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오늘, 이 노선에서 본 우리의 신앙 현실

공회의 정체성, 지켜 지는 것과 폐지 되는 것들

작성자
담당b
작성일
2022.08.05
We shall overcome some day!

60년대 인권 데모에 앞 장 섰던 인물이 목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다. 60년대 나는 학교장이 늘 이 노래로 선동할 때 멋 모르고 '영어 노래'에 '가락이 멋 진' 듯하여 신나게 따라 불렀다. 이 것이 왜 어디에 어떻게 사용 되었는지 또 이 노래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두고는 80년대가 되어서야 파악했다. 세상적으로 보면 저런 노래와 저런 희생을 통해 세상은 좋아 진다. 교회가 보면 이렇게 좋아 보이는 뒤에 따라 오는 세력에게 교회는 속수무책으로 당해 왔다. 그 노래의 향방은 위험하지만 그 노래의 우선 보기가 너무 좋으니 대 놓고 비판을 하지 못한다. 귀신은 여기까지 계산하고 하나씩 밀고 들어 오는 것이다.



그 언젠가, 그 어느 날, 우리는 이기고야 말 것이라!

이런 소망을 던졌기 때문에 죽어 가며 맞아 가며 수백 만이 그를 따라 갔다. 앞에 서서 이 노래를 부른 인물은 모두가 우려 했듯이 그리고 미국의 주류 사회로서는 그냥 둘 수가 없어 처단해 버렸다. 이 것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 미국의 세상 이야기다. 우리의 관심은 이런 노래와 그 때의 분위기와 훗날 그들이 드디어 성취해 낸 흑백의 자유와 평등, 심지어 이제 흑이라는 색깔 때문에 명확하게 덕을 보는 일도 자주 목격한다. 그리고 우리 한국 사람은 미국의 백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흑에게 무참하게 당하는 일을 많이 본다. 그 흑들이 백들에게 당하며 불렀던 이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오자 이 번에는 황이라는 우리를 향해 이유도 없이 폭력을 휘둔다. 그리고 동양인, 다른 사람들은 두고 우리 한국인들이 그들에게 억울하게 당하고 또는 그들을 보면 속으로 겁을 먹는 상황이 되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타락한 세상에서는 신앙인이 너무 나서고 설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지혜롭다. 모두가 다 죄악 세상의 일부이며 구성인이다. 그리고 유리하면 먹고 불리하면 울부짖는다. 그 불리한 쪽이 유리하게 되면 다시 약한 것을 먹는다. 약육강식의 세상에 누구 편을 들 것인가? 복음만은 탈이 없으나 복음 외적인 것은 어떤 선한 목적으로 어떻게 희생해도 마지막 결론을 보면, 과연 그렇게 했어야 했던가? 의문만 든다. 의문 정도가 아니라 실은 후회만 만들어 놓는다.

이런 경험을 일찍 했기 때문에 백영희는 신앙 초기부터 아예 사회 운동 쪽에는 무참하게 딱 잘라 거절했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진정 도운 것은 너무 많다. 그러나 최소한 사회 운동으로 하지는 않는다. 교회 이름을 걸고는 아예 사절한다. 그 것이 공회의 출발 정신이다. 공회가 고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복음병원과 같은 사회 구제 사업을 하게 되면 교회가 교회 정체성을 포기해야 하고, 세상이 고맙게 알아 주지도 않으며, 복음 병원 때문에 혜택을 본 이들의 훗날을 보면 복음 병원인가 반복음 병원인가 혼란스럽다. 이 정도라면 교회로서는 하지 않는 것이 맞다. 그들은 복음병원을 그렇게 자랑스러워 한다. 공회는 그렇게 수치스러워 한다. 그들은 고신대학교와 고려신학대학원을 그토록 자부심을 가진다. 우리는 창피해서 숨고 싶다. 비가 오면 지렁이는 밖에 나온다. 날이 맑으면 얼른 흙 속에 숨는다. 토끼는 그 반대다. 비가 오면 굴 속에 숨는다. 날이 맑으면 사방을 돌아 다닌다. 서로 체질이 다르니 같은 환경을 다르게 상대한다.



(어려운 때임을 먼저 인식했으면)
지금 시대가 어렵다는 것은 달리 말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알고 있다. 세상의 편의와 풍요로만 말하면 좋은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불신자라 해도 인간다운 면으로 보면 극히 어려운 시대다. 종교 면에서 보면 현재 사회는 교회 외의 종교를 모두 없애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우리의 신앙도 마침내 기본적으로 세상에게 해체 되고 있는 중이다. 현상만 가지고 보면 괜찮다 할지 모르겠다. 세상의 풍요와 편의가 넘치다 보니 교회가 세상에게 침몰이 되는 상황에서도 세상 기준으로 목회자와 교인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좋으니 마치 신앙까지 문제가 없다고 보는 듯하다. 과거 건전했던 시대의 기준으로 오늘의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들여다 보면 교회는 교회일 수가 없는 지경이고 우리의 신앙은 불신자의 도덕 기준에나 맞을 정도지 신앙이라 할 수는 없어 보인다.


