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오늘, 이 노선에서 본 우리의 신앙 현실

예배와 예배당, 교회와 신앙의 겉과 속을 돌아 본다.

작성자
담당
작성일
2022.07.27
(명칭에 담긴 것)

* 교회의 이름
공회는 말씀과 은혜 중심이다. 이런 말은 개혁주의에서는 모두가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교회의 이름은 지역의 이름을 사용하지 특별하게 아름답게 다듬지 않는다. 고린도교회, 갈라디아교회, 에베소교회, 예루살렘교회.. 이 것이 성경적 교회 이름이다. 한 도시에 교회가 많아 지면 동 이름을 사용한다. 거창읍교회, 대신동교회, 사직동교회.. 이렇게 된다. 모든 교회들이 다 그렇게 해 왔다. 교단과 개별 교회의 분열에 인구 집중까지 겹치며 생활 거리의 교회도 많아 졌다. 서부교회, 동부교회, 중앙교회.. 이렇게 이름을 붙인다. 이마저 곤란하면 지역을 포함하면서 창원의 창천교회, 동구의 동천교회, 서부의 서진교회.. 이렇게 넓혀 나간다. 행1:8 이하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라는 말씀에 따라 자라고 커지면서 이 곳이 좁으니 더 넓은 곳으로 진출도 하고 밀려 나가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 끝까지 선점을 위해 건너 뛰기는 하지 않는다.

* 알면서도 바꾸는 이유
모든 교파들이 모두가 그렇게 말을 하면서 시작을 하나 어느 순간 경쟁심에 조급해 지면 먼저 치고 나가서 깃발을 꽂고 자기 영토를 표시해 버린다. 특허권의 정신이며 상업의 장사속이면서 경쟁에서 남을 제치는 기술이다. 신앙의 세계는 주님의 인도를 따라 한 걸음씩! 답답해 보여도 그렇게 나간다. 주님이 앞에 서서 끌고 우리는 뒤에서 조심스럽게 한 발자욱씩 따라 순종으로 나간다. 고신의 해방 후 초기의 기록을 보면 우리는 인간의 생각으로 고려파를 만들지 않았다. 진리를 지키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다 보니 이렇게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고 또 제거를 당하다 보니 고신 교단이 출발 된 것이다.. 이렇게 논리 구성을 한다. 지금은? 아마 전국의 00읍교회가 거의 다 00교회로 이름을 바꿨지 싶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름다운교회, 즐거운교회, 행복한교회.. 이렇게 세상의 사람 이름처럼 유행을 따르지 싶다. 이렇게 이름의 변천만 봐도 그 교회와 교단의 속화 정도를 알 수 있다. 대구공회 안에는 현대식 이름이 곳곳에 보인다. 그래도 적다. 부산공회에는 거의 없다. 아무렇지 않게 보이고 누구든 알아서 만드는 듯이 보여도 이렇게 이름 하나에서 그냥 표시가 난다.


(건물에 담긴 것, 그 안까지를 본다)
* 원래의 교회
이제 건물을 두고 말하면 신학과 교회사의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금방 파악을 해 버릴 듯하다. 초대교회는 매일 목숨을 걸고 믿었다. 예배당을 가지고 싶어도 불가했다. 피해 다니며 미리 약속한 곳에서 몰래 모였다. 땅 밑의 지하실 모임이 아니라 표시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실은 지하교회였다. 박해가 없다 해도 눈총이 있었고, 눈총이 없었다 해도 신앙의 생기가 넘쳤기 때문에 전할 말씀에 집중했고 받을 은혜의 사모에 집중을 하다 보니 오는 비를 피하고 치는 바람을 막아 주는 정도의 예배당을 추구했고 그 이상의 남는 돈은 박해나 개척 중의 교회로 송금을 했다. 고후8, 9장을 중심으로 신약 내내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학생이 공부에 정말 주력하다 보면 교복의 멋, 가방의 유행, 책 표지의 디자인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오로지 강의 내용과 책에 들어 있는 글자에 집중한다. 10대 후반의 고교생이 몰려 가는 등하교의 복장을 보면 공부하는 학교, 노는 학교는 금방 눈에 띈다. 한 학교 안에서도 공부하는 학생과 연애에 정신 없는 학생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싸울 줄 아는 군대, 이기는 군대, 사명에 불 타는 군대와 병정놀이로 행사용 군인은 그냥 딱 보면 보인다. 어느 쪽을 환호하느냐, 어느 쪽이 대우를 받고, 어느 쪽에 지원자가 몰리느냐를 보면 국운이 보인다. 학교와 학생이 구별 된다.

