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석 - 애양원교회 신앙뿌리를 가지고 호남지방 총공회교회를 시작시킨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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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1.백목사님의 애양원 1차 방문
1947년 1월 30일 목요일 오후 5시30분 당시 백영희조사님은 애양원교회 손양원목사님을 거창도사경회 강사로 청빙키 위해 순천을 출발 신풍역에 하차합니다. 이곳은 서천석목사님 자형이 되는 애양원 서무 과장 차장로님과 그 부인인 서천석목사님의 누님 서귀덕집사님이 있는 곳입니다. 백목사님과 애양원교회 그리고 서천석목사님 집안과의 연결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2.손목사님 사모님과 서귀덕집사님의 교회 개척
1951년, 손양원목사님 사모님은 손목사님 순교직후 애양원교회가 신사참배찬성측 총회로 방향을 잡는 것을 보고 고려파로 개척을 하게 됩니다. 의지할 교인이 단 한 사람이었으니 그가 바로 서귀덕집사님이었습니다. 남편은 애양원 실세이며 그분은 여전히 애양원측에 남게 되고 부인은 손목사님 사모님을 따라 개척하게 됩니다. 시골 한 동네에서 제일 유지로 있던 부부가 이후 죽는 날까지 30년 넘도록 신앙문제로 교회는 달리 다니게 됩니다. 손목사님 사모님의 개척은 애양원의 신앙뿌리가 애양원외투를 벗고 신앙노선을 잇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백목사님은 부산에서 고신 소속으로 고신 부흥과 진리운동을 주도하던 때, 이곳은 호남 전체와 전국적 의미가 있는 교회로서 고신 소속으로 출발했습니다. 1959년 백목사님은 고신에서 제명된 후 그동안 전국적으로 신앙연결을 가졌던 교회들과도 최대한 소식을 끊고 개교회주의로 숨어버리고 남은 평생을 살게 되고, 이곳 손목사님 사모님이 세운 교회는 교권싸움에 매진하는 고신분위기를 걱정하다가 서울 김현봉목사님 교회로 연결됩니다. 김현봉목사님 사후에는 이병규목사님 소속 교회로 1970년대까지 백목사님과 무관하게 내려가게 됩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교회에 서천석목사님은 그 누님되는 서귀덕집사님이 부자였고 신풍에 살았으며 그 과수원을 관리하는 등 관계로 신풍에서 거주하며 교회를 출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교회 남반 기둥집사가 되어 진실되이 충성했습니다.
3.백목사님의 애양원 2차 방문
백목사님은 다시 한번 신풍에 있는 애양원을 방문하게 됩니다. 1961년 백목사님은 애양원교회 후임 서목사님과 주동 교인들에 의하여 부흥강사로 초빙을 받고 애양원교회를 한 주간 집회 인도하게 됩니다. 손양원목사님 뿐 아니라 여전히 애양원에는 백목사님과 일제 때부터 특별했던 관계를 가진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던 애양원이 위치한 신풍지역을 백목사님은 두번째 방문하게 되었고 백목사님의 이곳 방문으로 15년 후 이곳에 총공회 신앙노선의 교회가 출발하게 됩니다.
4.서천석집사님이 주동되어 백목사님 노선으로 소속하게 된 신풍교회
1)백목사님 집회 참석을 했던 분들이 주도하여 전 교인이 찬성
1974년 손목사님 사모님이 개척한 교회의 담임목회자 곽목사님과 교인들은 백목사님 집회등에 참석합니다. 주변에서 들어온 대로 과연 여기에 손목사님 신앙뿌리에서 출발한 신풍교회의 앞날이 있겠다고 판단하여 총공회 소속을 확정했습니다. 손목사님 사모님이나 서귀덕집사님 역시 오랫동안 백목사님과 단절되어 있었으나 집회를 참석한 사람을 통해 소속을 옮겨야 하겠다고 확신이 서자 교회는 소속을 문의하게 됩니다. 백목사님은 한 교인도 빠짐없이 전 교인 찬성이 있는 경우 소속을 허락할 수 있으나 단 한 사람의 교인이라도 반대가 있다면 그 교회를 포기하고 빈손으로 나와서 가입하라고 지도를 하게 됩니다. 즉시 전 교인이 찬성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2)진리노선 소속은 쉽지 않은 법, 큰 환란이 돌발
