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공회 자료

김철수 - 공회의 개척자, 공회의 비판자

인물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21.02.19

* 면담 1차 자료를 정리한 것이며, 부분적으로 확인이 필요하여 진행 중이므로 열람만 허용하며, 본인과 이 홈의 최종 확정이 되면 다시 수정 공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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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목사님 회고록

면담: 2011.10.28./ 당사자 교정 11.11.15. 붉은 색
정리: yilee주소: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산리

교회: 마산 산창교회 055-296-5540

참고: 공회 동역자로 1941년생은 박신찬 김철수 신연범, 1942년생은 김영웅 김병춘 목사님

■ 가족
부부: 김철수 목사님 신인식 사모님

자녀: 김명신(72년생) 김성도(충주양문교회, 방영남 목사님 부목) 김병도

■ 성장
출생: 1941.6.4.생

고향: 거창군 월천면 서변리 711번지

- 가정
부모님이 1945년 해방 때 일본에서 고향으로 오셨고, 가정이 가난 때문에 아버님이 중학교 진학을 시키지 않으려 하여 집에서 농사를 짓다가 진학이 1 년 늦어 짐. 동네 친구 박신찬이 학교를 다니는 모습을 보며 김 목사님 자신을 비교했고 학교를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 동변리에 살면서 출근하는 길에 서변리 마을을 지나 갈 때 부모님을 계속 강권. 졸업식 1 주일 전에 졸업반에 앉아서 졸업. 중학교부터는 친구들과 만 1 년 후배가 됨.

- 대성중학교

1965년 거창읍의 시내에 있던 대성중학교 진학했고 1958.3.3. 졸업.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했고 언행이 거친 편이었으나 책을 볼 기회가 주어 지면 보이는 대로 다 읽어야 하는 독서광.

■ 신앙
- 첫 출석

당시 시골에는 사람이 많았고 동네마다 청소년들이 많았는데 또래 7 - 8 명이 늘 가깝게 어울려 다님. 1957년 김 목사님이 중3이 되자 그 친구들은 고1이 되었고 그 중에 친구 박신찬은 기독교 학교인 거창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면서 거창고교의 교장인 전영창 선생님에게 많은 감화를 받고 수시로 친구들에게 한 마디씩 하던 차, 그 친구에게서 성경책을 보게 되었고 그 친구는 ‘이 책이 바이블이다! 우리 말로 말하면 성경인데 이 책이 세계 베스트셀러다!’라고 했으며 이 말을 듣고 ‘내가 세계 베스트셀러를 읽는다면 대단하겠다’ 싶어 다른 책도 열심히 보았지만 친구 말에 끌려 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더 컸고, 친구 성경을 빌려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됨.

친구 중에 김병춘 박신찬 김철수 3 인은 훗날 총공회 목사들이 되지만 김병춘 친구는 함께 어울리는 면이 적었고 박신찬 친구와는 특별히 친함. 책이란 책은 다 읽었고 책이 어려워서 못 읽을 책은 없었는데 성경은 한 페이지 읽는데 10분씩 걸릴 정도였고 어려웠으나 끝까지 참고 읽었음. 다 읽고 나니 기독교와 성경에 대해 평소 가진 생각이 변하게 됨. 물론 박신찬 친구는 학교를 다니며 교인이 되어 가고 있었고 김철수 자신은 그런 그를 보며 신앙에 관심은 가지게 되었고 성경은 다 읽었으나 아직 교인이 되지는 않았던 시기에 1957년 말 성탄절을 앞두고 방학이 되어 사방을 다니며 마음껏 놀고 새도 잡으러 다니던 차에 친구들이 우연히 ‘교회를 가보자!’는 말이 나오고 그렇게 하자 하여 7-8 명이 그 자리에서 악수를 하고 약속. 그런데 바로 몇 일 후면 성탄절이 되는데 지금 가게 되면 교회에 떡 얻어 먹으러 온다고 할까 봐서 성탄절이 지난 다음 주일부터 가자고 약속. 1957.12.29. 이 해의 마지막 주일날 친구들과 함께 김 조사님 자신의 발로 17세에 교회를 처음 출석.

- 창북교회

서변리 집에서 교회를 가려면 개울을 건너 산 쪽에 있는 동변리로 가야 하는데 교회는 언덕 좀 높은 곳에 있었는데, 그래도 반사도 해 가며 1년이 지나던 시점인 1958년 고교 1학년의 마지막 주간에 교회에 한동희 조사님을 강사로 집회가 있었는데 거창읍교회 당회장 최익우 목사님이 오셔서 집회를 금지 시킴. 집회를 금지 시키자 한 가정이 앞장을 섰고 그 자리에서 공회를 지지하는 교인들은 밑에 마을로 내려 와서 집회 계속. 공회 교인은 집사님 2 - 3 명과 청년 2 - 3 명이었고 우리 학생들. 창북교회를 개척. 전순이 집사님의 아들 변철장 등이 중심이고. 이 때부터 신앙은 불 붙기 시작.

월요일 저녁에 전순이 집사님 댁의 방과 마루에서 예배를 드리고 다음 날 새벽까지 2 회를 모인 다음 화요일 오전에는 이일포 집사님 집으로 옮겨 집회, 그 집이 창북교회가 됨. 이일포 집사님이 자기 집을 그냥 내 놓은 정도. 그 곳에 윗채의 벽을 털고 기둥은 남기고 공간을 살려 예배당, 살던 이일포 집사님은 자기 집의 아래채로 내려 감. 지금은 그 당시 예배당을 사택으로 쓰고 후에 그 곳에 1층 스라브 건물이 들어 갔고, 그 곳에 2층을 지으려다 잘 되지 않아서 그 곳을 사택으로 쓰고 그 앞에 새로 예배당은 건축.

별 생각 없이 그냥 오 가던 신앙이 이 집회의 첫 날 밤 예배에 들리기 시작. 이튿날 새벽은 눈이 많이 쌓였으나 정신 없이 새벽 예배를 참석하고 그 생활을 평생. 교회가 서게 되자 반사도 시작했고, 한동희 조사님은 한종희 조사님의 형으로 형님의 인물이 더 나았고 당시 청년들을 끄는 힘을 가짐.

교회가 개척 되자 교인이 적고 약해서 별도 목회자를 파송할 정도는 아니었고, 백영침 나인숙 김효순 장정애 이런 분들이 창동교회에 하루, 창북교회로 와서 하루를 지내며 밤시간 대만 예배를 인도하며 순회로 맡음. 창동교회 창북교회 도평교회 남산리 보해 골짝에도 교회가 있었음. 순회를 오시게 되면 순회 인도자를 따라 저녁마다 가는 교회를 뛰어 다니며 은혜 받고 수 년을 계속.

- 거창상고

경제가 어려워 성적에 상관 없이 대학을 생각하기 어려운 시기. 인문계 고교 대신 상업고교를 선택. 전북 무주나 합천군 등 많은 지역에서 지원. 고교 1 년은 교회를 그냥 다니는 정도였으나 그래도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목회자가 높게 보였고 시골 교회에 사람이 없다 보니 고교 1학년 봄부터는 나름대로 열심을 내고 여름방학 때부터 반사를 시작.

학교에서는 소란스럽게 앞장 서고 다닐 때. 친구 중에 입학하면서 수석으로 들어 왔던 신용국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신원면 출신에 극히 어려운 형편. 그런데 장기 결석을 하게 되었고 한 번은 학교에 들어오지 않고 학교 앞 호수에서 다른 친구를 하나 시켜 김철수를 만나도록 불러 내라 했는데 휴학 이야기가 나옴. 그 친구는 공부를 잘했는데 한 번은 우물 곁에서 대화하며 그 친구는 평소 서울대 간다 했고 신용국은 서울에 그런 학교가 있는가 보다 할 때. 친구에게 1 년 휴학 해 본 경험을 말해 줌. 생각처럼 그렇지 않고 좋지 않았던 면을 말하며 다시 학교를 출석하게 했으며 이 때는 신앙이 들 때여서 그 친구를 시내의 공회 교회로 막 개척했던 창동교회로 안내.