* 교회의 본질 변화
초대교회는 말씀에 전부를 걸었고 그 말씀을 듣고 나면 그 말씀으로 목숨을 던졌다. 그래서 모두가 긴장했고 주님만 바라 봤다. 먼저 죽어 나가는 곳을 전해 들으며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자세였다. 건물의 치장에 돈을 쓸 리가 없다. 예배의 화려한 순서로 관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들어 호객하는 일은 발을 붙일 틈이 없었다. 멋 있는 음악회에서 받고 오는 감동과 웅장한 오페라가 온 몸을 전율 시키는 진행, 노래방이나 개그를 통해 가볍게 챙겨 오는 즐거움.. 그리고 교회의 예배가 주는 은혜가 혹시 비슷해 지지 않았을까? 눈과 귀가 즐겁고 마음이 좋아 지면 무조건 '은혜'라고 쳐 버린다.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세월 속에 신앙의 자유가 왔고 이제는 로마의 황제가 교인을 우대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교회는 말씀으로 살기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할 일이 없어 졌다. 절박이 없으니 긴장이 없고, 긴장이 없으니 나태해 졌다. 이런 인간들을 교회로 끌어다 놓고 돈을 받아 내야 하고 또 위협을 해야 종교 지도자들이 먹고 살 수가 있다. 그 결과 예배당의 건물 자체를 예술품으로 만들고, 예배의 진행을 말씀 대신 쉽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행사로 메꾸어 나갔다. 그 결과가 '천주교'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건물만 봐도 안다. 예배로 모이는 건축 정도면 교회다. 건물을 보는 순간 종교성이 동하면 성당이다. 그 안에서 진행 되는 내용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깨닫는 데 모여 지면 교회고 좋다고 소문난 별별 요리가 제공 되면 천주교다. 일꾼은 일할 만큼 먹으면 달려 간다. 부자는 코스 요리?를 돌려야 한다. 10 가지 음식이 다채롭게 펼쳐 져야 한다. 예배의 순서가 많을수록 좋은 교회라고 한다. 돈이 넘치니 그렇게라도 써야 장사도 먹고 살고 일하는 종업원들의 직장도 생기겠지.. 그러나 그 돈의 한 푼까지 우리의 신앙에 꼭 필요하여 맡겼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시간도 순서도 내용도 허투로 버리지는 못한다.


(공회만 기독교며, 개혁주의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
* 초대교회, 오늘도 존재하는가?
기독교는 '초대교회'다. 초대교회는 환경이 어려워 성당과 미사를 할 수가 없었다. 중세 1천 년을 통해 교회는 마음껏 성당을 지어 예배당을 없앴고 미사를 통해 예배를 없애 버렸다. 전쟁을 하지 못하는 군대를 만들었고 공부가 필요 없는 학생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천주교를 기독교라고 하지 않는다. 그 말은 초대교회만 기독교라는 뜻이 된다. 천주교에서 나왔다면 기독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처럼 되어야 천주교에서 출애굽을 하고 기독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오늘 돈이 있는데 성당을 만들지 않는 교회는 거의 없는 듯하다. 아주 간혹 돈이 있는데도 성당과 예배당의 차이를 알고 체육관이나 학교 강당을 빌려서 교회를 제대로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런데 그런 곳의 예배 안을 들여다 보면 예배를 거의 다 무대로 만들어 버렸다. 돈이 있어도 그냥 딱 예배만을 전부로 하는 예배당을 마련하는 교회, 역사적으로 60년대의 아현교회 김현봉 목사님이 아주 대표적이었다. 이후 한국에는 거의 공회만 그러했다.

* 개혁교회, 그대는 어디로 갔는가?
개혁교회란 초대교회가 기독교인데 천주교로 탈선을 했기 때문에 제 자리로 돌려 놓는 교회라는 뜻이다. 그런데 묻고 싶다. 로마의 천주교에서 나온 것은 맞는데 초대교회로 돌려 놓았는가, 아니면 헬라의 지성주의로 이사를 가 버렸는가? 개혁주의를 외치는 곳의 첫 문제가 목회자는 신학자가 되고 교인은 신학생을 만들어 버렸다. 성경 하나로 전부를 삼아 한 말씀 함께 살피고 그 말씀으로 자기 현실에서 실제 살아 보게 되면 저절로 자라 가는 것이 초대교회다. 그 과정에 고난이 있으면 온 몸과 생활로 그 고난을 겪는다. 이 것이 초대교회며 이 것이 기독교의 원형이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어디나 개혁교회의 기치를 세운 곳은 대학의 철학과보다 더 어려운 신학을 전하려 한다. 배우려 한다. 이렇게 나가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복음이 로마로 갔다가 로마 카톨릭이 된 상태를 비판하고 이스라엘로 돌아 오려다 중간인 그리스 쯤에 주저 앉아 헬라 철학자들이 구성한 방법으로 신학을 하면서 로마에서 나왔으니 예루살렘에 다 온 줄로 아는 듯하다.