이미 전교인이 백목사님 노선으로 소속을 확정하기로 확정된 상태에서 주변 교역자들이 진리는 좋으나 교역자의 희생이 감당할 수 없이 크다고 만류하여 담임목사님이 입장을 번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담임목회자가 먼저 소개하고 시작한 노선소속을 스스로 번복하게 되자 대부분 교인들은 목사님 방향선회 자체를 의심하고 그대로 진행하게 됩니다. 자연 교회는 자체적으로 내분이 발생되고 강단에 있는 교역자를 교인들이 업고 내려오는 방법으로 반대하는데 이릅니다. 원래 이 교회는 개척 당시 고신으로 출발했다가 김현봉목사님 측으로 그리고 이병규목사님 지도를 받던 교회였습니다. 김현봉목사님의 최측근 이교부조사님도 중재에 나서는 등 한국교회 가장 보수측 범주에서는 전국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교부 당시 조사님은 아가동산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교주의 스승이며 '아가'라고 이름을 지어준 사람입니다. 백목사님을 포함 김현봉 이병규목사님 등을 모두 이단이라고 한국교계가 떠들게 된 배경에는 이교부조사님이 목회자들을 감금 폭행하여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그가 이단으로 정죄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부근에 있다는 사람들이 전부 이단으로 분류되는데까지 나가게 됩니다. 아가동산이라는 결실이 그가 나간 형태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1974년 총공회 가입문제를 두고 발생된 교회 내분은 결국 현재 신풍교회 내에서 사택 하나를 두고 양측 교역자가 함께 살림을 하는 데에 이릅니다. 사택은 가운데 부엌을 두고 양쪽에 방이 한칸씩 있는 스레트벽돌집이었습니다. 양측 교역자가 같은 부엌을 사용하며 양쪽 방에 나뉘어 6개월을 살았습니다. 다행히 담임목회자측이 개척하여 나가되 나갈 예배당을 양측 교인들이 함께 건축하는 것으로 뒷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공회관련으로 파송된 교역자가 손오용조사님이었습니다. 이 노선에 소속하느라 큰 어려움을 겪은 것은 진리를 알아서가 아니고 진리가 있는 것 같아서 찾아들어 가려는 노력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확할 듯 합니다.
3)1975년 신풍교회의 공회 가입
공회가입후 이재순목사님을 첫 목회자로 모신 신풍교회는 이목사님 재임기간이었던 1975-79년 특별했던 은혜를 가지게 됩니다. 그들이 사모했던 이상의 은혜가 넘쳤고 이 기간은 백목사님께서 총공회 다운 모든 현상을 다 볼 수 있는 제일 대표적인 교회라고 평가하는 정도입니다. 교인 중 제일 앞에 위치한 이가 서천석집사님이었습니다. 이재순목사님의 지도를 받아 서천석집사님과 그 아들 서원균선생님은 서부교회로 가게 됩니다.
4)서부교회에서 목회를 준비한 서천석집사님, 서원균선생님
서천석집사님은 남반 심방을 맡는 권찰로 수년 수고하다가 남해 서상교회로 그다음 도평교회에서 은퇴하게 되며 아들은 중간반 초기 반사로, 서상교회를 아버지 후임으로 이후 순남교회를 맡아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 큰 아들 서원룡목사님은 잠실동교회 장로로, 백목사님 사후 동산교회 등을 거쳐 남산교회목사님으로 계십니다.
5.노년
백목사님 사후 도평교회에서 목회를 마치고 1990대 중반 모교회가 있는 신풍으로 다시 오게 되었지만, 현 신풍교회는 비디오 재독으로 예배를 드리는 우상교회라는 생각에 비록 예배당 바로 두 집 건너에 거처를 하고 있었으나 신풍교회에는 한번도 출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서천석집사님은 자신이 한번 각오한 걸음은 흔들리지 않는 분입니다. 신풍교회를 개척한 누님 서귀덕집사님 역시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애양원내 위치가 지대했으나 30여년 한 집에서 살면서 교회만은 분리할 정도입니다. 이분들의 진리에의 이런 특심한 열심이 오늘 신풍교회가 일반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총공회 내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신앙노선주의로 걸어가는 교회로 나가는데 분명히 연결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현재도 신풍교회의 주력 교인들 대부분은 이분들의 전도와 지도로 초기 신앙과 그후 신앙 견지를 갖게 된 경우입니다.
결언:
한 사람의 개인사에 대한 것은 발표하는 것 자체를 스스로 극히 조심하고 또 이렇게 기록적으로 발표하는 것은 거의 없던 공회 분위기 때문에 서천석목사님의 임종은 평범한 한 목회자의 장례로 묻힐 것입니다. 그러나 서귀덕 서천석 두 집사님이 가졌던 이 복음, 이 진리에 대한 견집은 백목사님께서 특별히 새겨두었던 경우였으므로 이곳에서는 그분의 장례 소식을 들으며 이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요약해 보게 되었습니다.