그 친구는 공부만 하는 편이고 김철수 목사님 자신은 1학년 때는 교회는 다녀도 평소 친구들에게 앞장 서서 이런 저런 활동을 하고 친구들을 좀 억압하다 보면 그 친구하고는 서로 맞지 않는 정도였고 때로는 서로 아주 맞서는 그런 사이. 선생님이 교실을 비우면 앞에 나가서 설치니까 여학생이 없는 반으로 보내야 한다고 할 정도고 때로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에게도 대 들듯 따지는 정도. 그래도 신앙은 있어서 노래를 불러 보라 하면 유행가는 부르지 못하게 하고 찬송가를 불러야 하는 정도.

그런데 친구 신용국은 극한 어려움을 만나게 되자 평소 서로 부딪히는 친구였는데도 막상 김철수 자신을 불러 내어 상담을 받고 교회를 출발. 김철수 자신이 다니던 교회는 고향 창북교회인데 시내에서 10리며 가지리로 넘어 가도 멀기 때문에 친구에게는 자연스럽게 시내의 공회 교회 소개. 그 친구는 창동교회를 출석했고 그 교회에 신앙 있고 가장 부자 가정에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교를 졸업.

- 한종희 조사님

창동교회 조사님은 한종희 조사님이었고 그 교회 청년인 김영웅 신용국 중 1 명과 김철수를 1주일에 한 번 정도 불러 놓고 한 조사님 스스로 쓴 논문을 받아 적게 하면서 신앙 공부를 시킴. 얼마 기간 계속했고 비판을 하자면 한 조사님 자기 자랑도 있고 한 편으로는 젊은 학생들에게는 끌리는 면도 있고 권위도 있었는데 당시 한종희 조사님은 머리가 짧은 정도. 당시 고3에는 머리를 기르는 것이 자랑인데도 김 목사님은 머리를 아주 밀지는 않았으나 짧게 깎았으나 사회 생활에 좋지 않다는 말을 들어 생각을 바꿈.

한종희 조사님과는 훗날 1971년에 대구 덕수교회를 반 년 맡아 있을 때 당시 구자춘 도지사가 군사 정권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는 차원에서 대구 목회자들을 모아 포항제철 버스 몇 대로 모시고 포철 구경도 시키고 식사 등으로 대접도 한 적이 있었는데 포철의 쇠 구조물이 지나 갈 때 열기가 위에까지 올라 오는 그런 정도에서 서로 멀리 본 적이 있었고

- 동아대학교 법학과

고향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4 년이나 농사를 짓고 한 편으로는 교회 직책과 충성에 앞 장을 서다가 백 목사님이 집회 중에 강사실에 박신찬과 둘이 함께 불렀고 그런 상황. 진학을 하지 않아도 마음에 다윗처럼 뜻을 품고 있으라 하는 정도. 백 목사님이 공부를 권유. 김철수에게는 법학을 그리고 김영웅에게는 정치를 전공하라고 말씀. 김철수는 시간도 많이 들고 돈도 들고 신앙 전념을 하고 싶지 세상 공부 싫었음. 그래서 대학을 4년이나 뒤에 하게 되었다. 1965년에 부산의 동아대학교 법학과로 진학하여 과외나 경비나 우유 배달까지 하며 3학년을 마치던 27 세에 입대. 당시 군입대는 입영 대상자가 많아서 늦어 질 수 있었는데 1967년 27 세에 영장 받고 군 생활 중인 28 세인 1969년 10월에 위천의 위산교회 출신 신인식 사모님과 결혼하고 30 세 되던 1970년 10월에 제대.

■ 목회 출발

▷1971년 청량리교회
이미 학생 때부터 모든 집회나 교회 활동에 정신 없이 달려 왔고 백 목사님이나 공회 목회자들에게 앞으로 목회 나갈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던 청년으로 고향에 있던 중, 1971년 말에 청량리 신용인 조사님이 간 때문에 입원하여 청량리교회의 설교만 맡도록 부탁을 받아 두 달 정도 있었으나 설교만 맡았고 그 외 교회 일에는 일체 무관. 청량리에 있는 시기에 대학교 4학년 졸업식이 겹쳐 갈 수 없었고.

▷ 1972년 묘도교회
(부임 배경)

묘도는 여수와 경남 남해 사이의 작은 섬인데 통합 교단에 속한 애양원이 개척하고 지원하는 신풍 성암교회가 시골 교회라도 규모나 경제가 든든했고 여수의 인근 도서 교회들을 지원해 왔고 묘도교회의 역사는 오래 되었으나 목회자도 모시지 못할 만큼 약체, 성암교회 담임 오동원 목사님이 백 목사님 교훈에 붙들리고 주변 여수 시내에는 순복음교회 출신 박은석 목사님이 공회 교훈을 사모하여 여수 시내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개척하고 공회 교훈을 주변에 전파하려고 애를 쓰던 중. 성암교회가 묘도교회를 지원해 왔으므로 묘도교회의 상황을 오 목사님이 잘 알았고 묘도교회가 방치 된 정도여서 공회 목회자라도 보내게 되면 환영할 것 같고 공회 소속 가능성을 두고 오동원 박은석 두 목회자가 노력. 오동원 목사님은 처음 길만 텄고 박은석 목사님은 꾸준히 여러 면에서 현장을 지원. 박은석 목사님은 밀양 얼음골 백도광 장로님의 목장에서도 몇 달 정도 일을 본 적이 있던 상태.

(부임)

1972년 3월 초에 묘도 부임. 당시 묘도교회는 통합측 교회로. 작은 섬이어서 모든 것이 열악했고 중고교 진학 못하던 청년들이 많았고 믿는 사람도 없고 섬 전체가 어려워 교회 운영이 곤란. 목회자들이 기피하여 1 - 2 년씩 강단이 비기도 하고 와 봐야 얼마 있지 못하던 곳.

묘도에 들어 가던 날 하루 배가 몇 회 오가는데 통합측의 순천 노회에서 소개해서 보낸 신학교를 막 마친 한 분이 오전 배로 묘도에 왔는데 손에 라디오 하나를 들고 왔었는데 묘도 형편을 보고 돌아 갈 상황인데 김 조사님은 그 다음 배를 타고 가족 없이 김 조사님 혼자 이불 하나에 냄비 하나 들고 묘도 도착. 가족들은 한 달이나 뒤에 이사. 함께 갔던 오동원 박은석 목사님들이 그 분에게 묘도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고 왔다가 모두 그냥 가고 교인들 상처만 많았음. 괜히 후회하지 말고 그냥 육지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 꼭 여기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김철수 조사님을 성산교회로 보내겠다고 하자 그 분이 내키지 않던 차에 바로 돌아 감. 성산교회라는 이름을 그 때 처음 들었고 그 교회 이름 때문에 그 후에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얼마나 약한 교회일까 하고 마음 속에 그 교회를 기억한 적이 있었음. 신발은 모두 먹티 고무신에 연보는 동전. 섬이고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지 남자들은 술 먹고 노름하고 게으르고 여자들은 모두 바다에 고막과 굴 캐러 다니는 분위기.

부임하던 날 성암교회 담임인 통합측 오동원 목사님이 한 달 생활비라 하면서 7천 원을 가져 오셨는데 도움은 받지 않고 해 보겠다고 거절. 주고 거절하기를 반복하다가 오동원 목사님이 한 달만 받으면 그 뒤에는 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1 회 받음. 당시 보통 교역자 생활비가 1만 원 정도로 기억. 묘도 간 다음 달 4월에 첫째 명신 출생.

(교회 부흥)

묘도교회 교인들은 목회자가 장기간 없고 와도 잠깐 있다 가는 정도에 주변 잘 아는 목사님들의 소개로 가게 되니까 모두 반김. 당시는 여천 공단에 호남정유(칼텍스)만 있었고 남해화학과 같은 회사조차 전혀 없는 초기. 바닷가에서 고막 바지락을 캐고 굴을 쪼는 가난. 가난. 사람들은 좋아도 가난하고 미신이 많아서 전도는 어려움.

