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공회 자료

김응도 - 진리외길과 주관고집의 총공회 두 면을 가진 서부교회 초기 청년

인물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21.02.17
김응도목사님

면담:
일시: 1996.10.22.8:40-15:00
장소: 삼각산기도실 (서울시 종로구 구기동 245번지)

1.신상

생년: 1933. 11. 1.
출생: 평안북도 영변
성명: 눅1:1 뜻으로 이름

2.6.25전쟁

1950년 6.25 전쟁에 인민군으로 참전, 1951년 가을 거제도에 포로로 수용, 1953년 이승만박사의 포로석방 조처로 부산에 거주, 친구가 서부교인이었고 당시 자유당 치안국장인 문봉재의 누님되는 문봉례집사가 서부교회를 출석했으며 그 아들의 전도로 서부교회 출석.

수용수 석방 후 여러 다른 교회를 가본 것과 비교가 되었고 다른 곳에서 받은 느낌은 세상공부가 있어야 되겠다고 느껴졌으나 서부교회는 제일 성경 그대로만 전하고 인간 지식으로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기도하고 성경만 열심히 보는 신앙이 옳겠다고 느껴졌고 예수를 믿으려면 저렇게 믿는 것이 옳겠다고 판단되어 서부교회로 확정.

3.서부교회 신앙생활

백목사님 설교는 은혜로웠고 그 설교를 듣고 뭐든지 그대로 하는 것이 모든 생활. 생활은 장사를 주로 하였고, '대한셀룰로이트공업회사'에 취직했다가 25세에 목회 출발. 당시 목사님 거의 매주 집회 인도 때문에 출타하며 청년들이 설교 인도. 월요일 새벽을 주로 맡음, 철야기도를 하고 있으면 지나가면서 ‘새벽기도 인도해’그렇게 시킴.

1954-5년 남전도회 첫조직, 회장 박신한집사님 전도 부장을 김응도가 맡음, 주일 오전 예배 마친 다음 첫 노방전도를 나가는 날 비가 오기 시작했고 바로 나가자는 주장과 다음에 가자는 주장으로 실랑이, 백목사님 설교 마치고 2층에서 내려오다가 '가는 것이 승리!'라는 한 말씀을 던지고 지나침. 다음에 가자는 사람이 미안해 할 것 같으니까 빨리 지나치는 백목사님. 목사님 자신부터도 전도에 철저했고 전도를 계속하기 위해 몸이 아프면 예배당 앞에서 전도를 해도 계속했고 심지어 주일오전예배 시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도 전도를 위해 예배당 문 앞에서 두리번 하던 모습에서 깊은 인상. 집회 인도를 가도 전도지를 챙겨나가면서 '좀 전해야 화를 면하지' 혼잣말. 청량리교회에서 내수동교회까지 가면서 '주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외치며 가는 분이며 그 전도가 힘이 있었음.

4.연경과

1956년 백목사님은 서부교회 자체적으로 목회자 양성을 위해 청년들을 학생으로 '연경과' 과정 운영. 강사로서는 한동희조사님이 창세기, 장렬집사님이 총각으로서 교회사, 조직신학 이말출, 성경신학 나인숙집사님이 각각 맡고 백목사님께 지도 받아가면서 강의. 저녁에 한 번씩 강의하던 것을 '연경과'라고 이름까지 붙여 1년 1학기 과정으로 운영.

성경과목은 먼저 성경 8장을 연속 읽고 그다음 1장을 두 번 읽으면서 주어진 과제에 답을 적어가는 것이며 양심으로 정독을 하고 답을 쓰게 함. 과제는 고친 것, 고칠 것, 현재 고치는 것이 있었고, 기른 것 길러 갈 것 또 현재 기르고 있는 것을 적게 함. 또 만든 것, 만들 것, 만들고 있는 것 이렇게 주어짐. 각 장마다 큰 뜻 또 모르는 것은 마지막에 위에 과제에서 다시 시작시킴.

