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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녕 - 서부교회 외부 업무 담당 [사진] -- 일부 수정

인물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21.02.19

참고 : 하정재 권사님 별세 (총공회/소식10820)

            강상녕 장로님 소천(총공회/소식11592)


 

(사진1)
뒷 줄 좌로부터
손성준 장로님, 이동근 목사님, 박윤철 목사님, 황길태 장로님, 강상녕 장로님, 이춘영 장로님(좌끝)
나머지 6 명은 충현교회 방문단 대표
서부교회 주일학교 참관 때문에 김창인 목사님의 충현교회에서 감사패와 함께 방문한 모습

(사진2)
1987년 5월집회의 동대구역, 뒤 모습이 '부산-대구' 기차 전세 이동을 책임 진 강상녕 장로님

이 노선은 모든 면에서 대외보다는 내면을 주력했습니다. 마치 내부를 감추듯 살았는데 내면에 주력할수록 우리가 감출 수 없도록 하나님은 외부에 알리셨고 결국은 한국교회의 중심에 서서 등대처럼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서부교회가 있었고 서부교회 내에는 목사님을 모시고 외부를 향해 활동해야 할 때가 있었으니 그 때마다 서슴 없이 순종했던 분이 강상녕 장로님입니다. 물론 이춘영 장로님이나 황길태 장로님 등 여러 분들이 여러 면에서 목사님의 지시를 따로 받고 활동한 적도 있으나 예배당에서 가까왔고 연령으로도 목사님께서 가장 편하게 시킬 수 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서부교회의 예배 광고를 맡았고 장로님으로 예배 사회도 맡았던 분입니다. 목사님 사후에 대구공회 핵심으로 활동하셨으나 부산공회에서는 부산공회에 계실 분이라고 내심 기대를 많이 했던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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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용 정리본)

이름 : 강상녕
장소 : 경남 밀양시 초동면 성만리 794번지
연락 : 010-3592-2348
제목 : 백 목사님 생전의 서부교회와 사후의 공회 분열

1. 가정 배경

- 가정
고성 출신이며 불교 가정이어서 신앙은 전혀 접하지 않았음. 부근에 옥천사 절이 있어 집안이 불교에 철저.

- 학교
초등 4학년에 8.15 해방. 초교 졸업 후에 6 년제 진주농림중학교 졸업. 경남대학교 법률학과 졸업.

- 직장
사회 생활은 재학 중에 경남도청 직원으로 시작.
농업협동조합 창립 직원으로 경남도 지부의 경리계장 재임. 5.16 때 병역 미필로 사직했다가 복직. 후에 농협이 농업은행과 합칠 때 농업은행이 중소기업은행을 만들고 여신과 경제를 농협이 맡으면서 전국 청산법인 업무, 그 후 다시 경남도로 돌아와서 보건사회국의 학무과 소속 경남중학교 사무직으로 갔다가 다시 경남도로 와서 울산공업센터 처음 시작할 때 용지매수사업 업무. 매수 작업 끝나고 경남도 양정과 양곡관리특별회계를 맡았는데 당시 단식회계를 복식회계로 바꿀 때 전환 업무 시작, 기업회계 재무재표가 완성 된 후 대한건설협회 몇 년 종사. 학교 전공과 달리 공직에서는 회계 업무를 주로 맡았고, (주) 대우종합건설 설립

- 결혼
부인 하정재 권사님은 남해 출신. 1937년 5월 10일, 현재 74세이며 마산여고 출신.
1957년 결혼. 당시 강 장로님 24세 권사님 21세

2. 사회 생활

- 생사 경험
농협의 시군구 점포가 502개일 때 전국 통계를 매월 내기 위해 서울과 부산 생활을 반반씩 할 때 경남 15일로 늘 근무한 정도. 처음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도 토요일이면 무조건 본 교회 주일을 지키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 왔고 설교록에 초신자의 주일성수가 언급 된 사례. 토요일에 오고 월요일 다시 올라 갔는데 당시 부산 서울에는 KNA 프로펠라 단발 여객기. 비행 시간이 1시간 30분인데 두 번이나 죽을 고비가 되는 사고 겪음.

- 비행기 사고
박 대통령이 육군 소장으로서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일 때 사복 입은 국방부 국수국장과 동행하며 서울 가는 비행기를 함께 탑승. 당시 품에는 경남 일원에 지급 될 비료 대금이 수표로 휴대. 한국은행에 입금해야 경남 전체 농민에게 비료가 인도 되는 상황. 비행기의 착륙 불가 상황이 생겼는데 조종사의 기내 방송이 없자 박정희 소장은 복도에 일어 서서 대노를 해서 험한 말을 하고, 승객들은 북한 납치로 알고 바짝 긴장. 수표 처리를 몹씨 걱정했으나 다행히 김포공항 불시착 성공. 당시 조종사는 미국인이며 기류 때문에 일본을 갈 수도 없고 부산은 기류로 문제. 최종적으로 불시착을 강행했으나 사고 없이 안착.
개인적 대면은 부산에서 박 대통령이 군수기지 사령관 시절 김영주 변호사의 판사 시절 서로 절친. 자주 술판. 고시 대신 판검사 특임 경우. 그 부인이 누님과 초교 동기동행이고 장인이 우리 부모와 죽마고우 관계로 동대2가 관사가 신광교회 뒤에 있어 누님 집 하숙 시절 박정희 소장은 퇴근 후 나와서 그 집에 자주 모여 밤새 술 친구로 지내는 것을 목격함.

