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노선에서 본 현실
중립은 쉽다. 중심이 문제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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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2.02.02
(중간과 중심)
양 쪽의 중간에서 눈치를 보며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중립, 그런 의미의 중립은 쉽다. 신중하면 누구든지 중립을 가질 수 있다.
양 쪽을 지켜 보면서 양 쪽의 대립과 추구하는 가치관과 모든 논쟁과 혼란 속에서 그 중심을 찾아 유지하는 것은 여간 어렵다.
가정의 부부 싸움에 자녀가 중립을 지키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옳은 것을 찾아 그 중심을 알아 낸 다음에 지켜 내는 것은 어렵다.
우선 어른들의 세계를 모르니 중심이 어딘지도 모른다. 지식적으로 안다 해도 앞뒤 상황을 살펴 바른 지점을 찾는 것은 어렵다.
남들이 볼 때 어중간한 사람, 끝까지 어중간한 입장을 견지하면 어부지리를 얻는다. 소신이 없다 비판을 받아도 이익이 된다.
소신이 있는 사람은 토사구팽이 된다. 그 단어가 오늘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소신이란 손해라는 뜻이다.
모든 싸움은 어느 정도 승산이 있어야 시작 된다. 싸움에는 의외도 있다. 끝까지 지켜 보다 마지막에 한 쪽을 택해야 이익이다.
교회 분쟁에 소신을 접고 이익을 챙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핑계로 숨는 것이다. 모양까지 좋아 보인다.
세상 역사도 기독교 역사도, 그리고 한국교회사와 공회 역사도 그렇다. 소신 있는 이들이 항상 앞 장을 선다. 그리고 사라 진다.
양 측의 소신파가 다 죽거나 포기를 하고 나면 떼 묻지 않고 피 묻지 않은 깨끗한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렇게 되면 독식 한다.
교회사를 알면 소신은 양 측에 던져 주고 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공회는 이런 이들을 진실 없는 세상 사업가라고 말한다.
그런 공회에서도 마지막에는 그렇게 된다. 현재 5개 공회의 어디나 다 그렇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다. 다 그렇다 할 정도다.
(서부교회 직원들의 탐방)
백 목사님 사후 기존 노선을 고수하자는 쪽과 변경하자는 쪽이 정면 충돌을 하면서 상상 못할 일들이 계속 일어 나고 있었다.
백 목사님 5층 방에 올라 가 직접 결재 받는 서부교회의 핵심들, 사실 그들이 전부며 그들이 뭉치면 서부교회는 결정이 난다.
그들 중에 한 분이 총공회의 최고 학자에게 가서 그는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려고 갔다. 가 봤자 뻔하다며 나는 가지 않았다.
아다시피 서부교회는 목사님이 초등 5학년의 무식에 핵심들은 거의 다 그 시대에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실력은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뛰어 난 사람이라고 평은 들었지만 정상적인 공부는 중도에 다 그만 뒀다.
공부를 중간에 그만 뒀기 때문에 갔을까, 학교의 성적들은 뛰어 나지만 공부의 핵심인 실제 중요한 내용은 몰라서 갔을까?
어쨌든 모두가 갔다 왔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 싸움은 재미 있습니다.' 솔로몬이 아이 재판을 하며 얼마나 재미 있었을까...
부모의 애끓는 심정, 그 심정으로 해결을 했을까 아니면 내 자식 아니니 칼을 들어 보고 죽든 말든 재미 삼아 질러 봤을까?
공회가 신학과 신학자를 극히 경계하는 이유는 그 무슨 말을 해도 목회자가 아니라 신학자란 이럴 때 남의 일로 처리한다.
낳아서 길러 본 사람은 낳아서 길러 놓은 교회를 아끼는 그 심정과 자세가 다르다. 구원적이며 복음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교파의 최고 중심에 있다 해도 그가 교인을 전도하고 교인으로 만들어 보지 않으면 시퍼런 말씀의 칼을 쥔다.
