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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21.03.24

이명재 목사님은 이인재 목사님의 동생으로 박인순 전도사님의 동생인 박경순 사모님과 결혼했고, 이 분들은 해방 후 백 목사님과 제일 가까운 신앙의 동지가 되어 공회의 전국화 과정의 1세대에 해당 되는 인물이 된다. 이인재 이명재 가족과의 특별한 배려로 가족이 보관한 각종 1차 자료를 연구소가 기증 받거나 공유하게 되었다.

아래는 가족이 펴낸 책의 번역본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여행 - 이명재 목사님과 이경순 사모님 전기

 

내용

 

서문 – 3

  • 성장 – 이명재
  • 성장 – 이경순
  • 혼인과 부르심
  • 가정사: 장미와 가시
  • 한국에서의 목회
  • 떨어진 가족
  • 미국의 개척자
  • 추억과 헌정사
  • 선하신 하나님

맺는 말

부록 – 이명재 가계도

 

 

서문

이 책은 이명재 목사님과 그의 아내인 이경순 사모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평생토록 충성한 이 부부는, 그들의 삶의 중반을 지날 때 쯤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으나 이겨내시고, 시카고에서 한국개혁교회를 개척하여 그 교회에서 은퇴하셨습니다.

 

2003년 어느 날 이명재 목사님의 가족들이 아들인 청식의 집에 저녁식사를 하러 모였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 이명재 목사님 부부가 손주들의 악기 연주를 즐겁게 감상하며, 가족들이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손자 데이빗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낸 20세기 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데이빗은 책을 꼭 내자고 하며 제목을 “비범한 여행”으로 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아이디어를 들은 이 목사님이 “난 그저 평범한 사람인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삶은 평범 이상의 것이었고, 정말 감동적인 비범한 여행기였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가족의 추억을 보존하고,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얼마나 진실하신지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선물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훌륭한 부모님께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 가족에게 해주신 역사를 우리의 자손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리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 시편 78:4

 

(이명재 목사님과 이경순 사모님의 유화 – 라구나 해변에서)

 

  • 성장 – 이명재

 

명재는 1921년 1월 8일에 경상남도 마산리 상남면 밀양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생신고를 늦게 하여 출생증명서에는 1921년 10월 8일로 등록되게 되었다.

 

명재는 5남 4녀 대가족의 집에서 네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한묵은 근면성실하여 온 가족의 존경을 받는 농사꾼이었고, 어머니 최순명은 겸손하며 착한 여성이었다. 이한묵은 평소 명재를 두고 아주 굳세고 강인하여 밤송이 위에다가 놔도, 어떤 어려운 환경에 심어놔도 잘 자랄 아이라고 말했다. 가족을 돕기 위해 소의 쟁기로 밭을 갈기도 하고 풀을 먹이기도 하며 농사일을 도왔고, 근처 강에서 수영하며 맨손으로 고기를 잡기도 하며 놀기도 했다.

 

명재는 언제나 열정적으로 배우기를 원했다. 7살 때 서당에 가게 되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서당에가서 접장에게 문열어달라고 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이 작은 서당에서 벌써 한자를 2000자나 알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8살 때는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일본이 한국어를 금지시켜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렇지만 1학년을 마칠 때 1등을 하여서 한 아름의 책과 학용품을 상으로 받았다.

 

이 학교는 4학년 밖에 없었기 때문에 명재는 5학년과 6학년을 다니기 위해 하남 대사동이라는 먼 동네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매일 편도 8킬로미터를 2시간 동안 걸으며 학교를 다녔다. 어느 날, 버스를 탈 수 있는 돈을 얻게 되자 그는 버스를 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멀미가 너무 심하여 내리자마자 풀밭에 한동안 누웠다가 겨우 일어나 집으로 걸어갔다. 그날 명재는 다시는 차를 타지 않기로 결심했다. 매일 학교를 걸어서 등하교 하며 ‘신발에 바퀴가 달렸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는데, 훗날 미국에서 롤러스케이터를 보더니 ‘아니! 저건 내 아이디어인데!’하며 아쉬워했다.

 

그는 점심을 조금 밖에 먹지 못한데다가 집으로 두 시간 씩이나 걸어다녀서 자주 배가 고팠다. 그 당시에는 행상인들이 길에서 떡을 팔았었는데 살 돈이 없어 정말 먹고 싶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명재는 언제나 떡을 먹고 싶어하게 되었다.

 

농사일이 하두 많아서 집에서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었으나 학교 공부를 잘했다. 특히 교장 주관 역사 시험을 치룬 적이 있었는데, 최고점을 맞아서 연필 두 개를 상으로 받았다. 연필은 그 당시 굉장히 사치품이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 학교에는 여자가 10명 정도 있었는데 모두 나쁜 학생인 나머지 명재는 모든 여자는 바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훗날에 그의 딸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자, 그제서야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린 명재는 그 당시 장로였던 형 인재를 따라서 교회를 다녔었다. 그 때 명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받고 진심으로 믿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의 가족들도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밀양농업중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에서 머물렀다. 그의 형은 잘나가는 공무원으로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3년을 다니며 2등으로 졸업했는데, 최우수 성적 두 명의 졸업생에게는 일본정부 밑에서 곡식감독(crop inspector)라는 최고의 자리를 주었다. 이 자리 때문에 그도 부산으로 가게 되어 반년을 머물렀다.

 

이번에도 그는 배우고 싶은 열망이 일어나 더 공부를 하고자 도쿄로 가게 되었다. 상업고등학교를 2년간 다니면서 대학교 입학 자격을 얻게 되었고, 1등으로 졸업하였기 때문에 졸업식에서는 일본 문부성(교육부) 장관에게 상을 받았다. 그 때는 한국인들의 암흑기였기에 명재는 일본인 경쟁자들을 이긴 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한국인들은 나라를 빼앗기고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다. 명재는 자기와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일본 학생들보다 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는 일본에 머무르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신문과 우유 배달을 하며 스스로 돈을 벌었다. 공장에서도 일했다. 고향의 집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걱정하여 돈을 보냈지만 명재는 그 돈을 다시 돌려보내며 편지를 썼다. “아버지, 돈을 보내주신 것은 고맙습니다만, 제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일본 은행에 있는 모든 돈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그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믿었고 완전히 하나님께 의지했다.