- 목숨 위협
부산시장 김현옥 시절, 도의 양정과 근무할 때 5.16 혁명 직후여서 육군 소장인 양찬우가 경남지사로, 육군 준장 김현옥은 부산시장. 세상이 험할 때인데 당시 내부무 감사계 책임자가 부산시를 감사하면서 기업회계 전문가가 없어 업무 지원 차 장로님이 차출. 당시 부산위생주식회사의 서류를 전부 압수했고 회계장부를 자세히 파고 들어 가게 되니까 사장이 본인 옆구리에 권총을 쿡 들이 대며 살해 위협을 하는 상황으로 실제 위협을 느낄 분위기. 당시 사장은 예비역 육군 대령으로 김종필 씨와 육사 8기 동기

3. 신앙 배경

- 집안의 신앙
집안에서 강판녕 재종형님이 유일하게 믿었는데 그는 군수로 70년대 거창 부임. 고신의 거창읍교회 장로님이 되었고 공회와는 신앙으로 경쟁 또는 긴장 관계 형성. 남영환 목사님 지인. 형님이 신앙에 철저해도 자신은 신앙 생활할 것으로 생각하지 못함.

- 아내의 신앙
부인 하정재 권사님이 1966년에 이복순 집사님의 전도를 받고 서부교회 출석. 평소 교회 갔으면 하는 생각은 있었으나 가정 환경이 허락지 않아 가지 못했는데 이복순 집사님이 전도. 남편은 여전히 늦게 퇴근하고 술을 마시고 오니까 이복순 집사님을 가끔 마주 칠 수는 있어도 그냥 인사하고 지나 치는 상황. 아내의 교회 출석은 자유 허락. 신앙적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은 자유라는 생각 때문. 아내는 교회를 출석하면서 바로 열심이었고 이복순 집사님 지도에 절대 순종하며 3년 정도 지나고 있을 때 남편은 퇴근 후 오늘은 송도 술집 내일은 어디 술집 늘 한량으로 살고 있었고 집은 동대신동 1가 동대시장의 근처. 부인은 출발하면서 주일과 제사까지도 확실하게 정리했고 부부 사이에도 그런 문제까지 극복.
모든 면에서 신앙 자유는 허락했으나 그 믿는 정도가 심해 속으로는 걱정. 부인은 곧 구역장을 따르는 그 밑의 권찰이 되었는데 자녀 6남매 중 당시 4남매, 아침부터 권찰회한다고 늦게 오고 또 이복순 집사님은 일반 권찰들은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회의까지 꼭 대동하고 아꼈으며 단기간 신앙 성장

- 재정 파탄
1968년 여전히 공직 생활 중이었고 부부가 알뜰하게 살았고 경제 문제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울산에서 건설업을 하는 분이 부자였고 고향 부친과 연세가 같은데 하루는 재정보증을 부탁. 당시 울산시가 처음 발족하여 건설 수요가 많은데 빌라 24동을 건축하면서 분양만 하면 돈이 되니까 실수하지 않는다면서 설명했고, 본인은 당시 신용이 좋아서 이서만 해도 필요한 돈을 차용할 수 있다 해서 설마하고 허락. 한 달이 지나면서 바로 부도. 바로 그 시기에 고향 계신 부모님을 모시고 살 것이라며 동대신 3동의 경남고교 밑에 집을 건축하고 있었으며 80% 완성 상태인데 채권자들이 찾아왔고, 서둘러 그 사장의 재산을 살폈으나 이미 2번 3번까지 다 담보 설정. 건축 중인 집도 넘겨 주고 나중에 전화까지 넘겨주고, 오갈 데 없고, 당시 살고 있던 전세도 다 넘겨 주고, 하꼬방 하나 얻어 내려 앉은 상태. 이런 상황에서 하정재는 억만금이 있으면 무엇 하나 건강이 더 중요하다면서 신앙 출발을 강하게 권고.
성격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자살을 하지 않겠나 생각했고 고향 부모도 그 성질에 죽으면 죽지 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걱정. 그 순간 ‘모든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깊게 깨달았고 부인을 따라 서부교회로 출석하며 신앙 출발. 그 빚을 다 갚는데 7 년이 소요.

