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용광로

시뻘건 불길이 보입니다. 그 속에는 무엇이든 쪼개 버리는 도끼가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앞을 막아 설 수 없는 ‘힘’과 ‘무적’의 상징인 도끼는 그냥 태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뻘건 불길 속에서 만들어 지는 ‘시련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우리의 영생은 영계와 우주의 모든 만물을 아버지 대신 다스릴 이름입니다. 그러나 도끼가 시뻘건 불길 속에서 구워 지고 녹아 지며 대장장이 손에 수 없이 맞고 나서 도끼가 되듯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 섭리로 만들어 주신 각양 현실 때문에 그렇게 녹아 나며 구워 지고 태워 지며 맞고 또 맞는 과정을 통과한 다음에 비로소 만물의 주인이 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법적 출발은 믿는 첫 날이지만, 아버지의 자녀다운 모습은 이 세상이 끝나야 만들어 집니다.

시련의 차원

앞에서 본 시뻘건 불길과 비교하면 이 노란 불길은 신비롭게 느낄지언정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듯합니다. 생활 속에서 보는 불은 대개 붉은 색이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붉은 색에 두려움을 느끼나 온도로 보면 제일 낮은 단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 하고 압도 당하는 그런 현실은 불신자들도 인생 경험을 통해 시련이 사람을 만든다고 알 정도입니다.
붉은 불길은 850도 정도이나 이 사진처럼 노란 색을 띄기 시작하면 1100도까지 치닫습니다. 노란 색 불길 가운데를 보면 흰 색이 보입니다. 불길에 흰 색이 시작 되면 1300도까지 올라 갑니다. 그 흰 색에 노란 부분이 완전히 없어 지고 순백색이 되는 순간에는 1500도를 훨씬 넘겨 버립니다. 알루미늄은 붉은 불길 660도에서 미리 녹고, 구리는 노란 색 불길 안에 있는 1084도에서, 그리고 쇠는 순백색이라야 녹는 1535 도까지 버팁니다. 참숯에 공기를 잘 불어 넣으면 순백색 속에 자그마한 새파란 부분도 나타 나는데 이 온도가 가장 높으나 촬영이 어렵고 이 홈의 초기 화면에서는 너무 깊게 들어 가지 않고 입문만 설명하는 곳이므로 생략했습니다. 이 사진에는 붉은 불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사진과는 그 시련의 혹독함에 있어 차원이 다릅니다. 오히려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깊은 속을 제대로 만들어 가시는 아버지의 본격적인 사랑의 세계를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직업 환경 때문에 늘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배우기 시작했고 세상을 조금 살았습니다. 어느 날 백영희설교록의 한 곳에서 금과 은과 쇠의 제련 과정을 통해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세계를 배웠습니다. 믿는 세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저 불 속에 넣지 말아 달라는 것이 당시 일반 교회의 신앙의 일심이었습니다. 저 용광로를 마련하시고 나를 만드는 아버지의 사랑의 세계를 노래하는 세계가 이 노선이었습니다. 비록 저 불길 속에서 견디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신앙의 세계라면 이 길이 옳습니다. 맞습니다. 바릅니다. 어떤 고난 박해를 주셔도 그 시련을 초월하여 오히려 그 시련을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는 세계로 갖는 이 노선, 이 홈이 필요하며 이 홈에서 외쳐야 할 이유입니다.