 

1941년 그는 대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마쳤다. 수의학과를 선택했다. 일본은 세계2차대전중이어서 교양학부 학생들을 징용했으나 의학부 학생들은 제외했다. 일본군으로 끌려간 한국 젊은이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국을 지배했다. 그들은 강제로 한국인들이 일본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게 했다. 학교에서는 한국어를 금지했고, 성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했다. 많은 애국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이 규칙들 때문에 박해를 받고 체포되었다. 명재의 형, 인재도 신앙양심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되었다. 평양신학교 학생으로써 인재는 이 세계에 만연한 우상숭배는 잘못된 것이라고 믿었다. 신사참배를 강제로 시키기에 그의 자녀들도 학교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 아이들은 집에서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하여 선생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때 근처에 투옥된 형제 자매들을 위해 모여서 예배와 기도를 하는 교인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 중에 박인순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열정적이고 뜨겁게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보시는 분이었다. 그는 인재의 자녀들이 집에만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학교교사로 일하는 자신의 여동생이 생각이 났다. 여건이 된다면 그가 집으로 와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다행히 인재도 결혼하지 않은 남동생, 명재가 있었다. 혹시 명재가 경순과 결혼하여 인재의 아이들을 교육시켜 줄 수 있을까 싶었다.

 

명재가 방학하여 일본에서 한국에 귀국했다. 미래 결혼하게 될 신부를 소개받았으니 중요한 사건이다. 경순을 본 명재는 그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다 생각했다.

 

 

  1. 성장 – 경순

 

박경순은 1920년 11월 20일 경상남도 기장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재하는 그 동네의 존경받는 접장이었다. 그러나 경순이 2살 때 독감으로 죽었다. 어머니인 김봉경이 삯바느질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아주 가난했었다.

 

형제인 박세영은 그 시대 지성인이였고 사회주의자였다. 17살 때부터 ‘금연과 금주만이 우리나라가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대자보를 붙이는 등 마을에 나가 사람들을 선동하다 일본경찰과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강한 애국주의 정신이 있었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찰이 여러번 체포했다가 감시하에 두기도 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몇 년을 머물렀는데 결핵에 걸려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경순의 가족은 의사의 충고에 따라 몸조리를 위해 햇빛이 강한 해변 마을인 수영으로 이사를 갔다.

 

결핵이 치료된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계속 싸웠다. 23살 때 체포되어서 6년형을 받았다. 수감생활 5년 8개월째, 병이 너무 심해 일찍 나오게 되었으나, 2개월 만에 그는 2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오늘 날까지 기장 마을은 그의 애국심을 기려 추도식을 갖는다. 경순의 어머니는 일본에서 돌아오는 배를 타고 오며 아들의 죽음으로 너무 상심하여 뛰어내리려 했으나 남은 자녀들을 생각하며 참았다. 경순도 오빠의 죽음이 너무 슬펐다. 매일 등하굣길 8 킬로미터를 걸어다니며 민요를 불으며 울었다.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지금도 오빠를 생각하면 눈가에 눈물이 맺히곤 한다.

 

수영 마을에서 경순은 굉장한 기독교인 선생님을 만나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그녀를 사로잡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어 예수님과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언니인 인순은 교회를 반대했었다. 인순은 오빠처럼 사회주의자의 길을 걷겠다며 했다. 마을의 모든 어린이들이 교회를 다녔지만 인순은 가지 않았다. 머리를 땋고 있는 경순의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며 교회 다니는 경순을 못살게 굴었다.

 

그러나 인순의 마음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셨다. 주일학교 선생이 인순에게 교회에 와서 주일학교 선생이 되어보지 않겠냐고 권했다. 믿지도 않는 사람인데도 그런 권유를 하니 굉장히 이상했지만 아마도 그 선생은 인순이 언젠가 활동적인 기독교인이 될거라고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선생의 권유를 받은 인순은 “음.. 한번만 가볼게요. 예수가 누군지 좀 알아보고요.” 그는 평소에 ‘주여, 주여’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내는 소리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점차 역사하시니 그도 결국 주님을 믿게 되었다.

 

박인순은 18살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주일학교 반사로 일하다가 교회의 전일제 직원이 되었다. 인순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온 몸을 받쳐 일했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일본의 박해 기간 동안 신앙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된 후에는 고려신학교를 졸업했다. 부산 영도제일교회에서 17년간 부목으로 시무했고, 그 후 서울 동도교회와 부산 초량삼일교회에서도 일했다. 그의 어머니가 중풍병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실 때 인순이 3년간 별세하실 때까지 간병했다. 목회에서 은퇴를 한 인순은 미국으로 건너가 경순의 가족과 같이 살았다.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여겼다. 그는 진정 끊임없는 기도의 표본이었다. 조카손주들이 ‘기도 할머니’라고 불렀다. 도미한지 20년이 지나서 한국에 잠깐 들렸을 때 천국으로 돌아가셨다. 영도교회에서 명예로운 장례식을 치뤘다.

 

경순은 좋은 학생이어서 많은 상을 받았는데 반장을 맡기도 했다. 그의 기독교인 선생 중에 할머니가 많이 아프신 분이 있었다. 경순은 자주 방문 하여 찬송을 불러드리며 편안하게 해주었다. 어느날 그 할머니가 11살 6학년인 경순에게 물었다.

 

“경순아, 고등학교 가고 싶지 않니?”

“당연히 가고 싶지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가고 싶다고 말도 못해요.”

“경순아, 정말 가고 싶거든, 엄마에게 말해보거라. 무서워 말고, 꼭 부탁해보거라.”