- 신앙 출발
말씀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게 됨. 성경을 읽어 보니까 전부가 자신에게 꾸지람. 성경을 들고 읽다 보면 어떤 때는 새벽기도 갈 시간. 믿게 되면서 말술은 당장에 끊었으나 담배 끊기가 어려워 8 개 월을 고통하다가 겨우 해결. 예배당이 2 층 다다미로 되어 있던 때고 예배 때마다 교인들의 앉는 자리를 앞으로 당기라 좁혀라 할 때. 4백여 명 교인이 되었을까? 목사님 사후까지 계속 살던 예배당 부근의 집은 동대신 1동 369번지, 360만원에 구입. 이 집을 사서 예배당 옆에 살 때는 이제 목사님 명령이면 죽을 수도 있는 시기.

3. 백 목사님 지도

- 개인 인상
목사님은 평소 복장 하나에서도 흐트러짐이 없고 신앙 어린 우리를 대하는 자세와 방법에서도 자상하면서 위엄. 말씀을 많이 하거나 자주 하지 않으시나 한 말씀을 하면 그 권위와 능력 앞에 압도를 당하게 됨

- 예배당 건축
1969년에서 1970년에 이어 진 예배당 건축은 그 동안 사용하던 예배당이 과거 일제시대의 다다미 2 층 집이어서 이를 헐고 시작. 현재 서부교회의 강단이 있는 본당 중앙의 3 층만을 건축. 건축 허가를 받던 시기의 부산 시장은 1969년 4월까지 근무한 부산시장 김대만 재임 기간. 당시 본인은 공직을 사직하고 건설사인 주식회사 오성토건의 상무이사(동대신동 조흥은행 뒤편). 예배당 건축이 1층 스라브를 올리고 삿보도로 괴었을 때 갑자기 부산시에서 허가 취소를 통고. 예배당 입구 쪽 주택 주인이 육군 준장으로 당시 항만조정위원장인데 교회와 그 주택 사이의 골목 때문에 건축허가가 취소. 교회로서는 불하를 받아야 했고 주택 소유주는 교회를 압박. 당시 항만조정위원장은 실질적으로 부산 대구 경남 지역의 정보를 집결하던 특수기관 역할을 하던 곳이어서 대단한 권력가이며 상권까지 다 가지다시피 한 정도.
교회로서는 이 상태에서 그 골목을 불하 받는 것이 해결책이며 그 골목은 당시 서부산세무서가 관할권을 행사 중. 백 목사님은 세무서장을 만나기 위해 강상녕을 불렀고 세무서 윤 서장은 또릿또릿한 인물. 당시 강상녕의 근무 회사가 서부산세무서 관할인데 기업하는 사람은 당시 세무서 직원 앞에서도 떠는 정도고 서장실은 감히 가지도 못하는 곳이나 목사님 연락을 받고 바로 동행. 목사님은 걱정을 하시는 듯 ‘가도 괜찮은가’ ‘가겠습니다.’
서장실의 여비서에게 ‘서부교회 목사님이며 서장님 면담하러 왔다’고 했고 용건을 물어서 서장님께 직접 말한다 했는데 당시 목사님은 머리를 깎고 계실 때. 대화 중인데 막 육군 준장이 선글라스를 끼고 면담하러 온 목사님을 보며 휙 나가 버림. 세무서장이 그에게는 자기 자리를 양보하고 대화하는 정도. 목사님께서 불하 문제를 말하며 교회가 필요하다고 좋게 말했으나 그는 관할은 서부서로서 조사와 의견은 가질 수 있으나 부산지방국세청의 상신이 필요하다면서 연구해 보겠다 하고 빠짐. 양 쪽 사이에서 입장이 곤란해 지니까 이후 병원에 입원. 2 - 3 일이 지나 뒤 목사님은 다시 부산청 김영일 청장을 만나러 갔고 당시 보수초교 옆 중부세무서가 당시 부산지방국세청. 그는 후에 대신증권전무가 되고 복음을 받고 장로 되었을 것. 목사님 모시고 청장실에 들어 가자 당시 청장은 무좀이 있어 세수대야에 발을 담그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소파에 앉으면서 한 말씀을 하심 '여보세요, 이 자리가 당신 사랑방인 줄 압니까' 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한 마디를 하자 그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양말을 신는 등 허둥. 불하 관계로 대화가 접어 들자 옆에서 볼 때 감정 대치로 볼 만큼 불꽃 튀는 논쟁. 결국 저 쪽의 답변이 시원찮음. 미리 요구를 받은 것이 있어 불하는 거절. 처음에 예배당을 뜯었을 때는 서대신1가 보건소 조금 위의 공터에서 예배.
때마침 고향 선배 한 사람이 청와대 민정비서관(현. 수석)이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김종필 측근. 부산 출장 중 동광동의 고급 여관 호산장에 있으며 저녁에 불렀고, 그는 술을 즐기는 사람이나 강상녕은 말술을 먹다 끊었으므로 다른 대화는 적었고 자연스런 기회였으므로 교회 건축 문제를 상세히 짚으며 국가행정의 난맥을 지적. 당시 청와대 감사에서 향후 마산시장 안재흥(68.5.1-70.12.4.)의 인책 가능성과 부산의 법인세과 재갈 과장이 파면 등의 징계가 진행 될 사안이 적히고 지방국세청장까지도 영향을 받을 감사 결과가 출장 복명서에 적히는 상황. 한 편으로 백도광 장로님은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 말이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 얼마 후 부산시장은 건설국장을 보내어 건축허가를 내주고 부산시장은 떨고 건설국장이 목사님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함. 당시 백도광 장로님의 막후 활동 지대.
건축 취소가 번복 되는 일은 몇 달이 계속 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 교회 건축 일 후에 목사님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적 심부름을 자주 부탁

