖에 없다 할 정도니 그렇다고 생각한다.



(김명자 사모님, 내게는 모니카)
신도범 목사님은 내게 은사다. 내가 성경을 배웠다. 그렇게 기대를 했다. 그런데 스스로 나갔다. 이병준 목사님은 자료화에 그렇게 나섰으나 가진 자료를 선뜻 공개를 하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깝다. 여러 번 노력을 했으나 거부한다. 자연스럽게 내게 기회가 오고 있었다. 나는 이런 세계를 몰랐다. 뒤에 알게 되었다. 나를 돌아 본다. 내가 특별한가? 누구든지 나 정도는 될 수 있는가?

1966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신용인 김명자 조사님 부부가 창동교회에 부임했다. 1971년 여름에 떠났다. 김명자 사모님은 주일학교를 맡았다. 달리 맡을 사람도 없지만 그 분은 너무 출중했다. 그 분이 예배를 인도하며 찬송의 후렴이 시작될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이런데도 벼락을 맞지 않은 것을 볼 때 그 당시 내게 하나님은 종이 호랑이였다. 주일학교 분반 공부 때 손용모 선생님 면전에서 계속 부아를 올려 본다. 주일이고 예배여서 선생님은 힘을 다해 참는다. 그 면전에서 얼마나 참는지 나는 시험을 한다. 어떨 때는 5분 어떨 때는 3분, 선생님은 찬송가 성경책 공과책 노트를 내 얼굴에 집어 던지고 나를 잡으러 벌떡 일어 선다. 어른이 일어 서는 것과 아이가 일어 서는 것은 누가 빠를까? 잡으러 쫓아 오면 그 날 오전 예배는 수라장이 된다.

그 손용모 집사님은 1982년 내가 연구소에 들어 갔다는 말을 듣자 지금까지 평생에 나를 스승으로 깍듯이 모신다. 그는 평생 번 돈, 노년에 쓸 돈까지 내게 다 맡겼다. 연구소 업무에 맡겼다. 그 돈을 신고하지 않고 받았다고 나는 지금 2심에서 징역 6개월을 받고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린다. 나를 고소한 백 목사님의 자녀들은 그를 안다. 백순희 장녀의 사돈도 그 분과 오랫동안 내게 연보했다. 그렇다 해도 전라남도 도청에 신고하지 않고 받으면 죄란다. 할 말은 없다. 사실 그런 법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 번에 배웠다. 세상이 죄라니 나는 대한민국 앞에 나쁜 죄인이다. 나를 고발한 분들은 이 나라를 위해 의로운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천국에 계신 목사님과 내게 연보한 이들의 신령한 세계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2심에서 징역 6개월을 받게 되자 서울의 강동교회는 연구소의 모든 자료의 무차별 무제한 전파의 중심지였는데 즉각 업무를 거부했다. 그 곳에는 설교록의 문법과 표현을 다듬는 한국의 최고 국어학자도 계신다. 또 연구소 자료를 가장 먼저 파악하고 연구소 게시판에 글을 적으면 내 글인지 그 분의 글인지도 모르는 분도 있다. 역시 서울에는 인재가 많다. 그런데 그 인재가 인災인지 인材인지는 더 두고 봐야 하겠다. 오늘은 서로의 가는 길이 정반대다. 가다가 잘못 되었다고 느끼면 서로 둘째 아들처럼 돌아 오지 않을까? 돌아 오라고 적는다. 그들은 내가 돌아 오도록 기도한다고 한다.