(교회가 무조건 지켜 내야 하는 것)
교회가 세상에 사는 교인에게 그 마음과 생활의 주력을 천국으로 향하고 준비하는 일에 주력 시키지 못한다면 세상 정부의 문화관광부나 가정복지부가 하는 일과 교회를 비슷하게 볼 듯하다. 이런 논쟁은 20 세기를 거치며 치열했다. 세상은 교회에게 세상 사람들을 위해 문화 복지 인권을 위해 존재하라고 몰아 붙였고, 진보 쪽의 교회들부터 세상과 부화뇌동하면서 건전한 교회들에게 그렇게 하자며 부추겼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인권과 민주화와 문화와 복지를 위해 전념하면서 그들이 세상에 빛이 된다고 했고 보수 정통의 교회를 구복적 미신처럼 바보를 만들고 나쁜 집단으로 유린을 했다. 역사 2 천 년을 거치며 교회는 교회답게 천국만을 향해 오던 저력이 있어 20 세기 초반에는 어느 정도 버텼다. 그러나 20 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그 유명한 교단들까지 차례로 세상의 일원이 되었다.

21 세기에 접어 들자 20 세기 내내 순수 복음, 오직 천국, 예수만 구원을 외치며 버티던 국내 최고의 교단들도 환경 청소에 앞 장을 섰기 때문에 세상에 빛이 되었다고 교회 사이트를 도배했고, 배 고픈 사람을 먹여 준다며 주일까지 범해 가며 세상의 일원이 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북한의 김 씨들에게 들어 가는 돈인 줄 알면서 북한 선교를 앞에 세우고 기독교 박해 세력들에게 줄 서기에 바빴다. 그리고 지난 3 년의 코로나 기간에 한국의 교회는 유행성 독감이 온다면 교회의 주일과 예배도 근본적으로 중단하고 예배론과 교회론의 기초가 되는 교리마저 특례 사항으로 뽑아 내 버렸다. 이제는 재림 때까지 세상이 교회를 손 대려면 과학적 근거만 갖다 대고 주변 다른 단체와 꼭 같이 하라고 요구하면 독감 정도만 가지고도 교회는 자진해서 세상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결론을 내 버렸다. 국내 최고 강성 교회들의 마지막 저항 논리가 보면 이런 식이다. 불교인이 신사참배를 한다면 기독교인도 하겠다, 그러나 불교 유교인에게는 요구하지 않고 기독교에게만 신사참배를 하라고 요구하면 버티겠다.. 이 것이 최근 코로나 문제로 재판하고 승소한 교회들의 논리다. 철이 없는 것인지, 순진한 어린 양이라 그런지 헷갈려서 도무지 판단이 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교회가 지켜 내야 하는 것은 현재 우리 상황에서 무엇이 있을까? 다 따지려면 조직신학의 목록을 가지고 비교해야 하나 지금 이어 지는 글은 고신에게 SFC 폐지처럼 공회는 주일학교를 실제 지켜 내고 있는지 때문에 살피고 있다.



(공회의 목회자들, 그들은 광야 수도사들이었다.)
주일학교 문제를 두고 목회자의 결혼과 출산이 먼저 선행 되지 않는다면 공회의 주일학교라 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 보았다. 그보다 더 앞에 따져 볼 것은 공회 목회자는 검정 양복 하나로 산다는 것이 50여 년의 흐름이었다. 여름 양복 겨울 양복을 따로 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철에 따라 기능 때문에 몇 벌을 가지는 문제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나 최소한 양복의 디자인 때문에 겹쳐 입지는 않겠다는 뜻을 담아 검정 양복에 검정 넥타이가 마치 공회 교역자의 교복처럼 되었다. 철에 따라 양복이 있는데 여기에다 색상까지 더해 버리면 제곱 비례로 옷이 늘어 나며 여기에 따라 양말과 와이샤쓰에 구두까지 달라 져야 한다. 그 것을 연구하느라고 고민하는 것도 목회자에게는 너무 아까운 시간이고 돈으로 말하면 너무 낭비로 본 것이다.