- 아내와 막내 출생
1976년 아내 하정재 집사님이 갑상선 발병. 당시만 해도 생소해서 부산의 병원을 다 찾아 다님. 서면 변 내과에서 처음으로 갑상선으로 진단했는데 부산대병원도 원인을 찾지 못할 때, 최하진 박사가 인제병원 원장 한 사람으로 의사 개업하며 우리가 첫 환자가 되었고, 서울로 가라 하면서, 이상종 삼성강북병원(구.고려병원) 의사가 이병철 주치의이며 그 병원은 삼성 임원들도 밀려서 못 받는다면서 미리 부산에서 쪽지를 주면서 간접 전달하면 안 되고 꼭 바로 전달하라고 부탁. 최하진 박사의 편지를 받아서 간호사에게 전달하니까 10분 후에 바로 들어 오라 했는데 당시 복도에는 환자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바로 들어 가는 사람이 있다고 떠드는데도 그냥 진찰. 그리고 입원 조처후 검사 진단하자고 했는데 당시 검사도 어려운데 입원은 더 어려운 상태에서도 그 의사는 원무과장에게 전화를 들고 입원을 지시하고 대답도 듣지 않고 끊어 버림. 최하진 박사와 두 사람이 학교 친구인데 그렇게 가까운 사이. 당시 무궁화 다섯개 호텔 비용이 들어 가는 특실을 바로 비워 주며 1주일 입원 후 갑상선 약물 투약. 그러나 살지 못하겠다며 사형 선고를 받았고 부산으로 내려 왔으며 약물 때문에 이전에는 바싹 곯았던 사람이 고도 비만 상태. 아내도 다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겼는데 목사님께서 '근대 의학으로 해 볼 만큼 해 봤으니까 이제 기도하자고 하시면서 내가 한 가지 처방해 줄 테니까 그대로 하라 하시면서 프라즈마네이트 혈청 대용 500cc를 1주일에 한번씩 맞게 하였고 음식을 못 먹고 있으니까 목사님이 잡숫는 곰탕을 보냈는데 그 곰탕이 입에 안 맞는 사람은 먹기 어렵다 하시면서 빨대를 주면서 빨대로 먹으면 맛을 모르고 바로 목으로 넘어 가니까 일단 먹어야 한다고 해서 주심. 탄약도 좀 먹어 봐라 해서 중구청 뒤의 회창한의원 김명돈 한의사, 지금은 아들이 잇고 있는데 그 곳에서 한약을 먹음. 목사님께 기도를 받고 시키는 대로 했는데, 6개 월만에 링겔 떼고 나음.
일단 병은 나았는데 왠지 사람이 시들하여 기력 회복이 안 되고 있자 다시 5층으로 부르심. 그때 전국은 국가 시책으로 남자들의 불임 수술인 정관수술이 한창이며 정부에서는 이제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 낳아 잘 기르자고 구호할 때며 3명 이상 자녀는 근로소득 감면 혜택도 제외할 때. 목사님은 귀속말로 정관수술 했나 물으셨고 안했습니다 대답하자 그러면 회복하는 길은 아이를 하나 낳는 것이 가장 빠르다, 아이 하나 낳도록 힘을 쓰라. 이미 낳아 놓은 자녀가 다섯이어서 그만하면 많은데도 순종하여 막내 성진 출생. 얼마 후에 아이를 가졌다고 말씀을 드리지 목사님은 또 다시 어려운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께서 둘 다 살리면 기적인데 둘 중에 하나는 희생할 생각을 가져라, 아이가 제대로 살지 못할 줄 알라는 뜻으로 들었고 그대로 순종했는데, 진해로 출장 가고 없을 때인데 집에 전화하니까 산기가 있다 해서 메리놀 병원 입원, 입원 수속에 의료카드가 부부 2명과 아이 5명으로 이제 6명이 되었는데 또 출산을 하니까 간호사들이 구박하는 정도, 하나님 은혜로 순산, 78년생 7월 1일. 발병은 76년 77년, 상당히 오래 동안 고생했고 출산하고 이후 산모와 아이가 너무 건강. 상황이 심각하여 장인이 사위를 불러 포기하라고 한 정도, 살 사람만 살라고 하심.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지요.