병원에서 사람을 고치듯 성경을 가지고 자기를 고쳐 나가게 하면서 성경을 깨닫게 하였고 성경에 대하여 많은 말씀으로 지도. 그다음 해 2학기를 다시 받아 나가다 민수기 정도에서 연경과를 중단. 이유는 행함이 없어 아는 것으로 교만을 우려.

5.가까이 뵙던 백목사님

1961년 제대 후 2개월 간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방석을 2개 챙겨 동아대학교 뒤 구덕산으로 다님.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기도할 것이 없어 눈을 떴다 다시 기도하는 반복 중에도 목사님은 일부러 위험한 바위를 택해 기도하는 모습, 해가 부산 앞 바다에서 떠오르기 시작하면 햇빛의 일부분이 목사님을 비취면서 그 모습이 천국의 햇빛 같아 보이고 하나님과 만물이 환영 고대하는 그런 모습으로 은혜.
기도 중에는 이남과 이북에 대한 국방 기도가 늘 있었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쭉정이지만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을 보시라는 기도

금정산 기도 중에 목사님 세수법을 볼 수 있는 기회, 원주 하종택목사님도 동행한 기도였고 비누를 사용할 때는 손에 물을 적시되 비누를 묻힐 수 있는 정도로 최소한만 우선 바르기 때문에 다시 비누를 놓아도 비누에 묻은 물기가 없어 비누 아래 부분이 조금도 녹지 않도록 하는 자세.

성경 찬송을 들고나서면 반드시 먼지를 닦고 어깨 밑에까지 바짝 당기는 자세, 찬송을 부를 때 늦게 오는 교인을 쳐다보지 않는 것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 찬송가를 다 외웠기 때문에 찬송가 없이 목사님을 따라 간 적이 있는데 목사님은 알아도 찬송가 책을 가지고 보면서 하는 것이 겸손이라 가르침. 그분은 찬송가를 부를 때도 부동자세로 떨고 보시니 그 모습에서도 은혜, 기도할 때 자세는 양쪽 엄지손가락을 맞잡고 다른 손가락도 전부 안으로 들어가도록 잡아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하심. 박영기조사님은 양손가락으로 꽉지를 끼는 형.

6.박영기조사님, 3대 부흥사

백목사님이 꼽는 한국의 3대 의인은 한부선선교사, 박영기조사님, 김현봉목사님이며, 고신의 2대 부흥사는 백영희, 박영기였고 3사람을 꼽으라면 김창인으로 다 전도사. 박영기 조사님은 십자가 외에는 전하지 않는 분인데 그는 십자가가 믿어지지 않아서 100일간 12시에 일어나 목욕하고 기도를 계속, 100일만에 시험이 되고 어려움이 왔으며 그 고비를 넘기면서 십자가 대속의 은혜만을 전하게 됨. 백목사님은 늘 같은 설교라도 새 깨달음이 있었고 그분은 노트를 들고 다녔으며 설교 내용이 동일했던 것이 달랐고 그는 후에 교회를 맡지 않고 집회만 다녔고 유랑객이 되어버림. 신학교를 다닐 시간이 없다며 복음을 전했고 부흥회를 수없이 맡았던 분이었으나 같은 내용만 가지고 다녔으며 나이가 많아지면서 영감이 없어지게 되면서 마지막이 아주 어려워짐. 박영기조사님의 한참 때는 가는 곳마다 눈물바닥이 되었으나 노인이 되어 신앙까지 함께 노쇠해짐이 백목사님과 차이.

7.목회출발

①1957년 25세에 고아원이었던 '경남소년학교'에서 예배 인도, 대예배만 인도하고 새벽예배는 서부교회서 계속 은혜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목사님께 부탁. 새벽기도는 송용조반사가 맡으면서 선원학교를 운영하던 목사님 집에 가정교사. 강경재집사님 남편 김응주목사님이 고아원으로 운영했고 그 아들 사무엘이 계대. 그 해 12월 예배 인도하러 가는 길에 병역기피로 분류되어 1958년 1월 육군 입대. 이어서 송용조반사가 후임. 정식 목회로 시작한 이는 백태영목사님. 백태영목사님은 원래 청량리교회로 최금주집사님이 원했으나 제대로 잡힌 것이 없어 부산에서 배우고 가야한다고 하여 선원학교로 오게 되고 대신 청량리교회는 송용조조사님이 정식 부임했다가 군 기피자로 입대.