결국 서부교회는 그런 핵심들의 기본 사상과 그리고 그런 사상을 가진 교회니 거기에 맞는 그런 분이 왔고 오늘이 되었다.
(변화 무쌍의 시대에)
세상. 세상의 정치도 가정도 문화도 교육도 그 어떤 세상도 변화무쌍하여 맥 잡기도 어렵다. 교회도 신학도 신앙도 그렇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것은 몸을 좀 낮추고 추이를 보는 것이다. 몸 조심이다. 신중론이다. 양비론 양시론을 섞으면 처세술이다.
그런데 공회란 특이하게 출발했고, 특이하게 출발한 역사의 노선들과 비교할 때 특이한 것이 유지 되는 특이한 노선이다.
그래서 이 노선에 한 곳쯤은 만사를 어디 보다 신중하게 살피지만 중립이 아니라 중심을 추구하는 곳이 있어야 맞을 듯하다.
중립은 역사를 조금 접하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중심은 좁은 길이다. 너무 험한 길이다.
세상도 교회도 사안마다 '역사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으로 시작한다. 너무 자주 듣다 보니 이 또한 예사가 된 느낌이다.
팬데믹이란 코로나 19의 상황이 역사에 있었던가? 전 세계가 전부 중단을 했다. 과거는 하고 싶어도 기술이 따르지 못했다.
역사에 여성이 시대를 휘어 잡은 적은 많다.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라 남자 여자의 구별이 없어 지며 인류가 없어 지고 있다.
매일 쏟아 지는 세상의 소식이 서로를 부추기며 어느 하나의 우연한 파생을 마치 인류의 대세인 것처럼 몰아 가고 몰려 간다.
서로 상승 효과를 내면서 세상은 1차 창조 때 만든 모습과 위치와 역할이 우주 쇼와 같이 뒤집어 지며 혼란으로 몰고 간다.
이를 바로 잡으려는 이들조차 이미 자신의 원래 위치를 잃고 이제는 자기가 설 중심이 아니라 아무 중립에라도 서려 한다.
공회는 오늘까지는 과거 일제 때처럼 해방 후 혼란기처럼 또 점령기와 이후 격변의 세월에도 지켜 온 위치를 지켜 내고 있다.
지난 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오늘 상황에서도 예측이 불가한 상황이 펼쳐 진다 해도 이 노선은 고비를 쉽게 넘어 왔다.
이미 검증 된 이 노선의 가치성과 정확성 그리고 지난 날을 헤쳐 온 현장 대처 능력이 보배롭다. 올해는 무슨 소식이 들릴까?
세상으로부터 시작 된 것만이 아니라 늘 세상과 교회가 늘 뒤섞이며 교회를 흔들어 왔다. 공회는 이런 면을 구별해 왔었다.
천국을 잠시 접어 두고 세상을 살아야 할 생각에 빠지면 어느 노선이든 대책은 없다. 천국만을 바라 보면 해 볼 만 한 듯하다.
양 쪽의 중간에서 눈치를 보며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중립, 그런 의미의 중립은 쉽다. 신중하면 누구든지 중립을 가질 수 있다.
양 쪽을 지켜 보면서 양 쪽의 대립과 추구하는 가치관과 모든 논쟁과 혼란 속에서 그 중심을 찾아 유지하는 것은 여간 어렵다.
가정의 부부 싸움에 자녀가 중립을 지키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옳은 것을 찾아 그 중심을 알아 낸 다음에 지켜 내는 것은 어렵다.
우선 어른들의 세계를 모르니 중심이 어딘지도 모른다. 지식적으로 안다 해도 앞뒤 상황을 살펴 바른 지점을 찾는 것은 어렵다.
남들이 볼 때 어중간한 사람, 끝까지 어중간한 입장을 견지하면 어부지리를 얻는다. 소신이 없다 비판을 받아도 이익이 된다.