 

할머니의 그 말씀이 경순에게 희망을 주었다. 단 한번도 고등학교에 가보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 당시에 고등학교에 가는 여자 아이도 매우 드물었다. 한 마을에 한 아이 정도 갈까말까였다. 거기다 그의 어머니도 삯바느질로 겨우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끼니를 떼우는 것만도 고마운데 어떻게 고등학교 가고 싶다고 말하겠는가. 그럼에도 일단 말해보기로 결심했다.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말해보거라.”

“고등학교에 진학해도 되나요?”

 

경순의 심장이 떨렸다. 어머니가 뭐라고 대답할까? ‘말도 안되는 소리 말아라. 어떻게 그렇게 네 생각만 하니?’ 놀랍게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없이 생각만 하고 계셨다. ‘그래, 그래도 시도는 해봤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경순에게 놀랄만한 상황이 일어났다. 신문사에서 잘 나가서 돈을 잘 받는 아주버니가 찾아왔다. 그 때 경순의 어머니가 갑자기 물었다.

 

“여기 경순이가 고등학교를 가고 싶어하는데 돈이 없어서 보낼 수가 없구나.”

 

아주버니가 잠깐 생각하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고등학교 보내주세요. 아주 잘 할 겁니다. 등록금은 저희가 내드리겠습니다.”

 

경순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고등학교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먼저 어려운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친구들은 개인교습을 받아가며 열심히 공부한 것을 알고 있어서 자기가 할 수 있는대로 열심히 준비하여 시험을 치뤘다. 시험에 합격하니 너무 기뻤고 고등학교에 보내주신 것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했다.

 

경순은 일신여자고등학교를 2년 동안 다녔는데, 언니가 돌아가시고 아주버니의 지원이 멈췄다. 그러나 사촌들과 교회에서 일하던 인순 언니를 통해 하나님께서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경순의 졸업이 다가올 때쯤에는 가족들이 남은 등록금을 내기 위해 마지막 한 푼까지 긁어왔었고, 경순은 그것을 잊지 않았다. 결국 고등학교 4년 과정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경순은 가끔 그 병든 할머니를 추억한다. ‘만약 그 할머니가 그 말씀을 하셔서 내게 희망을 주지 않았다면, 만약 아주버니가 잠깐 들르지 않았다면, 난 고등학교를 절대 다니지 못했을 거야. 하지만 하나님이 은밀히 섭리하셔서 세상을 급변시키니 내가 기적적으로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거야.’ 꿈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해결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그 꿈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꿈을 이루어줄 최상의 방법을 보여주실 것이다.

 

경순은 초등교육과 유치원교육을 배워 여러 보통학교를 다니며 교사를 맡았다. 이인재 목사님의 가족이 조카들을 위해 교사를 찾고 있었는데, 경순이 제격이었다.

 

 

  1. 혼인과 부르심

 

1942년 1월 15일. 선본지 5일 만에 명재와 경순이 결혼했다. 처음 본 총각과 결혼하게 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는데 “그와 결혼하는게 내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주님 말씀 순종하며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했지요.”라고 말했다. 그 당시에는 결혼할 때 선을 보고 며칠 안에 결혼하는 것이 평범했던 시기였다. 어떤 신혼부부는 결혼식에서 처음으로 상대를 보기도 했다. 명재와 경순은 그래도 결혼 전에 몇 번 얼굴을 보기라도 했다. 또, 그들은 결혼을 그들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정략결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결혼 준비는 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할 일은 아주 많았다. 이불을 기워야했고, 옷과 바지를 만들어야 했고, 떡을 만들어야 했다. 이 많은 일을 하면서도 매일 네 번씩 예배를 빠지지 않았다. 감옥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불신 친척들은 그들을 보며 결혼식 준비를 언제할거냐며 비웃었다. 하지만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부부의 결혼식 사진을 보면 명재는 턱시도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매었고 경순은 하얀 옷과 레이스가 달린 면사포를 썼다. 당시에는 신랑 신부 모두 전통 혼인예복을 입었는데, 이들은 전통복장을 하나도 입지 않았다. 이들의 혼인 의상만큼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볼 수 있겠다. 명재는 결혼식 후 며칠을 더 머물다가 학업을 위해 도쿄로 돌아갔다. 그때 공부를 위해 남동생도 데려갔다. 경순은 인재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신혼부부가 서로 볼 수 있었던 날은 방학 밖에 없었다.

 

2차대전의 중반인 1943년에 첫 아이를 낳았다. 전쟁이 심해지자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졌다. 겨울방학때 명재가 돌아오자 경순이 일본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설득했다. 놀랍게도, 그는 밀양에 남기로 결정했고 관개수로 사무소에서 일했다. 교육에 대한 그의 열의를 생각해보면 정말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처자식을 생각해야 했다. 경순은 그때를 두고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말을 들은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2년 후 1945년 8월 15일 세계2차대전이 끝났고 이인재와 박인순 등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해방되었다. 일본은 8월 말에 옥중성도들을 모두 처형하기로 결정했었는데, 그렇게도 때가 잘 맞춰질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역사에 아주 큰 감사가 넘쳤다. 명재는 평양에 부흥회에 참석했다. 그는 이 시대의 흐름을 기쁨으로 이겨냈고 또한 하나님의 역사하신 것이라 믿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마귀의 역사를 진멸하셨다. 하나님께서 6년 동안 옥고 생활을 한 인재를 풀어주셨다. 명재는 그 일이 있은 후 거기서 목회자로 하나님께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가 딱 하나 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이 사명을 찾았던 날이 25세 되던 해였다. 그는 그의 형을 따라 고려신학교에 입학했고 전쟁이 끝난 후 고려신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인재 목사님은 목사 안수를 받고 대구에서 목회를 했다. 은퇴하고 나서 이인재 목사님은 이명재 목사님의 초대를 받아 미국으로 이민갔다.