가난해서 중고등학교 진학생이 몇 없었고 대부분은 집에서 일이나 하는데 17 - 20세 분포가 많았고, 이 학생들을 전도하려고 섬에 있던 분교인 초등학교를 빌려 밤으로 야간학교를 시작했고 교사로는 묘도 초등학교 교사 1 명과 섬에 초소에 파견 나온 경찰 2 명과 함께 야학을 시작. 당시 나라에서 재건학교를 권장하던 시기. 모두들 많이 했다가 실패도 많이 하였고 앞에도 하다 실패. 그래서 담당자들이 들으면 ‘재건학교구나!라고 함. 교과서는 교육청에서 지원해 주었는데 가니까 ‘재건학교요!’ 이렇게 흔하게 알던 시기. 조사님은 고교 시절 배운 태권도로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비롯해서 모든 과목을 가르치다가 뒤에 다른 선생님들은 학과목을 가르쳤는데 학생수가 6 - 70여 명에 많을 때는 80여 명에 이름. 학생들이 진학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고교 과정을 배웠기 때문에 나이는 십대 후반에서 20세도 출석하는 정도여서 건장한 청년들인데 전원이 다 교회를 출석하게 되고 야학 때문에 학생들의 평소 자세도 변화가 생겨 섬 전체의 평판과 교회 영향력이 확고하게 됨. 집에서 부모 말을 듣지 않거나 심지어 대드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교회로 연락이 오고 조사님이 나서면 통제가 되는 형편. 배에 기압을 넣으면 상대방이 주먹으로 쳐도 튕겨 나가는 정도가 되어 주먹질 잘하는 박양봉 청년같은 사람을 잡으니까 나머지는 다 잘 따름. 나중에는 부모들이 ‘전도사님에게 일러 준다.’ 하면 통할 정도. 장년반도 부흥이 되어 20 - 30여 명이 되자 주일 오전 예배에 100여 명이 출석하게 됨. 경제는 어려워도 보람 있고 희망 찬 나날이며 섬 사람 전체의 호응 속에 교회가 굳건해 짐. 안 믿는 분들이 예배당 땔감을 준비해 주고 천정 작업도 지원해 준 정도. 마을 전체에 방송할 일이 있으면 이장님이 방송 편의를 봐 주고. 그 중에서 김상곤 김정식 청년은 은혜와 충성이 뚜렷.

그래도 불모지 섬에서 불신자들이 지켜 보고 그들도 가난에 허덕일 때여서 목회자가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이자니 먹는 것이 없어 자라는 아이들의 영양실조가 심각했고 그럴 때는 들에 가서 개구리를 잡고 바다에서는 게를 잡아 삶아 영양 해결. 학생들이 조사님 가정에 잡아다 주기도 하며 정말 목회 재미가 넘치던 시기.

(교회 소속 문제)

원래 올 때부터 교회는 통합 교단. 그 동안 버려 둔 정도. 단 시간에 교회가 크게 부흥이 되니까 통합 원래 교단의 순천 노회에서 대표들이 주일 오후마다 방문하여 교회의 소속 문제를 제기. 김철수 조사님은 공회 목회자로 갔기 때문에 통합노회나 지방 행사에 전혀 참석하지 않았고, 묘도 교인들을 데리고 공회 집회만 자꾸 가니까, 통합교단의 조직상 그들에게 당회장이 있어 김 조사님을 노회에 참석하도록 설득, 당회장 목사님 중에서 김 조사님과 잘 지내 보자, 분립을 해 봐야 재미 없다, 자신도 젊을 때 그렇게 해 본 경험이 있다며 권유했으나 김 조사님이 단호히 거절, 그래서 그들이 당회장을 자꾸 바꾸면서 권면했는데, 그 분들은 주일 오후에 예배가 없으니까 주일 오후에 자주 와서 권면했고, 어떤 때는 순천의 인휴 선교사를 포함해서 한 번은 8 - 9 명이나 와서 권면한 적도 있고, 이순배 목사님이 당회장이던 시절에 나중에 안 되겠다고 목회자를 교체하겠다는 말까지 나옴. 당시 김 조사님이 가장 존경한 분이 있었는데 윤성화 목사님이며 그 분에게 3월 부산 총공회에 가서 지도를 받겠다, 사임하든 어떻게 하든 결정을 내겠다 하고 상호간 싸움을 격하게 하지 않음.

(교회 인계)

부산에 가서 목사님께 교회의 상황을 말씀 드리니까 ‘그 사람들 말이 맞다. 그들 교회다. 달리 욕심 낼 것 없다.’ 하시고 종결 지움. 박은석 목사님은 우리 공회의 교회들을 넓힌다고 교회 확장에 관심이 많았고 목사님께 현장 이야기가 100% 전달 되지 않아서 생긴 일. 그리고 한 두 달 뒤에 교회를 통합측에 넘겨 주고 대구 덕수교회로 부임한 것은 1973년 9월 14일.

(묘창교회 개척)

김철수 조사님이 나온 뒤 묘도교회는 통합측 목회자를 새로 맞지만 이제는 공회 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확고하게 해 본 은혜 경험 때문에 예전처럼 그대로 있을 수가 없게 되고 그 중에서 큰 은혜를 받아 완전히 공회 교인이 된 김상곤 김정식 등 청년들이 공회 교회를 추진했고 김철수 조사님은 이를 공회로 출발하게 연락 지도. 1973년 그 해 가을에 묘도교회에서 찬송가 궤도 걸이 등 몇 가지만 받아 나와서 가정 집에서 공회 소속 묘창교회 출발.

▷ 1973년 대구 덕수교회
1973년 9월 14일 대구 덕수교회 부임. 송종섭 목사님이 대구 간호학교의 교수로 근무하면서 군인 신분에 개척한 곳이 덕수교회. 송 목사님이 반 년 정도 군사 교육 과정 때문에 서울로 가게 되어 임시 목회로 부임. 일반적으로 장기 군 교육을 받게 되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는데 만일 다른 곳으로 발령 나면 덕수교회에 계속 목회하고 대구로 다시 발령이 나면 송 목사님의 빈 자리를 임시 맡기로 했는데 반 년 교육 후 특이하게 원대 복귀. 덕수교회 시절 전임 묘도교회 교인들의 묘창교회 개척을 지도.

▷ 1974년 울산 남산교회
(개척)

송종섭 목사님의 덕수교회 복귀가 결정 되자 다음 목회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백 목사님께 개척을 하겠다고 지원. 지역은 울산으로 신청. 목사님께서 울산은 어려운 곳이라 하며 허락을 하지 않고 잘 생각해 보라고 몇 차례 보류하며 남해를 권했고 꼭 가 보겠다고 말씀 드리니까 미리 한 번 가서 살펴 보라 하심. 몇 번을 방문하고도 뜻을 말씀 드리니까 한 달간 오간 후 허락.

(교동교회 - 사택 예배)

1974년 2월 24일에 울산에 와서 예배당은 없는 상태에서 교동 370번지. 3월 10일 8 명이 모여 첫 공식 예배. ‘교동교회’라고 함. 평일은 사택이었고 예배 드릴 때는 방 2 칸의 사이에 문을 떼고 이불은 다락에 올린 다음 예배당으로 사용. 6 개 월을 예배 드리다가

(남산교회 시절)

1974년 8월 21일 수요일 밤예배를 새로 마련한 학성동 155-3번지에서 예배. 2층 집에 전세로 들어 갔는데 이 건물은 과거 교육청하던 일본식 건물.

(예배당 건축)

1974년 9월 1일에 양동 694-36번지 부지 184평 360만원 조건으로 차용술 씨에게 50만원 계약금을 지불하고 10월 30일에 예배당 32 평을 착공. 예배당 마련 후 첫 주일 11월 30일에 27 명이 출석하고, 1976년 1월 7일 남산교회로 공회에 허락 받음.

1976년 2월 22일에는 장년 43명 유년 110명 출석하고 2월 26일 집사로 남자 3명(이술이 이윤재 황길태) 여자 4 명(장경재 이소둘 이경자 이명달) 그리고 권찰 2 명(곽금자 이향순) 임명. 당시 황길태 장로님은 울주 군수로 계시며 울산 시내 거주. 당시 취업하게 한 가정의 곽금자라는 분은 딸이 김진복 집사님 부인

▷ 1976년 서울 상남교회
1976년 7월 13일 상남교회로 이동, 개척은 이원일 목사님이며 2대 목회자가 이종옥 조사님이며 100명 간신히 넘었고, 예배당은 부지가 없고 30평 스레트 건축물에 교인이 가득 찼고,

서울이어서 잘 살고 배운 젊은 교인들과 연세 많고 배우지 못하며 살기가 어려운 형편의 교인들로 교회가 소리 없이 양분. 교인들이 선의로 목회자를 대접해도 서로 눈치가 보이니 전임자가 목회자를 섬길 때 소리 없이 대접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오히려 오해가 증폭 된 것으로 판단하여 교회에 모든 것을 다 공개하고 운영. 모든 것을 다 펴 놓으니 오해와 추측이 없어 지고 벽이 없어짐. 누가 무슨 소리라도 하면 무조건 그 쪽을 먼저 눌러 놓았고, 처음에는 교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들어 주지 않는다 해서 새로온 목회자가 저 쪽 편이라고 불만을 가졌으나 세월 속에 목회자의 공평을 이해하며 소란이 잠재워 짐.

