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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천 - 거창의 6.25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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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9

박기천 1923 - 1950
경남 거창군 북상교회, 가천교회 전도사, 순교자

경남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1054번지에 위치한 북상(北上)교회는 1934년 호주선교부 거창지부가 주관하던 주간학교 교사인 곽남순(郭南順)의 전도로 개척된 교회였다. 정기적인 집회가 시작되자 호주선교부 거창지부는 황보기 전도사를 파송하여 임시로 일하게 했고, 후에는 고운서, 김동준 전도사가 봉사했다.
1936년경에는 교인수가 40여명에 달했고, 예배당도 건축하게 되었다. 후에는 이자익(1934-1936.9), 서금윤(1936. 10-1937. 5)등이 교역자로 일했다. 농촌교회로서 교세는 미미했으나 이 지역 기독교 지도자인 주남선 목사의 후원 아래 꾸준히 유지되어 해방 당시까지 존속하였다. 1948년 1월에는 주남선 목사의 추천을 받은 25세의 청년 박기천(朴基千,1923-1950) 전도사가 이 교회에 부임하였다. 성실하고 진실했던 그는 초임 목회지에서 온 마음으로 목회하던 중 약 1년 후 거창군 남하면 대야리의 가천(加川)교회로 이동하였다. 이 교회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심익순(沈翊舜, walter E. smith, 1902-1912)목사에 의해 1907년 설립된 교회였다. 이 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박기천 전도사는 거창 지역으로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기독교신자라는 이유에서 끌려가 1950년9월 26일 피살되었다. 27세의 나이로 순교자의 길을 간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 기독교문화유적 위원회는 이 점을 확인하고 그가 시무한 북상교회를 2011년 5월 24일 순교기념교회로 지정한 바 있다. 가천교회는 수몰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첫 시무한 교회를 지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북상교회와 가천교회를 담임했던 박기천 전도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박기천 전도사는 1923년 4월 2일 경북 금릉군 대덕면 내감리 910번지에서 박정하(朴貞夏)와 이순분(李順分)의 5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박만도(1899년생), 박만천(1900), 박삼천(1915), 박희춘(1920)이 형이었고, 박삼순(1916)이 누나였다. 3살 때인 1926년 4월 4일 아버지를 여이고 홀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은 그를 견실한 청년으로 살아가게 인도했다. 그는 10살 때인 1933년 3월부터 내감리에 소재한 감주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감주교회는 이계춘(李桂春) 영수에 의해 1907년 설립된 교회였다. 박기천은 13살 때인 1936년 3월 10일에는 순회 당회장이었던 김중환(金重煥) 목사에게 학습을 받았다. 김중환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제23회로 1928년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고, 경북 내륙 지방에서 활동하던 목사였다. 이듬해인 1937년 3월 13일에는 미국북장로교 부해리(Rev. Henry N. B겨두)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부해리 선교사는 대구경북지방에서 일한 북장로교의 대표적인 선교사로서 경북 내륙지방을 순회했던 선교사였다.
박기천은 감주마을의 간이학당에서 수학하고 1938년 3월에는 대덕 심상소학교에 편입하였다. 심상소학교 라고 할 때 ‘심상’ (尋常)은 고등과가 아닌 보통 과정이란 뜻인데, 일제시대의 학제로 오늘의 초등학교를 의미했다. 이 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당시 박기천은 궁성요배를 거부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1941년 3월 이 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때 학교 이름은 대덕공립소학교였다.