1947년 1월 30일 목요일 오후 5시30분 당시 백영희조사님은 애양원교회 손양원목사님을 거창도사경회 강사로 청빙키 위해 순천을 출발 신풍역에 하차합니다. 이곳은 서천석목사님 자형이 되는 애양원 서무 과장 차장로님과 그 부인인 서천석목사님의 누님 서귀덕집사님이 있는 곳입니다. 백목사님과 애양원교회 그리고 서천석목사님 집안과의 연결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2.손목사님 사모님과 서귀덕집사님의 교회 개척
1951년, 손양원목사님 사모님은 손목사님 순교직후 애양원교회가 신사참배찬성측 총회로 방향을 잡는 것을 보고 고려파로 개척을 하게 됩니다. 의지할 교인이 단 한 사람이었으니 그가 바로 서귀덕집사님이었습니다. 남편은 애양원 실세이며 그분은 여전히 애양원측에 남게 되고 부인은 손목사님 사모님을 따라 개척하게 됩니다. 시골 한 동네에서 제일 유지로 있던 부부가 이후 죽는 날까지 30년 넘도록 신앙문제로 교회는 달리 다니게 됩니다. 손목사님 사모님의 개척은 애양원의 신앙뿌리가 애양원외투를 벗고 신앙노선을 잇게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백목사님은 부산에서 고신 소속으로 고신 부흥과 진리운동을 주도하던 때, 이곳은 호남 전체와 전국적 의미가 있는 교회로서 고신 소속으로 출발했습니다. 1959년 백목사님은 고신에서 제명된 후 그동안 전국적으로 신앙연결을 가졌던 교회들과도 최대한 소식을 끊고 개교회주의로 숨어버리고 남은 평생을 살게 되고, 이곳 손목사님 사모님이 세운 교회는 교권싸움에 매진하는 고신분위기를 걱정하다가 서울 김현봉목사님 교회로 연결됩니다. 김현봉목사님 사후에는 이병규목사님 소속 교회로 1970년대까지 백목사님과 무관하게 내려가게 됩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교회에 서천석목사님은 그 누님되는 서귀덕집사님이 부자였고 신풍에 살았으며 그 과수원을 관리하는 등 관계로 신풍에서 거주하며 교회를 출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교회 남반 기둥집사가 되어 진실되이 충성했습니다.
3.백목사님의 애양원 2차 방문
백목사님은 다시 한번 신풍에 있는 애양원을 방문하게 됩니다. 1961년 백목사님은 애양원교회 후임 서목사님과 주동 교인들에 의하여 부흥강사로 초빙을 받고 애양원교회를 한 주간 집회 인도하게 됩니다. 손양원목사님 뿐 아니라 여전히 애양원에는 백목사님과 일제 때부터 특별했던 관계를 가진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던 애양원이 위치한 신풍지역을 백목사님은 두번째 방문하게 되었고 백목사님의 이곳 방문으로 15년 후 이곳에 총공회 신앙노선의 교회가 출발하게 됩니다.
4.서천석집사님이 주동되어 백목사님 노선으로 소속하게 된 신풍교회
1)백목사님 집회 참석을 했던 분들이 주도하여 전 교인이 찬성
1974년 손목사님 사모님이 개척한 교회의 담임목회자 곽목사님과 교인들은 백목사님 집회등에 참석합니다. 주변에서 들어온 대로 과연 여기에 손목사님 신앙뿌리에서 출발한 신풍교회의 앞날이 있겠다고 판단하여 총공회 소속을 확정했습니다. 손목사님 사모님이나 서귀덕집사님 역시 오랫동안 백목사님과 단절되어 있었으나 집회를 참석한 사람을 통해 소속을 옮겨야 하겠다고 확신이 서자 교회는 소속을 문의하게 됩니다. 백목사님은 한 교인도 빠짐없이 전 교인 찬성이 있는 경우 소속을 허락할 수 있으나 단 한 사람의 교인이라도 반대가 있다면 그 교회를 포기하고 빈손으로 나와서 가입하라고 지도를 하게 됩니다. 즉시 전 교인이 찬성서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2)진리노선 소속은 쉽지 않은 법, 큰 환란이 돌발
이미 전교인이 백목사님 노선으로 소속을 확정하기로 확정된 상태에서 주변 교역자들이 진리는 좋으나 교역자의 희생이 감당할 수 없이 크다고 만류하여 담임목사님이 입장을 번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담임목회자가 먼저 소개하고 시작한 노선소속을 스스로 번복하게 되자 대부분 교인들은 목사님 방향선회 자체를 의심하고 그대로 진행하게 됩니다. 자연 교회는 자체적으로 내분이 발생되고 강단에 있는 교역자를 교인들이 업고 내려오는 방법으로 반대하는데 이릅니다. 원래 이 교회는 개척 당시 고신으로 출발했다가 김현봉목사님 측으로 그리고 이병규목사님 지도를 받던 교회였습니다. 김현봉목사님의 최측근 이교부조사님도 중재에 나서는 등 한국교회 가장 보수측 범주에서는 전국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교부 당시 조사님은 아가동산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교주의 스승이며 '아가'라고 이름을 지어준 사람입니다. 