대장장이의 수고

날카롭고 예리하게 땅을 파야 하는 농기구를 만들고 있습니다. 붉게 바뀐 쇠의 왼 쪽 끝은 시커멓게 보입니다. 불에 구워 지기 전의 모습입니다. 구워 진 양 끝은 붉은 색이고 가운데로 갈수록 노란 색을 띄며 제일 중앙은 흰색에 가깝습니다. 철의 원 모습이 혹독한 환경에 시달린 차이입니다. 그 위를 대장장이이 망치가 두드려 댑니다. 불이 닿지 않은 검은 부분을 때리 치면 망치와 맞붙어 싸웁니다. 잘 먹고 잘 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간섭을 한다며 맞 받아 치는 우리 모습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입원을 하고 사업이 위태로워 지고 시험에 떨어 지고 마침내 제 몸이 수술대 위에 올라 가면 그 때는 한 말씀 한 말씀이 나를 접할 때마다 녹아 난 쇠가 망치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만들어 지듯이 우리의 본질과 본성에 마구 변형이 일어 납니다. 이 때에 어떻게 만들어 졌느냐에 따라 남은 인생 곡괭이가 되기도 하고 부엌칼이 되기도 하며 낫이 되기도 합니다.
고온에 녹초가 되어 우리의 심신과 철학과 사상과 고집과 자존심과 세상에 대한 소망까지도 다 녹아 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두드려 대며 앞 날을 인도하실 때, 그 순간에라도 견디지 못하겠다고 내려 치는 매를 피하다 잘못 만들어 지면? 또 다시 처음부터 불 속에 들어 가야 합니다. 바로 이런 저항을 ‘강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먹고 내 환경을 통해 나를 잡아 족치기 시작했다고 느껴 지면 그 순간에 그 발 앞에 엎드러 져서 죽은 자같이 되는 길이 가장 좋고 빠릅니다. 이왕 맞을 매 한 번을 열 배로 키워서 맞는 교인, 이왕 맞을 매 열 대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한 번으로 끝나는 교인, 각자 고요히 지난 날 고난의 시기 또는 현재 닥친 어려움을 새겨 보셨으면.

대장장이의 집념

시뻘건 불길, 노란 색을 거쳐 흰 색까지 올려 놓은 단계에서 내리 치고 또 쳐서 대강의 모습을 갖추고 나면 최종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이제는 대장장이가 미세한 부분까지 망치로 내려 칩니다. 첫 망치는 해머라고 부르는 큰 망치를 사용하고 이런 미세한 부분에 이르면 작은 망치를 사용합니다.
앞으로 뒤로, 두께를 맞추며 둘레를 살피며 대장장이 마음에 그려 놓은 목표를 향해 막바지로 치닫습니다.
하늘이 무너 질 것 같은 사고 소식을 듣는 첫 순간이 용광로 불길 속에 들어 가던 첫 순간이라면, 이제 사고의 마무리 끝 자락에 접어 들면 그 동안 겪은 마음 고생 때문에 얼른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시며 완전이시라 대충이란 없습니다. 이 단계에서 대충하고 마무리 지으면 다음에 또 다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겪은 과정의 마무리 작업, 그 속에 담긴 아버지의 뜻을 일일이 알 수는 없으나, 공연히 우리에게 닥치는 현실이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 현실의 어느 사람 하나의 눈 빛 하나 움직임까지 그 마음 하나의 스쳐 가는 생각까지 하나님은 영원 전에 미리 예정하셨고 때가 되어 동원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기다리면 되는 것을… 요셉조차 마지막 순간에 출옥을 청탁했으니 그 때 출옥이 성사 되었더라면 그 동안의 수고가 다 헛일입니다.

불꽃의 향연

한 쪽에서는 달구어 진 쇠를 거머 쥐고 있습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내리 치고 있습니다. 우리를 제대로 만드시려고 좌우 꼼짝도 할 수 없도록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저 무시무시한 해머로 힘껏 내려 쳐 버리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불길 속에서 녹초가 된 우리가 저 해머에 맞을 때 그 고통스런 비명과 우리의 몸부림이 사방으로 흩어 집니다. 물 건너 불 구경하는 이들에게는 불꽃의 향연처럼 아름답게 보이나 입장을 바꾸어 ‘네 놈이 저 풀무에 녹초가 되고 저 해머에 맞아 봐라!’ 절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불순물이 없었더라면 저렇게 때려 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때려 쳤다 해도 저렇게 날리는 불꽃은 없었을 것입니다. 철광석 속에 섞여 들어 있는 별별 부패성 잡심 욕망 시기 원망 자기 중심들이 저 불에 녹고 저 망치에 맞으며 견디지 못하고 도망 가는 것입니다. 뚜드리는 아버지는 기뻐하시고 천사들은 저 불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 별별 잡 귀신 잡 것들이 날려 가는 모습에 희열을 느끼며 환호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라면 기쁠 것이고 깨닫지 못하고 저 잡 것을 자기인 줄 아는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초일 것입니다.

