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계순 - 기도와 능력의 백목사님 첫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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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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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소개)
백영희목사님의 막내 여동생 백계순집사님, 백목사님 전도에 가장 기도하고 애썼던 사람이며, 백목사님이 신앙출발한 뒤에는 그 첫 제자라 할 수 있으며, 백목사님이 직접 키웠던 3교회 중 봉산교회를 주로 맡았고, 20세기 오순절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었던 봉산집회와 그 기도생활, 그리고 6.25 중앙을 가로지르며 복음을 전파했던 백목사님의 위천교회와 함께 했던 봉산교회 순생과 변판원 순교는 백목사님의 첫 제자인 백계순으로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1.가족
백계순: 백영희목사님 막내 여동생, 기도의 사람, 백목사님 첫 제자로 꼽을 분
이백원: 백계순집사님 남편, 선하고 진실한 인품, 보기 드문 초기 부부 교인
남편 이백원(白元)집사님은 1911. 12. 7. 생, 본적: 위천면 모동리 무월리 220번지,
위천초등학교(소학교) 1회 졸업, 댕기머리로 한문 서당을 다니다가 머리 끊고 학교 입학. 경제는 보통. 결혼 20세,
백계순은 1913년생. 친정이 살기가 곤란. 당시 백목사님은 결혼, 계명 거주, 막내 백계순은 시집. (백영희 1910년생, 백상순 1916년생, 백영익 1919년생, 백태영 1925년생)
2.신앙
시댁은 위천면 모동, 귀신이 많은 집안 내력. 시집오기 전에는 교회 다니지 않았음. 고도열
선교사에게 전도. 위천에 교회는 일찍 섰지만 모동까지 넘어 전도 다닐 분은 없었고, 백영침목사님의 장모 완수대 댁과 같이 보름재를 넘어서 위천 교회로 신앙출발. 가는 길은 1시간 정도 걸리는 산길 10리. 처음에는 혼자 다녔으나 곧 남편, 시부모,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교회 출석. 1934년 아들 요셉 출생. 54년 신수 등 손주 6명.
고제면 농산으로 이사. 원 농산교회는 한옥으로 있던 첫 예배당, 이백원이 두번째 예배당을 건축, 농산의 신앙생활도 평범. 그후 봉산교회 담임교역자가 없어 봉산으로 이사, 개인 경제를 자립하며 평신도로 목회 시작, 살림집에 살림 살면서 예배를 보는 평신도 목회 시작.
당시 봉산교회는 이홍길 가정집에서 예배 중, 이백원 이사 오면서 현 봉산교회 예배당을 건축, 원래 목수였고 또 교인 중 이홍길이 목수이며 둔터 강재희도 반 목수 정도.
전임교역자가 없는 이 부근은 선교사 전은혜가 주로 순회, 호주 출신 처녀 선교사로 슬라이드 기계로 화면을 보여주며 전도. 김기화 역시 진주사람이며 처녀로 동행. 대구사람 김복주전도사까지 3명이 봉산까지 순회를 다님.
봉산교회가 위치한 와랑촌으로 갈 때는 경제 곤란, 그곳서 물레방아를 2대를 놓게 되고, 형편이 좋아져 예배 후 교인들에게 수제비, 국수를 해 먹일 수 있었음.
3. 6.25사변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그날부터 온 교인이 교회에서 예배, 그 이후는 계속 예배당에 모여 철야로 통과. 이백원은 설교에서 인민군 정부는 무신론이며 기독교를 절대 반대하는 운동을 그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절대 가담치 말 것을 계속 반복. 인민군 점령 치하 분지서 치안대 사람들이 정보파악을 하고 듣고 이백원, 백계순 부부를 체포. 고제면 분지서에서 갖은 위협과 회유로 신앙을 포기하라 했지만 굴하지 않았고 일단 석방시킴.
6.25 전란 만 3개월에 예배당을 인민군들이 소각시키는 가운데 여반 김집사가 불을 꺼버렸고, 그는 군 작전 방해를 이유로 인민군에게 마당에서 현장 총살 집행을 당하게 되었으나 사살을 책임진 사람이 바로 눈 앞에서 정조준을 했으나 귀 옆을 스치는 총격으로 살려줌. 평생 그 귀쪽 청각장애로 살았고, 대신 동네에서 제일 잘 살았던 그의 집은 완전 소각시킴.전란 6개월이 통과되면서 변판원선생이 순교되었지만 모든 교인들은 휴전될 때까지 교회에서 기도. 주일학생들까지 늘 예배당이나 산으로 기도를 다녔으며, 퇴각하는 인민군들의 대열에 다가가 십자가 깃발을 흔들며 백계순과 예수믿으라는 전도를 외침.