주일학교 때부터 빗나간 나였지만 지금 대구공회 최고 영도자이며 위대하신 김영웅 선생님이 강단에 서면 어린 내게 너무 웅장하게 보여 기가 질렸고 이재순 목사님의 조카 하영신 선생님은 사정 없이 뺨을 날리기 때문에 움싹하지 못했다. 매가 사랑이 되고 능력이 압도해야 한다는 점을 평생 느끼고 있다. 손용모 선생님처럼 화가 난다고 생쥐를 잡으러 다니는 방법으로는 사탄의 새끼를 잡을 수 없음을 배우고 있었다. 신용인 목사님은 한 번 사무실로 불러서 '너 혼난다.' 말만 했다. 그 한 마디에 하늘이 깜깜해 졌다. 그런 것이 능력이고 권위다. 그래도 귀신은 내 속에서 나를 붙들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이 때 경험 때문에 평생에 교회를 향해 그 어떤 나쁜 학생과 교인이 있다 해도 나보다는 그래도 낫다 싶고, 그래서 앞으로 나를 지도할 수도 있다고 보지 소망을 잃어 본 적이 없다. 요즘 나를 향해 들어 오는 수백 건의 고소 고발을 막기 위해 나의 칼을 뽑아 들 것처럼 시늉은 해도 속으로는 나보다는 다 착하고 순진하게 보여 소망을 놓아 본 적은 없다. 내가 그들이었다면 10배는 더했을 것이다. 신앙에 철이 들고 나서도 나는 공회를 위해 한 번씩 움직였다. 내가 든 비느하스의 창을 본 사람 중에 나와 반대 쪽에 있는 사람은 어릴 때 나와 이후 나의 창을 연결 시켜 천하에 나를 제일 나쁜 인간으로, 서부교회와 총공회를 짓뭉갠 인물로 평할 때 나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 본 적은 없다. 어릴 때부터 나를 지켜 본 이재순 목사님이 신풍교회 교인들에게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는' 인물로 요약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교인들에게 그 분이 워낙 도인이어서 그 정도로 표현했지 실제 나는 더한 인간이라고 했다. 변명하지 않았다. 선 곳이 반대가 되면 나쁘게 보는 것이고, 내게 대한 악평은 최소한 그 근거가 확실하다.

김명자 사모님이 내게 그렇게 고초를 겪으면서 한 번도 얼굴에 표시를 내 본 적이 없다. 그 분은 50년대 전국 단위의 최고 명문인 부산여고 학생일 때 전체 학생 조회에 교장이 서는 단상에 올라 서서 '주 예수를 믿으라!' 외쳤던 분이다. 졸업 후에는 그 시절 기자를 했다. 날카롭고 명철함이 넘치는 분이다. 그처럼 강한 분이 주일학교를 맡았기 때문에 나를 6년이나 기다려 주셨을까? 그런데 그 분의 첫 해 설교에 나는 어느 날 오후 예배 설교 중에 택함과 불택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 된다는 말에 한 주간을 충격 가운데 살았고 다음 주 오후 예배 때 기본구원을 받은 표시와 건설구원을 배우며 혼자서 몰래 지옥에서 살아 나와 천국 문을 들어 갔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여전했다. 중생과 그 성장의 과정에는 그렇게까지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는가 보다. 공회의 모든 목회자들과 어른들이 몹쓸 아이로, 희망 없는 아이로 봤는데 김명자 사모님은 내가 어떻게 하든 눈 빛 한 번, 얼굴 빛 한 번도 변치 않고 가르쳤다. 그 분의 말씀은, 시냇물이 흘러 가며 거친 돌을 뺀돌뺀돌하게 만들기만 하지 본질적으로 변하지는 않는 듯했다. 나는 예배당 안에서 닳고 닳았다. 그 때 비슷한 나이로 함께 믿은 분들은 지금 서울과 부산과 거창 등지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정말 진실되이 잘 믿는다. 그 분들은 내 이름을 접할 때마다 그 때를 생각하면서 얼마나 웃을까?