소신이 있는 사람은 토사구팽이 된다. 그 단어가 오늘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소신이란 손해라는 뜻이다.
모든 싸움은 어느 정도 승산이 있어야 시작 된다. 싸움에는 의외도 있다. 끝까지 지켜 보다 마지막에 한 쪽을 택해야 이익이다.
교회 분쟁에 소신을 접고 이익을 챙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핑계로 숨는 것이다. 모양까지 좋아 보인다.
세상 역사도 기독교 역사도, 그리고 한국교회사와 공회 역사도 그렇다. 소신 있는 이들이 항상 앞 장을 선다. 그리고 사라 진다.
양 측의 소신파가 다 죽거나 포기를 하고 나면 떼 묻지 않고 피 묻지 않은 깨끗한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렇게 되면 독식 한다.
교회사를 알면 소신은 양 측에 던져 주고 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공회는 이런 이들을 진실 없는 세상 사업가라고 말한다.
그런 공회에서도 마지막에는 그렇게 된다. 현재 5개 공회의 어디나 다 그렇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다. 다 그렇다 할 정도다.
(서부교회 직원들의 탐방)
백 목사님 사후 기존 노선을 고수하자는 쪽과 변경하자는 쪽이 정면 충돌을 하면서 상상 못할 일들이 계속 일어 나고 있었다.
백 목사님 5층 방에 올라 가 직접 결재 받는 서부교회의 핵심들, 사실 그들이 전부며 그들이 뭉치면 서부교회는 결정이 난다.
그들 중에 한 분이 총공회의 최고 학자에게 가서 그는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려고 갔다. 가 봤자 뻔하다며 나는 가지 않았다.
아다시피 서부교회는 목사님이 초등 5학년의 무식에 핵심들은 거의 다 그 시대에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실력은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뛰어 난 사람이라고 평은 들었지만 정상적인 공부는 중도에 다 그만 뒀다.
공부를 중간에 그만 뒀기 때문에 갔을까, 학교의 성적들은 뛰어 나지만 공부의 핵심인 실제 중요한 내용은 몰라서 갔을까?
어쨌든 모두가 갔다 왔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 싸움은 재미 있습니다.' 솔로몬이 아이 재판을 하며 얼마나 재미 있었을까...
부모의 애끓는 심정, 그 심정으로 해결을 했을까 아니면 내 자식 아니니 칼을 들어 보고 죽든 말든 재미 삼아 질러 봤을까?
공회가 신학과 신학자를 극히 경계하는 이유는 그 무슨 말을 해도 목회자가 아니라 신학자란 이럴 때 남의 일로 처리한다.
낳아서 길러 본 사람은 낳아서 길러 놓은 교회를 아끼는 그 심정과 자세가 다르다. 구원적이며 복음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교파의 최고 중심에 있다 해도 그가 교인을 전도하고 교인으로 만들어 보지 않으면 시퍼런 말씀의 칼을 쥔다.
결국 서부교회는 그런 핵심들의 기본 사상과 그리고 그런 사상을 가진 교회니 거기에 맞는 그런 분이 왔고 오늘이 되었다.
(변화 무쌍의 시대에)
세상. 세상의 정치도 가정도 문화도 교육도 그 어떤 세상도 변화무쌍하여 맥 잡기도 어렵다. 교회도 신학도 신앙도 그렇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것은 몸을 좀 낮추고 추이를 보는 것이다. 몸 조심이다. 신중론이다. 양비론 양시론을 섞으면 처세술이다.
그런데 공회란 특이하게 출발했고, 특이하게 출발한 역사의 노선들과 비교할 때 특이한 것이 유지 되는 특이한 노선이다.
그래서 이 노선에 한 곳쯤은 만사를 어디 보다 신중하게 살피지만 중립이 아니라 중심을 추구하는 곳이 있어야 맞을 듯하다.