백목사님을 포함 김현봉 이병규목사님 등을 모두 이단이라고 한국교계가 떠들게 된 배경에는 이교부조사님이 목회자들을 감금 폭행하여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그가 이단으로 정죄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부근에 있다는 사람들이 전부 이단으로 분류되는데까지 나가게 됩니다. 아가동산이라는 결실이 그가 나간 형태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1974년 총공회 가입문제를 두고 발생된 교회 내분은 결국 현재 신풍교회 내에서 사택 하나를 두고 양측 교역자가 함께 살림을 하는 데에 이릅니다. 사택은 가운데 부엌을 두고 양쪽에 방이 한칸씩 있는 스레트벽돌집이었습니다. 양측 교역자가 같은 부엌을 사용하며 양쪽 방에 나뉘어 6개월을 살았습니다. 다행히 담임목회자측이 개척하여 나가되 나갈 예배당을 양측 교인들이 함께 건축하는 것으로 뒷마무리를 지었습니다. 공회관련으로 파송된 교역자가 손오용조사님이었습니다. 이 노선에 소속하느라 큰 어려움을 겪은 것은 진리를 알아서가 아니고 진리가 있는 것 같아서 찾아들어 가려는 노력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확할 듯 합니다.
3)1975년 신풍교회의 공회 가입
공회가입후 이재순목사님을 첫 목회자로 모신 신풍교회는 이목사님 재임기간이었던 1975-79년 특별했던 은혜를 가지게 됩니다. 그들이 사모했던 이상의 은혜가 넘쳤고 이 기간은 백목사님께서 총공회 다운 모든 현상을 다 볼 수 있는 제일 대표적인 교회라고 평가하는 정도입니다. 교인 중 제일 앞에 위치한 이가 서천석집사님이었습니다. 이재순목사님의 지도를 받아 서천석집사님과 그 아들 서원균선생님은 서부교회로 가게 됩니다.
4)서부교회에서 목회를 준비한 서천석집사님, 서원균선생님
서천석집사님은 남반 심방을 맡는 권찰로 수년 수고하다가 남해 서상교회로 그다음 도평교회에서 은퇴하게 되며 아들은 중간반 초기 반사로, 서상교회를 아버지 후임으로 이후 순남교회를 맡아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 큰 아들 서원룡목사님은 잠실동교회 장로로, 백목사님 사후 동산교회 등을 거쳐 남산교회목사님으로 계십니다.
5.노년
백목사님 사후 도평교회에서 목회를 마치고 1990대 중반 모교회가 있는 신풍으로 다시 오게 되었지만, 현 신풍교회는 비디오 재독으로 예배를 드리는 우상교회라는 생각에 비록 예배당 바로 두 집 건너에 거처를 하고 있었으나 신풍교회에는 한번도 출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서천석집사님은 자신이 한번 각오한 걸음은 흔들리지 않는 분입니다. 신풍교회를 개척한 누님 서귀덕집사님 역시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애양원내 위치가 지대했으나 30여년 한 집에서 살면서 교회만은 분리할 정도입니다. 이분들의 진리에의 이런 특심한 열심이 오늘 신풍교회가 일반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총공회 내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신앙노선주의로 걸어가는 교회로 나가는데 분명히 연결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현재도 신풍교회의 주력 교인들 대부분은 이분들의 전도와 지도로 초기 신앙과 그후 신앙 견지를 갖게 된 경우입니다.
결언:
한 사람의 개인사에 대한 것은 발표하는 것 자체를 스스로 극히 조심하고 또 이렇게 기록적으로 발표하는 것은 거의 없던 공회 분위기 때문에 서천석목사님의 임종은 평범한 한 목회자의 장례로 묻힐 것입니다. 그러나 서귀덕 서천석 두 집사님이 가졌던 이 복음, 이 진리에 대한 견집은 백목사님께서 특별히 새겨두었던 경우였으므로 이곳에서는 그분의 장례 소식을 들으며 이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요약해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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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8월 집회교재 - 솔로몬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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