* 둘러 봐도 초대교회는 공회뿐인 듯
복음은 처음부터 지성이 아니었다. 지성처럼 보였을 뿐이다. 헬라인은 지성을 원한다.
복음은 처음부터 미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기적이 너무 많아서 미신처럼 보였을 뿐이다.
복음이란 원래도 오늘도 성경 그대로만 읽고 그대로 살아 보려 한다. 그 과정에 착오도 있고 오판도 있고 실수도 있고 곁길 빗길을 헤매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의 자세가 바르면 하나님께서 그 중심과 진심을 아시기 때문에 양심을 통해 원래의 길을 가게 한다. 그리고 자꾸 자라 가게 한다. 공회는 역사적으로 그러 했다. 지성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적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초기의 갈팡질팡이 많았다. 다만 세월 속에 하나씩 고쳤고 나아 졌다. 그리고 그 마지막의 결과처럼 보일 때가 되니까 괜찮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 때가 되자 우리는 이름을 '공회'라고 했다. 함께 모였다는 말이 전부다. 양심을 가지고 정말 끝까지 걸어 가고자 하는 사람이면 천주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말씀이 개종을 시킬 것이다. 하물며 장로교인 침례교인 감리교인은 더더욱 가리지 않는다. 그들에게 장점이 없겠는가? 있다면 이 공회에서는 배운다. 자존심이니 해 온 이력 때문에 거부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 봐도 '장로교'가 기본적으로 적통이며 정통이다. 그래서 공회 앞에 '장로교'를 붙였다. 다만 장로교 뒤에 '공회'를 붙여 놓은 것은 장로교 그 자체가 완전무결이며 정확무오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자라 가기도 해야 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은 고칠 것도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공회'라는 이름을 통해 교계에 하나의 노선으로 드러 났다.



(공회, 우리 안을 들여다 본다.)
* 건물과 교회의 이름부터 본다.
돈이 있어도 예배만 드리면 되는 건물로 유지를 하고 있는가? 서부교회의 예전은 그랬다. 백 목사님 사후는 손이 가는 곳마다 다듬고 있다. 다른 곳은 보이는 사진만 봐도 아쉽다. 전국 200여 곳을 다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몇 곳은 있을 듯했다. 그렇게 기대를 한 교회들마저 개보수를 하는 순간 성당을 지향하는 어느 절반쯤이라고 보여 진다. 안타까울 뿐이다.

교회의 이름만은 아직도 대부분 지키고 있다. 이름만 지키고 있어도 언제나 새움이 돋을 때를 소망할 수가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의 통칭은 옛 이름인데 전도회가 왜 선교회가 되나.. 전도회가 왜 제1 제2 전도회로 분리가 되나, 찬양대가 그냥 찬양대면 되는데 찬양대 앞에다 무슨 별별 이름을 붙이고 있나.. 교회의 이름은 의구하되 속에서는 시대에 맞고 교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변화의 몸부림이 요동을 치고 있다는 뜻이다. 교회의 이름으로 눌러 놓고 총공회의 전통과 명분으로 눌러 놓는다고 눌러 질까? 왜 교회의 이름이 지역의 이름이라야 더 좋고, 왜 교회의 내부 여러 이름을 집회니, 전도회니, 주일학교니, 반사니, 조사니, 중간반이니, 찬양대이라고 붙여 놓았는지를 구구절절이 알면 아무리 세상이 바뀐다 해도 가치 평가적인 우수함을 알면 폐기하지 않는다. 모르면 결국은 넘겨 준다. 전국의 집집마다 그렇게 넘치든 옛날 가구들 기구들 서적들이 오늘의 국보가 되는 역사성과 보배성이 있는 줄 알았다면 없앴거나 팔았겠는가? 가치를 모르면 지킬 수 없다.

공회 교회들도 결국 한 세대 늦을 뿐이지 교계를 따라 조금씩 바뀌는 것을 볼 때 바뀌는 그 자체를 비판한 적은 없다. 그 것은 각 교회의 개별 인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요셉이 가나안을 떠난 것이 말 못할 사정 때문이었지 애굽이 좋아 유학을 간 것은 아니었던 것과 같다. 그런데 조금을 바꾼다 해도 예배당과 교회의 이름을 공회가 유지해 온 것이 당시 구 시대여서 그랬을까, 그 것이 아무리 봐도 귀한 보배여서 가치적으로 복음에 유익해서 그렇게 했을까? 이런 면을 몰라서 바꾸는 것이 보이면 이 현상은 아무리 작게 보여도 작은 문제가 아니다. 어미 양을 잡아 먹고 양 가죽을 뒤집어 썼지만 발톱이 보이면 이 것은 변화의 규모 문제에서 그치지 않는다. 본질의 변형이다. 이 것은 정체성 문제가 된다. 양을 잡아 먹는 늑대인가, 어머니 양이 여행을 하다 발톱을 미처 다듬지 못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이 곳의 글은 몇 명이 읽든 상관 없이 공회를 아는 사람, 공회를 운영하는 간부들, 심지어 외부에서 공회를 관심 가진 분들이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세대가 다 없어 지고도 주님 오실 날이 더 남아 있게 되는 어느 날 그 시대를 감당할 종이나 그런 교인들이 등장을 하게 될 때 요단강 언덕에 쌓아 둔 12개의 작은 돌 무더기를 보며 신앙의 근본을 다시 시작하도록 표시를 남기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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