중립은 역사를 조금 접하면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중심은 좁은 길이다. 너무 험한 길이다.
세상도 교회도 사안마다 '역사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으로 시작한다. 너무 자주 듣다 보니 이 또한 예사가 된 느낌이다.
팬데믹이란 코로나 19의 상황이 역사에 있었던가? 전 세계가 전부 중단을 했다. 과거는 하고 싶어도 기술이 따르지 못했다.
역사에 여성이 시대를 휘어 잡은 적은 많다.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라 남자 여자의 구별이 없어 지며 인류가 없어 지고 있다.
매일 쏟아 지는 세상의 소식이 서로를 부추기며 어느 하나의 우연한 파생을 마치 인류의 대세인 것처럼 몰아 가고 몰려 간다.
서로 상승 효과를 내면서 세상은 1차 창조 때 만든 모습과 위치와 역할이 우주 쇼와 같이 뒤집어 지며 혼란으로 몰고 간다.
이를 바로 잡으려는 이들조차 이미 자신의 원래 위치를 잃고 이제는 자기가 설 중심이 아니라 아무 중립에라도 서려 한다.
공회는 오늘까지는 과거 일제 때처럼 해방 후 혼란기처럼 또 점령기와 이후 격변의 세월에도 지켜 온 위치를 지켜 내고 있다.
지난 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오늘 상황에서도 예측이 불가한 상황이 펼쳐 진다 해도 이 노선은 고비를 쉽게 넘어 왔다.
이미 검증 된 이 노선의 가치성과 정확성 그리고 지난 날을 헤쳐 온 현장 대처 능력이 보배롭다. 올해는 무슨 소식이 들릴까?
세상으로부터 시작 된 것만이 아니라 늘 세상과 교회가 늘 뒤섞이며 교회를 흔들어 왔다. 공회는 이런 면을 구별해 왔었다.
천국을 잠시 접어 두고 세상을 살아야 할 생각에 빠지면 어느 노선이든 대책은 없다. 천국만을 바라 보면 해 볼 만 한 듯하다.
전체 580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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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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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 부공3, 우리의 파송 사례 1 (15일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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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은혜 - 중생의 순간인가, 중생을 따르는 현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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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크게 바뀌면 지진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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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찬송가 : 개인, 교회, 공회, 연구소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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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옹니에 걸렸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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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의 무형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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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22.03.19 | 0 | 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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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a | 2022.03.21 | 0 | 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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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충성하라'를 왜곡해 버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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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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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 2022.03.19 | 0 | 118 |
중립, 중심에 더하여 중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다. 부와 모가 갈라서는데 자식은 중립에 서야 하는가? 어떤 중심으로 중립에 서 있어야 하는가? 부모가 음행의 연고로 이혼한다 할지라도 자녀된 입장에서는 끝까지 중보를 노력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아무리 도박이나 두집 살림, 외도, 믿었던 상대방 배우자의 등 뒤에 비수를 꽂고, 감당이 안되는 범죄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회개와 용서의 도가 있기 때문에 중립과 중보 사이에서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자녀들이다. 앞날을 주님이 어떻게 하실지 사람 마음을 어찌 움직이실지 다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이 없으니 이것이 참 탄식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십자가 대속으로 중보를 하셨다. 중보에는 소금 같이 녹아지고 죽어지는 희생이 필연 따라간다. 이혼 같은 노선 분리에 중심 없는 중립은 박쥐 같은 존재가 되겠지만 중립 같은 중보는 노아 방주의 역청처럼 이혼을 막아 준다. 물론 단서는 이혼 안해야 되는 경우를 말한다.
