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단에서

오늘, 이 노선에서 본 우리의 신앙 현실

예배 숫자가 교회 숫자인데

작성자
담당
작성일
2022.07.19
(교회의 예배 줄이기)
손님이 없으면 직원과 매장을 줄인다. 경제의 기본이다. 손님이 더 줄면 영업소 숫자를 줄여 나간다. 공장도 줄인다.
사업이란 전시용이 아니고 복지도 아니기 때문에 손님을 항상 계산에 두고 모든 것을 운영한다. 사업이란 그러하다.

교회가 경제인들이 말하는 종교 분야의 '사업'인가, 개혁주의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공동체인가?
예배를 참석하는 교인이 숫자가 줄어 들면 예배를 없애고 많아 지면 예배를 늘려 간다면 종교 분야의 '사업'이 된다.
인체는 많이 먹는다고 입을 더 만들거나, 또 적게 먹는다고 치아를 뽑지 않는다. 입과 치아는 본질 문제라 그렇다.
몸이 추우면 옷을 하나 더 껴 입고 더우면 옷을 하나씩 벗다가 더 이상 벗을 수 없으면 가벼운 옷으로 갈아 입는다.
옷은 인체의 본질이 아니고 수단이기 때문에 줄이고 늘이고 손을 댄다. 그러나 인체 자체는 가감승제를 하지 않는다.


(교회의 예배 분리)
출석 교인이 많다고 한 교회의 예배 횟수를 늘리고, 출석이 준다고 예배 횟수를 줄이는 것은 예배 본질을 몰라서 그렇다.
출석 교인이 늘면 예배당이 비좁아 지는 것이다. 출석 교인이 아무리 많아도 예배는 교회가 정한 시간에 모이는 것이다.
주일 오전 예배가 없는 교회는 없다. 주일 오전 예배로 예를 들면 주일 오전 예배를 2 개로 3 개로 쪼개는 것이 가능한가?
1 부 예배의 설교와 은혜가 2 부 예배의 교훈 강약과 방향과 지도와 같은가? 예배가 2 개면 교회가 2 개가 된다. 분열이다.
예배당 건물은 같은 곳을 사용하고, 한 사람은 9 시에 다녀 오고 다른 사람은 11 시에 다녀 오면 같은 교회 교인이 되는가?

미국의 개척에 예배당을 마련하지 못하면 한 예배당에 여러 교파의 여러 교회가 여러 예배를 드린다. 한 교회가 아니다.
예배당을 교회로 보면 한 교회가 되고 예배당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예배 공동체라고 본다면 예배 별로 교회가 된다.
한 교회가 다 함께 주일에 1 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상관이 없다. 그 교회의 실력과 역량과 그 교회의 형편대로 하면 된다.
한 교회가 주일에 2 회를 다 함께 드려도 된다. 3 회를 다 함께 드려도 된다. 다 함께 드리지 못하는 교인은 어린 교인이다.
그런데 한 교회가 주일에 1 회 예배를 여러 부로 나누어 알아서 출석을 하라고 한다면? 이는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 난다.

예배당이 같고 목사가 같으면 1 부와 2 부 예배는 한 교회의 한 예배가 아닐까? 1 부의 내용과 2 부의 내용이 같으면 된다.
같을 수가 있는가? 한 명의 목사가 같은 원고를 가지고 2 회든 3 회든 꼭 같이 반복하면 한 교회에 포함 되지 않겠는가?
같을 수가 있는지 또 여쭤 본다. 같을 수가 없다. 천주교의 미사와 절의 염불은 같을 수 있다. 사실은 같을 수밖에 없다.
생명 없는 돌들의 반복이고, 은혜를 제거한 세월이 수 천 년 전이니 다른 염불을 외우든 다른 교독을 해도 같다. 돌뿐이다.
교회는 하나님과 연결이 된 생명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생명이란 한 순간도 같을 수가 없다. 예배의 수가 교회의 수다.


(교회갯수 계산)
사람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헤아리지 않는다. 1 명에 10 개니 시간도 걸리고 또 12 개 가진 육손도 있고 장애 절단도 있다.
사람의 숫자를 치아로 헤아리려면 보통 28 개인데 32 개도 있고 26 개도 있다. 치아가 다 빠지고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
사람을 헤아릴 때는 머리 숫자로 한다. 쉽고 확실하다. 머리를 떼 놓고 다니거나 가방에 넣는 사람은 없다. 교회의 숫자는?