 

 

  1. 가정사: 장미와 가시

 

1943년 12월 24일 장녀 효선이 태어났고 1945년 12월 27일에는 차녀 신애가, 1948년 4월 1일에 장남 정식이 태어났다. 모두 마산 밀양에서 출생했다. 1950년 12월 27일 셋째 딸 정혜가 태어났는데 1953년 12월에 태어난 둘째 아들은 안타깝게도 일주일 후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명재가 목사로 안수받은 해였는데, 이 기쁜 날에 마음 아픈 일이 생긴 것이다. 이 슬픔은 이겨내기에 시간이 좀 걸렸다. 넷째 딸 혜영은 1954년 10월 3일에, 다섯째 딸 혜옥은 1957년 4월 15일에 밀양에서 태어났고 막내인 여섯째 딸 혜경은 1959년 7월 28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가족이 1남 6녀로 불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한국사회는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는데 이 딸들은 절대 차별받지 않고 자녀로 똑같이 사랑 받았다.

 

큰 가족이 되다보니 기쁨이 커졌지만 걱정도 커졌다. 어느 날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정식이가 실종되버린 일이 있었다. 아무 여자를 엄마라 생각하고 쭉 따라가버린 것이다. 밤이오고 가족들은 깊은 근심에 빠졌다. 한 주일학교 반사가 우연히 시장에서 그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다 줬다. 정말 기쁘고 눈물이 나던 사건이었다. 명재 가족이 다른 곳으로 이사가게 될 때 그때 반사선생님이 선물로 신약성경을 사줬다. 그의 첫 성경인 것으로 알고 있다.

 

효선이 두 살 때였는데, 마을에 원인 모를 설사를 일으키는 전염병이 돌았다. 두 마을에서 7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갑자기 죽었다. 어떤 가족은 두 아이가 한꺼번에 가는 일도 생겼다. 효선도 너무 아파 걷지도 못했다. 경순이 등에 없고 두 시간을 걸어 병원에 데려왔다. 의사가 알약을 주며 “이 약을 먹어보시고 효과가 없거든 마늘을 갈아서 줘보세요.”라고 권했다. 알약이 효과가 없는 것 같아 경순은 마늘을 갈아서 효선에게 먹이기로 했다. “진짜 힘들었지. 효선의 코를 막고 억지로 먹였어.” 그 때를 생각하며 경순이 말했다. 기적적으로 효선은 살았고 경순은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산 것이라고 말했다.

 

신애가 태어나고 얼마 후에는 지독한 콜레라가 유행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24시간 안에 죽었다. 명재의 아버지도 사람들이 관을 짜는 걸 보다가 그 다음날 돌아가셨다. 이웃들이 “저 집에서 한 명 더 죽으면, 집을 통째로 불살라 버려야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어머니가 콜레라에 걸렸다. 그 때 그 집에는 어머니와 아들 여섯과 며느리 둘이 살고 있었다. 어머니가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와서 집을 태울거라니, 너무도 끔찍했다. 가족이 모두 치료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그때쯤에 북한에서 온 한 내과의사가 있었는데 다른 것은 주지말고 숭늉과 물만 많이 주라고 처방해주며 수액을 좀 맞으면 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이 작은 동네에서 정맥수액을 구하라니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만물의 주권자 하나님이 인순의 친구 한 명을 부산 병원에서 일하게 하셨다. 명재는 부산으로 출장을 나가 이 분한테서 수액 두 병을 구해가지고 돌아왔다. 그 의사 말대로 하니 어머니가 살았다. 그렇게 그는 노환으로 돌아가시기까지 80년을 사셨다.

 

천연두가 유행하던 대도 있었다. 동네 많은 어린이들이 죽었다. 명재는 어떻게 천연두 백신을 구해서 자녀들에게 놓아주었다. 덕분에 그들은 죽지 않고 어깨에 접종 흉터만 남았다.

 

명재도 질병 문제가 생겼다. 고려신학교 2학년 시절, 맹장염으로 앓았다. 경순은 근처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배를 타려 했는데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선장이 위험하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새도록 큰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다음날 나룻배를 탈 수 있었는데 기차로 갈아타려할 때 고통이 너무 극심하여 바로 작은 시골 병원에 들렸다. 의사가 맹장이 파열됬으니 당장 수술해야한다고 말했다. 그 당시를 회상하는데 “그 병원은 너무 후져서 마취제는 물론 얼음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데려온 어린 신애를 꼭 안으며 하나님께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마음속에 한 찬송가가 들려왔다.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주를 더욱 의지 합니다

세월 지나 갈 때에 의지할 것 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딸의 간구를 들으시고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지만 치료받고 회복되었다. 주님은 이 시기에 경제적인 지원도 해주셨다. 명재의 형이 농장을 조금 남기고 다 팔고 병원비를 대주었다.

 

경순이 둘째 아들을 잃은 후 이상한 병에 걸렸다. 그때를 두고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고 말하셨다. 그때 마침 북한에서 온 한 한약사가 들러서 약을 좀 주니 금방 나아버렸다.

 

1954년에 지방 목회자 기도집회가 있었는데 정식이가 떨어져서 머리를 다쳤다. 타고 갈 수 있는게 없자 명재는 정식이를 업어서 의사의 집에 찾아가 바늘로 상처를 꿰멨다.

 

명재는 학구열이 있었기에 많은 책을 모아놨다. 그가 머무르던 방마다 책을 쌓아두고 떠나기 일쑤였다. 그 중에 특별한 두 책이 있었는데, 하나는 1948년 가족 서재에 들어와서 오랫동안 많은 소란을 피한 낡은 영어 성경책이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빨간 표지로 된 낡은 한자옥편이 있었는데, 표지 안쪽에 가족의 주요 사건들이 적혀있었다.

 

이명재 목사의 자녀들은 주일을 엄격히 지켰다. 주일에는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월요일에 시험이 있으면 주일에 일찍 자고 자정에 일어나서 공부했다. 주일에는 장도 보지 않았다. 주일은 교회를 가서 성경공부를 하고 성도들과 교제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억압받았다 생각하지 않았다. 혜경은 주일을 제일 즐거웠던 날로 기억한다. 그는 주일이 언제였는지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주일에는 라디오에서 아름다운 찬송가가 흘러나왔고 교회 가는 것도 정말 재밌게 느껴졌다.