1941년 4월에는 김해군 대저리에 소재한 복음농림학교에 입학하여 전수과에서 1년간 수학하고 1942년 3월 10일 졸업하였다. 이 학교는 호주선교사 부오란(Francis T. Borland)이 농촌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해 마산에 설립한 학교로서 영문으로는 Gsospel Farm School 이라고 불렀다. 후에 윤인구 목사가 교장으로 일하던 중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가게 됨으로 심문태(沈文泰) 목사가 교장직을 계승하였고, 구포교회 임학찬 목사 등이 가르치던 학교였다. 박기천 전도사가 수학할 당시 교장은 심문태 목사였다. 이 학교에서 수학한 박기천은 그 후 금릉군 지례면의 지례교회 이춘화(李春和) 장로의 소개로 충청북도 영동의 교회 집회에서 충북 영동군 양산면 하곡리의 이창주, 박문옥씨의 4남매중 외동 딸 이진표 양을 만나 1944년 2월 5일 혼인하였다. 부인은 충청북도 영동 출신으로 얌전하고 순진한 현모양처형의 여성이었다. 그를 사람들은 외유내강한 여성이라고 불렀다. 결혼한 박기천은 부인을 본가에 남겨둔 채 형이 있는 만주 북안성, 후에는 간도성으로 가서 일하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한 그는 거창군 위천면 사무소 임시서기로 취직하여 1945년 11월 경남 거창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박기천은 거주지와 인접한 위천교회에 출석하며 교사로 또는 제직회 서기로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당시 위천교회 담임교역자가 백영희 전도사였다. 1947년 1월부터는 거창읍 사무소 서기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직에서 일하면서 뇌물을 받는 문제나 술좌석에 동석해야 하는 문제 등 신앙적 갈등을 경험한 그는 백영희 전도사 설교를 통해 큰 은혜를 받고 면서기 직을 사임하였다.
그가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은 백영희 전도사의 설교에서 많은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교역자의 길을 결심했을 때 주남선 목사의 추천으로 1948년 1월 거창군 북상면의 북상(北上)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게 된다. 1934년 곽남순, 김동준에 의해 설립된 이 교회의 당시 당회장은 주남선 목사였다. 박기천은 서환성(徐煥成) 전도사의 후임이었다. 당시 장년 교인은 10여명에 불과했다. 이름 그대로 미자립 교회였으므로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로 볼 때 안정된 직장인 면사무소 직원이라는 직장을 두고 생활도 안 되는 북상교회 전도사로 간 것을 보면 전적으로 신앙적 결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와 함께 면서기로 일한 바 있는 이만기씨 (후에 목사가 됨)의 회고에 의하면 박기천은 늘 웃는 얼굴이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한다. 교역자의 길을 시작하면서 박기천 전도사는 주일에는 늘 금식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힘썼다고 한다. 그에게는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토요일이나 주일예배 후에는 주일학생들을 데리고 깃발을 들고 동네를 다니며 전도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해방 후의 상황은 혼란했다. 좌우익으로 나누어 대치하던 때에 북상에서 멀지 않은 월성에 빨치산의 아지트가 있었다. 북상지역은 좌익세가 우세하여 저녁에는 빨치산들이 내려와 우익청년들이나 교역자를 잡아가기도 했다. 박전도사는 산(山)기도 하러 간 사이에 빨치산들이 자주 교회에 찾아와 교회를 지키고 있는 전도사 부인에게 총을 겨누며 위협했다. 전도사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라고 협박하고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이런 일로 젊은 새댁이 크게 놀라 심장병에 걸렸고 몸은 점점 야위어 갔다.