②1962년 30세, 월급 500원으로 위산교회 조사로 정식 부임. 백목사님이 기도해서 보냈는데 그것이 바로 인허식이 됨. 25세때 선원교회에 고아원 교역자로 가는데 새벽기도만 은혜받도록 대신 갈 수 없느냐 해서 송용조 반사가 그 집에 가정교사를 하면서 새벽기도를 맡고, 그것이 송용조목사의 길이었다. 3살 아래고 신용인목사 소개로 뒤에 들어왔고 그랬다.

8.김현봉목사님에 대한 기억

①관악산집회

김현봉목사님이 인도하던 아현교회의 관악산 집회를 백목사님과 동행. 아직 백목사님이 조사님이었으나 안수를 먼저 받은 이병규목사님이 자꾸 붙고 배우려고 따를 때. 조사님은 아는 척하는 것이 없었고 풀밭에 자연스럽게 눕거나 대화를 통해서 가르침. 백목사님이 김현봉목사님에게 한번씩 질문할 때가 있었고 김현봉목사님의 물질관이 물질 개악설로 가는 것이라고 말을 했다가 김목사님이 싫어할 때였으나 또 질문. 김현봉목사님의 걸음은 청년이며 군인이었던 김응도가 기를 쓰고 따라가도 따라 붙지 못할 정도였고 그의 발은 아예 땅에 붙지 않을 정도. 한번은 사53:10의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성구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영혼이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를 김목사님께 질문하였고 김목사님은 '아는 것 실행하면 되는데 왜 묻느냐' 면서 회피. 김목사님은 옆을 보지 않으며 말이 없었고 앞만 보고 갈 길만 보고 가는 분.

②거창위산교회집회

거창 위산교회 집회가 있었고 백목사님은 김현봉목사님을 강사로 모시라고 하여 신도범조사님과 김응도조사님이 함께 아현교회 방문. 사택에는 당시 부자들이나 가지고 있던 콜라로 대접. 김목사님은 먹겠냐고 물어보고 예라고 하면 바로 주고 예의 차리면서 괜찮다고 하면 두 번 다시 먹으라고 권하는 일 없음. 식사도 마찬가지. 아무리 배고픈 사람이라도 안주면 다음에는 진실해진다는 생각. 차비를 줘도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어서 해당되는 구간요금을 동전까지 계산해서 떼어 지출.
집회 때 파리채를 들고 와서 쉬는 시간이면 계속 파리를 잡는 분. 살이 보일 정도의 삼베옷을 입었고 건강. 위산교회 집회 도중 강단에서 웃통벗고 하나님 주신 건강을 보라면서 자랑. 냉수마찰을 꾸준하게 하는 분으로 수건은 빨래해야 한다면서 돌로 수건을 대신하여 찬물로 몸을 닦는데 그 돌이 다 달아버린 정도. 강단에서 그렇게 웃통을 벗어 보인 것은 강단에서 의로운 체 하지 말고 생활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며 또한 강단을 우상시 하지 말라는 평소의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듯.

③영도벧엘교회집회

영도에 있던 벧엘교회에서 김현봉복사님 집회가 있었고 백목사님을 따라 갔을 때, 설교를 하다가 좀 쉬고 하자며 설교를 중단. 사택에 들어가서 먹고 쉬고 다시 하는 식. 그날 설교는 '아무 목사 그 목사가 요즘 믿는 일 하고 있나? 안 하지 아마! 믿는 일을 해야되. 요6:27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믿는 일을 해야 되.' 이렇게 그 내용이 쉬웠으나 그 설교들이 교인들에게 박히고 있었음. 설교도중에라도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데....' 하는 대목에서는 그냥 눈물을 주르르 흘렸고, ‘내가 혈기 하나 끊기 위해 40년 노력하고 있는데 여기 끊은 사람 있냐?’손들라고 했는데 드는 사람이 없자 '왜 못들어 양심이 간질간질해, 나는 40년 걸려 끊었어. 이렇게 믿는 일 해야 되.' 라고 설교했던 기억이 생생.