이러다 보니 뒤로는 온갖 돈과 시간을 내다 쓰면서 검정 양복만 입으면 공회 목회자의 청빈인 줄 아는 분들도 있다. 이 검정 양복 하나라는 의미에는 만사 모든 것을 다 담았다. 세상을 향한 모든 것을 최소화 하자는 실행의 표상이 검정 양복이다. 여기에다 흰 고무신까지 신으면 금상첨화다. 검정 양복이야 장례식이나 무슨 일이 있나 라고 볼 수 있으나 흰 고무신까지 신어 버리면 60년대에 아현교회 김현봉 계열의 교인들이 머리를 깎아 버리고 무명 옷 하나로 해결하던 그 시대의 그 노력과 같아 져 버린다. 교회의 차량, 예배당의 건축과 실내외 장식, 사택, 그리고 교회와 사택의 모든 생활과 행사에 이르기까지 풍요로운 세상에 조금만 맞춰 가려면 그 때부터는 밑도 끝도 없다. 교역자가 아닌 사람은 결혼을 하기 위해서나 직장에 돈을 벌러 가기 위해서 주변과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알아서 할 수 있다. 목회자야 교회와 교인 외에 만날 일이 없다. 불신자를 만나 전도를 한다 쳐도 공회 식의 생활은 오히려 그들에게 종교인답게 보인다. 공회의 교역자들만은 초대교회가 중세로 넘어 가는 애매한 그 시기에 발생했던 사막의 수도사들이 갔던 방향과 근본적으로 생각이 갔고 지향이 같다. 공회가 지킬 만한 것 중에 이만큼 시급한 것도 드물다.

흔히 공회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주일 오전 10시 예배, 오후 2시 예배, 수금요 7시 저녁 예배, 새벽 4시 30분 예배에, 집회나 연경회 등이 있다. 이런 것을 다 맞춰 한다고 해도 평소의 의식주 생활이 현재 우리 주변에 넘치는 풍요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가거나 그 것이 별 이색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공회의 제도적 정체성은 안에서부터 이미 다 녹아 져 사라 지게 되어 있다.



(집회, 양성원, 교회의 각종 모임과 행사..)
5월과 8월에 모이기만 하면 집회일까? 집회는 산집회가 외형적 정체성이다. 이는 오래 전에 없어 져 버렸다. 타 교단의 수련회 세미나 각종 집회는 그 예배, 그 강의, 그 모임의 내용과 별도로 평소의 생활이나 주변과 세상 건으로 들락날락 자유롭다. 찬양대도 공회가 그토록 조심했던 방식으로 모두가 운영하는 듯하다. 현재까지 그렇지 않은 곳은 본 기억이 없다. 가장 공회적이라는 곳의 찬양대까지 아예 공회의 개념은 간 곳이 없어 보인다. 교역자회는 매월 첫 주일 지난 월요일부터 2박 3일 또는 1박 2일이었다. 백 목사님 사후 혼란기를 거친 다음 1990년 4월부터 이전을 지키자는 부산공회의 첫 교역자회가 열렸다. 그 첫 회의는 준비와 진행이 정확하게 천주교를 향해 가는 첫 발이었다. 이런 인간들과 또 교역자회에서 만나야 한다? 단호히 거절했다. 사안 별로 갈 일이 있으면 그 순간만 가고 최대한 참석하지 않았다. 분리하던 1990년 3월의 총공회는 비상적이었다 쳐도 1991년의 총공회부터는 정립이 되어야 하는데 준비 단계부터 끝장 낼 태세였다. 무엇을 끝장 낼 것인가? 공회의 정체성, 그 중에서도 연례 총공회 회의의 정체성 문제였다.

어떻게 단 하나도 공회의 정체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냥 워낭 소리만 듣고 따라 오던 눈 먼 송아지들이 어미 소가 없어 지고 원안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자 지리멸렬 오합지졸 좌충우돌 엉망진창이었다. 백 목사님은 직접 길렀으니 돌아 가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지도했다. 나는 그들고 동료는 될 수 있어도 직접 책임을 질 사안은 극히 적었다.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사안에 따라 그 정도만 발표하고 끝을 냈다. 초기에는 전체 회의가 휘청거리고 가던 방향이 180도 바뀔 발언을 여러 번 했다. 평생 그렇게 해야 할까? 나는 다른 교역자들에게 스승이 아니다. 그들보다 먼저 듣고 보고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 면만 전하는 정도가 내가 할 일이다. 각자에게 주어 지는 1차 사명이 다를 수 있듯이 나에게도 그런 몇 가지가 있었다. 서로 나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당장에 잘라 내고 싶어도 '제명 금지' 원칙 때문에 칼을 들었다 놓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자진 탈퇴'라는 원칙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내 발로 나온 경우는 없다. 결국 10여 년을 채우지 못하고 제명하는 쪽에서 먼저 잘라 냈다. 절차를 정식으로 밟으려면 불가능한 줄 안다. 교역자회 서기가 이름을 부르지 않고 뭉개는 방법, 양성원에 올라 가야 할 순서에 실수?로 인쇄를 빼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그들이 모인 그 자리가 그렇게 영광스러운 분들도 있었으나 내게는 초기에 그들 전체가 제일 선망하던 자리를 여러 번 제안을 받았고 나만 하겠다면 바로 될 상황에서 정중히 일일이 거절했다. 한 번 받아 들이고 나면 그 때는 그들이 모두 나의 칼날에 죽든지 아니면 나의 길에 서야 한다. 그들은 옳고 그르고 상관 없이 머리가 되고 싶은데 그냥 죽겠는가? 죽더라도 한 번은 소리를 내 보겠지.. 끝 없는 교권 투쟁에 휘말리는 것은 고신이나 합동이 잘 하는 일이고 공회의 정체성은 그럴 기회를 아예 없앤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현재 각 공회들의 교역자회는 공회의 교역자회와 총공회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 진다. 양성원의 경우, 부공1까지도 신학과 공회의 신앙을 뒤섞고 있다. 그냥 안타까울 뿐이다. 나처럼 신학을 모르거나 신학적 소양이 없다면 아예 신토불이라면서 우리 것이 좋다고 신학을 외면해 버리면 순수성이라도 인정을 받는다. 원어 알파벳도 잘 되지 않는 분들, 알파벳은 알아도 신학의 속 사정을 모르는 분들, 별별 분들이 세계를 침몰 시킬 신학 홍수의 이런 저런 물 줄기를 양성원에 부어 대고 있다. 그 것도 물이라고 갈증 난 분들은 단비처럼 목을 적신다. 역사와 교계와 고신과 공회에서 나간 분들이 모두 그 쑥물에 절단이 난 것을 보고도 그렇게도 모르는지..