3.월천교회
주남선 목사님이 아직 계실 때, 월천 개척을 부탁하여 오늘 창북교회가 되는 월천교회 첫 교역자로 부임. 갔다. 김병춘목사님 부친이 초기 교인으로 전도되고, 박신찬, 김철수목사님 등이 주일학생. 월천에서 2년.
4.기타
백계순은 성격이 백목사님과 비슷했으며, 그의 임종에 “기도왕이 세상 떳다”는 표현으로 백목사님이 그의 평생을 정리. 평생에 매년 성경 10독. 남편 이백원은 봉산에서 물레방아를 할 때 백목사님은 개명에서 물레방아를 했었고, 1949년 이백원은 개명초등학교 증축 공사를 도급받아 일을 하고 있었고 그 학교 정문 바로 앞이 백목사님의 물레방아 방앗간. 백목사님이 유급전도사로 출발하는 문제로 망설일 때였고 둘째 딸이 치마를 입고 오가다가 물레방아 샤프터에 감겨 들어감. 60cm 정도의 샤프트가 계속 돌면서 아이는 완전 박살나게 되었고 바로 앞에서 일하던 이백원은 자전거에 실고 거창읍 내까지 내달아 감. 비원교회 성기용장로님 부친 성국도라는 사람이 유도를 했고 그가 뼈를 일단 맞추었음.
5.봉산교회 집회
백목사님이 집사로 해방후 개명교회, 봉산교회, 원기교회. 웅양교회를 맡았고 이어 자비량 조사님으로 전도사가 된 처음 집회를 봉산교회. 주남선목사님이 목회하던 거창읍교회 교인들, 대구 내당동 서부교회를 창설한 정종윤장로님이 대구에서도 참석하는 등 그 열기와 참가 숫자는 가마솥이 되었고 예배당 안에 청년들이 나무로 중간층을 임시 가설하고 예배당 양쪽 창문 밖에도 사람들이 앉아 안을 보면서 예배할 수 있도록 나무로 받쳐 임시 가설을 함.
참석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면서 육체가 떨리는 진동으로 온 예배당이 움직였고, 신유의 은사와 온갖 종류의 오순절 성령 역사가 눈으로 보이게 나타남. 거창읍교회 원영욱(동생 원영술목사 사촌이 원영봉) 윤학순, 서봉월, 묘산 관터에서는 김만술, 대구에서도 거창으로 경남여객이 다녔는데 적하 앞 우두렁 고개에서 내려 적하를 넘어 봉산으로 넘어 들어오면서 몸이 무거워서 앞뒤에서 밀고 당겨서 집회를 참석. 기독공보에 오순절 다락방에 내린 성신이 임했다는 교계 소식으로 전해짐.
6.기도생활
성령을 받는 사람들이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육체의 진동과 뛰고 굴리는 이들이 있었으나 너무 과하면 백계순의 안수로 진정이 되었고, 백계순의 기도에는 수도 없는 병이 치료되고 있었음. 이목사님의 사모님이 원래 정신분열증으로 완전 정신병자로 취급되었으나 백계순의 기도로 완치되는 등 많은 역사. 한번 금식하면 물까지 금하고 1주간씩 삼봉산 백일막에 기도. 하곤 했음. 야간에 그곳으로 기도갈 때에는 호랑이가 빛을 비추며 길을 열고 앞을 잡아 주어 기도장소에 도착했고, 도착하면 호랑이는 사라지곤 함.
기도의 교회로 이어졌던 봉산교회 기도교인들로는 백계순, 이백원, 강재희부부, 변을문부부, 김종삼부부, 이운길부부, 변판원 등.