(백영희의 기록)
백영희 설교는 그 때 그 자리에서 그 은혜를 받아 본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설교의 감동을 그려 볼 수 있다. 백영희 설교가 이 정도라면 사도 바울의 설교가 이보다 더 나아도 느끼지는 못할 듯하다. 220 볼트 전선에 220 볼트가 흐르나 2만 볼트가 흐르나 220 볼트 전선의 한계로는 차이가 없다. 총에 맞아 죽나 핵에 맞아 죽나, 산 사람의 눈에는 차이가 있겠으나 죽는 사람에게는 차이가 없을 듯하다. 오히려 핵에 맞아 순식간에 증발하면 총에 맞아 죽을 때보다 고통이 덜할 듯하다. 백영희 설교를 접해 본 사람, 직접이 아니라 간접으로 그의 설교 한 페이지를 접하고 타 교단 목회자들이 줄줄이 인생과 가정과 목회지와 여생을 돌변한 사람들이 무수하다. 바로 이 경험 때문에 나는 평생 그 설교를 무차별 무제한 전하고 있다. 그런데, 왜 다른 이들은 전한다고 처벌을 받지 않을까? 백 목사님 7남매가 왜 여수 바닷가 시골 마을에 목회하는 내게만 고소를 하고 있을까?

모두가 철저히 전할 듯한데 7남매 눈에 다른 사람이 전하는 것은 전달로 보지도 않은 듯하다. 실제 내 평생에 7남매는 가족보다 가까왔고 그들로부터 좋을 때는 최고의 언사로 감사를 받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하지 않게 되자 나 하나만 막으면 다른 사람은 막을 가치도 없다는 말을 무수히 들었다. 왜 다른 사람들은 흉내만 내지 필사적으로 전하려 하지 않을까? 나는 이유를 하나라고 생각한다. 너무 귀하다 보니 희소성의 가치에 눈을 뜬 것 같다. 물질은 희소성의 가치가 적용이 되나 진리는 무한의 세계니 전할수록 내게는 더 큰 것을 주시는데. 그 분이 그렇게 가르쳐도 그렇게 쉬운 것이 그렇게 철저하게 막히는 것을 보며 참으로 우리 공회인은 못나기를 그렇게 못난나 보다. 그래서 더욱 반갑다. 고맙다. 은혜롭다. 괜찮은 사람이라야 받을 수 있었다면 나 같은 사람이야 무슨 소망이 있었겠나? 불교나 천주교는 그 용어를 배우려면 대단히 우수해야 할 듯 하다.

기독교가 하늘의 길이라는 증명은 가장 쉬운 언어로 가장 보편적으로 전하지만 가장 무식해도 가장 높은 것을 깨닫는데 지장이 없다는 점이다. 신학교에서 성경 기록의 원칙을 가르칠 때는 분명히 그렇게 가르친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갑자기 일반 교인이 알아 듣기 어려운 원어를 턱 내놓는다. 나는 그들이 그 원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안다. 나는 원어를 모르지만 원어를 잘 아는 이들이 얼마나 원어에 애를 먹으며 고생한 것을 잘 지켜 봤기 때문에 내가 공부했던 카브난트는 NIV의 구약 번역 책임자 Harris, 그리고 신약 번역에 주력으로 활동한 여러 교수들이 있다. 성경 원어에는 탁월하여 정평 있는 분들을 직접 지켜 볼 수 있었다.