④교역자회인도

대구 주암산이나 삼각산에서 백목사님은 교역자를 대상으로 집회를 자주 인도. 김현봉목사님을 모셨을 때 그는 여반들을 다 참석시킴. 교역자만 모아놓고 할 말이 있는 법이지만 여반들을 불러 함께 앉혀놓으니까 이병규목사님은 반대를 잘했으나 백목사님은 그런데 마찰하지 않고 꼭 할 말은 뒤로 조용히 하심. 김목사님은 배우면 되지 여반 앉혀놓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책망. 동침문제가 있었고 김목사님은 동침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침. 김현봉목사님의 부인은 전혀 부부로 김목사님을 상대하지 못했고 김목사님은 아이 낳을 때 동침한 것만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가르침을 가진 분, 아이를 가지지 않고 낙을 누린 것은 다 죄라고 함.

9.백목사님의 교훈에 대한 강조면을 시대적으로 비교

백목사님의 1950년대 설교는 십자가, 고난 환란, 승리를 계속 강조했고 그다음은 진리와 영감을 많이 말씀. 그리고 물질 이치를 가르치는 순서로 나가다가 다시 진리와 영감을 가르친 다음 십자가 사활로 마지막을 맺음. 사직동교회의 이전 이름인 성은교회로 신도범목사님이 부임할 때 신명기 28장 설교에서 영의 이치와 도덕의 이치 그리고 물질 이치로 순서를 잡았고 영의 이치를 앞세워 도덕으로 나가고 마지막으로 물질 이치로 나가야되며 이것이 역순되면 안된다는 설교로 한 주간 설교.

(-2차 자료에서 계속)





김응도목사님,송종숙사모님
2006년 성탄 찬양
전체 1

  • 2021-02-20 14:28
    (계속) 목회 및 양성원 기타 - 06.9.2. 일부 보충


    1.기도생활

    신앙생활을 하던 처음, 새벽기도시간에 여반 한 사람만 출석. 다 산에 철야기도 갔다는 뜻. 뒤따라 산으로 쫓아올라갔고 백목사님이 잘 가는 기도 굴로 찾아갔으나 그곳에도 아무도 없고 그 굴 속에 혼자 기도하려 했으나 미진. 저녁이 되자 뱀 한 마리가 굴 안으로 들어와 땅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고 이후 뱀이 마음에 들어와 앉아 기도를 방해. 사자굴과 뱀굴이 같을 것이니 십자가로 죽을 결심하여 힘있게 기도하자 뱀이나가 버림. 만물의 영장인 나를 네가 어찌 물겠냐는 확신이 생김. 3일간 금식 기도. 한번은 지나가던 목사님이 기도하던 자신을 향해 '푹 들어가!' 한마디만, 짧게 크게 하고 지나감. 기도에 깊숙이 들어가야 함을 가르친 한 마디였으나 평생에 박힘. 선친이 일찍 사망하여 전혀 기억에 없고 서부교회서 만난 목사님은 모든 면으로 한 분 아버지가 됨.


    2.군생활에 대한 입장

    군대가지 않고 기피했던 청년들이 많았음. 교회 일군이 없었고 또 공연히 시간 허비가 될까 하여 목사님의 입장이 군입대를 피하게 하여 김응도 송용조 정경수 등 많은 이들이 후에 징집. 1960년대로부터는 연단을 위해 군 입대를 적극 지도하고 특히 당시로는 가장 고생이 심했던 해병대를 적극 추천. 군생활은 22사단 공병대대였고 파견 중대 서무계를 보면서 외출도장을 자기가 찍어 1년을 120리 떨어진 제천으로 예배출석.


