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기. 황보유안 조사님 부자 (백목사님 출석교회 교역자)
인물
작성자
서기
작성일
2021.02.17

황보 기 (皇甫琪)
1.소개
백목사님이 1936년 7월 처음 교회로 나간 곳이 농산교회였고 당시 교역자로 목사님 신앙 첫 출발에 관련된 언급이 설교록에 많이 있고. 현재 공회 나이 많은 교역자 교인들 대부분과 여러 면으로 관련있던 분.
2.생애
1881. 8. 15. - 1956. 9. 2. 76세 소천. 사모님: 심선애 원래 김해 사람이었고, 젊을 때 많은 곳을 다녔음. 4형제 중 둘째. 첫째는 황보경인데 아주 못살아서 생활이 힘들었고 만주로 이민을 갔음. 1903. 9. 조선인이 미국 이민 가는 첫 경우, 100여명이 하와이 노무자로 인천에서 출발. 1910년 5월, 7년 만에 다시 조선으로 나옴. 주로 사탕수수밭에서 노동. 농장에 통역이 있었고, 통역이 주인 편만 들어, 노동자들에게 불리함이 너무 심하자 데모 발생. 통역이 살해될 정도가 되자 경찰서로 피하고 고발. 말을 탄 순시경찰들이 주모자를 색출하려고 살피는데 모두 입을 닫고 있는데, 그가 나서서 해명, 오히려 주모자로 체포됨.
교화 기간 동안 울창한 숲에서 명상, 논리로 진실을 고백케 하는 기회를 제공, 꿈에 천사가 같이 일하던 한 사람을 가리키면 이가 의인이라함. 방면된 후, 그를 찾아 대화, 전도받음. “의인은 그가 아니라 예수 믿고 교회를 다니면 의인이 되는구나!” 그때부터 예수 믿고 신앙생활 시작.
3.신앙:
'1904년 12월 25일 하와이 호놀룰루 옥에서 주 예수와 성부를 비몽사몽간에 보고 그 말씀을 듣고 이 날에 깨닫고 예수를 믿었음’황보기의 친필기록. 1905. 4. 미국인 현순목사에게 학습, 1905. 8. 하와이 가와도 하마루루미미 교회에서
미국인 마포삼열목사에게 세례. 9월에 가와도 니후니 감리교회에 속장직 시무.
1907. 가와이 가따지방 전도인. 1908. 10. 5.까지 하와이 하나마루 교회 권사 시무.
1910. 6.- 11. 1. 가와도 동지방 각 교회 총대로 조선 백 만 명 부흥 전도회에 참석키 위해 한국인 목사와 함께 2명의 대표로 귀국. 조선 신자가 백 만 명만 되면 독립이 된다하여 교회가 전도에 힘쓸 때. 미혼이었고 경성 충남 선보감리사 지방에서 부흥전도를 했다.
4.목회
부흥 전도회는 일제 박해로 오래 가지 못하여 고향 김해로 왔다가, 호주 선교 본부가 진주에 있다 말을 듣고 방문 자기소개. 바로 전도사로 임명되고 부산에 있는 선교사 중매로 1911. 2. 결혼. 1911. 2. - 1912. 10. 까지 경남 진주 대안리에서 영국 맹호은 목사 어학선생으로 종사. 부인은 고아 같은 입장이며 선교사가 양육. 아들 황보유안은 진주에서 1912. 3. 15. 출생.
1912. 11. 호주선교부에서 거창 파송. 1912. 11. - 1916. 3. 거창, 안의, 함양 3개군 각 교회 순행교역자인 조사직 종사. 한 교회 교인이 3-4명이던 시절이며 한 사람의 순회로 목회. 합천 야로까지 해당 구역. 거처하는 집은 거창읍 냇물 옆. 거창교회 위쪽에 위치하였고 1920년 경신년 대홍수로 군수, 서장이 주민 대피 지도 중 다리 파괴, 군수 익사 사망. 일인 서장은 냇가 포플러 나무를 잡고 생존. 오형선장로님과 식구들 같이 지냄. 오형선은 일본 동경 있다가 부산에서 국회의원 출마한다고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유세했다는 정도. 나중에 부산에서 올라와서 함양서상면 거주. 일제 때 그는 신사참배 문제로 경찰에 가서 많이 뚜드려 맞고 감옥. 평양으로. 1919. 1. - 1941. 12. 목형교회로 전도 시무 종료.
5.노년
목회는 일평생 조사, 은퇴 후 장로 재직. 주남선목사님의 권유로 주남선목사님이 보육원을 권함. 당시 주남선목사님의 큰 아들이 이미 보육원을 시작. 주목사님의 딸도 마산에서 조수옥씨와 함께 보육원 운영, 후에 단독으로 보육원 경영.