7.여생
1951년 월천교회, 1953년 계명교회에서 3년 정도. 부산 서부교회에서 개척했던 학장교회 첫 교역자, 그후 교역일 그만 두고 1975. 6. 30. 백계순집사님, 이듬해 남편 이백원집사님이 사망. 주남선목사님이 임종시 백목사님에게 모자와 성경을 맡겼고, 중국어성경은 이백원조사님에게 맡김
백영희목사님의 막내 여동생 백계순집사님, 백목사님 전도에 가장 기도하고 애썼던 사람이며, 백목사님이 신앙출발한 뒤에는 그 첫 제자라 할 수 있으며, 백목사님이 직접 키웠던 3교회 중 봉산교회를 주로 맡았고, 20세기 오순절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었던 봉산집회와 그 기도생활, 그리고 6.25 중앙을 가로지르며 복음을 전파했던 백목사님의 위천교회와 함께 했던 봉산교회 순생과 변판원 순교는 백목사님의 첫 제자인 백계순으로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1.가족
백계순: 백영희목사님 막내 여동생, 기도의 사람, 백목사님 첫 제자로 꼽을 분
이백원: 백계순집사님 남편, 선하고 진실한 인품, 보기 드문 초기 부부 교인
남편 이백원(白元)집사님은 1911. 12. 7. 생, 본적: 위천면 모동리 무월리 220번지,
위천초등학교(소학교) 1회 졸업, 댕기머리로 한문 서당을 다니다가 머리 끊고 학교 입학. 경제는 보통. 결혼 20세,
백계순은 1913년생. 친정이 살기가 곤란. 당시 백목사님은 결혼, 계명 거주, 막내 백계순은 시집. (백영희 1910년생, 백상순 1916년생, 백영익 1919년생, 백태영 1925년생)
2.신앙
시댁은 위천면 모동, 귀신이 많은 집안 내력. 시집오기 전에는 교회 다니지 않았음. 고도열
선교사에게 전도. 위천에 교회는 일찍 섰지만 모동까지 넘어 전도 다닐 분은 없었고, 백영침목사님의 장모 완수대 댁과 같이 보름재를 넘어서 위천 교회로 신앙출발. 가는 길은 1시간 정도 걸리는 산길 10리. 처음에는 혼자 다녔으나 곧 남편, 시부모, 시할머니까지 모시고 교회 출석. 1934년 아들 요셉 출생. 54년 신수 등 손주 6명.
고제면 농산으로 이사. 원 농산교회는 한옥으로 있던 첫 예배당, 이백원이 두번째 예배당을 건축, 농산의 신앙생활도 평범. 그후 봉산교회 담임교역자가 없어 봉산으로 이사, 개인 경제를 자립하며 평신도로 목회 시작, 살림집에 살림 살면서 예배를 보는 평신도 목회 시작.
당시 봉산교회는 이홍길 가정집에서 예배 중, 이백원 이사 오면서 현 봉산교회 예배당을 건축, 원래 목수였고 또 교인 중 이홍길이 목수이며 둔터 강재희도 반 목수 정도.
전임교역자가 없는 이 부근은 선교사 전은혜가 주로 순회, 호주 출신 처녀 선교사로 슬라이드 기계로 화면을 보여주며 전도. 김기화 역시 진주사람이며 처녀로 동행. 대구사람 김복주전도사까지 3명이 봉산까지 순회를 다님.
봉산교회가 위치한 와랑촌으로 갈 때는 경제 곤란, 그곳서 물레방아를 2대를 놓게 되고, 형편이 좋아져 예배 후 교인들에게 수제비, 국수를 해 먹일 수 있었음.
3. 6.25사변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그날부터 온 교인이 교회에서 예배, 그 이후는 계속 예배당에 모여 철야로 통과. 이백원은 설교에서 인민군 정부는 무신론이며 기독교를 절대 반대하는 운동을 그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절대 가담치 말 것을 계속 반복. 인민군 점령 치하 분지서 치안대 사람들이 정보파악을 하고 듣고 이백원, 백계순 부부를 체포. 고제면 분지서에서 갖은 위협과 회유로 신앙을 포기하라 했지만 굴하지 않았고 일단 석방시킴.
6.25 전란 만 3개월에 예배당을 인민군들이 소각시키는 가운데 여반 김집사가 불을 꺼버렸고, 그는 군 작전 방해를 이유로 인민군에게 마당에서 현장 총살 집행을 당하게 되었으나 사살을 책임진 사람이 바로 눈 앞에서 정조준을 했으나 귀 옆을 스치는 총격으로 살려줌. 평생 그 귀쪽 청각장애로 살았고, 대신 동네에서 제일 잘 살았던 그의 집은 완전 소각시킴.전란 6개월이 통과되면서 변판원선생이 순교되었지만 모든 교인들은 휴전될 때까지 교회에서 기도. 주일학생들까지 늘 예배당이나 산으로 기도를 다녔으며, 퇴각하는 인민군들의 대열에 다가가 십자가 깃발을 흔들며 백계순과 예수믿으라는 전도를 외침.