목사 숫자가 교회 숫자일까? 이 곳은 개척 30 년에 괜찮은 교회지만 아직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하여 목사 없는 교회도 있다.
예배당 숫자가 교회 숫자일까? 출석 숫자 때문에 건물을 옮겨 다닌다고 교회가 달라 지지는 않는다. 건물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를 헤아리는 기준, 그 것이 교회의 숫자다. 목사 여부도 목사의 숫자도 건물도 교인의 숫자도 교회의 숫자와 다르다.
교회의 숫자는? 전체 교인이 참석하는 '정규 예배' '대 예배' '고정 예배'... 어떤 명칭이라도 좋다. 교회의 예배 숫자가 교회다.
공회는 교회 별로 11 회 예배를 기본으로 가진다. 교회에 따라 10 회 예배를 가지는 교회도 있다. 모든 교인은 참석이 의무다.
11 회 예배를 출석하지 못하면 신앙이 약하거나 형편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 출석이 적다고 교회가 적은 교회 된 것은아니다.

공회 교회는 전도 대상이거나 믿기는 하지만 아직 혼자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유아기 신앙에게는 주일 오전을 꼭 권한다.
보통의 교인이라면 주일의 오전과 오후, 수금의 저녁, 합해서 4 회 정도를 출석한다. 신앙이 좀 있다면 새벽 11 회를 더한다.
여기서 주일의 오전이나 오후를, 합하거나 더 세분화를 한다면? 전도를 위해 또는 화재나 천재지변으로 임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을 해서 주일 오전의 예배를 서부교회가 2 회 드린 적이 있다. 나는 그 때 서부교회를 2 개라고 적었다.
2 층 측에서도 4 층 측에서도 감정에 격하여 항의를 했으나 30 년 전에도 지금도 이런 분류법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리브가 뱃속에서 한 날 한 시에 쏟아 져 나왔지만 머리가 2 개여서 2 명이었다. 하나는 야곱이고 하나는 에서다. 못 합한다.


(신앙의 자유성 문제)
천주교에서 탈출한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한다. 기독교의 역사적인 이름이다. 무엇을 개혁했는지 알기나 할까? 알면 좋겠다.
교황이 혼자 해 먹으니 각 교회 목사가 화가 났을까? 그렇다면 천주교 내의 교권 싸움이다. 교인과 교회는 자유성을 가졌다.
죄 짓는 자유가 아니라 각자와 각 교회에는 하나님의 별도 인도가 있다. 성경과 교리는 하나지만 현실의 인도는 각각 다르다.
시골 교회와 도심 교회는 예배의 시간을 달리 할 수 있다. 무식한 교인들과 유식한 교인들에게는 전할 말씀이 다를 수 있다.
교회는 각 교회의 목사가 매 예배 시간에 전할 말씀을 결정하고 각 교인은 자기 현실에서 자기가 살아야 할 방향을 잡는다.
교황이 세계의 모든 교회를 장악하여 지시하고 각 교인의 생활 하나하나를 목사가 장악을 한다면? 자유성이 없어 지게 된다.
자유성이 없어 지면 그 인간은 노예가 된다. 성경의 노예는 사람이 아니다. 교회는 교황 교회의 지부가 된다. 교회는 아니다.
어떤 개혁교회도 그 출발의 가장 기본 원칙에 1 번과 2 번으로 적어 놓은 양심 자유, 교회 자유의 설명은 이렇게 시작 한다.

한 몸으로 사는 부부가 밥과 옷과 침대는 함께 사용해도 그 날 살면서 조심할 구체적인 것은 하나님이 개별적으로 인도한다.
10 명 교인이든 1만 명 교인이든 한 교회의 목사는 같고 예배당도 같고 교회 계좌도 같겠지만 예배 때마다 설교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한 교회 예배 때마다 주시는 말씀은 오전이 다르고 오후가 다르며 같은 원고로 설교해도 주시는 은혜는 다르다.
예배를 여러 번 나누고 참석자가 달라 져도 하나님의 전달이 같고 은혜가 같다고 주장하려면 천주교로 돌아 가는 논리다.
선교 초기 주일의 예배가 괜히 오전과 오후로 나누지 않았다. 오전에 왔으나 오후에 결석한 이들은 양심에 고통을 겪었다.
지금은 예배가 2 회니 한 번을 출석하면 된다. 차라리 교회가 주일에 1 회 예배만 두고 교인을 예배에 맞추라고 해야 한다.
주일에 1 회 예배만 두는 것은 그 교회의 형편과 수준에 따른 그 교회의 결정이다. 그러나 2 회 중 1 회 참석을 열어 놓으면?
예배를 쪼갠 결과가 된다. 자기 인체는 둘로 쪼개어 다니지 않으면서 교회는 편의를 위해 쉽게 그냥 2 개로 분리해 버린다.