- 장유 묘지
예배당 건축 취소 건을 살리는 일 이후에 교회의 외무 등으로 목사님의 심부름. 관리인 서영수 씨의 장난으로 공원묘지가 취소 단계. 당시 남해 고속도로 서부산 노선이 신설 되면서 묘지를 지나가는데 목장은 몰라도 공원묘지는 경관에 적합하지 않아서 허가 취소를 한다는 말이 나올 때. 목사님께서 예방을 위해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했는데, 본인은 진농과 경남도청 출신이어서 국과장 등에 선후배관계가 많음. 경남도청은 진농이 4-50프로, 간부는 60프로 정도에 특히 산업국이 많고 산림 쪽에는 거의 다라 할 정도. 진주농업학교에만 임업과가 있었기 때문. 목사님께 말씀 드려 식목일에 묘지에 나무를 심어 해결하도록 건의. 허락이 있어서 이후 동래구청 서구청 등으로 묘목을 5천본씩 얻어 해결. 당시 전국토의 식목운동이 전면적으로 펼쳐 지고 있어 묘목을 구할 수 있었음. 종목은 소나무 편백(리기다)이었고 몇 년을 심어서 조금 숲이 형성. 당시 허가는 경남 허가고 과장이 1년 선배, 계장이 후배 등이며 교회의 묘지관리 책임자로서 늘 접촉. 지자체인 김해 산림과 담당은 동기 동창. 묘지는 처음부터 허가를 받고 시작했으나 중도 취소가 가능한 경우.

- 회계
교회의 건축 연보가 있게 되면 계수사무가 전문이고 마지막 보고를 하고 가야 적성이 풀리는데, 어떤 때는 구역별로 현금과 약속을 다 맞춰야 하는데 나중에 연보봉투 다 맞추다 보면 밤 1시를 넘길 때도 있음. 한 번은 5층에서 살짝 내려와 보시고 사과 하나를 손수 깎아서 과일 칼로 찔러서 '이거라도 먹고 해라' 하심. 밤중에 내려와서 챙겨 주신 '그 감회'는 평생 잊지 못함.

- 장로 장립
1980.3.4. 이춘영 황길태 강상녕 박영태 김기수 백도광 장로님과 함께. 받지 않으려 버텼으나 꾸지람. 당시 서부교회 신앙 생활은 말씀과 실행 그리고 순종 등이었지 다른 생각이나 주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장로라는 직책이 뭐었인지 몰랐고 또 스스로 인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버텼는데 불려 가서 꾸지람, 집사람도 하나님께서 좋은 직분 주셔서 충성하라 하는데 거역은 안 된다는 입장. 부르신 목사님은 아주 간단하게 '하나님께서 직분주실 때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간단한 말씀 하나로 종결. 여러 말씀 하지도 않았고 우리는 그렇게 순종하던 시절.

- 꽃마을 기도실
1982년 편찮고 난 뒤 기도실 관리를 맡겨 방마다 열쇠를 다 가졌고, 밤마다 기도실 출입

- 1982년 상황
1981년에는 기차까지 준비하고 부산역에 대기했다가 못 가게 되었고 1982년에는 백 목사님이 전체 장로에게 한 말이 있었다는 질문에 대하여 기억이 없고

- 목사님 대접
목사님께 절대 순종이었는데 그 어른의 인품 그리고 개적으로 너무 자상하시고. 처음으로 자가용 포니2를 샀는데, 당시 목사님은 포니1 1741호 검정색이었으며 첫 머리를 종에게 드린다는 신앙 때문에 목사님 모시고 시승. 면허증이 없어 기사를 고용할 때. 밖에서 외식을 모시려고 계획을 잡아 송도 아랫길 점심 맞춰 식당으로 들어 가는데 식사 대접을 말씀 드리니까 끝까지 고마 가자 고마 가자 해 서 결국 돌아 오게 됨. 아무리 심정을 말씀해도 5층에서 밥해 놓고 기다린다면서 거절하여 교회로 모시고 옴.

- 집회 버스 대절
목사님께서 집회에 몇 대를 준비하라 하시면 무조건 예 하고 나서 맞췄지 다른 질문이나 말이 필요 없었다. 당시는 관광버스회사가 없었고 차량이 적어서 어려웠다. 그래도 어디 가서든지 차를 모아 와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고 다른 마음 먹어 본 일이 없음. 백 목사님 장례에 83 대, 그리고 집회는 최고 88 대로 기억,

- 교회 광고 책임
7 - 8 년 정도 예배 광고 위원. 감사 제목이 많아 져서 1년 광고물을 다 모아서 책자로 제본하여 목사님께 드림

4. 백 목사님 사후

① 장례식

- 백 목사님 묘소
목사님 장례 때 묘소를 확보한 것은 장지를 기도처 만든다 해서 사명감으로 했는데, 봉군을 크게 하는 문제가 생김. 본인은 원래 봉군을 직경 2미터 높이 65센티로 설계했는데 규모가 너무 커져서 묘지 조성 사업에서 빠짐

