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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무자 - 거창에서 서부교회로, 주교생에서 반사와 사모로

인물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21.02.17
송무자 - 서부교회 초기 반사, 현재 전주 전은교회 사모님

1.가정

①남편: 이종득목사님(전주전은교회), 제천 출신
②본인: 1933년생
③모친:신윤필(1906.6.16.)

함양 대남리 서상교회 설립, 1936-7년경 진주에서 진주성경학교 수학, 백목사님 처음 예수 믿고 다니시던 비슷한 시기, 박정자도 다녔던 곳, 당시부터 성경정독에 철저하였고 93세 되던 1998년까지도 매년 6-7독. 부친 송성일, 진주 출신으로 일정 때 함양군 서상으로 이주, 당시 금융조합 이사로 재직 중 은퇴한 뒤였고, 서상에서 신앙시작. 혼자 믿지 않았으나 가족들 때문에 첫 주일 출석했던 날 자청하였고 '주님을 하면서 할렐루야!' 특송. 매일 가족 예배 영향. 그러나 교회 회계를 보게 되면서 부인의 연보기록에 충격 시험들고 낙심 교회 단절.

동생: 방숙(남편 강호준, 영남대 음대교수 도미), 성숙(남편 수산교회 이성찬장로님), 경숙(남편 홍순철목사님 형님 홍순구집사님), 광숙


2.서상교회 시절

1945년 해방되던 일정 마지막 해 서상교회가 폐쇄되고 5리 되던 대남교회로 출석. 해방된 수 백목사님 집사로 서상교회 집회 인도. 후에 백목사님은 위천교회 부임하여 서상 집회 인도. 서상교회 부흥회 도중 주남선목사님 사망, 모친 전보 접수 백목사님과 함께 주목사님 임종. 백조사님은 주목사님 성경 받고 모친은 그 인내심을 주고 가라고 울고 다님.

중학교 다닐 때 6.25전란, 노란 모자 빨간 견장 찬 인민군들이 학교 강단에 전 학년 모아놓고 쭉 도열. 송무자를 간부로 불러놓고 앞에 세워 인민 학생회 대표로 지명, 강단 위에 올라가서 첫 강연에 예수 믿으라고 복음을 장시간 외침. 여러분 속에도 구원 얻을 자 있다고 두려움 없이 마음껏 전도. 시간이 한동안 지난 뒤 인민군이 중단을 시키고 소환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끝남. 그것으로 전부.

함양이 수복되고 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갔으나 아직 전란 도중이었을 때, 함양읍교회 집회를 백목사님이 인도하였고 부흥회 끝난 뒤 백목사님 모시고 90리를 언니와 함께 걸어가던 길, 목사님은 함양읍에서 서상을 거쳐 위천으로 가시던 길. 목사님 가방을 서로 들고 싶어 난리가 났던 간절. 언니는 백목사님 교회로 가고 싶어 위천교회 이종희목사님께 결혼. 오빠 황성규는 인민군 퇴각 때 위천교회 예배당 지붕에 'CHURCH'라고 적어 올렸던 청년.


3.서부교회 시절

1952년 4월 부산으로 가정 이주. 위천 백목사님이 큰 물고기는 큰 바다로 가라며 서상에 있지 말라고 하여 부산으로 이사. 서대신동 교회로 출석, 7월 백목사님 서부교회 부임인 첫 주일 모든 식구가 출석. 백목사님 부임 직전 김창인목사님 설교했던 기억. 교인들이 많아서 예배 볼 때 계속 교인들을 일어 세워서 다짐. 몇 번 다져서 앉혀야 예배를 볼 정도였으나 동일교회로 교인 전부 이동. 백목사님 오신 첫 날 예배 본 사람이 정확히 50명, 직접 계수. 원래는 김창인 목사님 나갈 때 대부분 따라 나갔으나 남아 있던 이들도 더러 있었다가 백목사님 부임하고 첫 날 예배보는 그 시간에도 나머지 이탈자들이 이동. 김창인목사님 계실 때 500명까지 있었다는 말,