(이 노선 전달의 사명자들)
1948년, 사도행전 2장이 이 노선을 통해 덕유산 골짝에 그 모습을 다시 보여 줄 때 그 자리에 가장 큰 은혜를 받은 3인, 신도범 서봉월 김봉선은 백영희가 순교 순간까지 매일 위해서 기도했다. 신도범 목사님이 사직동교회에 있던 1976년 타 교단 목회자 5-60여명이 매주 금요일 저녁 예배를 사직동교회로 와서 성경을 배웠다. 지금은 목회자 세미나가 많으나 그 때는 서울에도 거의 없었다. 백영익 목사의 합정동교회가 한 달에 한 번, 약 100여명의 타 교단 목회자들이 와서 배웠다. 공회의 말씀은 그 한 페이지가 그 제자들에 의해 제대로 전달 되면 그렇게 파급이 컸다. 나는 1976년 서울에서 대학 1학년을 공부했다. 그 해 9월 에베소 2장 5절 설교를 듣는 순간 성경 전체가 열렸다. 부산의 백 목사님께 매월 첫 주 지난 월요일 저녁부터 수요일 새벽까지 교역자회를 참석하여 배운 것으로 다음 한 달을 가르치는데 간접으로 배운 교인이 이렇게 되는 정도였다. 이 날 이후 나는 오늘까지 성경 전체를 성경만 가지고 읽고 전하는데 불편이 없다. 그래서 신도범 목사님이 더욱 존경스러웠고 그 분이 너무 존경스러워 그 분을 그렇게 만든 부산의 목사님께 직접 배우고 싶어 1977년 2월에 부산으로 편입을 해서 2학년부터 다니게 되었다.

내가 부산에 갔을 때 나처럼 그런 소망을 가지고 이미 나보다 먼저 백 목사님 밑에 배우며 목회 명령이 떨어 지면 어디든지 달려 갈 수 있는 청년들이 얼른 봐도 150여명은 되어 보였다. 부러웠다. 또 나 자신이 너무 막내라고 생각하여 아득했다. 그런데 내 앞에 있던 그 150명이 왜 아무도 이 것을 전하지 않는가? 월 100만원이면 천하에 다 전할 수 있는 세상인데. 나는 시골 교회지만 월급 200만원은 받아도 되는 교회다. 내 주변 나보다 못한 교회도 그 이상을 준다. 나는 월급이 60이다. 월급을 적게 받은 그 돈만큼 교회를 향해 이 노선과 그 설교 자료를 무차별 무제한 전하자고 했다. 교인들이 경제적으로 손해 볼 일이 없으니 적극 지지든 소극 묵인이든 최소한 반대는 없었다. 그리고 전할수록 교회로서도 교인과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총공회 전국 200개 교회 중 아무 교회나 1개 교회만 마음 먹으면 한다. 아무 교인이나 자기 월급으로 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도 하지 않으니 혼자 했고, 혼자 하다 보니 혼자 달려 1등이다. 수석이다. 유일이다. 이런 독점이 있나? 1등은 너무 쉬워 감사하고, 다른 사람이 함께 하지 않으니 탄식일 뿐이다.

그 3인 중에서 이 노선의 계통이 하나 나온다면 자연스럽지 않을까? 이병준 목사님은 내가 이 노선과 교훈의 의미를 알기 전에 백영희 자료에 혈안이 된 분이다. 정재성을 필기 1인자라면 이병준은 녹음 1인자다. 나는 이들 중 이 노선의 자료와 연구와 반포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2013년에 백도영 고소인은 그들을 지목하지 않고 나를 지목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1등이라 했던가? 공회의 자료를 두고 전설처럼 이야기가 돌았던 그들이지만 최후의 면류관은 내가 썼다. 그들이 백영희 설교 자료에 1등을 하려고 달릴 때 나는 그들 밑에 수많은 목회자, 그 밑에 다시 공회의 수많은 교인들 중에서도 어렸다.


내가 모세나 어거스틴이 될 수야 없지만 적어도 그 신앙의 계통에는 서 있는 사람들 중에 1명은 된다. 원래 나는 이 길이 싫었다. 그 계통에 있는 수 많은 교파들, 그 중에 공회가 그렇게 싫었다. 옆에 고신 교회를 다니는 친구들은 무슨 선물이 많았다. 그래서 툭 하면 '읍교회 갈 꺼야'라고 심술을 부렸다. 나의 집에서 거창교회나 창동교회가 꼭 같은 150미터 거리다. 갈 수 없기에 입에서 더욱 쉽게 뱉었고 주변에서는 웃고 넘어 갔을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은 진지했다. 호기심 반, 가출 심리 반이었다. 나는 평생에 공회 안에서 자라는 어린 아이나 학생을 볼 때 나를 생각해 본다. 신앙 있게 잘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외국인을 대하는 듯 어색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그리고 심통을 부리고 밖으로 도는 아이들을 보면 반갑다. 나는 그들의 나이로 돌아 가 그들과 마음으로 잠간 함께 어울린다. 그렇지! 다닐 곳이 없어 이런 교회를 다녀! 그 속박, 그 갑갑, 강단을 향해 돌을 던지면 싶고, 유리창을 다 깨고 싶겠지...