- 이재순 청빙
모든 장로님이 동의. 본인에게는 이말출 권사님이 전화가 와서 동의. 당시는 청빙이라는 말도 또 청빙 절차도 서식도 있는지 몰랐고 그냥 도장 찍은 것. 이재순 목사님과 인사하고 인천 교인에게 인사해야 한다고 해서 강상녕 장영목 두 사람이 지정이 되어 함께 가기로 했는데 왜 두 명이나 갈 것인가 해서 주저하자 혼자 가라 해서 간 것. 교인 대표들과 예배 형식으로 시작하고 회의가 이어 졌으며 목회자 이동에 대하여 교인들의 반대 의견이 있었으나 이동 자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님. 회의 끝에 서부교회 대표로서 '고맙다' 인사.
서부교회에 부임하자 비디오로 예배가 계속 되었고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평소 배웠으므로 몇 번 건의했고 이후 틈이 생겨진 것. 대화를 요청했으나 서로의 불신이 많아서 목회자와 교인의 대화라 하기 어려웠음. 비디오 예배에 반대했던 교인들 중에서는 예배 시간에 앰프를 폭파하자는 주장도 나올 정도.

- 비디오 재독
교훈 교육적으로는 지금도 개인적으로 테이프를 듣는다. 고신의 증경 총회장을 전전주에 만나서 목사님 사후 공회 안부를 묻고 백영희 목사님처럼 영적 깨달음 가진 분이 드문데 왜 사후 사분오열이냐 해서 부끄러워 할 말이 없는 정도. 그 분이 영적 깨달음은 백영희 목사님, 사상적으로는 아현 김현봉 목사님, 그리고 이병규 목사님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분이라고 표현.
2006년 필라델피아 이용걸 목사님 교회 예배 드린 적이 있었고, 한 곳을 개척한다고 해서 갔는데 그 곳 합동측 원로 정문호 목사님이 백영희 목사님 얼굴은 못 봤는데 들어보고 교훈을 접해 보고 또 설교록을 몇 번 봤는데 반 세기에 그런 깨달음 가진 사람이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다, 왜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었는가? 안타까워 함

② 남정교회 개척

- 개척 이유
서부교회 탈퇴는 이재순 목사님의 비디오 예배가 문제였고

- 남정교회 분리와 재산 정리
서부교회와 분리하면서 가장 골치 아팠던 것은 꽃마을 기도원 처리 문제. 구입할 때 이경순 이복순 명의, 이복순 돌아 갔고 서부교회와 남정이 나뉠 때 양 쪽 두 사람씩 대표를 냈는데 서부교회는 구의남 서문행 장로님이고 남정교회는 성정수 손성준 장로님. 2:2 협상이 계속 되어도 결론이 나지 않으니까 백영익 목사님이 나를 불러 챙겨 보라 해서 중부산등기소 앞의 백양다방에서 만나 양측 협상 결론. 그 동안 남정교회 대표는 서부교회 전체 재산 총 평가하여 2분의 1로 가리자는 것. 이 상태에서 협상이 될 수 없어서 이런 주장은 협상하려하는 것이 아니고 갈 수가 없는 길이다, 서부교회 건물을 누가 팔 것이며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안 된다, 그래서 서대신동 사택과 꽃마을 기도실 1백 평과 괴정동 옛날 목사님 목장하던 1846평 3 가지만 남정이 갖고 끝내자고 했다. 양산동 기도실은 서부교회가 모체니까 모체가 가지도록 하라고 했다. 그리고 제일합동공증사무소에서 공증하고 끝내 버렸다.
계약에 부가적으로 적은 것은 장유묘지는 함께 사용하도록 한 것. 공증을 서로 받아서 돌아 가서 구의남 서문행 돌아 가니까 이상원 장로님이 난리가 나고 너희가 강 장로에게 속았다고 하지만 이미 공증은 끝남. 남정교인들로서는 잘 됐다고 평가

- 남정교회 개척
서부교회에서 나와서 예배 드릴 때 장로 9명. 이동근 목사님의 담임 거론이 있어 재직회 때반대 발언. 이유는 남정교회 출발할 때 어디까지나 우리는 절차 밟아야 했음.

- 백영익 목사님
목사님 생전에는 어떤 분인지 어떤 위치인지 모든 면에서 몰랐고 교훈이 백목사님과 같다는 소문. 달리 교역자가 없어서 백태영 목사님 추천으로 왔을 것.

- 공회 재산 투쟁
1989년 이후 거창 이재순 배종일 전재수 백영침 몇 분이 강 장로님 집에 와서, 교단 등록 자체를 파악해야하겠다면서 서부교회가 공회 발상지인데 서부교회 등록을 물어서 찾아 보니까 인천시 동남구청에 원부가 있었고, 그 주소 관할 때문에 인천에 표시가 된 것. 그래서 대표자 정리를 할 때 강상녕 직접 처리. 6번이나 인천으로 직접 가서 정리. 1989.8.27. 목사님 돌아 가시고 그 다음 총공회장 백태영 목사님 취임하고 또 백영침 목사님 취임까지 정리한 것. 재산 문제로 소송할 때 백영익 목사님 계시던 남정교회 시절인데 이에 개입하지 말라는 지시로 묵비권 행사