이 분리 문제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교회의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예배에 전하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가 문제다.
한 교회에 교회적으로 전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이 뜻을 받는 자리가 예배다. 그 뜻을 받아야 실행으로 나아 갈 수가 있다.
달리 전하고 달리 받으면 머리가 둘이 되고 몸이 둘이 되는 셈이다. 한 교회에 전하는 뜻은 매 예배와 현실마다 단 하나다.
다른 교회에게 다른 사명을 주시고 다른 인도를 한다. 그래서 남의 신앙과 다른 교회에 간섭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금지다.
성경과 교리는 가르쳐 줄 수 있다.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과 교리 범위 안에서의 결정은 각자와 각 교회가 다 다르다.
이 다른 것에 개입하는 것이 잘못된 독재며 간섭이며 부당 교권이다. 신앙 자유란 자기에 대한 뜻을 순종할 자유를 말한다.
그런데 교회가 알아서 스스로 하나의 예배를 1 부 2 부 3 부로 나눴다며 이 교회는 예배와 신앙 자유를 아예 모르는 경우다.


(개혁주의 이름 하의 '예배')
개혁주의는 천주교의 미사가 꼴 보기 싫어 '예배'를 그렇게 강조한다.
예배를 강조하다 보니 또 하나의 예배 다음 단계를 잃고 헤맨 세월이 많다.

천주교 예배는 하나님 앞에 떨며 나아 간다는 겉 모습을 강조하다 보니 불교처럼 의전만 남고 미사라는 염불이 됐다.
개혁주의 예배는 이 면을 타파하고 원래 예배를 찾는다면서 하나님 앞에 '인격'이 나아 가고 바쳐 져야 한다고 했다.
일단 천주교의 틀린 것을 타파했으니 잘 했다. 그러나 인격을 바친다 드린다를 반복하다 그 단계에 머무는 난맥이다.

천주교의 불교화 우상화를 타파한 개혁주의의 5백 년 출발이, 출발 후 과거 반발에 그치고 추가 발전이 없게 되면서
이 번에는 천주교 때문에 교회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천주교를 떨쳐 버린 이후의 자체 수준 때문에 무너 지고있다.
이 현상 때문에 예배를 없애고 있다. 목사 1 명이라도 있으면 예배에 무슨 지장이 있나?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지켜 보는 교도들 때문에 버텼는가? 혼자라면, 혼자라도 가는 것이 십자가지.


어지간한 교회는 교파와 그들 교회의 소속에 상관 없이 모두가 서로 '개혁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예배를 강조하고 있다.
파티를 벌이고 춤과 노래에 땀을 흠뻑 적시며 오늘 예배는 은혜로웠다며 노래방식 은혜를 예배라고 하는 곳도 있다.
천주교 시절에 못지 않는 엄격함으로 모두를 통제하고 교리 교육을 반복하면서 청교도에 충실한다는 곳도 더러 있다.
한 교회가 한 예배에 함께 모여, 그 시간에 전하는 그 교회 교인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으로 배우고 찾은 다음..
함께 받은 그 말씀을 가지고 이제 그 교회 안에서도 각자 생활은 모두가 다 다르니 각자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심하고
그 결심 가운데 정확한 판단을 성령이 양심을 통해 인도하고 그리고 실제 생활 속에 그렇게 사는 것이 '예배' 공동체다.

공회이 예배론이 이렇다. 이렇게 설명을 하자 80년대부터 신학을 좀 했거나 다른 교회들의 모습을 직접 본 목회자들이
개혁주의 예배론을 거론하면서 '예배 공동체' '예배는 인격을 바치는 것' 등으로 뭔가 좀 아는 듯한 소리들을 내 놓았다
구체적으로 예배 공동체란 성찬을 함께 한다고 그렇게 강조하신 세계적인? 신학자.. 30 년 동안 성찬을 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2세대 청교도를 마치 자기들의 전유물인 듯 떠들고 한국의 50대 안팎인 3 세대 청교도 주장자들의 스승들치고
성찬과 예배와 교회와 개혁이라는 표현을 그들 스스로 규정한 것을 지키려고 노력이라도 한 이들은 아직 보지를 못했다.
이 나라 민주화를 외친 이들치고 그들끼리 민주화로 운영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인권을 외친 이들의 인권을 봤는가?
개혁이란 단어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 생활로 내가 걸어 가는 것이다. 개혁을 입에 담는 순간 개혁과 멀 수 있다.
경찰 검찰 법원이 '엄정'을 입에 담고 '공정'을 입에 담을 때 이미 이들은 엄정과 공정에서 멀어 진 것이다.