1966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신용인 당시 조사님 부부가 무월교회에서 이동을 해 오셨다. 그 직전에는 백영익 65-6년, 신도범 65, 이재순 62-5, 송용조 60-62, 한종희 59-60년 순서다. 한종희 목사님의 큰 아들과 나이가 같다. 세 살 때 그 친구가 세 발 자전거를 탄 기억을 한다. 나의 집 아래 채가 사택이었다. 이 인연으로 한종희 전기를 적고 그와 공회의 관계를 비로소 종료할 수 있었다. 나의 손에서 나간 수 많은 공회 기록과 설교 자료들은 그 어느 하나도 연결을 해 보면 이렇다. 나만 그럴까? 이 노선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나처럼 생각하지 못했던 사명들을 주셨다. 내게는 적어도 그런 면을 보는 눈은 있다. 내가 천출이라 그렇게 된 듯하다. 나면서 부자로 좋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의 장점은 구김살이 없다. 그 대신 인생의 요지경 그 속을 잘 모른다. 다리 밑에서 출발하여 먹고 살 만하게 된 사람은 천하를 다른 눈으로 본다. 부자 집 도련님과 꼭 같은 세상을 봐도 보이는 면이 있다.


이 노선의 설교 역사로 말한다면,
백 목사님 생전 30년
백 목사님 사후 30년

현재 우리는 사후 30년이 정확히 지나가고 있는 시점이다.
지방교회 정도 외에서는 찾아 보기 어렵고, 지방교회조차 그 전체 교리 구성까지는 이 노선에 미칠 것 같지는 않다.
이 것이 사실이라면 이 노선은 그야 말로 말세의 보배며 빛인데 이 것을 전하기 위해 왜 그토록 모두가 나쁘게 보는 인간 한 명만 전한다고 난리들일까? 왜 그에게만 십자가의 못이 박혔을까? 억울하지 않을까? 나보다 여러 배 또는 백 배나 신앙 있고 위대하며 이 노선의 가치를 알고 전해 온 분들이 백 목사님 자녀들에게 달려 가야 하지 않을까? 아니, 나를 어떻게 보고 여수 바닷가에 그깟 인간만 고소를 할 수 있는가? 대구공회는 공회 차원에서 나보다 많이 전하지 않았을까? 서부교회는 백영희 평생의 설교를 그들의 역사와 정체성으로 가졌으니 서부교회를 백영희 자녀들이 저작권 침해의 본부라면서 먼저 고소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 나라는 인간은 공회 200개 교회에서 제일 나쁜 ㄴ이라며, 자기만 자료를 가지려고 훔쳐서 숨겨 놓았다면서, 모두들 자신들은 빛의 사자며 이 복음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고 사방에 전하느라고 '서약'을 하고 나선 성직자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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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15 22:55
    다음과 같이 수정하면 좋을 듯하여 적어봅니다.

    ① 나중에는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고 책상 모퉁이에 멀쳐(밀쳐)두신다.
    ② 백순희 장녀(장남)의 사돈도 그 분과 오랫동안 내게 연보했다.
    ③ 그런데 그 분의 첫 해 설교에 나는 어느 날 오후 예배 설교 중에
    → 그런데 그 분의 첫 해 어느 날 오후 예배 설교 중에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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