 

명재는 신학생 때 로마서를 통째로 암기했다. 가문의 전통을 따라서 자녀들도 성경암송 대회를 휩쓸며 상을 받았다. 정식은 세 살 때부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디모데전서 6장 10절 상반절 말씀)’ 같은 성구를 암기하여 적재적소에 인용하곤 했다. 혜옥은 흥천교회(승원교회로 이름을 바꿈, 식구 대부분이 다니던 교회)와 무학교회(집이 가까워서 어린 자녀들이 가끔씩 출석함)에서 상을 받았다. 무학교회에서 상을 받았던 일은 비화가 있다. 어느 날 가족이 저녁예배를 보러 가는데 암송대회가 있다는 것을 늦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서둘로 집에 와서 자고 있던 혜옥을 깨워서 대회에 참가시켰다. 혜옥은 이미 얼마전에 있었던 한국기독교학생집회에서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를 암기했었다. 정혜는 고등학교에서 영어로 ‘산상수훈’을 암기하여 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었다. 마태복음 5-7, 요한복음 14-15, 요한복음 16-17, 히브리서 11-12, 잠언 1-2, 시편 등을 암기했었다. 경순은 먼 훗날에도 이 성경을 자동으로 암송할 수 있었다. 혹시 동요 가사가 기억나지 않을 때 경순에게 물어보면 잘 기억하신다.

 

명재는 교회업무 때문에 언제나 바빴는데, 한 번은 가족을 데리고 소풍을 나가고 싶어했다. 멋진 생각이었으나 가지고 갈 음식이 없었다. 경순이 짧은 시간동안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밥과 명란젓 밖에 없었다. 하지만 밥이 없다고 가족과 함께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도시락을 싸서 남산공원에 가서 재밌게 소풍시간을 보냈지만, 먹고 있는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고, 명란젓을 볼 때마다 소풍 기억이 생각이 났다.

 

그 시절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 우리 가정은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되새길 때마다 우리 가족의 마음에 언제나 오는 찬송.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날 구원하신 주 감사 - August L. Storm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 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해처럼 높으심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1. 한국에서의 목회

 

명재가 고려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어렸을 때 자랐던 밀양 마산교회에서 2년간 전도사로 시무했다. 시골의 작은 교회였다. 그는 1993년에 100주년 기념식을 할 때 기념예배에 초청받아 말씀을 전했다. 지금은 크게 자라서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었다.

 

후에 신마산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는데 예배당의 종탑을 건설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고려신학교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진 해에 졸업했다. 마산은 한국 남해에 있는데 북한군이 여기까지 밀고 내려왔다. 많은 한국인들이 최후방인 부산으로 피난갔지만 명재는 교회에 남기로 결심했다. 어떨 때는 산에 숨어있다가 밤에 조용히 집에 들렸다 가기도 했다. 신애가 다섯 살이었는데도 그때 마산에서 미군들을 봤던 것을 기억한다. 가끔 미군 병사가 마을 아이들에게 초콜렛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때 미국 초콜렛을 처음 맛보았다. 전선이 밀려올수록 나머지 가족들은 부산으로 피난가서 안전할 때까지 인순의 집에 머물렀다.

 

1953년 명재는 밀양의 삼문교회에서 복음의 사역자로 안수를 받았다(이하 이명재 목사님으로 표기). 삼문교회는 밀양 초등학교 입구쪽에 있었는데, 6.25전쟁 때 미7군단 병원이 학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은 교실이 없어서 여름에는 밖에서, 겨울에는 임시건물에서 수업을 들었다. 하나님이 교회 바로 옆문에 전도터를 만들어주셨다. 이명재 목사님도 목회자가 없는 여러 지방 교회들을 순회하며 돌봐야하는 상황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순회를 돌며 세례성찬식을 맡았다.

 

삼문교회 예배당 건물은 상태가 매우 안 좋았고 종탑도 없었다. 그래서 이재명 목사님이 새 예배당과 종탑을 만들자고 교인들을 설득하였다. 트럭으로 시멘트를 가져오고 강에다 벽돌을 세우는 등 직접 교인들과 함께 오랜 시간 몸으로 일했다. 기금이 모자라 건축 기간이 많이 연장되었으나 목사님이 서울 교회로 이동하실 때쯤에는 건설이 거의 끝나가 있었다.

 

밀양 삼문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고 있을 때, 그는 부산에 있는 칼빈대학교 영어학과에 입학했다. 통학하는데는 익숙해졌지만 들고다니던 서류가방은 소매치기에게 자주 당했다. 그는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했다.

 

1958년에 이명재 목사님의 가족은 새로 부임하게 된 원남교회가 있는 서울로 이사했다. 효선은 중학교를 끝내기 위해 밀양에 계속 머물렀고 신애도 중학교를 마치기까지 부산에 있는 인순 이모의 집에 머물렀다. 교회가 세내고 살던 건물은 곧 제약회사에 팔렸는데, 이명재 목사님은 또다시 세를 내는 것보다 창고를 하나 사서 리모델링하여 예배당으로 삼자고 강력히 주장하셨다. 새 예배당에 들어갈 장의자를 모두 구매했다. 그런데 교회터의 경계문제가 생겨서 예배당 벽이 3미터 정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길이가 예배당에 딱 맞는 장의자를 샀기에, 수정된 예배당 크기에 맞춰 의자를 다시 잘라 맞춰야 했다. 이명재 목사님은 1962년에 도미하실 때까지 원남교회에서 충성했다.

 

 

  1. 떨어진 가족

 

이 목사님은 밀양에 있을 때부터 언제나 해외 유학을 꿈꾸셨다. 미국유학을 원했기에 영어를 공부하며 준비했다. 모토로라 라디오를 하나 사서 영어 방송을 듣기도 했다. 자녀들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타임지, 배너지를 읽고 성경구절을 영어로 큰소리로 암송하시던 모습이 있다. 그래서 자녀들도 영어는 하나도 몰라도 성경을 영어로 외울 수 있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등을 아버지 따라서 암송할 수 있었다. 이 목사님은 서울에 있는 국학대학교(후에 고려대와 통합)에서 영어학사를 받았다.