물에 사는 물고기들은 '수영'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창공의 새들은 '비행'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는다.
고기는 그냥 수영을 하고 있다. 새들은 날고 있을 뿐이다. 그 것이 생활이고 그 것이 자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수영! 목 놓아 외치는 이들은 이제 배우는 초짜들이다. 물 속에 집어 넣으면 가라 앉는다. 공중에 던지면 떨어 져 죽는다.
정말 고치며 살고 있는가? 이미 개혁주의의 교인이다.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 고칠 것이 많아서 남을 돌아 볼 시간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은 개혁주의의 골수 분자다.

하나인 예배를 쪼개며 교회의 전체 예배가 마치 유지 되는 듯이 위장을 하고
세월이 좀 지나면 쪼갠 예배 중에 귀찮은 예배를 찬양 예배, 헌신 예배... 무슨 예배로 포장하여 버릴 준비를 하고
세월이 좀 지나서 이제 관심이 멀어 지고 나면 슬그머니 과거의 예배를 계속해서 없애고 있다.
좌파 정권이 교회를 탄압해서 그렇게 했을까? 교회가 스스로 그렇게 했다. 이 문제를 두고 나오는 비판은 거의 없는 듯하다.



(목사조차)
교인이 적으면 목사가 예배를 줄일 수 있나? 그렇다면 개척 때는 교인이 많아서 예배를 그렇게 드렸던가?
남들에게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전도를 해 놓고, 이제는 예배 별로 출석수가 적은 예배는 예배를 줄이고 없애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 사업일 뿐이다. 손님이 없다고 직원을 줄이고 영업점을 줄이는 것은 경제의 기본 논리다.
예배도 참석 교인이 적으면 줄이고 없애고 통폐합을 할 수가 있을까? 연경이나 부흥회는 그렇게 해도 된다. 특별 예배다.
한 교회의 기둥이 되는 기본 예배를 참석자가 적다고 뺀다면? 그렇다면 그 교회 목사는 평소 예배를 참석하지 않았던가?
목사도 교인과 함께 예배 때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찾는 교인 중 1 명이다.
목사 1 명이라도 출석한다면 교회가 가져야 할 예배는 진행해야 한다. 학원이 아니고 대학의 강의가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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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라는 이름, 그 성격과 명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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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기간의 변화 역사, 오늘을 돌아 본다.
12023 | 담당a | 202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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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병원의 설립자 논쟁 - 그 배경을 통해 우리를 본다.
12001 | 담당a | 2022.07.24
담당a 2022.07.24 0 142
11970
예배 숫자가 교회 숫자인데
11970 | 담당 | 2022.07.19
담당 2022.07.19 0 165
11981
동성 반대 하다 연애질 하라는 독사의 옹니 속으로.. (1)
11981 | 담당a | 2022.07.20
담당a 2022.07.20 0 133
11986
'맹자'의 말씀을 걸고 WCC 반대? 이미지
11986 | 담당b | 2022.07.21
담당b 2022.07.21 0 112
11992
공회 중심 교회들의 탈 공회 현상..
11992 | 담당 | 2022.07.22
담당 2022.07.22 0 174
11959
공회의 대표적 사회적 인물 2 명에 대한 비교
11959 | 담당a | 2022.07.17
담당a 2022.07.17 0 213
11961
공회의 부러운 교회들에 대한 비교
11961 | 담당a | 2022.07.18
담당a 2022.07.18 0 182
11940
백도광, 역사의 인물을 보내며
11940 | 담당b | 2022.07.12
담당b 2022.07.12 0 250
11953
백도광 장로님의 가족분들께 드리는 所請
11953 | 담당 | 2022.07.15
담당 2022.07.15 0 176
11909
한종희, 공회에게 주신 어두움
11909 | 담당 | 2022.07.06
담당 2022.07.06 0 173
11915
세상의 불행, 교회의 불행 - 남만 비판하는 악령의 역사
11915 | 담당 | 2022.07.07
담당 2022.07.07 0 172
11919
표현 하나에, 천하를 살리는 복음과 천하를 삼키는 간교가 된다.
11919 | 담당 | 2022.07.09
담당 2022.07.09 0 149
11901
집회를 준비하면서
11901 | 담당s | 2022.07.05
담당s 2022.07.05 0 195
11928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 히10:25
11928 | 담당 | 2022.07.10
담당 2022.07.10 0 114
11930
눈을 뜨는 기도, 눈을 감는 기도
11930 | 담당 | 2022.07.11
담당 2022.07.11 0 166
11934
세인트루이스교회, 백태영 식과 그 반대 식
11934 | 담당a | 2022.07.12
담당a 2022.07.12 0 159
11896
전도 : 그 상식과 그 실제 (2)
11896 | 공회원 | 2022.07.03
공회원 2022.07.03 0 207
11897
교회가 노래방 되면, 노래방에 팔린다. (4)
11897 | 공회원 | 2022.07.03
공회원 2022.07.03 0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