1977년에 상남교회 건축할 240 평 부지를 상도동의 중간 정도에 마련. 원래 예배당은 동네의 능선 쪽이라 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위치. 1층 건축하고 2층은 주택으로 만들었으나 교회 부채 때문에 빚을 줄이기 위해 사택에 들어 가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지하실에서 살다 나옴.

교회 경제로 상도동 높은 곳에서 중간 정도로 내려 와서 부지를 구입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1968년 김신조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이어 지는 각종 불안한 안보 상황 때문에 소리 없이 이민 가는 사람의 수가 적지 않았고 이로 인해 땅 값이 많이 내려 간 상태. 그 땅조차 돈이 없어 외상으로 살 수 있었던 정도. 상도초등학교 앞. 그 후 2005년에 김명재 목사님이 상도동의 아주 밑의 대로 주변으로 예배당을 이전.

▷ 1980년 부산 양성원 교학실장
(첫 전임 직책)

1980년 2월에 양성원 교학실장으로 부임. 양성원은 1976년 백 목사님이 총공회 목회자 신학 과정으로 개설. 초대 교학실장으로 서영준 목사님. 서부교회 중간반 부장을 겸임. 교학실장을 전임할 필요가 있어 김철수 조사님이 목회하지 않고 공회의 양성원과 행정실의 행정만 전담.

(생활비)

부산에 내려 올 때 목사님은 서울에서 월 생활비를 얼마 받았는지 물으셨고 28만 원이라고 말씀 드리자 교학실장 일에도 그 사례를 주셨고 뒤에 마산 산창교회로 개척해서 나갈 때도 28만 원을 그대로 지출하심.

(서영준 안수 건)

양성원을 맡고 있던 1980년 3월 총공회에서 서영준 목사님의 목사 안수직으로 분란. 전체 목회자들이 양성원 과정을 함께 했는데 정재완 목사님처럼 나이 많고 목회를 한 지도 오래 된 분들도 안수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양성원의 졸업 첫 해 안수에 서영준 목사님이 포함 양성원을 맡고 있던 1980년 3월 총공회에서 서영준 목사님의 목사 안수직으로 분란. 전체 목회자들이 양성원 과정을 함께 했는데 정재완 목사님처럼 나이 많고 목회를 한 지도 오래 된 분들도 안수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양성원의 졸업 첫 해 안수에 서영준 목사님이 포함 되자 안수하는 전날에 백태영 이재순 목사님들이 교학실로 찾아 와서 서영준 목사님의 안수를 두고 양성원 과정을 마쳤는지 확인. 성경 100독 여부를 물었고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하자 우리가 만든 우리 법을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입장. 당시 그 분들이 서영준 목사님에게 직접 말했고 서 목사님은 나갔고 이후 백 목사님의 하문.

다음 날 3월 초여서 아직 추울 때인데 모두 행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백 목사님은 5층에 몇 사람을 모이게 해서 취조하듯 묻고 지적하고 꾸짖고 계셨음. 안수 소식을 듣고 지금 부모가 축하하러 왔다가 그냥 갈 것인가? 누가 100독에 대한 말을 냈느냐? 백태영 이재순 물었을 것이고, 김철수 교학실장은 말했을 것이 아닌가? 양성원 1회 졸업생들은 안수를 받게 되는데 그 학생들을 가르친 교수는 목사가 안 되고 학생이 목사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이런 말씀으로 오전 10시가 넘도록 시간은 계속 지나 갔고, 김영웅 조사님은 김영웅 전재수도 좀 미달이나 왜 우리는 안 되고 서영준은 되는가 라는 표현. 회의가 계속 진행 되니까 모두가 추운데 고생하고 회의가 끝남.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지 그 이후 교학실장을 보는 시선이 달라 진 것을 느낌.

(직책의 특수성)

당시 백 목사님은 교역자들을 면담할 때 5층 숙소로 직접 불러서 바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교학실을 통해 물어 보고 답을 받아 오도록 했는데 그 역할이 비서처럼 되니까 모든 교역자들이 경계하고 조심하는 자세가 되어 대화할 친구도 없다고 할 정도.

지금 생각해 보면 김 조사님의 처세하는 식이 특이한 점도 있고 또 백 목사님도 김 조사님을 편하게 여기지 않으신 것인지?

▷ 1980년 마산 산창교회
(연혁)

- 1977년

2.14. 양덕1동 17번지 가정집 2층에서 전세 150만 원에 이만기 목사님 외 7 명 첫 예배

8. 양덕1동 8-17번지 상가건물 3층 33평으로 이전, 전세 250만 원

- 1980년

10.26. 이만기 목사님 신임투표(이병준 조사님 실시)가 찬성4, 반대17, 지지율 19%

11.10. 이만기 목사님은 대구 원동교회로 이동

11.11. 김철수 목사님이 부임

11.16. 부임 첫 주일 장년 25 명, 유년 58 명

- 1981년

4.7. 양덕1동 52-19번지 43평 부지 1천 만 원에 매입

6.28. 신축 예배당 첫 주일 장년 33명, 중간반 8 명, 유년 132 명

7.4. 신축 예배당 1층으로 사택 이사

8.9. 장년 54 명, 유년 188 명

- 1982년

2.14. 장년 주전 94 명, 오후 62 명

3.2. 이형 장로님 장립

3.7. 장년 주전 103 명, 오후 52 명, 유전 주전 203 명, 오후 25 명

11.28. 교역자 시무투표 찬성 91 명, 반대 1 명, 98% 지지

- 1983년

6.29. 합성동 263-22번지 138평, 48,883,000원

12.6. 주민 반대 때문에 공사금지 가처분 신청을 통해 마산지법에서 승소

-1984년

4.22. 부활주일 신축예배당 첫 예배, 장년 247 명, 유년 360 명

6.18. 헌당예배, 건축비 71,897,877원

6.24. 장년반 주전 185 명, 오후 105 명, 유년 주전 474 명, 오후 162 명

12.13. 옥상 조립식 사택 이사. 사택 건축 5,018,750원

부채 1억 초과 - 81년 이자 346만원, 82년 390만, 83년 579만, 84년 1450만

12월 시온 찬양대 설립

-1985년

2.17. 설립 8주년 기념 전도주일 장년 320 명, 중간반 62 명, 유년 450 명

3.5. 어린이 선교원 설립

-1986년

6.22. 유년 주교 1862 명 출석

-1987년

1. 진해 주일학교 분교를 충무동교회로, 유년 80, 중간반 15, 집사 권찰 3 명 전출

3. 성서대학 설립 개강

5. 임마누엘 찬양대, 호산나 찬양대 설립

11. 추정희 전도사 사역(88.6. 이임)

■ 경제
가는 교회마다 건축했고 건축의 문제는 빚인데 백 목사님이 학생 때부터 인정하고 신뢰하여 직접 빌려 주심. 다른 목회자들이 신기하게 생각할 정도. 어떤 교역자들은 교회 건축하다 빌린 돈을 갚기 어려워 빚을 못 갚는다고 선언해 버리는 수도 있었음. 이자를 갚을 때는 기간을 날짜 시간까지 맞춰 이자를 계산하고 봉투에 적어 드림.