 

그 당시에 목회경력 10년이 있으면 학생 비자를 취득할 때 시험이 면제된다는 규정이 새로 생겼다. 덕분에 영어과목에서 여러번 탈락한 이목사님도 결국 유학에 필요한 서류 준비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그 때 목사님의 연세는 41세였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할 수 있었던게 별로 없었다. 가족이 살아야할 곳도 찾지 못했고, 공부중에 가족을 부양할 방법도 없었다. 이 모든 문제들이 이 목사님에게 큰 짐이 되었으나 미국 유학이라는 일이라서 그저 기뻐했다. (2003년 석민(Paul. 효선의 아들)의 결혼식 후 성희(정식의 딸)가 아직까지 호텔에 머물러 있는 몇몇 가족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인도했는데, 이때를 두고 아브라함의 신앙과 비교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가는 길이 어디인 줄도 모르고 그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과 같다고 말했다.) 1962년 11월에 이명재 목사님은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 한미장학재단의 후원을 받는 미해군 함정을 타고 미국길에 올랐다. 100달러를 요금으로 지불했다. 가는 길에 멀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15일 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미국 땅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모든 아픔이 싹 가셨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4일을 걸려 필라델피아 Faith 신학교에 도착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사모님은 일곱 자녀를 돌봐야했다. 이웃 교회가 예배당 1층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방 하나를 제공해줬다. 건물을 짓는 동안 임시적으로 사용하려 만든 가건물이었지, 제대로 된 집은 아니었다. 그 교회의 목회자가 이명재 목사님의 친구인 덕분에 식구가 거기서 신세질 수 있었다. 다행히도 가장 나이가 많은 효선은 서울대학교 간호학과에 다니면서 기숙사에서 살았고, 정식과 신애는 근처 교인의 집에 합숙하며 과외를 했었다. 나머지 식구는 그 작은 방에서 살았다. 얼마나 비좁았냐면, 잘 때 양말을 신으면 방이 너무 좁아지니 신지 말라고 한 정도였다. 혜옥은 부산에 있는 이모 박인순에게 보냈다. 추운 겨울철이 오면 방 밑에 가운데에 있는 작은 숯불난로로 버텼다. 그 연기는 사람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에 경순 사모님은 이를 두고 ‘그 독가스 속에서 아무도 죽지 않은게 참 기적적이다.’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그 교회 건물에 있는 두 칸 짜리 방으로 옮겼다.

 

그 와중에 이 목사님은 Faith 신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일을 했다. 숙식비를 지원해주는 전액장학금을 받았지만 한국에 남겨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온갖 뜨내기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학교운동장의 눈을 치우기도 하며 월 100달러 정도를 식구에게 보내줬다. 너무 아파 학교는 못가도 식당에서 일은 계속하기도 했다. 이명재 목사님은 한 교회에서 큰 피아노를 기부받았는데 그걸 한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 당시 피아노는 굉장한 사치품이었다. 온 가족이 이 피아노를 치고 노래하며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근데 이 피아노 뿐 아니라, 피아노를 보낼 때 피아노를 싼 나무케이스도 도움이 됬다. 목수를 불러서 책상과 옷장을 만들었다. 사모님의 좌우명은 ‘하나도 버리지 말자’ 였을 것이다.

 

이명재 목사님의 Faith 신학교 한국인 동기 중에 한 분이 2004년에 우리 가족에 들렀는데 신학교 시절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셨다. “캠퍼스에서 낙엽을 쓰는데 시간당 1.1 달러를 받았다. 이발비는 팁을 포함해 5달러여서 이발기계를 사서 서로 이발을 해줬다. 이명재 목사님은 특히 딸들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다. 시내에 가서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일할 곳을 찾았는데 아무데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때 내가 한 중국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얻어서 얼마동안 하다가 이 목사님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거기서 일을 아주 잘해서 보조 요리사로 올려주기도 했다. 그때 한 요리사가 차를 중고로 팔려고 했는데 이 목사님이 그 차를 100달러를 주고 샀다. Faith 신학교 한국인들 중에서 이 목사님이 제일 먼저 차를 산 것이다. 그 차를 타고 드라이빙을 한번 다녀온 후에 ‘그래! 내가 이 때문에 미국에 온거야!’라고 외치며 좋아했다. 후에 내가 이 목사님이 운전연습을 시켜준다는 조건 하에 그 차를 100달러에 주고 샀다.”

 

박경순 사모님은 엄청나게 절약하며 살았는데 친척들이 그를 ‘경제학 박사’라고 부를 정도였다. 저축하고 또 저축했는데, 후에 신세지던 교회가 팔려서 이사갈 수 밖에 없게 됬을 때에, 직접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만한 돈이 모이게 되었다. 사모님에게는 사실 목사님이 한국에서 목회하던 시절보다 이 시절이 더 나았다. 미국에서 돈을 보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녀 학비는 언제나 큰 문제였다. 한국에는 아직 초등학교조차 무상교육이 없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학비를 늦게 내서 많이 혼났던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에게 교육은 최우선 과제였다. 가족을 잘 아는 한 친구는 “구멍가게를 지나치면서 과자를 볼 때마다 얼마나 먹고 싶어했을까!”하며 이 목사님의 자녀들을 보고 가엾게 생각하며 종종 과자를 사주기도 했다.