1952년 서부교회에서 바로 반사를 시작. 이사 했고, 찬양대 했고, 여러가지 활동. 부산에서 부친 사망, 백영침목사님 하관까지 장례 전부 주관. 오빠였던 송황규, 서부교회에서 중도 이탈, 목사님을 그렇게 따랐고 신학교 입학, 후에 백목사님이 보냈던 교회에서 사례문제로 마음 상하고 오늘까지 반대측. 백목사님 고신에서 제명되기 전 언니부부 남해 교역자 발령 이사. 후에 고신과 나누어지며 교파가 갈라질 때 언니에게 소속 부탁. 기어코 남해에서 사표 서부교회로 안내. 백영침 주교부장일 때 서부교회 교사로 회계를 맡았고 매달 사례 직접 지출. 언니 부부는 서부교회로 왔다가 학장교회로 목회.

백목사님 방에는 그냥 부르면서 들어간다. 항상 대님 매고 앉아 성경이나 기도하시고 자는 것은 앉아 있는 것이 자는 것이었다. 목사님을 반대하게 된 오빠도 이런 점은 인정, 허리 펴고 주무시는 수는 없음.

박정자집사님이 구역장, 목사님 생전 목사님이 부친보다 더 좋아서 온갖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었고, 1989년 목사님 돌아가기 전 한 달에 한번씩은 지방에서 부산으로 방문. 맛있는 것만 보이면 먹기 아까워 목사님께 가져갔었는데... 목사님은 받지 않으시고 고생하는 남편 이목사나 잘 해 주라며 오히려 야단

교회 안에 모여 살던 분이 많았고, 이동근은 옆집 솜공장 솜털 나오는 곳이 방. 이말출은 우물가에 있었고,


4.서부교회 주일학교

목사님 오셨던 1952년 당시는 주교 반편성에는 남녀, 학년 구별. 그러나 해가 바뀌고 학년이 올라갈 때 학생들을 그대로 데리고 올라 가고 싶으면 신청하면 가능. 여5학년반 맡았고 6학년으로 그대로 올라갔다가 그 다음은 유치반을 계속 담당. 주교 반사들로는 장춘자(김영웅목사님 사모님), 서길자(장렬목사님 사모님), 백순희, 고오순(고삼순권사님 동생), 조길연(송용조목사님 사모님), 오희영, 송무자 등이 여반사들. 한동희전도사가 부장 정금출, 배기석, 장렬, 이동화, 김병도(조금있다가 목회) 하기식, 서영호. 김대웅은 서기, 송무자 회계. 목사님께서 김대웅을 손발로 불러 심부름. 김대웅은 매주 나팔 불고 시장통으로 전도가서 오후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예배

주교 새벽 예배는 한달씩 목사님이 지명하여 맡김. 자원하는 반사가 있으면 우선 시키는 것이 목사님 방침. 반사 월례회가 있어 이때 새벽예배 인도를 정했고 늘 자청하여 새벽예배를 주로 맡음. 주교 새벽예배를 계속 인도하면서 아동자선 병원으로 직장을 다니고 밤에는 경남 사범대학 공부.


5.교회 내분시절

모친 신윤필과 함께 목사님께 직접 처음 내분 소식 들음. 장렬 선생을 교역자로 세우고 목사님을 내보내는 정도의 계획이 교회 중심 인물 전부에 의하여 진행. 그분들 밑에서 충성하던 비교적 어린 교인들은 후에 알게 되었던 1960년 최상층부 배척운동. 신윤필은 목사님과 너무 가깝다고 빼놓고 진행. 구역장 박정자집사님까지 가담.