■ 공회 탈퇴
▷ 1988년

2.14. 교단 소속 투표, 총공회 찬성 26 명, 탈퇴 김철수 목사님 지지 218 명, 지지 90%

3.19. 크리스챤신문 제1316호에 240 명 교우의 총공회 탈퇴 성명서 발표

- 공회에 대한 반발
백 목사님으로서는 많이 참으셨을 것. 교역자회나 공회의 집회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았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탈퇴한 분들이 대개 개인의 대우나 개인의 입장 때문에 반감을 가진 분들이라고 생각. 그러나 김 조사님은 신앙의 사상과 정신과 행정의 방향 문제로 목사님께 조심껏 표현. 따라서 양심에 떳떳함. 탈퇴를 해도 좋은 모습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감정이나 다른 입장이 개입 된 분들은 험한 모습을 보였음. 당시 나갈 때 훗날 다시 들어 올지라도 일단은 탈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 김 조사님은 어릴 때 부모 핍박 받아 가면서 교회를 출석했고 이런 자세로 탈퇴를 했는데 다른 분들과 대화하다 보면 탈퇴의 동기에 차이를 좀 느낌.

탈퇴 후 일반 교단과 공회를 비교해 볼 때 공회가 교회에 목회자가 적임 문제가 생길 때 공회는 교역자를 이동 시킬 수 있고 뒷받침을 해 주는데 일반 교회는 이동이 안 되기 때문에 어려움 닥칠 때 본인이 돌파하지 못하면 그 것으로 끝나는데 공회는 이동을 통해 다시 돌파구를 마련하여 교회와 교역자가 함께 유익할 수 있음. 일반 교회는 그런 면이 없음.

▷ 탈퇴 후 노선
-1989년

6.1. 김철수 목사님 위임식, 박우수 우종재 장로님 장립

-1990년

2. 합성동 263-22번지 2층 본당 증축공사

8.10. 263-46번지 46평 주택 1억원 매입

11.18. 추수감사절에 입당예배

건축비 96,766,496원(사채7900만, 은행5275만, 이자 182만원/월)

12.19. 산창 성서대학 제1회 크로스웨이 23명 졸업

-1991년

6.30. 유년부 총동원 주일 1,085 명

-1993.11.14. 전도왕 안강자 집사님 (주안장로교회) 전도 간증

-1994.9.26. 산창교회에서 고려개혁 44회 총회 개최, 총회장 최기호 부총회장 김철수

-1995.4.5. 양덕1동 94-11 서광빌라 401호, 42평 8900만원, 9월 교단 총회장 피선

-1996.7.8. 합성2동 263-28, 47평 주차장 부지 매입, 1억 8400만원

-1997.2.23. 제1회 열린음악회, 마산 종합운동장 올림픽 생활관에서 개최

-1998.2.12. 김영욱 목사님 안수

남부노회, 송용조 황주태 김철수 이영덕, 김석환, 이종길, 변재천, 김경렬 제2회 열린음악회, 40평 주차장 1억3560만원 매입

고려개혁 통합총회를 산창교회에서 회집

-1999.4.11. 제3회 열린음악회, 한샘교회 재건교회 내서교회 구세군교회 연합

-1999.9.14. 고려개혁 48회 총회에서 김철수 목사님 총회장 피선

-2000.6.26.-7.5 중국선교여행 17 명

현대콘도 회원권 산창교회 명의로 구입

-2001.1.29. 제26회 마산시 기독교연합회총회 회장으로 피선

3.18. 매주 FM 106.9Mhz 기독교 경남방송 오후 8시부터 30분 방송설교

경남방송 설립 공동회장 및 연보 1천만원

-2002.1.1. 김성도 강도사 윤선제 전도사 사역

필리핀 선교 여행 10 명

본 강단을 계단식으로 개조

-2011.5. 70 세 은퇴 (몇 년 전부터 파킨슨 병환)

▷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개혁) 헌법전문
1990년 10월 고신측 제21회 서울노회가 불법으로 이혼한 목사를 옹호하고 이에 항의하는 목사들을 부당하게 처리하자 이 문제를 고신 제41, 42회 총회에 상소하고 시정을 촉구하였으나 총회가 권징조례를 전면 무시하고 총회재판부로 보내야 할 소송사건을 총회 행정부로 보내는 등 정치성을 앞세워 묵살해 버림에 따라 우리는 고신총회와 결별하고 1992년 12월 10일 고신 제42회 총회를 계승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개혁) 총회를 조직하였다.

우리 총회의 기본정신은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고려파 교단을 설립한 신앙 선배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아 우리 시대의 진리를 파수하고 신앙의 전통과 생활의 순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총회의 정신에 입각하여 제42회 총회가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헌법개정위원을 선정하여 그 작업을 일임하였다...

1996년 10월
헌법개정위원회

위원장: 최기호

서기: 유관태

위원: 송용조 김철수 김석환 이상하 안병삼 김상철 이창배

■ 역대 제직 권찰
-1978년

목사: 이만기

집사: 정재우 음영희 하덕자

-1979년

목사: 이만기

집사: 정재우 이성복, 채종석, 음영희, 하덕자, 임용자, 박은혜, 차경림

-1980년

목사: 이만기

집사: 정재우 이성복, 채종석, 음영희, 하덕자, 임용자, 차경림, 신영애, 김영숙, 박은례

-1981년

목사: 김철수

집사: 정재우 이성복, 김영숙, 하덕자, 임용자, 차경림, 박은례

-1982년

목사: 김철수

장로: 이형

집사:

■ 사경회
1981.1.12.-16. 백태영(잠실동교회) 밤 57, 새벽 27

1982.1.25.-29. 김철수, 새벽 45, 오전 75, 밤 76 명

1983.1.24.28. 이재순(창동교회) 새벽 60, 오전 90, 밤 110 명

1984.6.18.-23. 김응도(여산교회) 새벽 70, 오전 100, 밤 150 명

1985.1.14.-18. 이진헌(청량리교회) 새벽 80, 오전 100, 밤 170 명

1986.1.13.-18. 송용조(사직동교회) 새벽 80, 오전 110, 밤 180 명

1986.7.28.-30. 유년 중등 수련회, 밀양팔복산, 유년 66 명, 중간반 32 명, 교사 등 23 명

1987.2.23.-27. 김철수(산창교회) 새벽 110, 오전 160, 밤 230 명

1988.8.8.-11. 3박4일 전교인 매포 연합수련회 - 산창교인 남 37, 여 77, 합 114 명

낮: 송용조, 밤: 김철수 정의진, 새벽: 송용석 방영남

1990.1.3.-5. 청지기수련회, 정찬용 목사님(서울 브니엘교회)

1990.8.15.-16. 전교인 하기수련회, 창녕 온누리캠프장, 김철수 목사님 강사, 200 명

1990.12.31.-91.1.2. 2박3일 제직 수련회, 경기도 청평믿음기도원, 전가화 목사님

1991.1.10.-11. 제직세미나, 김철수 강사

1991.1.28.-2.2. 중고등부성경다독회, 배승철 (산청 특리교회)

1991.5.2.-3. 부흥사경회, 김형천 목사님(대구 온천교회), 밤 집회만 2 일

1991.7.29.-8.3. 3박4일, 경기도 이천 대덕산 수련관, 산창교인 73 명

1992.1.1.-3. 기도수련회, 감림산 기도원

1992.1.6.-9. 3박4일 제직수련회, 방영남 (충주용산교회) 홍근성 목사님(마산 한샘교회)

1992.1.13.-17. 성경통독사경회, 낮: 김철수 목사님 37, 밤 김영욱 권찰님 38 명, 구약 1회

1992.1.24.-28. 중고등부 성경 사경회

1992.1.27.-29. 유년부 동기학교

1992.7.27.-29. 하기연합수련회, 대덕산기도원, 유년 13 명, 중고등부 43 명

199.2.7.29.-8.1. 하기연합수련회, 대덕산기도원, 장년 30 명

1992.8.17.-20. 성경통독사경회, 교육부 주관 31 명

1993.1.4.-8. 성경통독사경회, 교육부 주관 34 명

1993.1.25-27. 유년부동기학교

1993.8.2.-4. 중고등부하기수련회, 남해 창선 진동분교, 중등46, 고등17, 장년31, 유년6

1993.11.14. 안강자 집사님 전도간증 집회

1994.1.17.-18. 제직수련회

1994.1.24.-28. 중고등부 성경통독회

1994.1.27.-28. 유년부동기학교

1994.4.17. 주일오후 해병대 부사령관 소장 김기홍장로님 간증집회

1994.4.17. 주일오후 김만철 집사님 간증집회, 탈북 수기

1994.8.1.-4. 전교인 하기수련회, 거창 위천초등학교,

장년 73, 고등 23, 중등 36, 유년 59, 유치 14, 영아 3, 외부 8, 총 212명1995.7.31.-8.3. 전교인하기수련회, 위천초등학교,