    3.신학에 관심 많던 송용조목사님

    군에 징집되었던 송용조조사님이 제대 후 창동교회, 남천교회를 거쳐 서전교회. 그곳에서는 신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준비. 주로 영어에 몰두. 그는 이 복음이 세계 신학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 했고 연경반 등에서 권사님들이 우리 복음이 세계제일이라고 할 때 그는 신학과도 일치가 있어야 한다며 공부에 집중. 처음 미국 들어갔을 때는 백목사님을 한국의 선지자라고 자랑하였으나 두 번째 들어가서는 변함.


    4.결혼

    1957년 29세에 위산교회 부임, 목회 도중 30세에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전달. 결혼건이었고 목사님 결정이면 사람을 보지 않고 결혼하겠다고 순종. 3일간 양유 먹고 얼굴 좀 번들거리도록 하라 하여 쉬고 옷 하나 얻어 입고 결혼식. 일본인들의 주택용으로 지어진 예배당은 1, 2층으로 나뉘어졌고 그 1층에서 결혼식. 신부의 키가 작았고 신부를 배려하려던 사람들에게 하나님 창조한 그대로가 좋다며 그냥 하라 함. 구역장님들이 옆에서서 촬영, 교회서 떡을 준비. 신부 아버지가 가방 하나 이불 하나 들고 왔으며 송무자선생이 동행.


    5.개명교회

    신혼부부로 개명부임, 1962년 30세였고 걸어서 도착. 도로는 외길이었고 시냇가를 따라가는데 주변은 전부 산. 심심양곡에 양치러 간다는 생각. 기도생활을 제일 많이 할 수 있었고 교인은 40여명에서 70여명까지 부흥. 이해순집사님이 개명으로 들어오고 조순길씨도 이재순목사님의 논밭을 사서 들어오고, 전종기씨 어머니가 믿게되고, 전성수, 전재수, 장종범씨가 제대를 하게 되며 산골짝에서 목회해도 들어오면 온다는 것이 믿어짐

    토요일 앞산으로 기도, 주일 새벽 내려올 것이라 오전쯤에 갔는데 저녁때쯤 예비군까지 데리고 경찰이 칼빈총을 들고 간첩이라고 체포. 파출소에 전도 다녔던 안면 때문에 오해가 신분확인이 자연스럽게 해결. 교회서만 기도하라는 말에 교역자가 산에서 기도하는 법이라고 답변.


    6.동성로교회

    백목사님 말씀으로 왔다며 동성로교회 우동팔장로님이 개명을 방문. 동성로는 이인재 박윤선 김병도목사님이 지나갔고 4번째로 가게 됨. 창세기에서 여호수아 1장까지 설교가 진행되었을 때였고 새벽예배 마친 뒤 우장로님의 말을 들은 교인들은 눈물만. 수요일 동성로교회로 가서 설교한 다음 부산을 다녀 1964년 32세에 부임. 동성로 후임으로는 이진헌이며 당시 이진헌은 공회로 소속 변경 첫 목회지, 송용조목사님


    7.청도읍교회

    1966-7년 34-5세에 청도 개척교회로.
    청도교회는 청도신읍교회 백목사님 집회 후 은혜 받은 사람들이 중심되어
    공회 중심으로 개척하기를 원하여 신숙자전도사님이 전임으로 최초 시작했고
    김응도 부임은 김봉규집사님 다다미 방에서 첫 예배.
    신읍교회 집회 때 나사렛교단 시절의 이진헌목사님이 원하여 함께 참석한 기억