 

일곱 자녀를 먹여살리면서도 박경순 사모님은 교회 봉사를 잊지 않았다. 금요일이면 교인 심방을 다녀왔고, 새벽예배도 매일 빠지지 않았다. 새벽예배 가기 전에 숯불난로에 밥을 얹히고 정혜를 깨워 10분 정도 지나고 뚜껑을 닫아 끓이도록 시켰다. 그런데 가끔씩 정혜가 일어나지 못해서 예배당에 밥이 타는 냄새가 슬슬 올라가기도 했다. 혜경은 아침에 어머니가 차가운 손으로 자기를 깨우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자녀들도 어머니가 자기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할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가족이 다녔던 흥천교회는 이 식구를 사랑해줬다. 이젠 더 이상 사택식구가 아니게 되었지만 버리지 않고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그들의 수고를 인정해줬다. 이명재 목사님의 식구들은 주일학교, 찬양대, 학생회, 여전도회 등을 맡았다. 한 노장로님은 매 주일예배 때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이명재 목사님을 위해 기도를 했다.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한 삶 중에서도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이웃집들은 이 가족이 크게 웃는 집으로 기억하고 있다. 정혜는 버스내 장사꾼들의 완벽하게 흉내내면서 가족들을 웃게 했다. 새로 산 집으로 이사하고 나서는 신애도 집에 들어왔는데, 학교에서 들은 재밌는 이야기들을 풀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 않았으나 교육적 성과로 복을 많이 받았다. 효선, 신애, 정식은 한국 최고의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국립대이기에 등록금도 저렴했다. 사모님은 자녀들을 참 자랑스러워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잊지 않았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세기 22장 14절의 말씀을 우리 가족은 직접 체험했다. 아버지가 부재했던 7년간, 자녀들은 한 명도 탈선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좋은 학생으로, 교회에서는 좋은 교인으로 살았다. 어려움과 고난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는 것을 배웠다.

 

 

  1. 미국의 개척자

 

이명재 목사님은 Faith 신학교 석사과정을 마치고 Concordia 신학교에서 다음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하다가, 여름방학에 일 때문에 후에 시카고에 오게 되었는데 시카고에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7년에는 한국성경교회(Korean Bible Church)를 개척하기로 했다. 작은 예배실을 빌리고 교회 설립을 알리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주일 첫 예배. 혼자 예배당에 가서 기다렸다. 두 가족이 들어왔다. 좀 실망한 기분으로 예배를 시작했으나, 설교를 할수록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위해 가지신 계획을 알게 되어 기뻐했다. 후에 그는 목회자로써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이명재 목사님은 시카고를 정말 좋아했기에 정착하기로 마음먹고 온 식구를 초대하기로 했다. 신애가 1968년에 학생 신분으로 먼저 도착했다. 정식, 정혜, 혜옥, 혜경은 1969년에 들어왔고, 박경순 사모님은 1969년에 들어오고 마지막으로 효선이 합류했다. 혜영은 자신의 서류가 미국대사관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친구 집에서 혼자 남게 되었다. 이 목사님은 그를 위해 미국 상원의원과 시카고 트리뷴(시카고 지역 신문사)에 편지를 써서 도움을 구했다. 얼마 후 “지금쯤 당신의 따님은 비자를 받고 있을 겁니다.”라는 칼럼을 신문에서 보게 되었다. 미국의 사회체계를 통해 이 목사님 가족은 새로운 희망과 확신을 갖게 되었다.

 

7년이라는 세월 후에 드디어 온 가족이 재결합했다. 리글리 필드(Wrigley Field, 시카고의 야구 경기장) 근처에 침실이 두 개인 방을 구했다. 이층침대가 몇 개나 필요했을까? 들어갈 수 있는 만큼 필요했다. 이 목사님은 부양할 식구가 있다는 것에 대해 너무 행복했다. 그는 식료품점에 가서 온갖 음식을 사는 것을 좋아했다. 효선은 등록 정간호사 자격증을 따내고병원에서 일했고, 나머지 자녀들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학교에 다녔다. 이명재 목사님은 “Korean Bible Church" 이름을 붙여놓은 폭스바겐 미니버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버스를 타고 새로운 나라를 둘러보고 경험해보기 위해 짧은 여행을 많이 다녔었다. 박경순 사모님에게는 미국 이민이 굉장히 힘들었다. 그는 처음에는 가지 않으려 했으나 남편이 강하게 주장했기에 지역 주민센터에서 제공하는 영어 수업에 참석했다. 1년만에 1등급에서 8등급으로 올라갔다. 동료들에게 발음이 완벽하다고 칭찬 받기도 했다.

 

어느날, 이 목사님이 사모님께 직장을 구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오래 전 결혼한 이후 돈 받고 일해본적이 없어 생활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사모님은 독일계 회사에서 일을 해보다가 시카고 심포(Chicago Shimpo)라는 일본계 신문사에서 조판 글자를 배열하는 일을 했다. 혜경은 어느 고등학생 시절 여름에 어머니와 같이 그 일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여러 일을 했지만 이 일을 대부분 했었다. 어머니가 매일 8시간씩 즐겁게 일하던 것을 생각하면 혜경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사모님은 7시에 시작하는 오전근무를 위해 일찍 일어나야 했는데 쉬는 시간에 커피 한 잔 마시지 않고 1원까지 아껴서 모았다.

 

나중에는 Crane Packing Company라는 곳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교육을 받아 설계도면 보는 법과 칼리퍼를 쓰는 방법을 배웠는데 나중에는 감독관으로 승진했다. 총 20년을 일하시고 71살에 퇴직하셨다. 혜옥도 이 회사에서 여름방학동안 일을 했었다. 후에 백악관에서 대통령 여자 장학생으로 선정되었을 때, 이 회사에서 그의 이야기를 취재했었다.

 

한국성경교회는 무디교회(Moody Church)에 있는 작은 예배당을 빌렸다. 전일제 담임목사를 모실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재명 목사님은 인쇄회사에서 전일제 야간근무를 뛰었다. 신애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밤새도록 일하신 후에 낮에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서 시카고로 건너와 정착했는데 그분들이 이재명 목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목사님은 공항에서 태워주기도 하고 출입국사무소에서 통역 해주기도하고, 집과 직장을 찾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는데, 운전연습까지도 도와주셨다. 그렇게 일하시다가 겨우 몇 시간 자고 다시 야간근무를 하러 나갔다. 신애는 아버지가 전임 목사가 되어 목회일만 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 당시에는 불가능해 보였지만, 몇 년 만에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교회가 지원하는 전임 목사가 되어서 밤에는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교회가 Paulina Avenue에 있는 3층짜리 아파트 건물을 사기 전까지 두 곳을 이사 다녔다. 목사님의 목회는 언제나 건축중이거나 교회건물을 리모델링하거나 그랬던 것 같다. 1층은 예배당으로, 2층은 사택으로 바꾸었다. 큰 거실과 세 침실이 되었다. 사택 식구에게는 저택처럼 느껴졌다. 효선은 결혼해서 나갈 때 집안의 온 가구를 새걸로 바꿔주고 이사갔다. 미국에 이민 온 후 처음으로 산 가구였다. 시간이 흘러 모든 식구가 분가했을 때 식구가 교회 근처에 작은 집을 하나 샀다.