산창(유년89, 중고60, 장년96) 왕성,온누리 30명 성지,상기 10명, 총286명

1996.1.22.-23. 중고등부 동기수련회, 손양원기념관, 남30, 여46, 교사18, 유년10, 총118명

1998.8.3.-5. 전교인하기수련회, 의령 대유수련관, 유년 71, 중고 60, 장년 110, 계 241명

2000.7.31.-8.2. 전교인하기수련회, 의령대유, 유년50, 중등31, 고등21, 장년 135, 합234명

2001.7.30.-8.1. 전교인하기, 의령청소년수련관, 유치22,유년77,중고46,장년102, 총247명

2002.8.5.-7.전교인하기수련회, 거창월성, 유치17,유년72,중고32,장년123, 계244명

■ 출석과 연보 통계
연도 장년주전 주후 삼일 오일 새벽 유치 유년 중고 연보

80년 27 18 16 4 81

81년 42 25 21 5 141 9 2000만

82년 90 53 48 11 207 25 2500만

83년 122 75 50 12 248 42 4000만

84년 161 98 66 21 337 49 3500만

85년 216 127 103 27 395 62 3000만

86년 217 143 122 35 618 112 6000만

87년 245 149 132 31 425 141 6500만

88년 203 128 111 29 275 136 7000만

89년 208 118 103 25 298 124 9500만

90년 199 130 100 28 284 105 1억

91년 206 136 111 25 275 97 1억2천

92년 228 150 110 26 199 102 1억25백

93년 231 158 116 55 32 30 128 94 1억6천

94년 236 163 110 52 33 27 130 98 1억7천

95년 249 175 119 56 31 27 129 108 2억2천

96년 290 205 128 61 31 36 133 108 3억

97년 293 212 122 67 29 38 123 103 2억8천

98년 309 230 130 79 49 44 155 128 2억7천

99년 286 214 119 68 38 40 128 105 2억7천

00년 292 220 112 62 39 34 118 99 3억1천

01년 276 206 95 66 36 29 115 89 3억4천

02년 263 189 77 67 42 29 100 63 3억75백

■ 간증
‘최고의 복’ - 회고록, 박은혜 권사님

개혁의 길은 험로였다 - 하명철 장로님

‘최고의 복’ - 회고록, 박은례 권사님

25년 전에 산창교회 처음 왔을 때는 아기를 둘 가진 아기 엄마였고 아무 철도 없는 스물 일곱 살 나이였습니다. 그 때는 이만기 목사님이 계셨고 제가 왔을 때 있던 성도들의 수는 약 20명 정도였습니다.
서울 사직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조그마한 공간으로 된 교회에 들어섰을 때 정말 이상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교회는 교회겠지’ 하고 다녔으나 차츰차츰 교회를 들어 설 때면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하여 주위를 살필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 아래층이 동경회관이라는 술집이었고 교회간판은 초라하고 술집 간판은 색깔이 진하여 눈에 확 들어오는데 누가 볼 때 술집에 간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유경숙 집사는 그 당시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불러서 ‘너 어젯밤에 어디 갔었냐’고 했으니 그것은 삼일예배 가는 것을 보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 올라가는 계단이 술집계단으로 1층까지 장식이 되어 잇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예배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수요일 밤 집회 때는 마이크 노래 소리, 쿵쿵거리는 악기 소리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겁니다.
이러한 장소와 분위기에 누가 찾아오겠습니까.

약 2년이 지났을 즈음에 새로운 목사님을 맞이한답시고 철없는 성도들 고병우, 백숙이, 신선애와 함께 도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키가 크고 인물이 좋으신 젊은 신사가 쓰윽 들어오시더니 이곳 저곳을 살피시더군요. 그리고 짐을 올려놓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모님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한심한 듯한 표정으로 앉으시는 겁니다. 짐이 다 올려지고 나니 점심시간이 넘었지요. 철없는 저희들은 목사님의 식사대접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딱딱한 공회 분위기 속에 젖은 타성 때문인지 반가워 할 줄도 모르고 그저 맹종 외에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저희들에게 점심식사를 했느냐고 물으시길래 ‘안 먹었습니다.’라고 했더니 자장면을 시켜 주셨습니다. 저희들은 배가 고파서 그냥 먹었지요.

참! 기가 찰 일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째 그리 철이 없었는지 심히 부끄럽기만 합니다. 목사님은 예배실 뒤쪽에 있는 부엌을 보시더니 ‘여기 싱크대 하나 사 놓고 이 위에 찬장을 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더니 당장에 밖에 나가서 시켜서 설치를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 목사님은 많이 다르구나 단번에 처리가 이루어지는구나’ 놀랍게 느꼈습니다.

교회는 좁고 부엌은 연탄이다 보니 연탄가스 냄새가 늘 났습니다. 그로 인해 목사님과 식구들이 연탄 가스에 취해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 사정은 빚이 있었고 재정도 심히 빈약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첫 설교는 막혔던 하수구가 확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속이 시원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될 것 같았고 소망과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그후, 목사님이 오신지 두 달쯤 되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서울 잠실동교회 백태영 목사님을 강사로 집회를 했는데 울산 우인목 장로님이 아파트 한 채를 헌물 하셨는데 그 돈은 경우 400만원 정도였으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목사님이 부채를 구하여서 양덕 타워맨션 맞은 편 개울가에 아담한 흰 건물의 교회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 때 몇 명 안 되는 교인들도 얼마 안 되는 헌금이지만 자기 분수 이상으로 헌금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예정인 여학생이 30만원을 작정하였으며 그것은 1년 내내 갚아 나갈 계획이었는데 그 당시 처녀들의 월급은 10만원 미만이었습니다.

당시 목사님은 교회를 지으면서 무리하였고 대장염으로 죽을 고비도 당하였던 것 같고 많은 고생도 하셨습니다. 아마 그때 목사님이 많이 늙으셨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다시피 하셨으니 교회에 대한 목사님의 믿음과 용기 그리고 집념과 사랑은 얼마나 컸을까요?

그후 1 - 2 년이 지났을까? 교인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가득 차고, 자리가 없어 옥상에 천막을 치고 그곳에서 중고등부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면 좁아서 들어 앉을 수도 없었습니다. 좁으니 무덥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교회를 지어야 된다는 뜻을 품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시면서 많을 곳을 살피시다가 오늘의 교회 위치가 공터로 남은 것을 보고 선택하여 전부 빚으로 구입하였던 것입니다.
이 건물을 신축하기에는 2년이란 기간이 걸렸습니다. 문제는 주민들의 반대였습니다. 주민들의 반대 이유는 집 값이 떨어지고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착공 예배를 드릴 때 여기저기 큰 녹음기에 염불 테이프를 틀어 놓았고 물을 끼얹겠다고 물통과 다라이에 물과 바가지가 즐비했고 주민들은 성도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소리치거나 떠밀고 예배를 방해하고 예배를 다 마친 후에는 난장판이 되었고 경찰이 동원되었습니다.

지하 굴착공사를 하기 위하여 포그레인이 들어오는 날에는 이웃사람들이 비상종을 치면서 모여 들었고, 내가 설던 집에 살던 아주머니 김창희씨는 포크레인 밑에 들어 눕고 기절을 해버립니다.

이웃 사람들은 사람을 죽여 가며 교회를 짓느냐고 책임추궁 했고 목사님은 그 큰 사람을 병원에 입원시키러 가고 우리는 거짓인줄 알지만 한편 걱정도 되었습니다.

이웃 주민들과 마찰은 이루다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경찰관들도 수 차례 동원되었으나 그런 불법 행위를 지켜만 보고 있었고 누가 폭행하는가만 관망하였고 전혀 막아주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법이란 이상하기만 했습니다.