황보유안
1.소개
황보기조사님을 이어 농산교회를 맡아 목회를 했던 그 아들이며, 백목사님과 초기 많은 신앙토론을 했던 분. 농산교회의 신사참배와 6.25 시절 교역자. 공회 내 많은 분들과 신앙 관련. 설교록에 '신사참배 관련 언급'이 많았음.
2.생애
1912. 3. 15. 출생, 농산교회 부임은 1938. 12. 10. 27세로 고제 농산교회 전도사로 시작. 부임 당시 백영희목사님은 집사로 농산교회를 출석. 백목사님 세례문답을 받을 때 어찌나 유명했던지 문답 마치고 목사님이 “좌우간 아주 똑똑하고 분명하고 참 앞으로 전도사 감이라.'는 말을 확실히 기억. 농산교인은 4-50명이었고. 농산교회에서 개명과 봉산 교회를 개척해 냈다. 강재희, 김규야, 변을문부부 등이 봉산 교인이며 봉산에서 예배.
3.6.25. 농산 목회 중 동란을 겪었고 잡혀가다가 생환. 1950. 9. 25. 추석 바로 전날, 미군이 거창 탈환하던 때. 대전 인민군 본부로 가던 길. 고제면소재지 높은다리에 지서가 있었고, 그들은 분주소라고 함. 밤에 불러냈고 분주소에는 밤중인데 이미 사람들이 와글와글 집결. 인민군에 협조하던 사람들이 인민군 후퇴를 따라 가려고 집결됨.
본인이 들어서자 바로 대장이 ‘출발’명령. 체포되어 가는 입장이었으나 결박치는 않았고, 대신 앞에 세워놓고 건장한 젊은 군인을 감시케 함. 봉산쪽 큰골이 아닌 개명쪽 작은골로 덕유산을 넘어가는 노정. 대개 재를 넘기 전 살해하는 그들 습관. 농산교인 전부는 예배당에서 철야. 따라 가면서 기도만. 빨치산은 산으로만 행군, 대단한 악질들. 처음은 서슬이 시퍼렇고 독하게 굴었으나 나중에는 나아짐.
구천동으로 산을 넘었고 마을 이장이 영접. 인민군 11명이었고 다음 날 아침은 명절이었고 실컷 그들은 대접을 받았고, 마지막 밥으로 생각하고 본인도 마지막 밥으로 생각 잘 먹음. 행군이 무주를 지나는 중 정찰 중인 비행기를 공습으로 알았던 인민군은 혼비백산 '각자 논두렁으로 피해 앞으로'라는 말이 떨어지고 그 사이에 다시 돌아올 기회를 찾게 됨. 대로는 인민군의 북상 퇴각이 많았고 소로로 다시 돌아 오는 길에도 인민군은 퇴각 중이었고 무사히 귀가.
농산교회는 면 소재지였고 경찰들이 주재하고 있는 곳이어서 이후 빨치산 위험은 없었음. 이북에서 내려왔던 인민군 정규군들은 믿던 사람들이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징집되어 왔다는 경우가 있었음.
4.은퇴후
1953. 7. 14. 농산교회 전도사직을 사직 은퇴 후, 지금까지 부친 황보기 조사님이 설립 운영하던 보육원을 맡아 지금까지 자녀들과 함께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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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경남지방 40인' 인물사 저서에서)
황보기 1881-1956
서부경남지방 교회개척자, 함양교회 장로
서부경남지방 기독교 형성에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이 함양교회 황보기 (皇甫琪,1881-1956)장로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출생하여 15살 때부터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가며 여러 직업에 종사하던 그는 하와이로 이민의 길을 선택한다. 약 7년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서 약소민족의 아픔을 체험한 그는 이곳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예수 위해’ 생애를 바치기로 다짐하고 1911년 1월 귀국 길에 오른다. 귀국한 그는 진주의 호주선교사 맹호은의 어학선생으로 출발하여 조사, 순회전도사, 후에는 장로로 일하면서 거창, 안의, 함양 등 서부경남지방에서의 교회 개척과 교회 건설을 위해 봉사하며 서부경남지방 기독교형성에 기여하였다. 이제 그의 삶의 여정을 정리해 두고자 한다.
