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천교회 백영희전도사
(내용이 중요하여, 타이핑으로 등재 - 관)
기독교보 1550호 - 2023년 9월 16일 토요일
100년고신교회(33)
위천교회 1909년 1뭘 설립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에 위치한 위천교회쌍 임목사 안현)는 1909년 설립되어 오랜 세월 신앙을 지키며 이웃사랑선한 영향력을 이어가고 있다
고제면 개명리에서 온 권사 권응서의 전도에 유응춘이 처음 신앙을 갖게 되었다. 1909년 1월, 상천리 6통 6호 3칸짜리 집을 매입하여 기도로소 정하고 예배를 시작했다. 이 후 1915년 예배당을 장기리로 이전하였고 1920뎐대에 이 르러서는 노은상과 고운서가 열심히 전도하여 교인이 4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위천교회는 일제의 강점기에 일부 신도들의 자발적인 의병 활동으로 민족의 아픔에 동참한 교회다.1910년 교인 중 ‘전주 모 씨’가 의병 활동으로 일본 헌병에게 검거되어 전주 옥에 감금되어 있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위천교회로 피신하였다.일본 헌병이 교회에 도착했을 때 모 씨는 도망갔고 교인들이 구타당하고 감금당하게 되었다. 이에 유응춘은 진주에 있는 라대벽 선교사에게 찾아가서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라대벽 선교사는 일본 헌병들이 요구 하는 삼십 원을 주고 이들을 구해 주었다.이 과정에서 교회를 이끌던 사람이 서간도로 이주해 교회는 일시 쇠퇴기를 맞이 하기도 했다.
위천교회는 어려움 가운데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교회를 섬겼다. 1949년, 광복 이후 국기에 대한 경례가 일제 식대로 허리를 90도로 굽히는 배례로 진행되던 당시 위천 교회 학생들이 앞장서서 가슴에 손을 얹는 경례로 바꾼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신사참배를 반대하던 백영희 전도사의 지도를 받은 주일학교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구타 및 경고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거부하자 전국의 여러 학교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이어졌다.결국 이승만 대통령 이 국기에 대한배례를 주목으로 변경했다
위천교회는 6,25 전쟁 시기 공산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교회다. 1950년, 백영희 전도사는 예배 중 들어온 북한 군인을 호령하여 쫓아내기도 하였으며,계속되는 북한군의 위협에 강단 밑 계단에 숨어서 기도를 하였다.6.25 전쟁 중에도 새벽기도회를 계속하였으며, 미군의 폭격을 방지하기 위해 교회 지붕에 'church' 라고 새기기도 하였다,
위천교회는 지역민들과 소통의 창을 열고 이웃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강령을 실천하므로 영혼 구원을 도모하는 교회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위천교회는 큰바위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며 관내 아동·청소년들이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즐거운 미싱방’이라는 옷 만들기 평생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지속적으로 다양한 사회 환원 사업들을 운영하고 있다.
참고문헌 ‘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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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내용도 있고 또 새로운 내용도 있습니다.
현재 소속을 달리 하는 고신 쪽의 자료여서 저희로서는 의미도 더해 집니다.
돌아 가셨는지 몰라도 얼마 전에도 위천교회에서 정정하게 6.25 당시를 설명하시던 고신 장로님의 증언이 계셨습니다.
기독교보 1550호 - 23.9.16 '100년고신교회(33)'
위천교회 1909년 1월 설립
현재, 경남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 위천교회, 담임목사 안현
설립, 1909년
* 교회 설립 초기
고제면 개명리(註. 개명교회 설립 1903년) 온 권서 권응서의 전도에 유응춘이 처음 신앙
1909.1, 상천리 6통 6호 3칸짜리 집을 매입 후 기도소로 정하고 예배 시작
1915. 예배당을 장기리로 이전
1920년대, 노은상 고운서가 전도하여 교인이 40여 명
* 의병 활동
1910년 교인 중 ‘전주 모씨’가 의병 활동으로 일본 헌병에 검거되어 전주 옥에 감금 중 탈출, 위천교회로 피신.
일본 헌병이 교회에 도착했을 때 도망갔고 교인들이 구타 감금되어 유응춘은 진주 라대벽 선교사에게 보고.
선교사는 헌병들이 요구 하는 30원을 주고 해결. 이 과정에서 교회의 지도자가 서간도로 이주. 교회는 쇠퇴.
* 위천교회는 신사참배를 이기지 못했고 신앙은 피폐
* 1949.7. 백영희 전도사 개명교회에서 부임. 광복 후 국기 경례가 일제 최경례로 90도를 굽히는 배례로 진행.
위천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 박해를 이겼고 전국 곳곳도 거부하며 정부는 가슴에 손을 얹는 주목으로 변경.
* 1950.6.25 전쟁의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도 예배 계속. 50.9.28.경 예배에 들어온 북한군을 호령하며 쫓아냈고,
인민군 퇴각 후 미군의 폭격에 예배당의 오폭을 막기 위해 청년들이 지붕에 CHURCH를 적었으나 이를 철회.
예배당 뒷산이 빨치산 남부군 본부여서 친미 운동으로 오해 받지 않기 위한 것. 전투나 폭격 중에는 일시 피신.
빨치산과 토벌대의 교전 중에는 교회 강단 계단이나 인근의 학교 교실에 강단 아래 기도하며 교회를 지켰고
전쟁 중에도 주일과 밤예배와 새벽예배를 지속했고, 고신의 지도부의 파송을 받은 부산의 방문객이 직접 목도.
* 1952.7. 고신 지도부는 부산의 서부교회의 파행을 막기 위해 위천교회 백영희 전도사에게 부임을 요구. 이주
공회가 가진 위천교회 시절 자료나 이야기는 공회 내에서는 아는 인물이 거의 없어, 공회나 백영희를 이단으로 비판한 교단이나 인물들을 위주로 자료를 수집한 결과입니다. 당시의 실제 이야기는 이보다 더 극적이나 교계를 향해 객관적 자료 제시와 연구를 위해 평소 그렇게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