6.목회

1960. 2. 7. 결혼, 남편 이종득은 제천에서 교사. 제천에 한종희씨가 있을 때 목사님이 부흥회 오셨고 역에서 내려오면서 이종득선생 준비해, 언제든지 부르면. 그 말 듣고는 늘 목회로 나가도록 권할까 불안. 서부교회로 내려 와서 주교부장. 서부교회 필지가 9필지였던 시절. 목사님 심부름으로 남편 이종득은 한 필지로 통합. 여러 사람을 거쳐 넘어왔고 목사님은 한번 도시락 싸서 다니며 해보라고 부부에게 서류보자기를 넘기심. 그 보자기를 송무자들고 나오고 결국 한필지로 만들면서 그 이전에는 세금이 굉장히 많았는데 교회명의로 바꾸어 세금 전액 면제. 일이 마치자 이종득선생을 안고 얼마나 좋아서 붙들고 흔드는지 그렇게 기뻐하심. 66-7년도 혹 68년정도 마무리된 일. 알고보니 교사 출신의 점잖은 사람에게 목회 나가기 위해 꼭 보완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사회성이었고 그것으로 목회 준비 다 되었다고 하시고 목회자가 없던 거제동 교회에 설교부탁. 다음 주일 이종득의 서전교회 부임 발표. 본인은 더 배워야 한다고 버틸 때였으나 서전교회 부임. 1968년 4월 부활절 전. 교인은 사택식구까지 12명. 서전교회는 백영침, 이만기, 송용조, 이종득 순서.

서전교회 후임은 이동화목사님이며 개명으로 이동, 전임은 우현룡목사님.
1972년 개명에서 남해 북림으로 이동할 때 개명은 이종희목사님 후임, 4년 7개월 재임, 예배당 건축 후 7개월에 이동.

북림교회 예배당 건축 때문에 김광주, 김영환, 이성우까지 학생 4명이 리어카 하나 사서 매일 학교 가기 전에 멀리 있는 시내에서 모래나 자갈 한 리어카 실어놓고 등교. 3끼를 다 먹기가 곤란. 부부가 호별심방 나가고 나면 큰 아이가 남자지만 아이들끼리 보리 씻어 밥해 먹고 부부 밥을 이불 밑에 넣어두곤 했고, 어느날 저녁 먹을 것이 전혀 없어 꼭 굶고 지내야 할 때, 남해 관광왔던 언니가 5천원을 주고 가서 해결. 그날 까마귀는 이모. 큰 아이 초등 5학년이었고 그 아이 말, ‘엄마, 오늘 까마귀는 큰 이모네, 오늘 까마귀는 누군지'
백영침목사님은 서전교회서 씨래기국만 몇 바구니를 먹었다는 말을 듣고 서전교회로 부임했었으나 그렇게까지는 고생하지 못했고, 언니 오던 날은 목회 나오고 꼭 한번 굶어볼 날이었으나 다른 교역자에 비해 평안하게 살아 미안한 일. 우리 공회 교역자들이 그래도 그때 보람 있게 충성.

①성우: 제천에서 치과
②현아: 대전거주
③진우: 뉴욕, 엔아티 졸업, 의대 준비
④민아: 뉴욕, 컬럼비아 대학원 음악교육과정


7.집회

백목사님은 서부교회에 오시자 금정산 70인 바위로 기도를 다녔는데 기도로 오가다 산 집회가 시작. 거창 삼봉산 집회 끝나고 1957년, 그 다음 해 금정산 집회. 그리고 목회 출발했던 1968년이 마지막 집회. 군용 천막을 쳐 놓고 예배를 보았는데 폭우로 천막이 떠내려가는 정도, 집회 중단. 사택이 철로 옆이었고 기차 진동에 탁상시계가 떨어지는 곳에서도 기차에 상관없이 성장. 조리하는 중이어서 8월 집회를 가지 못했으나 비가 천장에서 쏟아졌던 폭우. 백목사님은 목회자에게 하루 40집 호별 전도,


8.목사님 사후

잘 부흥되던 교회가 공회에서 동판으로 된 녹색 총공회 간판을 붙이라고 해서 달았고 그후부터 새벽기도 오던 사람부터 이탈되기 시작. 백목사님에 관한 것을 다 좋아하지만 총공회 간판은 불편했고 목사님 돌아가신 직후 바로 없앰. 미장원에 갔을 때 손님 둘이 ‘전은교회, 반석교회 둘이 있는데 사람들이 전은교회는 이상한 교회라고 말하더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그들에게 알아보니까 간판 때문. 현재 소속은 없으나 백태영목사님으로 늘 마음이 기울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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