신문기사에도 몇 차례 기사화 되었습니다. 그들과 우리들은 집을 방문하거나 반상회와 동사무소, 경찰서, 시청, 신문사, 변호사, 법원 등 몰려 다니면서 투쟁했고 그때 우리들은 주민들을 볼 때마다 맹수를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 마을 주민인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갈 대나 시장엘 가도 사람들만 몇 명이 모여 있으면 온통 이 동네 주민들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상황이 얼마나 무섭고 악독하고 무지막지했는지 모릅니다. 목사님을 욕하고 삿대질하고 그러다가도 한편 목사님에게 호소하거나 애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도 싸움 중에 오줌을 싸기도 하고 밤잠을 못 자면서 고민했다고 하였으며 피차간에 큰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습니다.

법원에 제기한 공사반대 가처분 신청에서 우리가 승소하여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여름에 하려던 공사를 한 겨울에 가서야 하게 되어 또한 손해도 많았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모든 면으로 약한 교회였지만 하나님이 함게 하심으로 그 어려웠던 일들이 하나하나 해결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교회를 짓기 위해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흙이나 나무 치우는 일, 못도 빼고, 벽돌과 시멘트 올리기, 모래 나르기, 지하실 시멘트 긁어내기, 종 탑을 올릴 때 도르래 식 콘크리트 올리기 등 너무나 일이 많았습니다. 땅에 큰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어먹으면서 일했습니다.

그 뿐 아닐 또한 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있었던 성도들은 알고 있는 줄 압니다. 바로 공회 탈퇴 문제였습니다. 큰 다툼 끝에 많은 교인이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저도 처음 신앙생활을 공회에서 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그때 공회사람들은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해도 구원을 못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공회 사람들은 최고로 잘 믿고 다른 교회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건설구원은 못 받는 것으로 그렇게 사상인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타 교회와 교류도 없었고 성가대, 전도회, 분과위원회 활동과 다른 교회들과 종교서적들을 접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속화되고 타락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런 우리교회가 공회 사상에서 해방되기까지는 목사님이 얼마나 많고 오랜 고민과 기도, 교훈과 눈물이 있었겠습니까. 그 결과로 지금의 우리는 이러한 자유와 은혜와 행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교회 설립26주년인 되는 이 시점에 돌이켜 보면 어린양과 같은 성도로서는 목자와 같은 목사님 잘 만나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느껴집니다. 목사님은 어리고 철없는 양떼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시고 ‘항상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성경공부 소책자나 주제별 성경연구, 크로스웨이, 조직신학, 사역훈련, 다락방 공부, 찬양과 암송, 여러 가지 형태의 기도 등으로 성숙한 신앙, 성장하는 성도로 이끌어 왔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우리교회 강단에서 설교하였고 우리도 여러기관에 가서 선교와 봉사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목사님의 노고였고, 혼자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게 하셨음을 저희들은 분명히 보았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아무 것도 안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다 있게 하셨고 다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까지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목사님의 교회를 아끼시는 그 애정과 성도들의 응답이 지금의 산창교회를 이루웠음을 새삼 고백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우리들에게 어떠한 시련이 온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앙망하는 믿음으로 하나 되어 전진을 계속하여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는 참 된 교회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였고 앞으로 크신 은혜를 믿습니다. 할렐루야!

2003년 2월 3일 박은례 권사
(산창교회 26년사, 1977-2003년)

개혁의 길은 험로였다
- 하명철 장로님

1983년 봄이었습니다. 꼭 20년이 지났습니다. 부산에 있던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옮겨지면서 도청에 근무하던 저는 창원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창원의 몇 교회를 가 보았으나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조현권 집사의 인도로 산창교회로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산창교회의 모습은 교회로 건축되어 있었으나 그 규모가 너무나 작아서 가정집 크기였고 그나마 2층은 예배실이었으나 1층은 사택과 전세 사는 정재우 집사님이 살고 있었고 옥상에 천막을 치고 중고등부 예배실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교회에 비하여서 예배시간이 걸었고 특히 설교시간이 길었습니다. 잘 알아 듣지 못했으나 목사님의 메시지는 강하고 힘이 있었고 감동적이고 놀라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가 주일 오후 예배를 밤에 드리는데 산창교회는 오후2시에 하는 것도 특이했습니다.

그러므로 잘 적응이 되지 않아 오후예배는 많이 빠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일 성수에 대한 확신을 차차 배우게 되었고 성도들의 진지한 모습과 경건한 예배 모습에 끌리게 되었고 저도 차차로 산창교회 교인이 되어왔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모습은 목사님과 반사들과 구역장들이 열정과 집념으로 어린아이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토요일 오후에는 모두가 나서서 심방을 다녔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산창교회로 모였고 많은 교회에서 산창교회 주일학교를 배우기 위하여서 견학을 오는 교회들이 매주 찾아오다시피 했습니다.
신축한 합성동 현재교회의 지하실은 70여 평 정도로 넓었으나 가득하게 차고 들어 갈 공간이 없었고 800 - 1000 명 이상까지 모였으며 1986년 4월 평균출석은 756명, 5월 평균 출석은 727명 6월 22일 주일은 전도주일로 1862명, 29일 주일에는 1229명이며 6월 평균 출석수는 1119명, 7월 평균 출석수도 831명이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학용품이나 먹을 것이나 선물을 계속 주었지만

우리교회에서는 말씀만 가르쳤고 이것을 아이들은 불평하면서도 우리교회로 찾아왔고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거의 다 산창교회에 다녀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산창교회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사와 교사들의 열정을 볼 때에 긍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하여 어린이 인도가 이렇게나 어려워 졌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교파에 대해서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고 교회는 다 같은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나 부산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던 사람들은 무두가 나를 보고 이상한 교회에 다닌다고 수근 거렸고 이 지역 교계에서도 냉대뿐만 아니라 이단교회라고 정죄도 하고 교회 주소록에도 없고 기독교 연합회에도 가입시켜 주지 않고 언제까지나 증오와 적대감으로 대하였습니다.

가입된 총공회를 탈퇴한 후에도 7년이나 지난 1995년에서야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에 가입하게 되는 정도로 교파의 학대는 심했습니다. 그러나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에서 우리교회 김철수 목사님이 수년간 부회장으로 일하다가 2001년도에는 회장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고신 마산노회에서는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 회장 김철수 목사은 자신들과 신앙과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회비도 안 내고 부활절 연합집회에도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통보하면서 마산 교도소 선교협의회에서도 제명하고 아직까지도 불목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목사님은 우리 교회의 외부적 고립과 나쁜 위상을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외부활동에 더욱 노력하여 교도소 선교, 군 선교, YWCA, 경남기독교 연합회와 각종 연합사업과 구제 선교와 선교기관 돕기 등에 적극 동참하였고, CBS 경남방송 설립공동회장으로 물심양면 협력했고, 창원극동방송과 기독교 경남방송에 30분씩 매주 설교 방송도 하였습니다.
매월 두 번씩 마산 삼성병원 신우회 주관 환우예배에서 설교를 10여년간 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연합 집회에서 기도나 사회나 설교 또는 축도 등으로 순서를 맡았으며 마산시 기독교 연합회의 10여 명의 고문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 기관과 우리는 교훈과 행사를 교류하고 있으며, 우리 찬양팀이 여러 기관에 가서 찬양도 하고 선교 활동도 적극참여를 하여 왔습니다. 이제 산창교회의 위상은 많이 높아졌습니다.

목사님도 소속한 교단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려개혁) 총회에서 두 번 총회장으로 일하셨고 헌법위원으로 또한 신학교에 출강, 전국 초교파 목회연구회와 기도 동지회를 설립하여 총무와 회장으로 또한 부산 경남 기독교 합심회에서도 회장과 감사 등으로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9행20:35)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1년에 1억원 정도를 ‘주는 교회’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1년에 지경 확장축적금으로 1억원 정도를 저축하여 주변 주택을 네 번째로 구입하여 주차장이나 별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신 마산 노회나 지역교회에서 경계하면서 비판하거나 냉대하는 것도 어쩌면 일면으로 이해가 되는 것은 산창교회가 이전에 속하여 있던 총공회(속칭 백파)는 세속을 멀리하고 전적으로 믿는 것은 좋으나 좁고 편협적인 사상과 강한 교파 관념 때문인 듯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상과 인식이 중요하겠지만 특히 교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경직된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열린 뜻을 품은 김철수 목사님의 교훈과 행정과 공회에 대한 충성도를 공회에서 불신임했는지 경계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산창교회의 주일학교 분교로서 70여명이 모이는 장소였던 진해 허창민 김성은 부부의 가정을 충무동교회로 분립시켰습니다.