황보기 장로는 1881년 8월 15일 (음력, 양력으로는 10월 7일) 경상남도 김해읍 동하리(東下里)에서 황보선(皇甫善, 1843-1920)과 김연수(金連守, 1858-1934)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주. 아하의 황보기 장로의 생애 여정에 대한 중요한 정보는 그가 남긴 친필 이력서에 근거함.) 농부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8살 때인 1888년부터 1894년까지 7년 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선친을 따라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으나 15세 때인 1895년부터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자 농업 외에도 상업과 공업 등 여러 직종에서 일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전국을 다니며 질긴 댓잎으로 허리띠를 만들어 파는 장사를 하기도 했는데, 이 일로 인천 제물포에 갔을 때 인천내리감리교회에서 미국 하와이 이민단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차 있던 그는 견문을 넓히며 미국을 경험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와이 이민 신청을 하게 되었다.
예상보다 쉽게 내리감리교회의 주선으로 2차 이민 선발단의 일원으로 뽑힌 그는 1903년 9월 일본으로 가 고베(神戶)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미국령인 하와이로 향하게 된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하와이 제1차 이민단은 101명이었고, 1903년의 제2차 이민단은 1133명이었는데 황보기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와이로 간 그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사탕수수 재배 노무자로 일했다.
하와이에서 사탕수수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850년대부터였다. 처음에는 필요한 노동력을 하와이 본토에서 충당했으나 농장 규모가 확대되자 노동력을 외국에서 충원해야 했다. 처음에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였는데, 1876년부터 1885년까지 10년동안 5,037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후 중국인 이민이 금지된 1897년까지 4만6천명에 이르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주. 유동식,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2006),23.) 그런데 동일민족 집단의 과다한 유입은 자국민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한 하와이 사회는 더 이상의 중국인의 유입을 금지하고 1885년부터는 일본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인의 유입도 급증하여 1902년 당시 일본인은 무려 3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한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1903년부터 한국정부가 이를 금지한 1905년까지 총 65척의 선편으로 7,226명이 이민하였는데, 이 중 남자가 6,048명, 부녀자가 637명, 어린아이가 541명에 달했다.(주. 유동식, 30.)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한 황보기는, 하와이에 체류하는 동안 약소민족의 애환과 고통을 경험하였고, 하루 10시간 가까이 일하면서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착취 당해야 했다. 농장주의 학대에 항거하여 일어난 노동자들을 대변하기도 했고, 부당한 처우에 대항하여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하와이에 체류하는 동안 영어를 배우게 되엇고, 특히 기독교신앙을 접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호놀룰루에서 1904년 12월 25일 성탄을 맞게 되었는데, 많은 이들이 모여서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신앙의 위력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이때부터 주 예수를 위하여 일생을 살기로 다짐했다. 그는 제2차 이민단의 통역으로 따라 갔던 현순(玄楯)전도사에게 찾아가 신앙을 고백하고 학습교인이 되었다. 이때가 1905년 4월이었다. 학습 서약을 하고 성경말씀에 심취한 그는 4개월 후인 그해 8월에 미국출신 선교사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Moffett)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공식적인 기독교인이 되엇다.
신자가 된 그는 수세 후 1개월이 지난 9월 1일부터 1906년 말까지 카와도니후니 감리교회 속장직을 맡아 봉사하엿고, 1907년에는 카우아이 지역의 하나마우루(Hanamaulu)교회의 권사로 활동했다. 1904년 당시 카우아이 지역에는 7개 처에 한인교회가 있었는데, 하나마우루 교회 교인은 7명에 불과했다. 1907년 당시는 적어도 30명 이상의 교인이 있었을 것이다.
하와이에서 7년간 생활했던 황보기는 1911년 1월 하와이를 떠나 조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가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한국은 일제의 강점하에 놓이게 되었고, 슬픈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기독교는 융성하여 1907년 대부흥을 경험하고 1909년부터는 백만인 구령운동이 실시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하와이 카와도지방 한인연회는 한국교회를 위해 뭔가 필요한 일을 하도록 황보기 청년을 한국으로 파송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귀국한 황보기는 경성(京城)과 충남에서 활동하고 있던 서원보(徐元甫) 감리사를 도우면서 백만인 구령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안정된 생활이 필요했다. 고향 김해로 내려왔고, 경남 지방을 선교하던 호주선교부를 찾아 가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진주에서 사역하고 있는 맹호은(孟浩恩) 선교사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그가 외국 생활 경험이 잇고 어느정도 영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에 호주 선교부는 그를 어학 선생으로 채용한 것이다.
그가 호주선교사와 접촉하게 된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가 전도자의 길을 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일 고아원을 설립했을 때 호주교회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호주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 것이다.
어학 선생으로 채용된 그는 진주로 내려가 1911년 2월부터 1912년 10월까지 약 2년간 맹호은(Fred J. L. Macrae)의 어학 선생으로 일했다. 한국선교사로 파송된 맹호은은 1910년 11월 2일 부산에 도착하엿고, 11월 8일 부산을 떠나 진주에 도착했들때는 11월 9일이었다. 내한한 그에게는 한국어 선생이 필요했는데, 황보기는 적절한 인물이었다.