 

한국성경교회가 개혁교회에 가입하고 나서는 이름을 한국개혁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1977년, California Avenue에 있는 창고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이사해갔다. 15년 만에 모기지를 다 갚아서 일리노이주 휠링(Wheeling)에 좋은 건물을 살 수 있었다. 1993년에 이명재 목사님은 48년간의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한 목회생활을 뒤로 하고 은퇴하였다.

 

하지만 은퇴가 목사님을 느긋해지거나 활동적이지 않게 만들진 못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그린스보로(Greensboro)에 있는 교회가 임시목사로 목회시무를 부탁했다. 그래서 부부는 집을 팔고 1993년 11월에 노스캐롤라이나로 이사갔다. 여기서도 예배당을 짓게 되었다. 은퇴하고 70대가 되신 이 목사님은 또 하나의 큰 프로젝트를 맡으시고 즐거워하셨다. 이 예배당은 1997년에 건축이 완료되고 입당예배를 가졌다. 그리고 은퇴하여 1997년에 시카고로 돌아오시고 아들 정식의 집으로 이사했다.

 

1998년, 이번에는 애리조나에서 부름을 받았다. 이명재 목사님은 진실로 복음 전파하기를 좋아했다. 기회가 되면 언제나 복음을 전하기 원했다. 언젠가 한번은 “여기 계신 성도들 중에 어떤 분은 이번이 복음을 들을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증거하려한다”고 말했다. 1998년. 애리조나주 더글라스(Douglas)에는 혼자 건너갔다. 1년 동안 그는 시카고를 종종 왔다갔다하면서 전임목사를 모실 수 없는 교회를 도와줬다. 왜 그는 은퇴하였는데 쉬지도 않는 것일까? “그래야 내 자녀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지.”라며 간단히 대답했다.

 

이명재 목사님은 한국인 사회에서 공헌한 일로도 표창을 많이 받았다. 동우클럽은 시카고 지역의 회원들의 정착을 도와준 것을, 한국선교 100주년 위원회에서는 시카고에서 6개 한국인교회를 개척한 공로를, 한국개혁교회에서는 교단의 첫 한국인교회를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을 받았다. 한 신문사에서 그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짧은 인터뷰였지만 잃어버린 양에 대한 열정과 주님과 교회를 향한 사랑을 집중하여 말했다.

 

이 목사님은 1973년 10월 16일 미국 시민권을 얻었고 세 형제와 한 자매를 식구까지 모두 초청했다. 박경순 사모님은 1975년 2월 25일에 시민권을 취득했고 자매인 박인순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그들은 한 집안을 통째로 외국으로 이전시킨 진정한 개척자들이었다. (부록 ‘족보’를 참고)

 

이 목사님은 북침례신학교(North Baptist Seminary)에서 교육의 여정을 이어갔다. 이번엔 통학을 비행기로 했다. 그는 마침내 Faith 신학교에서 1982년에는 목회학으로, 1984년에는 종교교육으로 박사학위 두 개를 받고, 교육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명재 목사님은 책을 11권을 집필하셨는데 다음과 같은 책과 설교집을 내셨다.

- 새 언약의 영광 (The Glory of New Covenant)

- 예수님의 초대 (The Invitation of Jesus)

- 영생의 소망 (The Hope of Eternal Life)

- 그리스도의 증인 (The Witness of Christ)

- 말씀이 육신이 되어 (The Word became Flesh)

- 알파와 오메가 (Alpha and Omega)

-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The Holy Spirit - He will teach you everything.)

- 하나님의 선물. 우리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God's Gifst - How can we use them?

- 불의 혀 (The Thongs of Fire)

-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서 (Following the Pillar of Cloud and Fire)

- 영광의 광채 (The Reflection of Glory)

 

목사님의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지 그들도 학위를 추구했다. 효선은 서울대학교에서 간호학사를 받고 등록정간호사가 되었다. 신애, 정식, 정혜, 혜영, 혜옥은 모두 일리노이대학교를 졸업했고, 신애는 생화학 석사학위를 받고 화학/정보시스템분석 분야에 종사했다. 정식은 전기기술자가 되었고, 정혜는 공인회계사가 되었고, 혜영은 컴퓨터과학을 전공하여 시스템분석가로 일하고 있고, 혜옥은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가 공학자로 일하고 있다. 혜경은 루즈벨트 대학교에서 음악학사를 받고 칼빈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청년사역자를 하고 있다.

 

 

목회가 끝났고 자녀들이 모두 자랐는데, 이제 무엇을 하십니까? 이 목사님 부부가 사는 일리노이는 아름다운 산림공원이 있다. 그 공원을 매일 걸으며 버섯을 캐기도 하고 새와 꽃을 보기도 한다. 박경순 사모님은 다리가 약하시고 눈이 침침하셔서 서로 손을 꼭 잡으시고 걸으신다. 산책로 끝에는 소풍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서 거기서 잠깐 멈추고 휴식을 취한다. 날씨가 쌀쌀하면 작은 나뭇가지를 모아서 불을 피우기도 한다. 같이 찬송하며 기도를 하기도 하는데 세상의 시국과, 한국과 미국 정부와 대통령, 전 세계의 선교사와 교회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자녀들과 19명이나 되는 손주들을 위해서 한명한명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한다. 매일매일 하나님과, 또 서로와 친밀해지는 시간을 갖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맨 하늘 밑에서 하는 그들의 찬양과 기도는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 직통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그들의 목회 활동은 끝났으나 그들의 중보기도를 통한 목회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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