요즘처럼 '정체성'을 들여다 보는 기회는 과거에 그리 많지 않았다. 80년대 말, 90년대 말에 한 번씩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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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앙 > 워낭, 8.6.15:00 수정, 서기
전체 2

  • 2022-08-06 14:22
    원앙 -> 워낭 (*본문 내 수정 반영, 관리자)

  • 2022-08-06 14:58
    교계의 주변 상황을 볼 때마다 우리는 공회의 문제를 대입하며 자문자답을 하는 것이 맞다. 물 건너 화재 현장을 불 구경으로 보지 않고 우리 집과 우리 동네의 소방 시설과 화재 가능성 그리고 이미 우리는 다 타 버리고 지나 간 것이 아닌지 등을 둘러 보자는 것이다. 교회란 교파를 막론하고 크게 보면 원리가 같다. 매 현실의 대처는 교회와 교인은 개별적 인도를 따라 가야 하기 때문에 다 다르지만, 넓게 보면 물 고기가 어디 산들 숨 쉬는 원리와 움직이는 원리까지 다를 리야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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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14
예배와 예배당, 교회와 신앙의 겉과 속을 돌아 본다.
12014 | 담당 | 2022.07.27
담당 2022.07.27 0 78
12015
'집회'라는 이름, 그 성격과 명칭들
12015 | 담당 | 2022.07.27
담당 2022.07.27 0 121
12023
집회 기간의 변화 역사, 오늘을 돌아 본다.
12023 | 담당a | 2022.07.28
담당a 2022.07.28 0 109
12001
복음병원의 설립자 논쟁 - 그 배경을 통해 우리를 본다.
12001 | 담당a | 2022.07.24
담당a 2022.07.24 0 146
11970
예배 숫자가 교회 숫자인데
11970 | 담당 | 2022.07.19
담당 2022.07.19 0 171
11981
동성 반대 하다 연애질 하라는 독사의 옹니 속으로.. (1)
11981 | 담당a | 2022.07.20
담당a 2022.07.20 0 139
11986
'맹자'의 말씀을 걸고 WCC 반대? 이미지
11986 | 담당b | 2022.07.21
담당b 2022.07.21 0 115
11992
공회 중심 교회들의 탈 공회 현상..
11992 | 담당 | 2022.07.22
담당 2022.07.22 0 176
11959
공회의 대표적 사회적 인물 2 명에 대한 비교
11959 | 담당a | 2022.07.17
담당a 2022.07.17 0 220
11961
공회의 부러운 교회들에 대한 비교
11961 | 담당a | 2022.07.18
담당a 2022.07.18 0 188
11940
백도광, 역사의 인물을 보내며
11940 | 담당b | 2022.07.12
담당b 2022.07.12 0 254
11953
백도광 장로님의 가족분들께 드리는 所請
11953 | 담당 | 2022.07.15
담당 2022.07.15 0 180
11909
한종희, 공회에게 주신 어두움
11909 | 담당 | 2022.07.06
담당 2022.07.06 0 177
11915
세상의 불행, 교회의 불행 - 남만 비판하는 악령의 역사
11915 | 담당 | 2022.07.07
담당 2022.07.07 0 179
11919
표현 하나에, 천하를 살리는 복음과 천하를 삼키는 간교가 된다.
11919 | 담당 | 2022.07.09
담당 2022.07.09 0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