이 기간 동안 맹호은의 신임을 받은 그는 맹호은의 중매로 부산의 호주선교사관에서 일하고 있던 심선애(沈瑄愛)와 결혼하게 된다. 심선애 양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호주선교부의 보호 아래 성장하여 호주선교부에서 일하고 있던 여성이었다. 호주선교부가 맹호은으로 하여금 거창지부를 개척하도록 햇을 때도 맹호은은 황보기 조사와 함께 일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황보기는 1912년 11월 맹호은을 따라 거창으로 이거하게 된다.
이때부터 황보기는 호주선교부의 후원 하에서 호주 선교사들을 도우면서 거창, 함양, 안의 지역에 여러 교회를 세우며 조사로 활동했다. 그의 주된 사역과 봉사의 현장은 함양교회였으나, 맹호은 선교사를 따라 거창으로 이거한 이후 아래와 같은 여러 교회에서 활동했다.
즉 1912년 11월부터 1916년 3월까지 거창, 안의, 함양 3군(郡)의 여러 교회, 곧 거창의 위천(渭川), 가천(加川), 가조(加粗), 함양의 사근(沙斤)교회 등에서 조사(助事)로 봉사하였다. 1916년 4월부터 1917년 2월까지 10개월 간은 호주선교회(미슌회) 서기로 일 했다. 그러다가 1917년 3월부터 12월까지는 거창군 내 7개 교회 조사로 일했다. 1918년 3월부터 1919년 2월까지는 거창, 함양지방 전도인으로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함양으로 이사하여 함양에 거주하였다.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는 함양군의 4개 처 교히, 곧 함양, 안의, 사근, 개평 교회 조사로 봉사했는데 그 중심 지역은 함양교회였다. 당시 함양교회는 다른 교회에 비해 교인 수가 많아 이 지역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1920년 11월부터 1921년 10월까지는 함양군 전도인으로, 1921년 11월부터 1923년 2월까지는 합천군 적중면(赤中面) 옥두리(玉斗里)에서 전도하였고, 1923년 3월부터 1927년 2월까지는 합천군 묘사면(妙山面) 관기(館基), 성기(城基), 독골, 구원(舊源), 가조(加祚), 가천(加川) 교회에서 조사 혹은 전도사로 활동했다. 1927년 3월부터 1936년 5월 까지는 함양군의 4개처 교회, 곧 함양, 안의, 개평(介坪), 사근(沙斤) 교회 조사로 일했다. 1936년 6월부터 1938년 12월까지는 거창군 고제면 농산리 (農山里)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이것이 그의 목회 생활의 마지막이었다. 이제 그는 60이 넘었으므로 지역 교회를 담임하거나 순회하기 어려워 목회를 중단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함양교회에 정착하여 교회를 도우며 봉사했다. 황보기 조사가 함양교회에 처음 부임한 때는 1912년 11월이었다. 이때부터 1916년까지 함양, 거창, 안의 등 3군에서 순회조사로 활동하였고, 1917년 3월부터는 거창군 7개 교회 조사로 잠시 함양교회를 떠나 있었으나 1919년 3월부터는 다시 함양군의 함양, 안의, 개평, 사근 교회 등 4처 교회 순회조사로 활동하면서 함양교회 중심으로 활동했다. 함양교회는 1932년 1월 경남노회 제 30회 정기노회에서 장로 선출 허락을 받고 황보기 조사를 장로 선출했다. 절차를 거쳐 1932년 12월 11일에는 함양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다.(주. 함양교회 당회록 서문 참고.) 장로로 봉사하면서 지역교회 조사로 활동햇으나 1938년 11월에는 장로직을 겸할 수 없다는 경남노회의 결의에 따른 것이다. 장로직을 사임한 황보기는 함양의 목현교회에서 만 3년 간 일하고 교역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앞에서 열거하였지만 황보기 전도사는 안수 받은 목사가 많지 않던 시절 거창, 안의, 함양 지역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교역활동을 했고, 이 지역 기독교 형성에 있어서 실로 값진 봉사를 했다. 교역 활동을 중단한 그는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후원을 받으며 보육원을 설립했는데, 그것이 1948년에는 함양군 석복면 이은리 326번지에서 개원한 성민(聖民)보육원이다. 생애 말기에 사회 사업에 매진했고, 호주 장로교 선교부는 그의 보육 사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황보기 장로는 1956년 9월 2일, 76세를 일기로 고향 김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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