- 남정교회 전재수 목사님
남정교회 개척 시 백영익 목사님을 모시고 1990년부터 은혜롭게 잘 나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1993년 6월 말까지만 계시고 떠난다면서 다른 사람 구해라 했는데, 교회로서는 설마 후임 없는데 가겠느냐는 생각에 후임을 구하기 위해 교역자회가 개최 되는 거창 대구를 방문하여 교역자회 때마다 다녔는데, 거창에서 개최 된 교역자회에서 백영침 목사님이 사회를 봤고 전재수 목사님을 거론하자 순종하겠다면서 바로 응락. 당시 교회로서는 후임 청빙 순서에서
배종일 목사님이 1 순위였고 전재수 목사님이 3 번. 사회자의 거론에 전 목사님은 두 번 말 없이 바로 일어서서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일어 섰는데 인상이 좋지 않았음.

- 남정교회와 부 교역자
(백광진)
전 목사님은 부교역자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강 장로님은 부교역자가 와서 뿌리를 내리면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면서 반대 의견. 당시 백광진 목사님이 미국에서 왔을 때, 강 장로님은 결국 잠실동으로 갈 사람이니까 부목으로 모시자 하니까 전 목사님이 강하게 반대. 백광진 목사님을 모시는 것을 위협으로 느낀 듯

(유재룡)
남정교회에 와서 남정교인들의 생각에서 받아 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넓었음.

(장봉만)
전 목사님과 장 목사님은 두 사람이 직접 연락이 되어 남정 내려 오겠다고 되었는데, 그 약속 뒤에 백태영 목사님이 알게 되어 난리, 가기는 가나 그래서 안 된다 하여 꾸중도 듣고, 뒤에 내려 왔다가 전재수 목사님 병 난 뒤에는 장봉만 목사님과 서로 등을 댄 것, 장봉만 목사님이 내려 온 것은 원해서 온 것

(교역자들의 문제점과 제도)
법은 범죄자 때문에 필요하다는 말처럼, 남정교회가 행정처리를 할 때 늘 남의 법으로 하는데 공회의 다른 큰 교회도 마찬가지. 어느 교회 장로님들이 전화 와서 질문한 적이 있었고 공동 인식으로 제도가 있어야하겠다는 것과 교역자들이 너무 마음대로 한다는 점을 공감. 교회 운영에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 교역자들이 필요할 때는 법과 제도를 사용하고, 불리할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 공회를 정리하려 한다면 서울공회 헌법에 보면 총회적 헌법에 신조가 나오고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과 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이 나오는데, 이것을 제도권 안에 집합해야하지 않는가. 행정이 교훈에 앞서 가서는 안 되지만, 교훈이 마음대로 행정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 교훈과 행정은 함께 움직여야 한다.

③ 서정교회 개척

- 서정교회와 헌법 필요
남정교회를 개척한 후 공회의 교역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모두 공신이고 다 잘났는데, 이럴 때는 제도를 만들어 제도권에서 운영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헌법제정 문제가 나왔는데, 백영침 목사님이 기초위원장이 되었고, 헌법은 다른 교단에서 다 빌려 왔고 몇 가지는 수정했는데 당시 원로들의 연령을 고려하여 원로목사직을 20년 대신 15년으로 조정한 정도. 그런데 당시 헌법문제로 비원교회에서 갑론을박하게 되고 신도관 김영웅 목사님이 반론제기.
목사님 생전에 교회가 8 - 90 개가 되고 교역자 배출이 많았고 배종일 목사님이 교회 행정을 맡았던 79년에 헌법의 기초안이 제출 되었고 목사님 생전 마지막 순간 이영인 목사 김상수 장로님의 헌법 추진도 있었는데, 목사님 사후에는 대구공회가 헌법 제정 문제로 비원교회에서 의논하고 사회 보던 백영침 목사님이 4층 사택에 두 번 올라 간 것을 다시 모시고 와서 반대 가운데 헌법을 끝냈는데,
취지는 서정을 제도권 안에 묶자, 사람은 허물이 많다, 목사 못 믿겠다, 백 목사님은 영적이며 말씀으로 다스렸고, 이제는 다스릴 사람 없다, 제도권이 필요하다 해서 만들었고,
대구공회는 헌법 반대가 그 출발의 시작이었고, 헌법 제정에 있어 전재수 목사님이 제일 반대

- 시무투표
헌법으로 말하면 교인대회인데, 지금 생각하면 시무투표가 좀 원시적. 지도자의 역량이 충분할 때는 법은 결국 실력이니까 실력자가 있으면 법은 뒤 전이 되는데, 지도자가 실력이 없을 때는 법으로 해야 하는 것, 목사님 생전에는 장로교 헌법도 모르고 그냥 한 것, 하라니까 하고, 외우라 해서 외운 것,