신혼 초든 중년 이후든 공회에서 이혼할 뻔한 경우는 더러 있을 듯하다. 그때마다 누가 중보했던가? 누가 중립에 서서 이혼을 부추겼던가? 그때 이혼했더라면 금쪽같은 생명들은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본다면 이혼 안했더라면 허송세월에 기약 없는 기나긴 지옥터널을 허우적대다 정작 이룰 구원을 못 이루었을까?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신앙에 만약은 없지만 본인은 잘 결정했다 정평정가 할지라도 오판과 착각으로 실패했다면 주님은 이후 똑같은 시험을 계속 반복하시니 사후 평가는 필수적인 신앙 요소라 생각하여 중립과 중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자타를 살펴 본다.
연구소가 어떤 사람의 어떤 글이라도 적어 주시도록 열어 놓은 것은 세상의 죄와 악이 들어 오도록 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봐 주신다면 서로가 배우고 더 나아 질 수 있는 소망 때문입니다. 공회 성향의 신앙들이 발표를 조심하는 면이 지나 쳐 필요한 말을 하지 않음으로 오늘의 공회들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 곳의 어느 글에도 필요할 때는 늘 귀한 말씀을 기다리겠습니다. 다른 분의 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 소련 체르노빌 방사능 사고 조처 때 누군가는 핵용광로에 들어가서 수동으로 출입문을 잠궈야 하는데 누가 들어가겠는가? 아무리 억만금을 주고 처자식의 장래를 보장한다 해도 본인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산주의 국가니 강제하거나 미혹의 거짓말로 속일 수는 있겠으나 신앙 세계는 원하고 원하는 자유성의 의지가 아니면 만사가 다 말짱 헛일이 되고 만다. 대속의 정신이 아니고는 불법, 불의, 불목 어느 것 하나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다. 진퇴양난의 모순 속에서 대속이라는 극약처방 밖에는 달리 길이 없어 보인다.
죽음을 담보로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 피폭이 되는 줄 알면서도 다수를 살리기 위해 자기 한몸 기꺼이 바치는 제물됨, 고전13장의 사랑 없는 희생이 아니라 대속이 중심되고 누가복음 말씀처럼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몸소 자기 것 다 내 놓아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처럼 말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부모가 이혼하신다고 한다면 죽어가는 어린 신앙들을 살리고 싶고 사람을 아끼는 심정으로 원수들간에 하나되게 하는 대속의 정신인 소금은 지금도 가정에서건 어디서건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 없어서 못 구해서 소금처럼 흔한데 자원해서 대신 죽을 사람을 찾지 못해 처방전을 못 쓰고 있다.
왜 관망만 하느냐? 언제까지 기도만 하고 있을 거냐? 행동하라. 입장을 취하라. 그러면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과 표적을 보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말씀을 체험하고 싶다. 그런 설교를 하고 싶다. 현실에서 내 이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고 싶다. 답답한 사람이 우물 판다고 누가 제일 답답하겠는가? 아이를 둘로 나눠 가지라는 솔로몬의 극약 판결에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은 생모일 것이다. 이런 중심으로 댓글을 이어가 본다.
남단 글에 많은 이들의 댓글 참여가 절실해 보인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렇게 좋은 공간에 마음껏 표현할 수 있고 그러다 실수하면 스스로 절제 가능한 본 연구소 글쓰기 시스템이 마음에 든다. 아니 그 이상 매료가 된다. 내가 대통령께 상소를 올리면 방송용은 다 전달되는 것처럼 말해도 한 예로 대통령을 욕하는 등 심각한 사안은 중간에서 막바로 묵살되고 다 짤린다. 직통, 다이렉트로 모든 이들과 연결된 네트워크, 공개된 토론의 장, 본 연구소가 지향하는 '모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실행하고 있는 몇 안되는 연구소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댓글 활성화가 숙제로 남아 있는 듯하다. 필자의 글을 두고 공회 외부에서는 자만이 아니라 자부심 정도로 좋게 봐 주셨으면 한다. 한편 공회 내부에서는 주일날 설교를 다 듣고 나서 철부지 어린 주일 학생의 되도 안한 질문, 의문 정도로 봐 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