북상교회에 부임한지 약 1년이 지난 1949년 2월 10일, 박기천 전도사는 거창군 남하면의 가천(加川)교회로 이동 하였다. 이 교회는 1907년 9월 심익순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농촌교회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천교회는 1985년 합천 댐 건설로 인해 수몰지역이 되어 현재는 거창읍에 소재한 동부교회와 합쳐 동부가천교회가 되었다. 부임 당시 가천교회 교인은 20여명에 불과했으나 박기천 전도사는 이 교회를 위해 크게 헌신하여 교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부흥하였다. 특히 주일학생이 크게 부흥하여 50-60명이 되었다. 그는 늘 기도에 힘을 쏟았고 산 기도나 금식 기도하는 일 이 많았다. 후일 알게 되었지만 이런 기도는 좌익들에 의해 끌려가 탄압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며 순교자의 길을 가기 위한 영적인 준비였다.
이런 상황에서 6.25 동란이 발발하였고 지리산에 숨어 있던 빨치산은 거창지역에 출몰하여 토착 좌익세력과 내통하며 기독교인들을 학살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런 여러 위협가운데서 박전도사의 부인은 1950년 7월 16일 오전 7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9월 10일 이후 어느날 박기천 전도사도 인민군에 의해 잡혀 인민군 내무서로 사용되던 거창의 명덕학교로 끌려갔다. 기독교신자이자 교역자라는 점에서 좌익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지만, 그가 붉은 사상 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도했는데, 이런 이유로 그를 반동분자로 몰아간 것이다. 이곳에서 한 달 정도 구금되어 있던 중,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특히 주일에 의도적으로 일을 시키기도 했다. 음력 추석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 인천상륙 작전으로 불리한 전황에 놓이게 되자 인민군들의 후퇴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후퇴하면서 양민을 학살했다. 인민군과 좌익 세력은 박기천 전도사 등 양민들을 밧줄로 묶고 함양군 함양읍으로 끌고 갔다. 믿음을 지켰던 박기천 전도사는 인민군이 쓴 총을 맞고 순교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 날이 1950년 9월 26일로 추정된다. 박기천 전도사는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 나무 아래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인민군들은 떠나갔고 다시 평온을 찾았으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후에 나무꾼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나무 밑에서 기도하다가 넘어져 사망한 모습이었다. 시신을 발견했을 때가 1951년 1월이었다. 박기천 전도사는 27세의 나이로 순교의 길을 간 것이다. 부산 서부교회 목사였던 백영희 (1910-1989)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거창지역 세 순교자들에 대해 종종 언급했는데, 그들이 전도사였던 박기천, 주일학교 반사였던 배추달과 변판원이었다. 백영희 목사는 이 세 사람을 거창지역의 참 순교자라고 불렀다.(주. 1983년 7월 10일 부산 서부교회에서 행한 데살로니가 전서 4:1-8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박기천 전도사의 장례식은 거창시찰장으로 주남선 목사의 주례로 치러졌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주남선 목사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박내영이 있다. 4살 때 부모를 잃은 그는 훌륭하게 성장하여 존경받는 목회자가 되었다.(주. 박래영은 4살때인 1950년 7월에는 어머니를, 9월에는 아버지를 잃고 친척집에서 성장하였다. 고려신학대학(BA)과 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 대학원(MA)을 거쳐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목사가 되었다. 부산의 성도고등학교 교목을 역임했고, 부산시 북구 구포에서 성도교회를 개척하고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박기천 전도사의 설교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사용하던 성경에는 한편의 묵상기가 남아 있었다. 성경책 앞 여백에 붙어 있었던 이 글은 뒷 산에 올라 하나님만 바라며 기도했던 기도의 흔적이자 순교를 앞둔 신앙고백이기도 했다. 묵시록 7장 14-17절을 읽고 기도하며 묵상하던 중 쓴 것으로 보이는 이 글에는 자신의 순교와 그 이후에 누릴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서의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이 글을 썼을 때가 1950년 9월 9일이었으니 잡혀가기 직전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이 글은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이었을 것이다.

초목이 썩어지는 내음새는 코를 찌르고,
나는 굶주림과 목마름을 이기지 못해 기진하였는데,

비는 무정히도 쏟아져 산야를 적시우나,

나는 반석 속에 숨었으니 오는 비 내 몸을 못적시내.

썩는 내 더해가고 나는 기진하였는데,
해는 어찌 이리도 지루하게 머뭇거리느냐,

이 밤아 오너라 보자 네 한밤만 지나고 보매

광명 아침 햇빛이 뜨는 날은 승리와 즐거움이 가득 찬 날 이로다.

1950년 9월 9일 오후 3시 산중 암혈에서
(묵시록 7장 14-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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