옛 나를 버리려면 구워야 하되 녹초가 되도록 달구어야 합니다. 혹독한 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대장장이는 머리에 그린 목표를 향해 그 손에 쥔 쇠망치를 가차 없이 휘두릅니다.

불에 들어 가기 전의 쇠
불에 들어 갔다 난 후의 쇠
대장장이 망치로 짖 이겨 진 쇠
찬 물에 벼리고 벼려 져서 완성이 된 쇠

현실은 주인 소유의 시뻘건 용광로요
현실 속에 나를 타격하는 것들은 주인의 손에 들린 연장이며
불과 연장과 물을 만나기 전과 후의 모습은 각각 엄청 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 노선을 두고
이 노선의 교훈 내용을 두고
대장장이의 망치는 엄청 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련, 연단, 단련, 시험이라는 단어들은 바로 이 장면을 두고 우리를 가르 치고 있습니다. 잡석 속에 나 뒹 굴던 철광석 금광석 은광석을 모아다 저 불 속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종이나 나무를 태우는 그런 흔하디 흔한 붉은 불길에 그치지 않고 노란 색이 나오도록, 그리고 흰 색까지 나오도록 대장장이가 심혈을 기울입니다.

지금 사진에 보이는 외부 붉은 불길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도 흔하게 겪는 그런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저 붉은 불길 속에 있는 노란색 불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성도, 우리 믿는 사람을 향해 환경을 더욱 뜨겁게 달구어 놓은 특별 사랑의 표시입니다. 일반 성도 중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이 특심하게 되면 알미늄 그릇이나 청동의 장식품 정도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흰 불 꽃이 피어 나는 1500 도 이상으로 구워 댑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소리 높여 울게 됩니다. 하늘을 향해 아버지께 부르 짖게 됩니다. ‘날 잊으셨나이까!’ ‘날 이렇게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우리를 특심하게 사랑하는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고 특별한 도구를 사용해서 불의 온도를 더 높이십니다. 연료도 일반 나무가 아니라 참숯으로 둘러 싸서 파란 불꽃이 나오도록 올려 댑니다. 뜨거울수록 귀한 인격이 만들어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늘을 사랑하지 않으시고, 아버지는 우리의 내일을 사랑하십니다. 오늘은 순간이나 내일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눈물을 흘리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우리의 영원은 춥고 배 고프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오늘 이 땅 위의 내 현실에서 그대로 다 이루어 가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사 역사 세계에 그 어떤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해도 이기게 하소서!’

주님이 가르 치신 기도의 원래 내용은 이러 한데 지금은 그 뜻을 변개해서 내일의 영생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으니 눈 앞에 보이는 오늘만 좋게 하소서 하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고난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고난은 성도를 성도로 만드는 아버지의 지극 정성 사랑이다!’ 앞 서 간 성자들은 그 세계를 깨달았고, 오늘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살면서 이 면을 남 다르게 깊게 가르 친 분의 이름이 백영희였습니다.

피하고 싶어도 어려운 현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나를 삼키려는 두려운 세력을 흔히 불로 표현합니다. 성경에서도 또 우리 생활에서도 가장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속에는 속에서 쇠는 녹아 납니다. 그러나 주인의 시선은 쇠의 본질이 변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불 같은 시험을 주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우리의 고정 관념, 옛 사람이 녹아 나서 그 본질이 변형이 될 때까지 불길 속에 담아 놓고 있습니다. 뜨거움에 우리 마음은 녹아 나고 환경의 혹독함에 우리 마음은 죽어 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환경을 달구며 기다립니다.

불을 모르는 사람은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가리는 불길에 겁을 먹습니다. 불을 아는 사람은 그런 불은 불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불을 아는 사람은 연기는 하나도 나지 않고 불꽃조차 없고 오히려 아름답게 보이는 이런 불을 두려워 합니다. 참숯에 산소를 불어 넣으며 풀무불의 강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 어느 쇠든지 녹일 수 있도록.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살던 우리의 본질과 본색을 다 녹여 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 환경을 준비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우리 앞 길을 이렇게 준비하고 계실 때 미리 떨고 긴장하며 아버지께 매달려야 하는데 우리는 기어코 이런 불길 속에 들어 가야만 정신을 차리는, 강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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