3.월천교회
주남선 목사님이 아직 계실 때, 월천 개척을 부탁하여 오늘 창북교회가 되는 월천교회 첫 교역자로 부임. 갔다. 김병춘목사님 부친이 초기 교인으로 전도되고, 박신찬, 김철수목사님 등이 주일학생. 월천에서 2년.
4.기타
백계순은 성격이 백목사님과 비슷했으며, 그의 임종에 “기도왕이 세상 떳다”는 표현으로 백목사님이 그의 평생을 정리. 평생에 매년 성경 10독. 남편 이백원은 봉산에서 물레방아를 할 때 백목사님은 개명에서 물레방아를 했었고, 1949년 이백원은 개명초등학교 증축 공사를 도급받아 일을 하고 있었고 그 학교 정문 바로 앞이 백목사님의 물레방아 방앗간. 백목사님이 유급전도사로 출발하는 문제로 망설일 때였고 둘째 딸이 치마를 입고 오가다가 물레방아 샤프터에 감겨 들어감. 60cm 정도의 샤프트가 계속 돌면서 아이는 완전 박살나게 되었고 바로 앞에서 일하던 이백원은 자전거에 실고 거창읍 내까지 내달아 감. 비원교회 성기용장로님 부친 성국도라는 사람이 유도를 했고 그가 뼈를 일단 맞추었음.
5.봉산교회 집회
백목사님이 집사로 해방후 개명교회, 봉산교회, 원기교회. 웅양교회를 맡았고 이어 자비량 조사님으로 전도사가 된 처음 집회를 봉산교회. 주남선목사님이 목회하던 거창읍교회 교인들, 대구 내당동 서부교회를 창설한 정종윤장로님이 대구에서도 참석하는 등 그 열기와 참가 숫자는 가마솥이 되었고 예배당 안에 청년들이 나무로 중간층을 임시 가설하고 예배당 양쪽 창문 밖에도 사람들이 앉아 안을 보면서 예배할 수 있도록 나무로 받쳐 임시 가설을 함.
참석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면서 육체가 떨리는 진동으로 온 예배당이 움직였고, 신유의 은사와 온갖 종류의 오순절 성령 역사가 눈으로 보이게 나타남. 거창읍교회 원영욱(동생 원영술목사 사촌이 원영봉) 윤학순, 서봉월, 묘산 관터에서는 김만술, 대구에서도 거창으로 경남여객이 다녔는데 적하 앞 우두렁 고개에서 내려 적하를 넘어 봉산으로 넘어 들어오면서 몸이 무거워서 앞뒤에서 밀고 당겨서 집회를 참석. 기독공보에 오순절 다락방에 내린 성신이 임했다는 교계 소식으로 전해짐.
6.기도생활
성령을 받는 사람들이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육체의 진동과 뛰고 굴리는 이들이 있었으나 너무 과하면 백계순의 안수로 진정이 되었고, 백계순의 기도에는 수도 없는 병이 치료되고 있었음. 이목사님의 사모님이 원래 정신분열증으로 완전 정신병자로 취급되었으나 백계순의 기도로 완치되는 등 많은 역사. 한번 금식하면 물까지 금하고 1주간씩 삼봉산 백일막에 기도. 하곤 했음. 야간에 그곳으로 기도갈 때에는 호랑이가 빛을 비추며 길을 열고 앞을 잡아 주어 기도장소에 도착했고, 도착하면 호랑이는 사라지곤 함.
기도의 교회로 이어졌던 봉산교회 기도교인들로는 백계순, 이백원, 강재희부부, 변을문부부, 김종삼부부, 이운길부부, 변판원 등.
7.여생
1951년 월천교회, 1953년 계명교회에서 3년 정도. 부산 서부교회에서 개척했던 학장교회 첫 교역자, 그후 교역일 그만 두고 1975. 6. 30. 백계순집사님, 이듬해 남편 이백원집사님이 사망. 주남선목사님이 임종시 백목사님에게 모자와 성경을 맡겼고, 중국어성경은 이백원조사님에게 맡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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