    8.신천교회

    1967-8년 신천으로 이동 1969년 신천교회 예배당 건축. 4-5평크기의 초가집. 자체 집회로 연보를 마련키로 하여 마두원선교사 교안의 레위기 백목사님 설교의 성막 5대제사 설교로 터는 26-7평 기초는 24평을 한 뒤 우체국으로 나와 부산에 전화보고, 백목사님은 넓히라 하였고 어려움을 말씀 드리자 '믿음이 있어야지!'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딱 끊어버림. 숟가락 하나까지 다 뭉쳐 연보하여 34평으로 확정. 당시 도평교회는 송용조목사님이 흙블럭으로 예배당을 짓고 있었으며 양혜원 환자들이 수고하던 때.
    ‘영감이 교회를 세운다’는 것을 두번 체험. 목사님의 말씀 한 마디가 이루어짐. '왜 그렇게 적게 짓느냐, 돈이 없다. 믿음이 있어야지' 그렇게 시작하고 상냥식하고 예배보고 사진을 찍어 믿음의 제자 김응도 라는 글자를 적어 목사님께 드림. 신용인목사님이 창동교회에 있을 때였고 도왔으며, 거창읍에서 가조 살피재 넘어가면 보이는 건물로 면에서 제일 큰 집이라해서 동네에서 칭찬도 하고, 잘한다고 말도 들음. 예배당 건축은 하룻밤 자고 나면 높이가 달라짐. 여반이 많기 때문에 밤에 나와 일을 하기 때문.


    9.청도읍교회

    1970년 청도읍교회로 다시 부임. 김봉규집사님의 배척. 사택은 남의 집에 셋방으로 살고 예배당은 60여평 대지에 교인은 20여명. 사례를 받을 때 집사님 주머니에서 돈을 헤아려 받아야 할 때가 있었고 사택을 짓기 위해 연보가 들어오는 대로 세멘트를 한 포씩 구입하여 120장 블록을 찍고 준비. 방 2개, 부엌, 다락까지 완성되고 또한 예배당도 뒷담이 세워지고 용마루 창문이 차례로 완성. 추수감사 주일 오전예배가 끝난 뒤 십일조를 냈던 교인이 강단으로 올라와 자기 봉투를 다시 회수. 당시 목회가 안되면 세상으로 나가서 떡장사를 통과시킬 때. 굶어죽어도 사모를 장사시키지는 않겠다고 결심 노력하자 교회의 연보가 한 사람의 주머니에서 유지되던 것이 정상적인 연보에서 유지. 일제 때 일본사람과 재판해서도 이겼다는 김세민장로님, 김봉규집사님, 교역자였던 조사님도 옳다고 깨달으면 꺾이지 않는 분이어서 세 김씨 세 고집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결국 새벽기도 가는 중 김봉규집사님이 교역자에게 시비를 걸고 이를 뿌리치자 다리를 붙잡아 넘어질 정도가 되자 교회 안에서 싸워야겠느냐고 했지만 다른 교인이 교역자와 교인이 엉겨붙어 싸웠다고 부산으로 보고되었고 목회자에게 목회 책임을 물어 100일 근신.


    10.성경전념

    40세에 김삼암과 백일굴 근처에 천막을 치고 둘이 기도 중. 비가 계속되었고 백목사님 나인숙 김효순집사님도 1주간. 건강이 좋지 않았던 나인숙집사님에게 목사님은 몸이 아프고 그러니 1주간 성경을 보고 오라하셨고 그런 뒤 건강하게 되었다는 나집사님 말. 이 말을 듣고 무조건 1주간 성경 1독을 끝냄. '목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이니 통달을 하자'고 결심, 이후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 해당되는 성구를 계속 찾고 암기. 결국 백목사님 설교 도중 인용되는 성구는 완전히 장절까지 암기. 양성원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백영침 백태영 송용조조사님 등은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나 본인은 우리 양성원이 시작되면 1기로 하겠다고 생각 신학교를 다니지 않고 노트만 준비.