창원에는 창천교회를 세워서 이도범 집사 방남희 김현주 권찰 등 몇몇 사람이 옮겨가더니 1988년 2월에는 총공회에서 김철수 목사님을 산창교회를 떠나라는 결의를 했고 그 결과 1988년 2월 14일 주일에는 총공회냐 김철수 목사냐 한편을 선택하는 전교인 신임투표를 했고 물론 김철수 목사 지지율은 찬성 218명 반대 26명으로 90%정도였습니다.

총공회에서는 다른 목사를 지명, 파송하여 내적 투쟁을 시도했으나 총공회에 대한 절대적인 관념을 가지고 떠나간 성도들도 그럴 수는 없다고 거부하여 창천교회로 옮겨갔는데 그들은 대개는 오랜 경륜을 가진 신자들이었고 산창교회에 남은 사람은 숫자는 많아도 경륜이 얕거나 설교에 은혜를 잘 받는 순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떠나간 분들도 일생 아픔으로 그때를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뿐인 장로 이형 장로님도 가셨는데 그분은 사회적으로나 신앙과 인격적으로 모든 분들에게 신임을 얻는 분이었고 장로로 피택된 정재우 집사와 권사로 피택된 전우남 집사와 초대 담임목사 이만기 목사님의 아들 이성복집사와 나를 산창교회로 인도한 조현권 집사 정철포 이충현 정상효 집사와 여집사로서는 음영희 임용자 차경림 백숙이 김태선 선귀엽 김순희 신선애 이도순 김금악 백정순 박경자 최효선 백복남 집사 등이었고 그 가족과 그들이 인도한 구역식구와 상당수의 권찰님들까지 포함하면 약 100명 정도가 떠나갔다고 짐작됩니다.
참으로 교파사상은 얼만 무서운지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장년부 출석이 200명 이하로 내려갔습니다.

그후 약 1-2년에 걸쳐서 친분과 친척관계 등으로 또다시 떠나간 제직은 배종필 진선희 정동열 진영순 배종기 안순정 진정선 집사 등이었습니다.
15년이 지났으나 아직까지 개인교류는 되고 있으나 교회적으로는 산창교회와 창천교회나 충무동교회는 우리와 멀기가 북한보다 훨씬 먼 거리에 있어 전혀 교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길은 험난하고 연단의 길, 좁은 길 좁은 문입니다.

목사님과 산창교회 성도들은 과거에 소속했던 교단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계에서도 소외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길이 참으면서 극복하여 나왔던 것입니다.

나 개인으로서는 교회의 중매와 목사님의 주례로 1984년 10월 27일에 산창교회 초창기 교인인 정춘지 집사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 직후부터 반사 일을 하였는데 잘 할 줄도 몰랐으나 어쨌건 열심히 했고 직장이 울산으로 옮겨진 86-88년 약 3년이란 기간에도 신혼이었으나 나 혼자 울산에 머물면서 주말부부로 주일에는 산창교회로 빠짐없이 와서 반사로서의 충성을 다 했던 것입니다.
나의 신앙 노정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목사님의 교훈과 아내인 정춘지 집사의요동 없는 신앙 때문에 지금까지 복 된 교회에서 은혜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압니다.

특히 IMF 직후 직원 퇴출 위기에서도 퇴출 각오를 하면서도 주일을 성수했고 1995년 6월 25일에는 안수집사로 1996년 11월 26일에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장로로 임직받아 이제 내년도에는 47세로 수석 장로가 될 형편에 있습니다.

나의 아내 정춘지 집사는 김철수 목사님이 부임한 80년 그 당시 산창교회의 반사로서 설립 26주년에 대한 감회는 몇 권의 책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역사라고 하면서 특히 목사님의 믿음과 집념에 따른 노고와 착하고 고마운 성도들의 믿음의 응답과 교회에 대한 충성의 결과라고 감격하여 합니다.

이제 지금까지의 발판으로 산창교회가 더욱 성숙한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신앙후손들의 믿음과 정신이 살아있어야 하겠고 우리의 신앙성숙을 더욱 승화시켜갈 사명감과 믿음의 비전과 리더쉽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스스로 열매 맺는 건강한 교회’ (막4:28-19)란 표어처럼

‘열심히 충성하는 성도, 사랑 중에 축북 받는 가정,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 교회다운 교회 우리 산창교회가

'샘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창44:22)처럼 영육간에 복된 교회가 되기를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후 2003년 1월 31일 하명철 장로
(산창교회 26년사, 1977-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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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은 거창읍, 자유당 시절 월천면이 거창읍으로 흡수, 당시 어린 학생들까지 반대했고 나무에 글을 적으라 해서 거창읍에서 월천까지 줄을 걸어 놓았는데 어느 높은 사람이 오기 때문에 기회라 했는데 차를 타고 그냥 지나 침. 원래 거창군이 1읍 12 면에서 월천면이 읍에 통합 되어 1읍 11 면.

2) 박신찬 회고에 창북교회 출신 친구들은
이환봉 성기정 오세윤 남상철 김병권 - 장로, 김철수 김병춘 박신찬 - 목사

3) 당시 ‘월천교회’, 지금은 ‘전원교회’

4) 당시 고신이 백영희 조사님을 제명하던 중

5) 이, 희, 확인

6) 딸은 이강옥

7) 당시 반에는 여학생이 4 - 5 명 정도 있었는데 여학생이 없는 반도 있었음.

8) 창동교회 개척 1959.9., 과외 대상 이정애 51년생 58년 초교1이고 이영호 54년생 60년에 초교입학이며 두 학생을 가르쳤고 신용국의 고교는 58년부터 60년이므로, 1960년 고교 3학년으로 추론.

9) 자원하면 일찍 갈 수 있었음

10) 애양원의 4대 목회자, 이북에서 피난 온 월남한 독신. 그는 묘도교회를 맡아 잘하면 교회를 주면 되지 왜 안 준다고 아우성이냐고 자기 측에 말씀하던 분. 논쟁이 벌어 지면 밖에서 부채질이나 하고 기다리던 분. 양심적인 분. 딴 분들은 투쟁적이었으나 김철수 조사님은 ‘쫓아 내 보시오’ 하면서 자신 있게 상대. 3번이나 당회장을 교체.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 윤성화 목사님에게 김 목사님이 감화 받고 존경 받는다는 점을 고려해서 윤 목사님을 보냄. 윤 목사님은 밖에 나가 우동을 사 먹이면서 한 달이든 1년이든 알아서 하고 좁은 섬 안에서 서로 나누지는 말자고 하심. ‘나는 부산에서 지도를 받고 있으니 월초 정기 모임 때 가서 말하고 오겠다’고 말한 뒤 물러 남. 이런 문제 때문에 통합 측에서는 그 후 실력 있는 분을 파송했으나 오래 있지 못하고 또 나감.

11) 이술이 집사님 기억과 상치

13) 탈퇴 후 1년 정도는 그냥 있었고, 탈퇴한 우리끼리 교파를 따로 만들지 말고 우리 주변 지역에 있는 노회에 들어 가자 해서 방영남 송용석 목사님은 충청노회, 송용조 목사님은 서울 노회, 김철수 목사님은 합동정통에 들어 감. 김 목사님은 그 곳에서 서기가 산창교회만 가입했고 김철수 목사님은 가입하지 않았다 해서 내가 못된 놈들 하면서 나감. 그 노회에 김철수 목사님을 데려 간 사람 쪽과 반대 쪽의 정치 싸움에 희생. 또 1년 외로운 길. 이런 일로 경험이 생긴 것은 어디든 목사는 그 단체 가입해도 교회는 1-2년 있다 가입하는 것이 좋다는 것

14) 처음 고신개혁으로 함께 나감
김철수 송용조 등이 성경노회가 있었는데 고신 서울노회가 반으로 나뉘면서 송용조 목사님은 상회 징벌이 없는데도 사람을 너무 제명을 많이 한다면서 나와 있다가 나를 권해 따라 갔는데 고신개혁.

나온 뒤에 고신으로 들어 간 사람 등 흩어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시 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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