- 싱가폴의 수준
싱가폴을 갔을 때 이광요 총리 은퇴 후인데 법원에 가보니까 소송이 별로 없어서 문이 닫혀 있음. 재판할 일이 없다는 것. 이 총리의 실력으로 질서가 잡혀 있고 통치권자의 통치를 국민이 신뢰를 하니까 범죄가 없음. 우리처럼 법원 옆에는 자동차 댈 곳이 없고 변호사 사무실과 브로커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 그 때 저 옆에 누가 비서 한 사람 데리고 집게 하나 들고 비닐 봉지 들고 쓰레기를 짚고 있는데 저 분이 이광요 총리라고 함

- 서정교회 현황
장봉만 목사님 후임을 안에서 찾지 않은 것은 서정교회 장로님들이 총회적 교역자들을 아예 신임하지 못한 상태. 공회 전체 목회자 전부가 시야가 너무 좁고 너무 치우 친다고 해서 불신임하여, 차라리 해외를 경험한 목사님을 모시려 한 것. 이해봉 목사님이 시애틀에서 교회를 사서 증축하고 헌당할 때 강상녕 장로님이 대표로 갔다 왔으며 지금은 공회 목회자 전부를 부정한 것을 회개,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님.
시애틀에 가니까 교인들이 28명인데 주먹들이 나올 정도여서 함부로 말할 수 없을 정도.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고, 분위기가 좋아 졌을 때 청빙 문제를 거론해서, 한국 와서 1등 목사님 만들어 돌아 올 것이라고 했는데, 성사. 시애틀의 후임자는 이희덕 목사님. 모두 동서 목사님으로 첫째 조순길, 둘째 이해봉, 세째 이희덕 목사님. 마침 이희덕 목사님은 개척을 하려다 화재로 가족만 있어 후힘 부임에 자연스러울 때

④ 총공회 통합

- 공회의 통합
현재 부공2 대구공회 서울공회 등 3개 공회가 실제로 다 법대로 하고 있는 것이니 통합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장로님은 법은 만인평등이라는 적용이 항상 필요한 것이며 세계적 추세도 개교회주의인데 교훈 기치 아래 모이자 하고 교역자들끼리 손잡으면 교단 운운할 것도 없이 하나 될 수 있는 것. 서로 이해한다면 하나의 공회가 되고 한 공회 내의 노회별 운영하면 가능한데, 교역자들이 마음 문을 열지 않는 것이 원인, 사욕 없이 받은 교훈 태두리 안에서 사심 버리고 나서면 통합 되지 않을까 아쉬움 가짐
2001년 장봉만 목사님 돌아 가시기 전에 공회간 통합 이야기가 있어 타 공회나 공회적 인물들과 몇 차례 회동. 그 때 노곡동 기도원 일부가 도로 편입 될 때 대구 거창 기도원에 대한 제안이 나왔고 5월과 8월을 한 곳으로 모으자는 말이 있었고, 방법론이 거론 되었는데 본인은 기도원 재산을 법인화하자고 제안. 법인설립에는 부동산을 자본금으로 편입할 수 있으니 목회연구소도 그 곳에 짓고 대구 것을 거창으로 옮겨서 지금 공회 산하 흩어 진 교회들이 집회를 해야 하는데 같이 못한다면 이용하는 사람이 수수료 내고 하자고 한 것. 법인 관리는 공동관리가 맞고, 이것을 갈라서 나누면 나누기도 어렵고 피비린내 날 문제, 몇 차례 만났고 장봉만 목사님도 만났고, 배한수 목사님도 온 적이 있었으나 걸림돌은 재산을 현실적으로 관리하는 측의 입장 때문에 좌절. 흩어진 목회자들을 파악했으나 여론을 들어 보니까 어려움. 기도원이라는 물질 문제 가지고도 의견이 모여 지지 않는데 공회 자체가 합하는 것은 안 되겠다고 느낌.

- 2007년 이후 공회 통합 운동
이경순 사모님 장례 후 공회 통합 이야기가 나왔고 금년 봄엔가 다시 연락이 와서 제3자를 동석하고 회동. 15년에 시도 된 제안과 흡사하여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부정적.

- 공회의 세습 문제
아직까지는 민주정신이 흐려서 그런지 몰라도 세습은 우리의 정서는 아니다. 잠실동의 후임 인계도 불합리한데 비원교회도 같은 현상이 있을 것 같아서 강상녕 장로님과 배한수 목사님 두 사람이 법 앞에 공평하게 하자, 헌법기초위원장으로 은퇴하고 후계자를 오해 없도록 조처해 달라고 요청하여 수용.

- 철새와 원주민
해외 관광을 가 보면 원주민들과 철새 주민의 차이를 느낀다. 요즘은 자꾸 원주민을 생각한다. 원주민은 우선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나 과거 전통을 살리려고 의욕을 가지며 가족을 희생하며 전통을 유지하려 하는데 철새는 먹이만 찾아 다니다가 먹이 없으면 그냥 끝남. 원주민은 피골 상접해도 끝까지 지키려 하는 자세

되돌아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칩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말씀 따라 연수의 자랑은 수고 슬픔뿐이라는 말씀이 너무 실감 나고 내가 나 된 것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요 지도자의 기도와 영적 교훈의 소산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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