    11.동문교회

    동문교회 1972년 부임. 서울 시내에서 예배당이 블록이어서 동네사람들이 예배당이 너무 험하다고 수군거려 3년을 오가며 교회 옆집 하나를 구입케 해 달라고 기도. 확신이 들었던 어느날 옆집 주인에게 제안하고 바로 팔겠다는 의사가 확인되어 최세봉집사님을 입회인으로 세워 구입. 주교 340명 장년 152명까지 부흥되어 구 예배실이 가득차게 되어 1975.3. 교회를 스라브로 건축. 예배당 건축을 앞두고 부산 목사님께 먼저 예배당을 지었던 목회자를 모셔 집회를 했으면 말씀드리며 사직동교회 건축이 끝났으니 신도범목사님을 부흥강사로 청하겠다고 말씀드리자 신목사님을 부르면 동문교인을 사직동으로 데려갈 것이라 하셔서 백태영목사님을 강사. 당시 신도범목사님이 섭섭했을 것이고 집회 참석도 낮 예배뿐이었고 백태영목사님과 둘 사이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멀어지고 있었음.


    12.양성원공부

    당시 양성원이 개강되었고 양성원에 앉아 있으니 백목사님이 불러 '교인들 헌금 작정까지 시켜놓고 건축이 진행되지 않으면 교인들 거지된다'고 하셔서 열심히 건축에 집중. 이번에는 양성원 공부에 소홀하다며 재촉을 받고 당시 함께 건축 중이던 상남교회 김철수목사님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부산행. 결국은 양성원은 빠지지 않고 건축은 끝을 낼 수 있었음.
    양성원 성경읽기에 대하여는 백태영목사님의 반대는 처음부터. 이렇게 껍데기로 많이만 읽게 해서 안된다고 반대를 했고 본인은 영감은 하나님이 주시면 주고 나 할 일은 4년에 100독을 끝내겠다고 하여 정거장에서까지 열심히 읽어 1979.7.에 완독 100회를 보고, 1980.3.3. 졸업을 하고 다음날 목사 안수.

    양성원 연경 100독 과제 중 사건의 동기와 목적을 기록하는 과정이 제일 어려움. 계시 영감 없으면 할 수 없었고 그 과목 90점 맞은 사람은 송용조, 전성수 김응도 3명뿐. 양성원 졸업후에도 100독 과정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빈약했던 부분이 아쉬워 다시 성경을 읽고 때로는 외우며 이제는 써기 까지 하고 있음.

    1978년 여수 여산교회, 안산교회, 동문교회, 번동교회를 거쳐 현 아현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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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장로 2023.09.18 0 126
13468
위천교회 백영희전도사 - 임인옥 장로님 증언 (1)
13468 | 서기 | 2023.09.19
서기 2023.09.19 0 89
13356
<집회 역사, 집회 자세> 이미지
13356 | 서기 | 2023.08.06
서기 2023.08.06 0 248
13343
총공회 산집회 역사 - 초기자료 이미지
13343 | 연구 | 2023.07.27
연구 2023.07.27 0 230
13320
23년 8월 집회교재 - 솔로몬 성전 이미지 첨부파일
13320 | 서기 | 2023.07.19
서기 2023.07.19 0 263
13291
비밀글 김정부, 70년대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주력에서. 첨부파일
13291 | 서기 | 2023.07.13
서기 2023.07.13 0 4
13289
최순직, 김치선 후계자(백석교단, 대신교단) 이미지
13289 | 서기 | 2023.07.13
서기 2023.07.13 0 182
13287
송용조 목사 첨부파일
13287 | 담당 | 2023.07.13
담당 2023.07.13 0 273
13255
박윤선, 공회와 함께 했던 인물 (1)
13255 | 서기 | 2023.07.06
서기 2023.07.06 0 208
13211
비밀글 손헌배, 백영희 둘째 사위 이미지 (1)
13211 | 서기 | 2023.06.26
서기 2023.06.26 0 8
13212
손헌배 장로님, 이력
13212 | 서기 | 2023.06.26
서기 2023.06.26 0 150
13143
청교도 개혁주의 노선에서 성도의 선행과 상급 첨부파일 (3)
13143 | 신학 | 2023.06.05
신학 2023.06.05 0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